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희곡 특성상 과장된 측면이 내게 거부감을 줬지만 후반으로 향할 수록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흔한 멜로 드라마와 같이 신데렐라식 신분상승하는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고군분투하는 여성을 그린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서 자신의 조각상과 사랑에 빠지는 남성인데, 여기에선 히긴즈가 피그말리온의 역할을 한다. 자신이 만든 작품인 일라이자와 사랑에 빠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자신이 만들었다는 그 사실/업적으로서의 일라이자는 사랑했을지도 모르겠다.
히긴즈로 인해 상류층 숙녀로 재탄생한 일라이자는 히긴즈를 좋아하다 이내 "당신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마음을 접어버린다. 아마 좋아하는 마음은 마음 한 켠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독실한 비혼주의자이자 젊은 여성을 혐오하는 히긴즈와는 이어질 수 없다는 현실이 일라이자가 히긴즈에게 시비를 거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 아닐까?
대중들은 이러한 가능성에서 쇼가 기존 멜로 드라마와의 결말에서 탈피하고자 의도저긍로 비튼 결말을 "일라이자와 히긴즈가 서로 사랑에 빠진다"는 기존의 공식대로 바꿔버린 내러티브에 열렬히 호응한다.
연극, 뮤지컬, 영화 등 각종 매체에서 사랑받던 이야기가 사실은 쇼의 허락 없이 함부로 변형한 것이라니···.
자신을 창조한 피그말리온을 거부하는 것으로 여성으로서 '숙녀'를 탈피하고 자율성과 독립성을 좇는 일라이자를 통해오늘날의 관점에서 페미니즘적 메세지를 전달하려 했던 쇼의 의도가 '대중성'이란 미명하에 제거됐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쇼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변형된 이야기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피그말리온 희곡을 정독하길 바란다. 그의 바람대로 신분제의 허상과 모순, 페미니즘, 통일된 언어의 중요성(음성학)의 메세지가 제대로 전달됐으면 한다.
재밌기도 재밌고 사회적 메세지를 여럿 내포하고 있어 유익했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