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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일님의 서재
  •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 브래디 미카코
  • 16,020원 (10%890)
  • 2022-06-17
  • : 417
'영국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사랑과 긍지'라는 부제 때문에 반쯤은 학술 논문 같은 책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처리즘에 노동당 얘기에 영국 사회주의 전통까지 깔고 가면서 브렉시트 이후 노동 계급이 어떻게 사는지 분석한 책인가 보군.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라는 책을 잼나게 읽은 기억이 있지만 같은 저자의 책인 줄 몰랐다. 그래서 읽다 지겨워 빨리 잠들 셈으로 잠자리에 가지고 갔는데...날밤 깠지 뭐. 좋은 책은 졸려서 눈 비비며 끝내 읽어야 잠을 잘 수 있으니.

영국 아저씨들 얘기에 푹 빠져 하루 달콤한 잠을 날려버리다니. 일단 저자의 글이 쉽고 재밌게 읽힌다. 브렉시트와 영국 의료보험 제도에 대한 노동 계급의 생각이 현지에서 오랫동안 산 외부인의 감각으로 역시 쉽고 재밌게 쓰여 있다. 거기에 사랑, 우정, 늙음, 결혼, 아이 등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차고 넘친다. 어차피 인류애를 유지하며 살기로 작정한 이상 언제까지 아저씨를 도태시킬 수는 없다. 저자 덕분에 아저씨를 더 알고 싶어졌다. 내가 아끼는 내 남자사람친구들도 이미 다 아저씨다.

특히 인종차별을 막기 위해 자치 순찰대를 구성하고, 공공도서관을 사랑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잘 돕는 스티브에게 빠졌다. 여성혐오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착한 아저씨. 정치적 올바름 가지고 이해되지 않는 사는 이야기. 그렇다고 스티브를 무작정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동안 아예 제쳐놓고 쳐다보려 하지 않았던 나이든 남자들의 처지를 구조적으로 더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고 싶어졌다. 인류애는 소중하니까.

이주노동자 차별에 앞장서는 노동자, 자국의 이익을 위해 브렉시트를 주장하며 지역차별을 옹호하는 노동자, 우버를 욕하는 택시노동자, 자본이 퍼뜨린 가짜뉴스에 속아 잘못된 판단을 하는 노동자, 이들의 모습에서 복잡하게 교차하는 소수자성과 늙어도 지키고 싶어 하는 노동자로서의 자긍심, 과거의 일에 집착하지 않는 순진함, 노동자성의 건강함, 이 모든 것이 이 책 안에 사람 사는 이야기로 흥미롭게 얽혀있다. 이 책이 깊은 울림을 준다면 저자가 아일랜드 계 영국 남자와 결혼해 오랫동안 영국에서 살아온 일본 여자이기 때문에, 그의 소수자성이 더 날카롭게 관계와 현상을 보도록, 더 많이 생각하고 여러 입장에 서보도록 오랜 시간 노력해온 덕일 것이다.

레트로 감성의 동그란 차체와 런던 말씨로 말을 거는 운전기사로 블랙캡은 런던의 명물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지금은 블랙캡이 "사악한 내셔널리즘과 배외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되고 있다...블랙캡 운전기사들은 불합격률이 70퍼센트에 달하는 시험을 통과한 프로들이다. 런던 시내 약 2만 5000개의 거리와 약 10만 개의 명소, 건물, 시설 위치를 전부 외워야 하는 필기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몇 년 동안 고생해서 외운 이 정보를 한 번에 무력화시킨 것은 스마트폰이다. 우버 기사들은 스마트폰 하나로 더 값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블랙캡과 우버의 전쟁은 '글로벌 경제의 뒤틀림에 의한 영국인과 이민자의 대립구도로까지 나아갔다. 블랙캡 운전기사의 67.2%가 영국백인이기 때문이다(2017). 우버 면허 말소에 대한 소송이 왔다가고, 노동조건과 안전, 서비스 품질에 대한 논란이 복잡해지면서 논란은 국가 단위 규제 비판과 국제주의로까지 나아간다. 여러 지역에 들어가 그 지역에서 정한 고용과 안전 규칙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장사판을 벌여 지역 산업을 엉망으로 만들고 노동자의 임금과 고용을 저하시킬 우려와, 이주노동자 차별이나 기득권 유지에 대한 비판이 누가 진보인지 보수인지 헷갈릴 정도로 교차하고 있다. 저자는 우버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나 제공하는 사람의 논리에서 벗어나 정확히 우버 자체를 문제 제기한다.

"우버는 유연성이 제로아워계약(시간이 명시되지 않은 계약으로 24시간 대기 타야 하는 나쁜 노동계약-내 식으로 말하자면)처럼 고용된 사람에게 복리후생을 제공하지 않는다. 차량예약과 요금지불 등 모든 것을 스마트폰으로 하기 때문에 관리가 전혀 필요 없는데도 25%의 수수료를 받아가기 때문에 소요 경기를 제하면 수입이 최저임금보다 낮아진다는 운전기사도 있었다." 90쪽.


결국 플랫폼 자본주의의 승리인 것이다. 이 와중에 블랙캡 노동자는 자기들끼리도 갈등한다. 은퇴할 시기쯤에 월세로 먹고 살 수 있는 블랙캡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는, 시대가 달라지지 않았어? 노동자에 대한 대우가 중요하다고 나라를 닫아버리면 세계적으로 뒤처진다고/ 너희가 말하는 나라를 열하는 결국 국내 노동자를 궁핍하게 만드는 거야 / 궁핍하지 않은 노동자도 있잖아 / 궁핍한 녀석과 그렇지 않은 녀석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질걸/ 온 세상을 평등하게 하는 건 불가능하잖아. 나라를 닫자는 건 퇴보하고 글로벌하게 나아가지 않으면 안 돼/ 글로벌리즘은 안 된다고...라면서 싸운다. 그동안 우버는 우버 이용자에게 스마트폰 한 번 충전할 만한 전기료 한 번 보태주지 않고도 알짜 수수료를 챙기며 플랫폼 자본주의에서 승승장구한다.

대화는 우버 서비스를 제공하는 운전자도 필요 없어지게 될 무인자동차 시대가 오면 가 일자리를 잃을 거라는 체념을 공유하고, 블랙캡 노동자조차도 취해서 집에 가는 길에 우버를 이용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서 허탈하게 끝난다. 이런 상황을 정리하고 독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도 관점이며 당파성이다. 이 역시 저자가 이주민이고 백인과 결혼해 백인의 나라에 사는 여성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다양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소수자성은 세계에 대한 관점을 널리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모서리에서 보니까 중심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외 베트남 여성의 간병노동을 이용한 잘 생긴 남자 대니와 그의 동생 제마의 인종주의, 노숙자를 집에 재우고 다 털리고도 노동자의 합리성으로 살아가는 션, no man no cry의 주인공 레이의 이야기는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영국의 의료보험 제도와 브렉시트를 둘러싼 사람들의 정치적 판단 상황을 알게 되는 것도 큰 덤이고.

사실 아저씨들 얘기, 별 관심 없었다. 매너 없고 분위기 파악 못하고 술주정하는 아재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오죽하면 개저씨라고도 불리기도 할지 이해도 된다.

한국 50대 남자에게 집중했던 적이 있긴 했다. 코로나 팬데믹 시국에 종종 뉴스거리가 되어서 문제 일으킬 때마다 나이와 성별을 확인하곤 했는데 압도적으로 50대 남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로 마스크를 써달라는 편의점 알바나 버스 운전사에게 물건을 던지고 주먹을 휘두르고 욕을 했다. 마스크를 써달라는 요구가 왜 그리 불쾌했을까. 버스나 편의점에서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요청을 해야 하고 누구나 그 당연함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찌질함과 있지도 않은 권위를 위협받았다고 느낀 화남이 섞인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그뿐, 그저 피해야 한다는 생각만 강해졌다.

매력있고 지적이고 사랑스러운 아저씨들도 있겠지. 딱히 젊고 잘생긴 남자에게 관심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상적 무관심을 유지할 뿐이었는데. 영국 아저씨들 얘기를 듣고 보니 더더욱 한국의 아저씨들에게도 내가 모르는 뭔가 있을 거 같다. 방송이나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추잡한 모습들, 혹은 어린 여자와 연애를 꿈꾸고 자기가 매우 유쾌한 사람인 줄 알고 아무 때나 라떼를 섞어 농담을 하거나 성희롱에 가까운 폭언을 농담인 줄 아는 그런 모습 말고.

"야단맞고, 멍청한 일을 하고, 호되게 당하고, 엉덩이를 내놓으면서 아저씨들의 인생은 앞으로도 이어진다.
당신들을 축복해야지, 베이비.
아직도 칭찬할 만한 삶을 사는 것 같지는 않은 그들이지만." 225쪽.

이어질 그들의 인생에 축복 한 자락 함께 얹고 싶어졌다. 저자 덕분에 인류애는 더욱 드높아지고. 좋은 책을 읽었다는 충족감에 기분도 좋고~. 272쪽에는 '마지막은 중요한 술에 관하여'를 통해 영국의 세대별 술문화까지 다 훑어주신다. 저자의 센스 덕에 책을 덮을 때까지 흐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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