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선만 같다면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현대사회에 만연한 메리토크라시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많은 몰랐던 부분과, 알았지만 깨닫지는 못했던 부분을 지적해 주었다. 이 책의 많은 내용에 동감했고 포퓰리즘적 분노에 대해 해결책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러나 한 대목에 대해서는 시선이 엇나가 보였다. 앨리 러셀 혹실드의 『자기 땅의 이방인들』을 인용하면서 하류층 백인들의 박탈감을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하위 90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아메리칸 드림 머신은 자동화, 해외 아웃소싱, 다문화 정착민들의 위력 등등으로 작동이 멈춰버렸다. 동시에 그들 90퍼센트는 백인 대 유색인종 사이의 증폭된 경쟁(일자리, 인정, 정부 지원금 등등)에 휘말려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차례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고 여긴 사람들이 (흑인, 여성, 이민자, 난민 등에게) ‘새치기를 당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분개했으며,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정치지도자들에게도 분노했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이 새치기쟁이들뿐 아니라, 본인들을 인종주의자, 보수 꼴통Rednecks, 백인 쓰레기라고 비하하는 엘리트들에게 불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다. 그들은 남들이 바라보는 대로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가 없어졌다. 남들의 시선과 개인적 명예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려면 뭔가 앞서가고 있다는 느낌(그리고 그렇게 보이고 있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잘못은 없는데도 뭔가 모를 이유로, 그들은 퇴보를 거듭하고 있다.”
가장 먼저 하고싶은 말은 ‘새치기 당한 느낌’을 해결해줘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회적 공동체적 유대감으로 해결하지 말아야 하고 외려 부셔서 없애야 한다. 충격으로 인해 정신을 잃어버린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칭얼거림은 받아 줄 필요가 없다. 새치기 당했다고 여기는 사람을 아무리 동정적으로 바라봐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여전히 차별주의자다.
한국에도 비슷한 ‘새치기 당한 느낌’을 받는 사람이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여자인 이부진이 남자인 나보다 부자이므로 한국에는 차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허수아비같은 주장을 놓고 얘기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귀기울여보면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는 변주되서 상당히 많이 들려온다. “내가 아는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인인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버니까 차별이 없다”, “여성 대통령도 가능한데 무슨 소리냐” 이런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한 집단에 소속된 사람이 조금이라도 특출나는 상황이 생길 때 과하게 집중한다. 그에게 있어 이 일은 아주 특수한 행위고 세상이 뒤집힐만한 충격이다. 그리하여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억울한 감정을 품게 된다. 자신은 타고 난 조건 때문에 이보다 더 나은 취급을 받아야만 한다는 거만함을 품고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백인남성기득권이 상처받는단 사실이 아니다. 그런 소리에 상처 받을 정도로 과하게 자아가 비대해지도록 사회가 백인남성에게 부여한 이미지가 더욱 문제다.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지 않고 유색인종이나 장애인 여성등과 같이 경쟁해야 한다는 소리에 심적인 충격을 받는 것 자체가 문제다. 누구나 독특하고 소중하며 이성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 게 문제다.
메리토크라시로 인해서 상처받은 사람들중에 주목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차별을 정당화하는데에 이용되어 상처받은 사람이다. 사회를 단순하게 네 개의 집단으로 나눠보자.
A. 백인 능력자
B. 백인 무능력자
C. 유색인종 능력자
D. 유색인종 무능력자
옛날에는 A-B-C-D의 체계가 유지되면서 백인은 아무리 무능력하다고 하더라도 유색인종보다는 더 나은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능력주의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A-C-B-D의 모습으로 구도는 바뀌게 되었다. B인 백인 무능력자는 C 유색인종 능력자에게 새치기를 당했다고 느낀다. 그러나 여기에서 D 또한 C가 기존의 벽을 허물면서 나아가고 있는 도중에 자신은 전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 또한 느낀다. D는 자신의 소속집단에 대한 부채감 또한 같이 느끼게 된다. 세상이 유색인종도 더욱 잘해낼 수 있다고 말하고, 세상의 편견을 깨트린 영웅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그러나 D는 영웅적인 역할을 할 수 없고, 역시 유색인종은 열등하다는 편견을 강화시키는데에 자신이 한 몫을 하고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느끼는 자괴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능력주의라는 탈을 썼지만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C또한 불쾌감을 느낀다. A는 C에게, B는 D에게, 그래도 자신보다 너가 아래에 있는 까닭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한 것이, 실제로 공정하지 않더라도 공정하다는 착각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문제이지 않은가. 실제로는 공정하지 않은데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가 위대한 줄 알고, 실패한 사람들이 자기가 잘못된 줄 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런 상황에서는 C와 D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을 경우, 그것이 차별적인 까닭 때문이더라도 자신의 능력부족으로 여기게 된다거나 하는 문제에 더욱 주목했어야 한다고 본다.
미국 우파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해명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해서 보다는 그들이 왜 ‘새치기 당한 느낌’을 느끼게 됐는지, 그들이 느끼는 새치기 당하기 이전에 자신이 응당 받았어야 할 대우가 뭔지에 대해 집중하는게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원래 위치가 어디라고 생각했기에 새치기를 당한 것일까. 마이클 샌델이 인용한 앨리 러셀 혹실드의 책의 제목도 여러 의문이 들게 만든다. 책 제목에서 미국의 하류층 백인들을 표현할 때 ‘Strangers in their own land’라고 하는데 미국의 백인들이 그 땅을 ‘Their own land’라고 할 자격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미국원주민들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미국 원주민 타령이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반박하려 한다면 ‘Strangers in their own land’라고 미국 우파를 정의하는 것 또한 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