미술평론가, 공예가, 목수의 첫 소설집
클로이 2020/06/0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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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홀로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
- 김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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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 - 2020-05-15
: 81
전작 <목수, 화가에게 말 걸다>, <나무로 깎은 책벌레 이야기>, <상상목공소>의 제목의 책을 낸 조금은 특별한 이 김진송 소설가의 단편소설집은 무엇보다 표지가 무척 아름답다. 감색과 회색 언저리의 양장 표지에 녹색 글리터의 에폭시를 입힌 책은 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책을 펼친 순간, 나는 첫번째로 실린 표제작에 홀딱 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강력하고 굵직한 문장들이라니.
책의 종이에서 흙냄새가 나는 것만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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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이 파헤쳐지기 시작하자 고집스러운
그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풀뿌리와 벌레들을 뿜은 부엽토가 거두어지자
털가죽으로 덮인 동물의 살덩이처럼
핏빛의 황토가 드러났다.
흙을 떠내자 갓 잘라낸 고깃덩어리 같은
붉은 육질이 켜켜이 그 모습을 보였다.> p15
➖
아 이 소설집은 이런 분위기구나. 역시 목수의 소설인가, 단정하며 두 번째 소설, '짝'을 읽었는데, 어라 뭐지. 완전히 다른 작가가 쓴 작품 같았다. 무척 이상한 소설이었는데 김영하 작가님의 '옥수수와 나'의 느낌이 아주 살짝 떠오르기도 하고 비현실적이면서도 그래도 재밌었다.
책을 읽다보니 소설 하나 하나의 색깔이 무척 진하고 굉장히 강력했다. 개인적으로 '달팽이를 사랑한 남자'와 '종이 인간'은 조금 충격적이고 당황스러웠지만 반면 '신의 기원'이나 '어린 왕자의 귀환'과 같은 소설의 상상력은 너무도 나의 취향이었다.
소설 '신의 기원'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걸 읽고 뒷부분을 읽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
<이제는 제대로 밝힐 때가 된 것 같다.
최초의 인간과 최초의 신이 정면으로 딱 마주친
그 사건에 대해서 말이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어린 왕자의 귀환'이었다. 실제 목수로 작업하는 소설가가 쓴, 개인 작업실에 실제로 어린 왕자와 소행성 B612를 구현하려는 설정의 단편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미쳤다고 해야할까, 자유롭다고 해야할까. "전업 소설가"가 아닌, 역사를 연구하고 나무를 작업하는 작가의 첫 소설집은 여느 소설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나는 이런 소설가들을 응원하고 싶다. 문유석 판사의 소설 <미스 함부라비>가 판사만이 다룰 수 있는 법적 소설의 디테일을 담고 있듯이. 미술 평론가이자 공예가이자 목수만 쓸 수 있는 소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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