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우리 엄마는 늘 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며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편히 앉아 먹으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늘 ‘다 먹었어.’라고 말하며 밥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밥을 쓸어 입에 넣고는 금방 일어났다. 나는 엄마의 그런 모습이 참 싫었는데 내가 지금 그러고 있다. 엄마와 내가 다른 점이라면 엄마는 상 앞에 쪼그려 앉았다면 나는 싱크대 앞에 서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 엄마의 그 모습이 그렇게 싫었는데 내가 엄마가 되니 나도 그러고 있다.
혼자 밥을 먹게 되면 늘 마음이 급해진다. 숟가락과 입을 바삐 움직여 먹으면서 눈은 집안을 이리저리 살피고 머리로는 할 일을 떠올린다. 입은 열심히 먹고 있지만 나는 음식이 아닌 딴생각 중이다. 또 혼자 밥 먹는 그 시간이 그렇게 아깝다. 아, 이 시간이면 다른 걸 할 수 있는데, 언제 차려 먹나. 그냥 대충 차려서 먹고 얼른 할 거 해야지. 아, 설거지도 정말 하기 싫은데... 그렇다면 설거지가 최대한 나오지 않도록 그릇도 최대한 적게 사용해야지.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가며 최단시간, 최소그릇을 계산한다. 나는 그 어떤 수학문제를 계산할 때보다 진지하다.
그런데 아이 밥상을 차릴 때면 달라진다. 어떻게 하면 맛있는 거, 특별한 거 해줄까. 어떤 그릇에 더 예쁘게 담아줄까 고민한다. 엄마라면 이 정도 노력과 수고로움은 당연한거지. 라고 생각하며 아이 밥상을 차린다. 나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다양한 메뉴와 예쁘게 담긴 모양을 흉내내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정성껏 아이 밥상을 차리면 내 밥은 그냥 밥 한 그릇에 반찬 두어 개를 반찬통 째 상 위에 올리는 것으로 끝난다. 아이가 밥을 먹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나는 내 입에 밥을 전투적으로 집어 넣었다. 혼자 먹을 때야 그렇다치고 아이랑 같이 먹을 때조차 나는 그저 한 끼 때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나에게 미안한 적이 없었다. 아니 미안한 줄도 몰랐다. 나를 사랑하자, 나를 아끼자, 나의 생각과 감정을 먼저 챙기자. 며 수없이 다짐하고 연습하고 노력했으면서 정작 내 몸에 가장 중요한 끼니는 대충, 적당히, 아무렇게나 먹고 있었다.
혼자 먹는 밥일수록 예뻐야 한다. 혼자 있을 때 나를 챙겨 줄 사람은 나뿐이다.
만족스러운 한 끼는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든든하게 만들어 주었다.
뚝배기에 대한 이야기, 뚝배기를 예찬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실제로 이 책은 뚝배기에 대한 이야기가 맞다.)하지만 첫 장부터 내 가슴에 훅 들어온 저 문장을 한참동안 바라보느라 정작 뚝배기 이야기는 나중에 읽고 말았다. 뚝배기야, 미안. 그리고 좀 늦었지만 나에게도 미안.
-뚝배기 고르기 및 관리법-
당장 뚝배기를 하나 구입해야겠다.
예전에는 된장찌개만큼은 뚝배기에 끓였지만 두 개의 뚝배기를 다 깨먹은 후 다시 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에 좋은 뚝배기 고르는 방법이 잘 나와 있으니 그 방법대로 나에게 맞는 뚝배기를 잘 골라봐야겠다.
아, 뚝배기를 사고나면 작가님이 알려주신대로 뚝배기를 먼저 길들여야지.
그냥 물로 휘휘 닦는 것이 아니라 작가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으로 잘 닦아봐야지.
그렇게 뚝배기와 먼저 인사를 하고 애정을 담는다면 예전처럼 쉽게 뚝뚝 깨지지 않을 것 같다.
-나만 맛있을지 모르는 뚝배기 레시피-
뚝배기로 할 수 있는 요리가 이렇게나 많다니!
뚝배기로 할 수 있는 깔끔하고 정갈한 요리 레시피에 인덱스를 붙여 놓았다.
책 속의 레시피를 보니 요리에 젬병인 나도 그럴듯한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책은 요리책자 옆에 놔야 하나, 에세이 책들 옆에 놔야 하나.
-가락국수의 정석-
나도 뚝배기에 담긴 가락국수를 좋아한다.
누군가는 면이 불어버려 뚝뚝 끊겨 맛없다고 하지만 나는 아니다.
부들부들, 흐느적흐느적거리는 그 면만의 매력이 있다. 그리고 다 먹을때까지 뜨거운 국물을 먹다보면 식도까지 데인 것 같은 기분이지만 그것 또한 뚝배기 가락국수 국물의 매력이다.
요즘에는 이렇게 파는 곳이 없어 많이 아쉬웠는데 뚝배기를 사면 가락국수도 끓여 먹어야겠다.
-국물이 국룰-
뭐니뭐니해도 뚝배기하면 국물이지. 맞다.
어쩜 이런 표현을!
뚝배기하면 국물이지!
술 먹은 다음날은 콩나물 해장국, 생리하는 기간에는 선지 해장국, 소주 한 잔 마실 때는 감자탕 해장국, 그냥 그때그때 먹고 싶을 때 돼지국밥이나 순대국밥. 뭔가 몸보신이 필요하다 싶을 때는 설렁탕과 갈비탕. 거기에 아빠가 끓여주던 청국장까지.
아,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오늘 저녁에는 이 중 하나를 골라 먹어볼까?
기꺼이, 라는 말이 붙으면 낭비는 낭비 아닌 것이 되고 고생은 고생 아닌 것이 된다. 오히려 기쁨과 보람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요리를 좋아하거나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핵심은 행복이다.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면서 집안일과 요리에 대한 책임감이 생겼다. 아무리 나만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여전히 나는 집안일과 요리를 담당하고 있다. 나에게 집안일에 해당되는 일들(빨래, 청소, 정리정돈, 설거지 등)은 힐링이자 즐거움이다. 하고난 후 뿌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요리는 아니다. 요리는 재료를 준비하고 다듬고 끓이거나 볶고 맛을 보며 부족한 맛을 찾아내고 그것을 그릇에 담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고행의 과정이다.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지루하고 재미없다. 그래서 하지 말자 다짐하며 나는 ‘집안일을 이렇게나 잘하는데 요리까지 잘하면 그건 반칙’이라며 농담처럼 말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뜨끔거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요리를 아예 안하고 살 수가 없다. 남편 밥이야 그렇다치고 애 밥은 챙겨줘야하니까. 그래서 저 문장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 핵심은 행복이지.
작가님은 책 처음에 나에게 미안하게 만들더니 마지막에는 뜨끔했던, 답답했던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주셨다. 아, 작가님께서 내 마음을 들었다놨다 하시는구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에세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이야기 하나만 꺼내도 훌륭한 에세이가 될 것이다. 그런 에세이는 누군가에게 잔잔한 울림과 깨달음을 줄 것이다. 이것이 에세이의 매력이다. 이 책의 작가님은 프롤로그의 제목을 변명 혹은 부탁으로 쓰시며 너그러운 입맛과 열린 마음으로 이 책장을 넘겨 달라 부탁하셨다. (책을 다 읽고 보니 이런 부탁은 안하셨어도 되었을 것 같지만.) 그리고 뚝배기 이야기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쓰셨고 나는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중간중간 마음의 일렁임을 느끼고 많은 생각도 했다. 이 책은 콤팩트 시리즈답게 책의 크기가 콤팩트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콤팩트하지 않은 에세이다. ‘뚝배기,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이제라도 뚝배기를, 다른 사람의 뚝배기가 아닌 서주희 작가님의 뚝배기를 알게 되어 참 행복하다.
(핵심은 행복이니까. 이 책을 읽고 내가 행복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마음에 남는 글귀
p12 혼자 먹는 밥일수록 예뻐야 한다. 혼자 있을 때 나를 챙겨 줄 사람은 나뿐이다.
p15 만족스러운 한 끼는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든든하게 만들어 주었다.
p172~173 기꺼이, 라는 말이 붙으면 낭비는 낭비 아닌 것이 되고 고생은 고생 아닌 것이 된다. 오히려 기쁨과 보람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요리를 좋아하거나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핵심은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