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기록하는 탐사선
햇시 2021/06/22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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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어가 내려온다
- 오정연
- 11,700원 (10%↓
650) - 2021-06-16
: 384
≪단어가 내려온다≫에는 <마지막 로그>를 포함하여 총 일곱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 로그>는 안락사가 보편화된 가까운 미래, '온전한 나'로서 죽기 위해 안락사 시설인 '실버라이닝'을 찾은 주인공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단어가 내려온다>와 <분향>, <미지의 우주>는 화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중 표제작인 <단어가 내려온다>는 만 15세 즈음의 모든 인간이 자기만의 단어를 받게 되며, 아시아권에서는 공자의 용어를 따서 이를 '지학'이라고 부른다는 세계관을 가진다.
자신에게 단어가 내려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주인공은 화성으로 이주하기 위해 거쳐가는 검역소에서 '나는 나중에 그에게 말할 것이다'라는 의미의 이누이트어를 가진 소년과 만나게 되고, 열여섯 번째 생일을 3일 앞둔 어느날 단어를 받게 된다.
<분향>은 화성으로 이주한 한국인들이 화성에서의 첫 명절을 맞아 고향에 남은 가족들과 화상통화로 차례를 지내는 이야기이다.
화성으로의 이주라니 까마득하기도 하고, 거기까지 가서도 차례를 지내야 한다니 갑갑하게 느껴지는 한편으로는,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얼굴을 보고 안부를 확인하고 싶은 존재들에 대한 애틋함 또한 느껴지는 소설이다.
그날 밤 숙소에서 너는 말했다. 까마득히 먼 곳의 보이지 않는 입자들이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아무런 목적 없이 그런 장관을 만들어내는데 너와 내가 그 안에서 함께였다니. 그것이 기적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을 기적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분향>, 111p
<미지의 우주>는 화성의 콘텐츠 유통 기업 '레드플래닛'의 사용자 분석팀 팀장인 '미지'가 지구 연수 대상자로 선발되면서 시작된다. 미지를 중심으로 이주와 개척이라는 꿈 앞에서 여성, 그리고 비혼모가 맞닥뜨리는 현실에 대해 풀어내는 소설이다.
배경이 화성이라는 점은 같지만, 지구에서 화성으로 떠나는 <단어가 내려온다>나 <분향>과는 달리 <미지의 우주>는 화성에서 지구로 돌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행성사파리>는 쌍둥이지구에 가기 위해 우주여행을 떠나는 '미아'의 이야기이다.
쌍둥이지구는 크기와 질량부터 기후와 생물까지 모든 게 우리 지구와 쌍둥이처럼 똑닮은 행성이다. 다만 우리 지구보다 50만 년 정도 늦게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기에, 지구인들은 마치 지구의 과거를 구경하는 마음으로 쌍둥이지구를 여행한다.
엄마, 아빠. 저 지금 쌍둥이지구로 떠나요. 혹시 모바일 가정통신문에서 수학여행 일정 업데이트 안 해준다고 학교에 연락해 보고는 걱정하실까 봐 미리 알려요. 걱정 마세요, 저 이제 다 컸대요! 사랑해요! ♡♡♡
<행성사파리>, 164-165p
미아는 성장이 끝났다는 의사의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성장판이 닫힌 사람만 우주여행 티켓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의 공인인증생체정보를 도용해서 수학여행 불참 사유서를 내는(수학여행이라고 속이고 엄마 아빠 몰래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깜찍한 아이. 과연 미아가 혼자서 머나먼 여행길을 떠난 이유는 뭘까? 쌍둥이지구에서 미아는 무엇을 경험하고 느끼게 될까?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은 사람들의 기억이 담긴 VR 파일을 관리하고 우주의 풍경을 메일로 전송하는 업무를 맡은 인공지능 永遠의 이야기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의 독백으로 전개되는데, 그저 자신의 일을 담담하게 해낼 뿐인 영원의 독백이 참 신선하면서도 잔잔하게 다가왔다.
<일식>은 기억을 기록하고 저장하여 재생할 수도 있게 된 세계에서 '기억 관리자'로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우리의 기억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할까? '인간의 기억은 재생할 때마다 새로 덮어쓰는 파일 같'아서 ' 애초에 기억과 경험은 한 번도 완벽하게 일치한 적이 없었을(246p)' 거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은 단연 <행성사파리>이다. 미아는 물론 미아와 함께 패키지 여행을 떠나온 각각의 사람들도 매력적이었고, 쌍둥이지구에서의 여행이 정말 생생하고 흥미로웠다.
흥미롭게 읽은 또 다른 소설은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이었는데, 기억을 영상매체로 포맷하여 관리하는 영원의 일에서 영상물을 디지털화하여 관리하는 일을 했다는 작가의 이력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우연을 가능하게 만든 '시작'부터 존재하는 전파를 가르며 별이 되는 중이다. 인간의 가장 소중한 기억들과 함께. 이만하면 충분히 아름답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 224p
소중한 기억들을 품고 우주를 유영하는 영원의 마음은 순간의 반짝임들을 모아 소설이라는 세계로 풀어내는 작가의 마음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이만하면 충분히 아름답다 고,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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