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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당구님의 서재
  • 수월한 농담
  • 송강원
  • 15,300원 (10%850)
  • 2025-09-10
  • : 3,300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 책의 서평을 쓰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게
나는 한줄 한줄마다 엄마를 떠올렸고, 내가 기리는 죽음과 비교할 수 밖에 없었다. 전영옥님이 좋아했던 자몽은 우리 효심씨의 석류를 떠올리게 했고, 아들이라 엄마의 기저귀를 갈지 못해 당황했다는 그의 이야기에 나는 딸이라 엄마를 수월하게 안아들 수 없던 그 시간을 떠올렸다. 이상하게 닮은 점이 많다고 느껴졌는데, 그가 언급했듯 “이 문장은 엄마에 관한 자의식이 가득한 나의 해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여전히 나는 나의 글을 다듬고, 엄마를 미화하고, 엄마가 이러길 바랐을 거라고 생각하며 글을 쓴다.
책 여기저기에 떠올랐던 생각들을 적어놨지만, 그 글을 다시 보는 게 쉽지 않다. 이게 나의 자의식으로 점철된 이야기라는 걸 알아서다.
엄마를 간병하는 동안에 “엄마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썼던 인스타 피드에 엄마는 ‘좋아요‘를 눌렀다.
엄마는 아프다는 말 대신에 진통제 하나만 더 주면 안되냐고, 애교섞인 부탁을 했었다. 강원님의 어머니가 자살을 결심했다는 데에서야 엄마가 남겨질 우리를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참아냈는지 헤아릴 수 있었다. 아니 아마 진짜로 헤아리진 못할 것이다. 그런 종류의 고통을 처음 깨달았을 뿐. 나는 아직도 내 슬픔이 더 중했던 거다.
엄마의 장례식날 엄마가 좋아하는 꽃들이 가득차, 언니와 나는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다. 영정사진은 대학원 졸업식에 굳이 사진을 찍어야 하냐며 툴툴댄, 보정이 과하게 들어간 학사모 쓴 엄마의 사진이었다. 그만큼 우리는 어떤 준비도 하지 못한채로 엄마를 보냈다. 그래서 엄마를 기억하는 글을 꼭 써야겠다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 글로 마무리 될 것 같다. 그 결심까지도 사실 내 슬픔의 미화였고, 이게 얼마나 얕은 마음이냐면 글을 쓰겠다 마음 먹은지 어느새 3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병상에 함께 누워있을 때 엄마는 자주 “너넨 쌍둥이라서 좋겠다. 너네 평생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거잖아”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이게 엄마의 유언이라 생각하고 엄마의 삶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내겠다고, 내 슬픔을 영원하게 만들 수 있을거라 내심 생각했던 것이다.
6남매 중 늦둥이 막내딸로, 큰이모와 나이차이가 무려 스물하나인 엄마. 그중 대부분이 대도시로 취업을 가거나, 시집가거나, 가게를 차려많은 것을 공유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겨우 기억을 그러 모아보면 엄마는 우아했던 말년과 달리, 대장부였던 것 같다. 단편 단편의 기억이지만, 대학생인 오빠에게 화가나서 똥물을 뒤집어 써서 똥독에 올랐었다던 국민학생 엄마, 서울에서 전학온 친구가 ’쩝쩝대면서 먹지 말라‘고 해서 너무너무 창피했다는 엄마(그래서 밥상머리 교육에 철저했던 엄마), 외할머니가 아플 때 죽음을 마주할까봐 혼자 대도시로 도망쳤다는 엄마, 이런 강렬할 이야기 말곤 흔하디 흔한 아빠와의 러브스토리. 그건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니 논외겠다. 엄마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에 나는 어떤 책임감까지 느꼈다. 엄마를 여전히 ’내엄마‘로만 기억하고 싶으면서, 기록이라니. 엄마가 말해온 숱한 이야기들 속에 결국 내가 기억하는 건, 엄마의 그 행실이 지금의 나의 성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이걸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오만한 마음이었는지.
그가 보낸 3년이 한편으로 부러웠다. 내가 보낸 1년은 어쩌면 내 슬픔을 이해하려고 전부 허비했는데, 그는 죽음을 기다리는게 아니라 ’잘‘,’맞이‘하게 된 순간까지 2년여의 시간이 더 가졌으므로. ’자의식‘에서 벗어나 오롯이 엄마에게 집중한 시간으로 더 진득하게 보낼 수 있었던 듯 싶다. 자신의 슬픔에 앞서 그는 엄마가 엄마의 삶을 응시할 수 있도록 애쓸 수 있었다. 그것이 못내 부러웠다. 아마 그 시간만큼 소화해내는 시간은 더 괴롭겠지만.(평생 슬플거라면 좀더 성숙하게 슬퍼할 수 있겠지)
엄마의 죽음 이후 나는 내내 엄마를 썼지만, 이렇게 러프하게 내 마음을 써본 건 처음인듯 하다. 그래서 사실 언니에게는 좀 더 “네 마음을 수월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 때 읽어라”라고 조언하며 건넸다.
“엄마, 죽는 게 쉽지 않제?”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의 지난한 과정이 수월하게 내 본심을 끌어냈다. 그가 겪을 슬픔이 내가 겪어온 시간과 비슷하다면, 진심을 다해 응원을 보낸다. 무뎌지진 않지만, 슬픔도 조금 수월해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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