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인 향기를 풍기는 글이다. 읽으면서도 수시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헤세의 다른 저작을 전부 읽은 다음에 다시 여기로 돌아온다면 더 많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헤세에 정통한 사람은 아닌지라 아쉬움이 남았다. 나중에 다시 읽으면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겠지. 참 이상한 책인 게, 문장 문장은 흥미로웠는데 전체적인 틀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이렇게 파편만 마음에 들고 전체적인 그림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을까 신기한 감정이 들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임을 제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인데... 하리 할러는 태생적으로 엄숙한 사람이어서 가벼운 것, 유희 등을 싫어하며 피해 다니던 사람이다. 그 모든 걸 극복하면서 삶의 다면성에는 가벼움과 유희도 포함되어 있음을 깨달으려고 노력한다. 글이 쓰여있는 부분까지는 하리가 자아를 통합하는 방법에 대해서만 깨달았을 뿐 제대로 된 통합에 이르지는 못한다.
숭고하려고만 하는 것이 천박한 것. 천박하다고 여겼던 가벼운 것과 유머에도 진리가 있는 것. 유희 속에서 진지함을 꺼낸다면 현실의 때를 묻혀 죽여버리는 것.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이런 건가 싶었다. 그런데 이 글의 묘사 방식이 아이러니했다. 짓눌릴듯한 숨 막히는 엄숙함과 환상 속에서 볼 정도의 극단적인 가벼움 양 극단을 오간다. 현실적이고 시민적인 인물이란 건 처음 나온 몇뿐이다. 그리고 환상의 내용도 너무 엄숙하다. 모차르트니 괴테니 하는 숭배의 대상이 튀어나와서 얘기해야만 하리에게 설득력이 있는 걸까. 하리 할러가 자신의 수기에서 엄숙한 향기를 풍기는 이유가 뭘까. 하리가 아직 엄숙함에서 벗어나지 못 한 걸까, 아니면 헤르만 헤세가 떨치지 못 한 걸까? 하리의 글이라는 설정이니 하리의 생각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추가적으로... 헤세 말고도 유머를 좋아하는 예술가가 참 많다. 다들 너무 진지하게 사셔서 그런가? 또 헤르만 헤세는 남자끼리만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건... 특정 취향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때쯤에 하신건가? 덕분에 헤르미네라는 인물이 나왔으면 잘 된 일이다.
극히 드문 일이긴 하지만 나에게 행복과 환희와 체험과 무아경과 승화를 주는 것들을, 세상 사람들은 기껏해야 문학에서나 찾고 이해하고 좋아할 뿐, 삶에서 그것들을 대하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세상이 옳다면, 다시 말해 카페의 음악이나 대중의 향락이나 값싼 만족에 길들여진 이런 미국식 인간들이 옳다면, 내가 틀렸고, 내가 미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말 그대로 황야의 이리인 것이다. 나야말로 고향도, 공기도, 양식도 찾지 못하는 짐승, 낯설고 알 수 없는 세상에 길을 잘못 들어선 짐승인 것이다.- P45
과거의 유럽, 과거의 참다운 음악, 과거의 참된 문학을 잘 알고 존중하는 우리들은, 내일이면 잊혀지고 조롱당할, 어리석고 머리가 복잡한 소수와 노이로제 환자에 불과한가?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던 것, 우리가 정신, 영혼, 아름다움, 성스러움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미 오래전에 사멸한 한갓 허깨비에 불과하며, 단지 바보들이나 아직도 그런 것들이 살아 있고 실재한다고 여기는 것일까? 어쩌면 그런 것들이 실재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을까? 우리 같은 바보들이 애써 얻고자 하는 건 어쩌면 항상 하나의 환영에 불과한 건 아닐까?- P56
그는 성자 쪽으로도 탕아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강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나, 어딘가 허약한 구석이 있어서 혹은 게으르기 때문에 자유롭고 거친 세계로 도약할 수 없고 시민 사회라는 무겁고, 버거우면서도 포근한 별에 사로잡혀 있다.- P77
내가 당신 마음에 들고 당신에게 중요해진 건, 내가 당신에겐 일종의 거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내 내면에는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에게 답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요. 본래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상대를 위한 거울이어서, 서로 답을 주고받고 서로 조응하는 거지요. 그러나 당신 같은 기인들은 괴팍하고 쉽게 마술에 걸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읽어낼 수도 없고, 세상에 어느 것 하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요. 그런 기인이 느닷없이 그를 정말로 응시하는 얼굴을, 그에게 어떤 대답을 줄 것 같고 어떤 친속성을 풍기는 그런 얼굴을 발견했을 때, 기쁨을 느끼는 건 당연합니다.- P153
당신의 투쟁이 아무런 성과가 없으리란 걸 당신이 알고 있다고 해도, 당신의 삶은 천박하고 무미건조해지지 않아요. 하리, 당신이 어떤 훌륭한 이상을 위해 싸우고, 그것을 반드시 이루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훨씬 더 천박해요. 도대체 이상이란 것은 이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건가요? 도대체 우리는 죽음을 없애기 위해 사는 건가요? 아니에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런 다음 다시 죽음을 사랑하기 위해 사는 거에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보잘것없는 인생도 어느 순간 그렇게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거예요.- P168
실례지만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당신은 검사십니다. 어떻게 인간이 검사가 될 수 있는지 나는 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을 고발하고 처벌하는 일을 밥벌이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P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