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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일님의 서재
  • 노랜드
  • 천선란
  • 14,220원 (10%790)
  • 2022-06-22
  • : 3,387
천선란, 아버지와 언니와 엄마 이름의 한 자씩 조합해서 만들었다는 이름. 처음 들었을 때 천 년에 한 번 핀다는 난인가, 사람이름 같지 않았다. 그의 <노 랜드>를 읽고 그에 대해 검색해봤다. 인터뷰 기사가 꽤 되었는데, 너무 많이 읽었나, 마치 아는 사람이 된 것 같다.

SF를 잘 읽지 않았다. 별 이유 없었다. 감흥이 없어 허무맹랑하고 지루하게 읽힐 뿐이었다. 그 재미를 제대로 알게 된 건 옥타비아 버틀러를 만나고 나서였다. 여성작가들의 SF에는 뭔가 색다른 게 있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어린 시절 커서 작가가 되고 싶다 했을 때, 가족으로부터 들은 말은 '검둥이는 작가가 될 수 없어'였다. "얘야.....검둥이는 작가가 될 수 없어"란 말은 내가 마치 검둥이가 된 것처럼 읽혔다. 내가 나라는 존재여서 될 수 없었던 것들. 여자는 00가 될 수 없어. 가난한 여자는 00가 될 수 없어. 가난한 검둥이 여자는 00가 될 수 없어. 이렇게 확장되는 통제와 낙인. 전라도 사람은, 장애인은, 키가 작은 애는, 뚱뚱한 사람은, 동성애자는, 대학 안 나온 애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들은 영역마다 다양했다. 뭐든 될 수 있는 놈들이 만들어놓은 덫이었다.

흑인이자 여성이었던 옥타비아 버틀러는 거의 백인남자만 가득했던 SF작가의 세계로 들어섰다. 어느 정도 유명해지고 난 후에도 'SF가 흑인에게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어떤 종류의 문학이든 흑인에게 무슨 쓸모가 있었을까. 옥타비아 버틀러는 소설을 쓰든 시를 쓰든 희곡을 쓰든 뭐를 쓰든,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이다. 너 따위가, 흑인 주제에 유모로 취업하고 식모일을 배우고 뭔가 현실감있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지, 무슨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냐는 허접하고 영양가 없는 상투적인 질타. 이런 쓸모없는 질문은 주로 흑인에게서 왔다고 한다. 주로 사정 아는 사람들이 충고랍시고 던지는 말들이니 주로 흑인들이 했겠지.

옥타비아 버틀러는 SF가 상상력과 창조력을 자극하며 독자와 작가를 다져진 길 밖으로, 모두가 말하고 행하고 생각하는 좁고 좁은 오솔길 밖으로 끌어낸다고 말한다. 그래서 흑인 여성이 SF를 쓰는 이유를 이해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SF와 판타지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실에 대해 쓴다는 건 너무 가혹하고 상상력은 제한되어 쓸 때마다 비통했을 수밖에 없으므로. 현실을 벗어나자 그야말로 생각이 폭발하고, 그 에너지들이 뻗어간 곳에서 막연한 상상이 구체화되고, 그래서 아름답고 신비롭고 또 오묘한 이야기들이 쏟아졌을 것 같다.

<노 랜드>는 그렇게 쏟아진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묶어 보여준다. 인류가 버린 쓰레기를 먹는 괴물이 나오고, 인간은 이미 멸종하고 지구도 쉽게 인류의 문명을 버렸다. 외계의 생명체와 싸우기 위해 떠나기도 하고, 복제된 가족이 등장하기도 한다. 생명을 틔울 인류의 배아를 들고 이동하기도 하고, 지구는 검은 재에 둘러싸여 지워지고 있는 이야기도 있다. 이름이 불리지 못해 떠도는 영혼도 있고, 아이를 잡아먹는 할아버지에, 하반신 없는 시체도 등장한다. 무섭고 해괴하고 괴상한 이야기들. 피가 튀고 몸이 잘리고 인류가 지구가 망하는데 정작 그 안에 사람들이 지키고자 하는 혹은 무시하고자 하는 진실이 있고, 그래도 살아가면서 얻는 믿음과 희망이 있다. 그래서 천선란은 책 뒤 작가의 말을 '이유 없이 살아가자는 말을 너무 길게 한 것 같다'는 얘기로 시작한다.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은 저자의 엄마를 떠올리게 했고, 우주를 좋아하게 된 이유에선 크게 공감했다. '불안으로 꽉 찬 나를, 나만 한 크기가 아니라 좁쌀만 한 크기로 만들고 싶어서' 그 불안으로부터 도망가는 과정에서 우주는 내게도 항상 존재하는 것 이상의 몫을 했다. 그래서 다음 작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사실 10개의 단편을 읽는 동안 꽤나 지쳤다.

행복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게 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서 읽고 나면 지치는 책이 될까 봐 두렵다. 여전히, 하지만 사랑하고 싶어 소설을 읽고,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듯 가끔은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으리라 믿으며...418쪽

특히 르포 매거진 <추적단 불꽃-우리, 다음>에 실린 '-에게'와 가장 긴 이야기였던 '이름 없는 몸'이 그랬다. '-에게'는 오랫동안 이름을 잃고 구천을 떠돌며 이름불러 줄 사람을 찾아다니지만 자기 이름을 못 찾고, 비슷하게 살해된 여성들을 위해 그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니는 귀신이 나온다. 그녀의 이름은 광화문에서 시위를 벌인, 살아 있는 여성들이 되찾아준다. 저승으로 가지 못하는 귀신과 계속 살해당하는 여성, 그녀들을 위해 이름을 부르고 시위를 벌인 인간 여성들의 연대가 3장짜리 짧은 소설에 꽉 차 있다.

​'이름 없는 몸'은 복잡다단하다. 총과 칼과 망치가 등장해 쏘고 때리고 휘둘러 피튀기는 상황에서도 여성의 현실은 그다지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여성은 집을 얻을 때도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성별도 따져 위험을 줄여야 하고, 결혼이주 여성들은 여전히 사고 팔린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개망나니처럼 살면서 도랑에 빠져 얼어죽는다. 엄마는 동네 할아버지들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된 노동을 감내하고. 온갖 것을 달여먹으며 몸보신에 집중한 노인들은 젊은 남자에게 덥석 이장 자리를 줄 만큼 관대하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도 친구도 잃은 '나'는 요구는 명확하다.

진짜로. 너무 화가 나서 숨을 크게 내뱉고 있을 때 가끔 누가 말을 걸어.

뭐라고 말을 거는데?

죽이고 싶으냐고, 죽여줄까?하고

그런 너는 뭐라고 그래?

나는,

.........

응, 이라 말해.

260쪽.

죽이고 싶은 사람이 230명 정도(전두환 덕분에 1명 줄었다) 있는 나는 더럽고 추한, 비도덕적이고 악행을 일삼는, 대체로 숫컷인 생명체들을 어떻게 못하고 마음에 병이 생긴 듯했다. 늘 응, 이라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저자가 '이름 없는 몸'을 이렇게 마무리해주었을 때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 역겨운 마을에서 살아남아 버텨온 주인공은 낯선 친절과 따뜻함에, 자기가 살아온 얘기를 듣고도 여전히 나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기껏 마음을 열어준 언니에게 '언니는 나를 믿어요?'라고밖에 말하지 못한다. '어쩌면 내게 붙어 있을지 모르는 그 세계의 흔적들이 언니는 무섭지 않은 것일까.' 궁금하지만 언니는 도리어 '너는 내가 안 무섭니?'하고 묻는다. 무섭고 믿을 수 없을 거 같지만, 이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의지한다. 그래, 그럼 됐지 뭐. 마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수할지 적은 노트는 없지만 천선란의 괴기한 이야기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무섭고 암울하고 우울한 이야기 속에 기어이 썩어가는 시체의 몸으로라도 다정한 이야기를 해줄 것 같다. 이로써 옥타비아 버틀러보다 더 아끼는 작가가 생겼다. 번역 과정 없이 작가의 언어로 바로 읽을 수 있는 이 괴이하고 따뜻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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