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의 마지막 ‘반전’은 충격적이면서도 터무니없다.
그리고 이 소설은 너무나 솔직하다. 너무 솔직하기에 충격적 반전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는 것일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왜 안돼?” 진도를 나가려던 손이 제지당하면, 그렇게 묻게 된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 그 ‘느낌’을 두고 입씨름이 벌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감정 문제에서 여자들은 전문가였고, 남자들이 거친 초보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라는 말은 교리나 어머니의 권고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고 반박 불가능했다. (44-45)
(느낌을 대지 않고 논리를 말하면 뭔가 반박할 것이 있을 텐데...)
좀 취했다 싶었던 어느 날 밤, 베로니카는 내 손을 그녀의 속바지 속으로 이끌었다... 두 어주 동안은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호령하는 기분이었지만, 내 방으로 돌아와 수음을 하다보면 때로 분한 마음으로 기분이 날카로워졌다. (62-3)
이런 방충맞은 놈을 다 봤나. 그래, 그 여자가 네 성기에 콘돔을 말아 씌어주는데도 처녀라고 생각했던 거야? 묘하게도, 그랬다. 내겐 속수무책으로 결여된 여성의 직관적인 기술 중 하나인가 싶었다. 정말 그랬는지도 모른다.
... “넌 너만 아는 나쁜 놈이야.” 다음번에 만났을 때, 베로니카가 말했다... “그건 강간이나 다름없어.” (68-9)
나는 베로니카가 오래전에 받은 괴로운 상처가 있다고 봤기 때문에 그에게 신중할 것을 권했다... 무슨 뜻으로 ‘상처’라는 말을 한 거냐고? 그냥 짐작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증거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불행했던 주말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그것이 다만 순진한 면이 있는 한 청년이 자신보다 지체 높고 사교술에 능한 가족에게 부대껴 심기가 불편했던 것 이상의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78-9)
에이드리언에게 편지를 썼을 때, 나는 어떤 의미로 '상처'란 말을 썼는지를 스스로도 명확히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가, 인생의 끝자락에 와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한번은 장모가 -또 한 번의 아동학대가 신문지상과 TV 뉴스 프로그램을 오르내렸을 때- ‘학대받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베로니카가 목욕할 때나 잠잘 때면 맥주로 불콰해진 눈으로 그녀를 보던 아버지와, 포옹을 할 때마다 어딘지 도를 넘어선 듯한 오빠의, 요샛말로 ‘부적절한 행동’의 희생양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뭘 안다고? 무언가를 상실하게 된 근본적인 순간이라든가 사랑이 가장 절박했으나 그것이 거둬진 순간, 혹은 아이가 어쩌다 엿듣게 된 대화로 인해 혼자서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 같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80)
(여기서 학대는 성학대 sexual abuse로 바꿔 번역해야 보다 명확할 것 같다. 물론 그러면 표현이 너무 강하겠지만. 학대라는 번역도 좀 과한 것 같다. 성 남용이라면 뜻이 애매해지고. 성 추행이 맞겠지만, 역시 표현이 강한 것 같다. 과도한 애정 표현 정도 일텐데.)
완전무결한 부모와 오누이와 이웃과 동료로 이루어진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닌데, 상처를 피할 도리가 있을까... 상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또 그 상처는 우리의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81)
** 여기서 이런 인용을 계속하는 것은 이 소설의 ‘반전’, 수수께끼 때문이다. 주인공의 ‘머리 좋은’ 친구 에이드리언이 주인공의 애인이었던 베로니카를 좋아하다가, 베로니카가 아니라 베로니카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졌다는 충격적인 반전, 그래서 난산으로 장애아를 낳고 그로 인해 베로니카도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반전 때문이다.
이 소설은 말미에 그런 엄청난 반전을 만들어 놓고 아무런 설명없이 갑자기 끝나고 만다. 그러니 독자 스스로가 되짚어 설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하나의 설명. 아버지와 오빠로부터 성적 ‘추행’을 경험한 베로니카는 그 상처로 인해 남자를 사귀는 데 극도로 예민하다. 한편으로 어렸을 때부터 겪었던(혹은 그와 유사한) 그런 성적 접촉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면서도("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 그로 인해 받은 상처 때문에 그것을 경계한다. 그녀는 늘 아버지와 오빠와 유사한 인물을 파트너로 선택한다. 처음 그것은 앤서니였다가, 더욱 유사한 인물인 에이드리언으로 바뀐다.
베로니카에게 남자와의 접촉과 성적 접촉은 늘 잘못된 결과를 예고하고 있다. 어릴 적 상처를 다시 불러내고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남자와의 접촉과 성적 접촉은 다른 말이 아니다.(남성이 만든 질서 속에서 남성들이 원하는 선택 이외에 다른 선택이 어디 있겠는가?) 어렸을 때의 상처가 그랬듯이 성적 접촉은 반드시 상처만을 남기게 되고, 그 모든 결과는 모두 자신이 아니라 타인들이 자신에게 부당하게 가한 결과이다. 그래서 베로니카는 모든 잘못된 결과를 상대방의 탓으로 책임을 떠넘긴다. (작가는 그런 부류를 피도 눈물도 없는,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라고 못박는다. 헤겔식으로 표현하면 '아름다운 영혼'의 경우, 라캉이 말하는 도라의 경우이다.)
한편 베로니카의 어머니는 가족 내에서 늘 따돌림 당한다. 남편과 아들은 베로니카만을 둘러싸고 돌아 간다. 그 결과, 그녀는 딸의 애인을 ‘유혹’한다. 그를 통해 딸에게 복수한다. 그리고 가족 내의 다른 남자 구성원들에게도.
그러나 그 딸은 어머니와 에이드리언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작가의 표현은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이다. 그 상처를 끝없이 반복하기 보다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게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황당하고 지저분한 설명을 작가는 자신이 손수 하기 보다는 독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