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 필사, 인생의 문장들>이라는 책을 만났어요. 그동안 종종 영어 필사를 하고 있었던 데다가 문장 수집의 의미를 느끼던 차였기에 정말 반가웠죠. 길지 않은 영어 명문장을 통해서 사색하고, 좋은 글쓰기에 대한 갈망까지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 책은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고광윤 교수님이 좋은 문장을 골라 담은 도서에요. 교수님은 바쁘게 흘러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느리게 읽기의 가치를 꾸준히 말씀해 오신 분이라고 해요. 이 책을 만나고서 예전처럼 왜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걸까 하며 한탄하던 저는, 또 다른 시각으로 읽기라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이 책에는 저자의 철학과 지향점, 인생의 방황을 잡아주는 소중한 문장들이 오롯이 담겨 있었어요. 그래서 영어 공부로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지혜와 통찰을 얻는 경험으로서의 가치가 뛰어나다고 생각했어요.
책을 그냥 읽을 때는 주로 전체적인 느낌을 파악하듯 후루룩 마셔버리는 편이지만, 이렇게 필사를 하게 되면 같은 문장을 적어도 너댓 번은 반복해서 보게 되잖아요. 그래서 과연 이 글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여러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학창 시절부터 오른쪽 페이지에만 필기해왔던 저로서는 이런 페이지 구성이 참 반가웠어요. 왼쪽에는 원문의 영어 문장을 두고, 오른쪽에는 필사 영역이 있어서 습관대로 편히 쓸 수 있었거든요. 영어 문장의 아래에는 한국어 번역문이 있는데요, 가끔은 너무 직역한 게 아닐까 - 번역체 그대로라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하단에는 영어 단어와 뜻을 주석으로 달아두어서 따로 파파고를 띄울 필요 없어서 편리했죠.

책은 내구성이 좋은 양장본으로 제작되어 있는데요, 오랫동안 필사하더라도 쉽게 헐어버리지 않을 거 같아요. 그리고 내지 퀄리티도 어찌나 좋은지 글을 쓰더라도 뒷장으로 번지지 않아요. 저는 파이롯트 Juice up 0.4로 필사 중인데요, 종이가 좋으니까 걸리는 부분 없이 매끄럽게 잘 써진답니다. 제본과 내지 구성 그리고 가름끈까지 모두 마음에 들어요.
<영어 필사, 인생의 문장들>의 맨 처음 문장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구절이었어요.
What does your conscience say?
"You shall become the person you are."
이 문장을 보는 순간, 글을 쓰려던 펜을 잠시 내려놓고 생각해 봤어요.

종종 제게 나타나는 증상이기는 한데, 나에게 부족한 면이 너무나 크게 다가와서 자신감을 잃어버리곤 하거든요.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나 자신이잖아요. 내가 나답게 사는 거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요?
그래서 타인을 보면서 '나는 왜 저렇게 되지 못했을까.', '이제는 글러먹은 건 아닐까?'하는 자괴감 대신, 나만의 컬러와 목소리를 찾는데 집중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문장들을 그냥 필사하기보다는, 다이어리를 꾸미는 것처럼 좋아하는 스티커들을 붙여가면서 한 페이지씩을 여러 번 곱씹으며 천천히 삼키기로 했어요. 평소 감성을 담는 걸 잘 못하지만, 영어를 읽고, 한글을 읽고, 필사를 한 후, 잔뜩 모아둔 스티커를 붙이면서 계속 되뇌는 거죠. 그러면 나다운 방식으로 문장을 가슴속에 수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랬더니 정말 한 페이지를 채울 때마다 그 의미가 더욱 풍성해지면서 제 마음 깊숙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어요. 매 페이지에 감성과 기억, 생각들이 더해지는 느낌이랄까요? 조금 더 마음이 평온해지면 필사+그날의 생각을 담는 식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앞으로도 이렇게 저만의 컬러로 채워나갈 예정인데요, 자꾸만 스티커를 붙이다 보면 그렇지 않아도 두툼한 양장본인데 더 뚱뚱해질 거 같네요.ㅋㅋ

이렇게 필사를 해나가면서 저는 영어 문장을 수집하면서, 그 의미를 계속 되새기며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어요. 예전처럼 부지런히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아도, 내면의 성장을 잃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다시 이전의 활기찬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