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쿠데타는 세력화된 군부를 기반으로 했다고 보기 어려워. 5·16 이후에 군부가 성장했지. 박정희 밑의 수방사, 보안사,
비서실, 중앙정보부는 말할 것도 없고 부처 장관, 외국 대사까지군인들이 차지하잖아요. 전두환은 이렇게 세력화된 군부를 기반으로 해서 학살을 저지르고 권력을 잡았어요. 박정희와 다른 점이고전두환 체제의 본질이지.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하겠다고 유신을선포했지만 7년 만에 무너졌어요. 하물며 출발부터 정통성 없는살인 정권이 오래 버틸 수 없는 거야.
검찰독재.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막아야지.
경제적으로도 전두환은 박정희 경제정책의 수혜자였을 뿐이에요. 우리나라가 60년대로 넘어오면서 산업화가 되고 수출 주도형경제구조가 만들어지잖아요. 자원이 없으니까 원자재를 사다가 제품을 만들어서 팔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기술과 매니지먼트가 필요해, 박정희는 그 역할을 재벌이 맡도록 적극적으로 육성했어요. 이런 시스템 안에서 우리 사회의 물적 기반을 재벌이 다 차지하게 되지. 농업이나 복지를 희생시키면서 재벌을 키웠으니까. 그런데 농업이나 복지가 성장하지 못하면 내수가 안 생겨서 경제가 안 돌아가요.
지금까지 우리의 내수 기반이 약해진 이유가 그때부터 자원 배분을 불균등하게 해서 그런 거야. 60년대 중반에 우리 인구는 3천만이 안 됐어요. 4천만이 된게 90년대 초반쯤이고. 그 정도 인구로내수를 성장시키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도 JP가 이회창을 도왔으면 충청권에서 우리가 참패를 했을 거예요. DJP 연합의 효과가 있었다고 봐야지. 그리고 드러나지않았지만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DJP 연합으로 색깔론, 북풍이 힘을 잃었어요. 보수정당하고 손을 잡아버리니까. 92년 대선 때는이선실 사건 방어하다가 선거가 끝나 버렸거든.
총풍 공작을 주도한 사람은 안기부장 권영해, DJ가 후보일 때내가 안기부에 모시고 간 적이 있어요. 일반적인 얘기를 좀 하더니 후보한테 특별 브리핑을 해야 하니까 나머지 분들은 기다리라고 하면서 후보만 데려가. DJ한테 저 사람 말을 믿으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지. 내가 예산심의할 때 율곡사업을 다뤘어요. 엄청 큰사업인데 좀 의심스러워. 근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그 율곡사업의 주무가 권영해였어요. 그때부터 믿을 수가 없었지. 이 사람이장관까지 가고 안기부장이 된 거야. DJ가 권영해한테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 나와서는 나보고 차에 좀 타 보래. 그러시더니 이 의장이사람을 잘못 본 거 같다고 하시더구만. 근데 내가 제대로 봤어. 선거에 들어가니까 총풍 공작을 모의했잖아요.
우리는 달러가 급했잖아요. 달러를 빌려야 하는데 일본은 안 빌려 줬거든. 근데 미국은 특사까지 보내서 먼저 빌려 주겠다는 뜻을밝힌 거예요. 재무부에 얼마를 빌리면 되겠느냐고 물어보니 30억달러를 보고했대요. 특사하고 만나는 자리에 김용환 위원장이 나가고 우리는 배석을 했지. 특사한테 30억 달러를 빌려 달라고 요청했더니 이 사람이 좀 어이없다는 표정이더구만. 그러면서도 오케이, 내일 바로 보내 주겠다고 그래요. 알고 보니 미국은 200억 달러정도를 생각하고 왔대요. 특사는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고작 30억달러라니 하면서 놀랐고.
당시에 우리가 IMF에 100억 달러를 빌려야 했어요. 만약 200억달러를 미국에서 빌렸으면 IMF와의 협상력이 높아졌겠지.
최민희 클린턴이 DJ를 존경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는데, 이런 뒷얘기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가 만델라를 존경하듯이클린턴은 DJ를 존경했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해찬
우리 관료사회가 그랬어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고.
경제는 YS 자신이 식견이 부족하고 관료들은 안일하고…. 그러다 보니 엉망이 됐던 거고, 신도시 개발로 유동자금이 부동산투기의 재원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게 노태우 정부 말, 김영삼 정부 초부터였어요. 박정희 정부부터 조성된 유동자금이 부동산투기로 작동하기 시작한 거지. 집 보러 다닐 때 여름에 얼음 들고 다닌다고어요. 얼음이 녹기 전에 빨리 집을 사야 한다고. 이때부터 경제구조가 유동자금의 영향을 크게 받기 시작했다는 의미예요. 금융실명제를 했지만 이런 구조를 통제, 관리하지는 못했다고 봐야지.
결정적으로 IMF가 터졌는데, 내가 보기에는 외환 유동자금 관리에 실패한 거예요. 한국이 OECD에 가입하면서 외환 자율화가됐잖아요. 그전까지는 차관, 외자도입이 까다로웠는데 자율화되면서 단기금융사, 제2금융권이 막 생겨요. 단기자금을 막 들여와. 아시아 전역이 그랬지. 그게 미국이나 다국적의 초단기자금이었어
요. 금리가 거의 10% 되는 그런 단기자금을 들여와서 국내 자를 해 줬는데 그게 관리가 안 되는 거야.
97년 여름 YS가 각당 정책위의장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나도 갔어요. 그 자리에 경제수석하고 경제부총리가 있었지. 우리나라가 무역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외환보유고가 중요해요. 그래야신용장이 발부되고 원활하게 돌아가는데 그해 6, 7월 시점에서 외환보유고가 500억 달리가 채 안 됐어요. 당시 수출액을 고려하면600억 달러 정도는 보유하고 있어야 했거든. 내가 YS한테 굉장히위험한 상황이라고 얘기를 했지. 그랬더니 YS가 경제수석한데 애기를 해 보래. 경제수석이 김인호라고 유능한 사람이었어요. 근데이 사람이 괜찮다. 일본하고 스와프가 돼 있다. 그런 거예요. 강경식도 비슷한 얘기를 했고. 그러니까 YS가 거 보라고, 괜찮다고 하지 않느냐고 안심을 하더구만. 그러고 넉 달 뒤에 IMF가 터진 거야.
최민희
안일하게 일본을 믿고, 그런데 일본은 스와프를 안 해줬던 거고요.
이해찬
그렇지. 김영삼 정부의 과도기적 역할은 인정하지만 실패한 정부라고 봐야지. 아쉬운 몇 가지가 더 있는데, 하나가 대학 정원을 풀어 버린 거예요. 어느 나라나 고등교육이 필요한 직업은40% 정도거든. 근데 김영삼 정부가 준칙주의라고 해 가지고 최소한의 교수들, 강의실 등을 갖추면 허가를 해 줬어요. 사실상 신고제였지. 유동자금이 한쪽으로는 부동산, 다른 한쪽으로는 증여세를 안 내도 되는 재단 출연으로 가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대학이300여개로 늘게 돼. 대학이 급격하게 두 배로 늘면서 대졸 실업자는 양산되고.
복지정책이나 사회안전망을 그때부터 강화하기 시작했어야 하는데 그런 걸 못했지. 언론 정책도 세무조사하려다가 못했고, 군부독재 정부는 아니었지만 조중동하고 보수 연합이 돼 버렸잖아요.
언론사는 준재벌 기업으로 커버리고.
28년 동안 이어진 BK21
이제 대학 교육 얘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BK21 (BrainKorea 21)을 시작하셨지요?
이해찬
맞아요. 교육부장관이 돼서 보니까 대학 정책에는 관심들이 없더구만. 한국학술진흥재단이 교수들한테 연구비를 지원하는정도였는데 실태조사를 해 보니 평가도 제대로 안 하고 있었어요.
대개 문과는 500만 원, 이과는 천만 원 정도씩 나눠 주는 거야.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싶었어요. IMF를 극복한 우리 사회가 이제 먹거리와 교육을 연계시킬 필요가 있었어요. 산학 협력이 이뤄져야해. 더 크게 보면 산업사회 이후 지식 기반 사회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야 했고.대학 교육은 교원 정년 단축 같은 방식으로 혁신을 할 수가 없어요. 교수들이 서른 넘어서야 입직을 하니까. 30년 정도 일하는거예요. 게다가 대학에서는 교육만 하는 게 아니야. 연구를 하잖아요. 정년 단축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봤어요. 그럼 어떻게 대학 교육을 혁신할 것인가, 이런 고민 속에서 BK21이 도입됐어요. 큰 틀에서 대학원 중심 대학과 일반대학으로 나눠서 특성화하는 거예요. 연구 중심 대학은 학부를 줄이고 대학원을 늘려야 했지. 일반대학은 실용적인 교육을 중심으로 가요. 산학 협력을 강화하고, 전국 대학에 비슷비슷한 과들이 있는데 그러지 말고 각 대학을 특성화하자는 방향이었어요.
이해찬
어떤 사회 수요에 대해서 판단을 잘하고 책임을 지는 거.판단력과 책임감, 이 두 가지를 잘 끌어가는 게 ‘퍼블릭 마인드‘가아닐까 싶어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공무원, 공인으로서 자세도 중요하고, 나한테 관대하고 남한테도 관대한 사람이 있어요. 좋은 사람이지. 근데 이런 사람들은 뭘하지 못해요. 공인은 이러면 안 돼. 남한테는엄한데 나한테는 관대한 사람도 있어요.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야.
반대로 남한테는 관대한데 자기한테 엄한 사람은 도덕주의자라고를 할 수 있을 거예요. 이것도 공인의 자세는 아니라고 봐. 공인의 자세는 남한테도 엄하고 나한테도 엄해야 해요. 그래야 공적인 기강이 서니까요.
심지어 한국에 DJ 노벨상 수상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다는걸 알아. 노벨상을 뭘로 보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요. 우리가어떻게 권위를 지켜 왔겠냐, 추천 과정이나 심사 기준이 얼마나 엄격한 줄 아느냐, 한국 언론이 문제다. 그런 말을 스웨덴 총리에게서 들었지.
DJ 노벨상 수상 당시에 노벨상위원회 베르게 위원장이 특별 해명까지 했잖아요. 노벨상은 로비가 불가능하다, 유일한 로비라면
‘김대중에게 노벨상을 주지 말라‘는 기이한 로비가 있었을 뿐이다.
한국에서 DJ의 노벨상 수상을 반대하는 편지가 엄청나게 날아와서놀랐대요. 발신지가 특정 지역에 편중돼 있었다고 했지.
우리가 얼마나 왜곡된 환경에서 정치를 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나라 밖에서는 DJ의 수상을 반기고 축하하는데…. 조수미성악가는 축하연에 가서 공연을 하겠다고 먼저 연락을 주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런 축하 분위기는 제대로 보도가 안 되고 엉뚱한 논란이 부각됐지.
이해찬 98년에 DJ가 일본을 방문해서 오부치 게이조 총리하고 새
‘로운 한일 관계를 선언했잖아요. 그때 오부치 총리가 식민 지배로한국 국민들에게 손해와 고통을 준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인다면서사과를 했지, 공식 문서로 사과한 게 처음이었는데 그 배경을 좀얘기할 필요가 있어요.
DJ가 대통령이 돼서 방일을 하게 되니까 일본에서는 73년 납치 사건이 부담이 되는 거예요. 자기네 영토에서 납치가 일어났는데 그걸 묵인한 셈이니까. 일본이 DJ한테 사과를 해야지. 근데 DJ가 납치 사건을 문제 삼지 않았어요. 대신에 식민지 강점에 대한사죄를 비공식적으로 요구했지. 그러면서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풀었어요
막겠느냐. 국민들이 선택하게 하되, 우리 문화의 질을 높여야 한다. DJ는 근본이 자유주의자셨어요. 이런 생각이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화정책으로 이어진 거예요. DJ가 일관되게 하신말씀이었어요. 문화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지원은 하지만 간섭을하면 안 된다는 거.
집권 중반기부터 문화 예산이 많이 늘었어요. 그 시기에 박지원, 김한길 문화관광부장관이었지. 예산도 많고 부처도 크고 문화예술 쪽으로 지원을 대폭 늘리면서 한류가 발전하는 기반이 됐어요. DJ가 바라던 게 이뤄진 거야. 우리문화의질을 높여서 국민의선택을 받게 하자. 우리가 일본 문화에 흡수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한류가 일본을 휩쓸고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됐잖아요.
돌이켜 보면 문화의 발전은 민주화랑 같이 왔어요. 정치적 자유가 있어야 문화도 발전하는 거야. 코미디가 정치를 풍자할 수 있고 드라마, 영화의 소재가 다양해지고.
순수하게 IT 분야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었어요. 반면에 제조업 같은 전통산업하고 IT 기술이 결합을 하면 시너지가 생겨. 예를 들어 공장을 정보화하면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잖아요. 다녀와서 DJ에게 보고를 드렸더니 기존 산업에 IT를 어떻게 장착할 것인지 고민을 해 보라고 하시더구만.
포항제철을 만든 사람은 박정희이지만 IT와 결합해서 부가가치를 높인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이라고들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지도자의 비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최민희
박정희 신화가 수십 년간 계속된 이유는 ‘박정희의 산업화가 우리를 먹여 살린다‘는 인식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정보화시대의 한국 사회는 IT 산업이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민의 정부가 그 토대를 만들어서 참여정부까지이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IT 분야에 대한 전략이 별로 없었습니다. IT 산업이 모바일 중심으로 급격하게 바뀌는 중요한 시기였는데요.
이해찬
이명박 정부는 토목, 건설에 몰두했으니까…. 집권하자마자 정보통신부하고 과학기술부를 없앴잖아요. 정통부 업무를 지식경제부 등 여러 부처로 쪼갰지. 박근혜 정부는 뭐, 마인드 자체가없었던 것 같고.
재벌 구조조정과 함께 공기업도 민영화를 시작했잖아요. 포스코, KT, 기업은행 등등. 공기업들을 민영화해서 상장하면 대금이 들어오고 그 돈으로 경기부양을 위해서 필요한 시설을 짓거나SOC(사회간접자본)에 투자를 한 거예요. 그때 주요 기업들이 외국 자본에 넘어갔지. 할 수만 있었다면 제한적 개방을 했어야 하는데 우리한테 방어 능력이 없었고 조건이 완전 개방이었으니 어쩌겠어요.
그러고 나서 소비를 촉진하려고 신용카드 발행을 쉽게 했잖아요. 내가 정책위의장을 할 땐데, 공기업 민영화도 그렇고 신용카드 보급은 다음 정권에 부담을 주겠다 싶었어요. 3~4년 지나서 부채 폭탄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참여정부때 문제가 됐고…. 외환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부작용이 이것저것 많았어요. 그나마 그렇게라도 했기 때문에 IMF를 극복한 것이거든.
나는 정당이라는 걸 제도로 봐요. 게임의 장으로 보지않거든. 삼권분립 체계를 기본으로 하면서 정당, 노조, 관료 사회,
시민사회 등등의 기둥들이 있어야 해요. 그중에서도 정당이 큰 기둥이지.
탈당하시면서 발표한 보도 자료에 대표님의 심경이 드러나더군요. "87년 6월항쟁 이후 정치를 시작했던 평화민주당의 일맥이자 개혁과 진보를 위해 참여했던 열린우리당의 법률적 후신인 신당을 떠나자니 만감이 교차한다"고 하셨습니다.
이해찬 대선에서 지고 나서 안희정이 ‘친노는 폐족(廢族)‘이라는말을 했어요. 내가 아주 화를 냈어. 다시 일어나서 당을 추슬러 갈생각을 해야지, ‘폐족‘이라니. 그리고 그 용어 자체가 얼마나 봉건적인 말이에요?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세력이 그런 말을 쓰면 안되는 거예요.
그런데다 당대표로 손학규가 선출되는 걸 보니까 아이고, 이렇게 해서 당이 끝나는구나 싶었어요. 한나라당 출신 당대표라니. 완전히 좌표를 잃어버린 당이 됐어요. 뭘 할 수가 없었어요. 탈당을하고 총선에도 불출마했지. 정치를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중국으로 갈 생각이었어. 베이징 대학에서 석좌교수를 제안했거든. 한번 가 봤는데 숙소도 잘 지어 놨더구만. 내가 원하는 대로특강을 할 수 있었어요. 한 2년 거기서 강의나 하면서 지내려고 했지.
2012년에는 검찰이 내 친구한테 허위 진술을 강요해서 나를 엮으려고 했어요. 내 친구가 2011년에 저축은행 사건으로 구속이 됐거든. 근데 검찰이 "이해찬한테 2억 원을 줬다고 불라"면서 일주일간 아침마다 불러냈대요. 친구가 끝까지 거부하니까 1억, 5천,
4천으로 내게 줬다고 요구하는 액수를 깎았다는 거야. 마지막에는500만 원까지 내려갔다더구만. 그래도 내 친구가 이해찬한테 돈준 적이 없다고 하니 다른 민주당 의원을 들이대더래요.
더러운 공작질
이해찬
무상급식은 시혜의 느낌을 주거든. 복지는 시혜가 아니고인권에 관련된 기본권이에요. 평등권적이면서 자유권적인 기본권.
기본 복지가 이루어져야 사람으로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어요. 그리고 병역은 국민의 의무이기 때문에 군대갈때 생활과 관련된 모든 걸 국가가 제공해요. 교육도 국민의 의무잖아요. 의무교육 시기에 제공하는 급식은 의무급식이라는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최민희
대선이 끝나고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를 본회의장 앞에서만난 적이 있어요. 제가 물었죠. 언제 이긴다고 생각하셨냐. 황 대표가 그러더군요. 전쟁을 앞두고 장수를 바꾸는 게 아닌데 이해찬대표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 "됐다" 싶었다고요.
모든 대선은 시대정신이 반영되지 않습니까? 돌아보면 2012년대선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명에 간 박정희, 육영수에 대한 한을 푸는 선거였나 싶어 씁쓸합니다.
물론 박정희 향수도 살아있었다고 봐요. 내가 대구사찰에 간적이 있는데 박근혜도 왔었어요. 어르신들이 박근혜를 보고 땅에엎드려서 절을 하더구만. 여왕님을 대하는 것처럼. 박정희에 대한로열티가 박근혜로 이어진 면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졌다고 보기는 힘들어요. 명료한 우리의 메시지가 없었어요. 선거 과정은 실전이 아니라 연습을 하는것처럼 보였고, 단일화도 시너지가 생기는 방식이 아니었잖아요.
냉소적인 단일화랄까. 박근혜 쪽이 잘했다기보다는 우리가 못했던거예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사람들한테는 휴식 공간이 되니까 인공하천이 문제라는 생각을 잘 안 하는데 자연스러운 건 아니에요.
대통령이 돼서는 4대강 사업을 벌이는데 참…. 4대강을 물류 수송에 쓰려면 배가 다녀야 되니까 수심이 깊어야 해요. 수심을 8미터로 만들려고 강바닥을 긁었잖아요. 근데 그렇게 만들어 봐야 경제성도 없어요. 물류비용이 더 들어. 토건족, 건설사들만 배불리는사업이야.
2016년에 한국수자원공사 감사를 해 보니까 4대강 비용이 33조가까이 되더구만. 원래 22조라고 했는데 아니야. 10조가 더 들어가요. 수자원공사가 8조를 떠맡았는데 그게 다 회사채였어요. 그이자 비용은 정부예산으로 지원해 줘요. 거기다가 2015년에 정부가 수자원공사 부채 30%를 갚아 주기로 했어. 이런 비용까지 계산하면 33조쯤 되는 거예요. 수자원공사가 건실한 회사였는데 4대강에 8조를 쏟아부으면서 부실해졌지. 그러니까 빚을 갚으려고 부산에코델타시티 사업* 같은 데 또 투자를 해야 했지.
이해찬
자원외교는 전체 손실 규모를 제대로 한번 조사해야 돼요.
말이 안 돼. 석유공사가 2009년에 인수한 ‘하베스트"만 봐도 얼마나 엉터리야? 부실한 정유 회사를 실사 한 번 없이 4조 넘게 주고인수했잖아요. 그것도 40일인가 만에 덥석 샀어. 그러고는 3년 뒤에 1조 원 넘게 손해 보고 팔아. 이런 의혹투성이 자원 개발 사업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투자나 처분 과정에서 MB 쪽 사람들한테엄청난 돈이 흘러갔다는 의혹도 있었는데 안 밝혀졌지.
인천공항 민영화 시도까지 성공했으면 큰일날 뻔했어요. 형편없는 금액에 싱가포르 자본에 팔려고 그랬잖아요. 반대 여론이워낙 심해서 무산됐지만, 자산평가 금액의 10분의 1도 안 되는 헐값에 넘기려고 했더구만. 알짜 기업은 헐값에 팔고 부실기업은 비싸게 사들이고.
이명박 정부가 딱히 성과를 남긴 것 같지 않아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세계 1위였던 IT 산업이 후퇴한 것은 큰 손실이었고.
문화, 언론 쪽에서도 다 후퇴하잖아. 이런 분야는 정부가 얼마나 탈권위주의적으로 나가느냐가 굉장히 중요해요. 자유로운 분위기를 깨 버리면 좋은 창작물이나올수가없어요. 언론도 제 역할을 못하고, 이명박은 원래 있던 매체들을 장악하고 종편까지 만들었어요. 반면에 우리 쪽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마땅한 매체가 없었어요. 그러니 여론이 왜곡되지.
이해찬
냉전 시기에는 진영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지금은 달라요. 그리고 신냉전체제가 올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봐요.
원래 WTO를 만들 때는 자본과 노동의 이동을 시도했어요. 그런데 한동안 자본만 이동을 했지. 현지 투자로 값싼 노동력을 구매한 거예요. 이런 전형적인 자본 이동의 시대를 거쳐서 노동도 이동하게 됐어요. 이제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 나라 국민한테 총을 쏘는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요. 진영 간에 완벽한 단절이나 폐쇄가 불가능한 상황이에요.
우리가 얼마나 현명하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어요.
그렇지. 이재명 후보는 너무 아까운 후보야. 굉장히 좋은후보였는데…. 정치권에 이 후보처럼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 후보하고 밥 한번 같이 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듣다 보니까내가 참 미안해지더구만. 소년공으로 공장 다닐 때 야학 다닐 시간도 없었다는 거 아니야. 일이 늦게 끝나니까. 그러면서도 한 단계씩 극복해 나간 의지가 놀라워요. 다시 서민들, 노동자들 곁으로돌아와서 정치인으로 성장한 것도 대단하고. 그런 사람을 기득권카르텔이 똘똘 뭉쳐서 공격했지. 윤석열 쪽의 비리 의혹은 증거가나와도 검찰이 수사를 하지 않고, 언론은 외면해 버렸어요. 반면에이 후보는 아무런 증거가 없어도 의혹을 부풀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