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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민님의 서재
  • 진주
  • 장혜령
  • 13,500원 (10%750)
  • 2019-12-27
  • : 1,008


 이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소설이고 에세이이며 시로 이루어진 이야기. 어두운 표지를 가진 이 책에서 말하기와 언어는 혼합되며 확장하고 있다. 소설이라고 쓰여 있지만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만 소설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의문이 든다. 계속해서 바뀌는 서술 방식은 낯설고 혼란스럽다.

 하지만 이 혼란은 책을 읽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책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고 어조는 덤덤하다. 어두운 물속으로 깊이 잠수하는 것처럼 잠잠하다. 중간 중간 들어간 도판들은 소설을 갑자기 현실로 개조하며 시선을 건조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작가의 어린 시절 글과 그림들은 감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책을 덮고 나면 나의 의문과 혼란은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장르가 무슨 소용인가. 소설의 고요한 모습은 바다나 강물에 이는 잔물결에 빛이 반사되는 모습 같다. 그 알알이 반짝이는 모양이 물 위에 떠다니는 진주 같다.

 


 인상적이었던 몇 장면이 있다. 먼저 첫 번째 장에서 어린 화자는 수학을 잘하지만 공집합을 이해할 수 없었다.“존재하되 보이지 않으며 결코 발음될 수 없는 것. 우리는 공집합이고 그것은 모든 것입니다.”(13쪽) 

 어린 작가가 아버지를 이해하려면 일찍 어른스러워져야 했다. 작가의 아버지는 공집합처럼 어린 작가가 “이해할 수 없는 수의 세계”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희생해 감옥까지 갔다 온 아버지는 개인적인 삶을 이제는 살아야했다. 그에게 전부였던 우리는 이제 없고 지극히 개인적인 둘레를 위하여, 자신의 가족을 위한 삶을 살아야했다. 아버지가 좇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한때 같은 목소리를 내었던 동료들도 이제는 가정을 지키고 자신을 지킨다. 그건 곧 평범한 삶이다. 그리고 그 평범한 삶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잊어야한다. 주변의 그 많은 것들을 잊고, 모른척하며 고독을 견뎌야한다.

 그럼에도 ‘혼자 행진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었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을 한 남자의 이야기가 3장에 등장한다.

 


 소설만큼 ‘작가의 말’에도 힘이 들어가 있는 책이었다. 아마 이 책은 작가의 말에서 완성된다. 작가는 말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분명 쉽지 않다고.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진주를 다녀왔다. 열한 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아버지를 만나러 진주로 향하던 그날처럼. 진주를 다녀오고 긴 시간을 거쳐 완성된 이 책을 다시 한 번,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5장의 제목이 이 소설을 간단히 말해주고 있는 듯 보인다. “당신 뒤에 딸도 받아쓰기를 했습니다.”라고.

 단순히 민주화 운동의 영웅이었던 아버지를 위한 소설이 아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되었고, 당신 곁에 있던 어머니와 아내와 딸의 시선으로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아버지, 당신은 한 명이 아니다. 이 개인적인 이야기는 ‘우리’로 나아가 닿는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가르쳐주며 말한다.

“뒤돌아보지 말아라.”

 나도 처음으로 자전거를 배우던 때가 생각난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필요한 것은 뒤돌아보지 않기와 용기. 멈추지 않고 페달을 밟는 일. 그건 미행당하는 아버지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써내려간 작가에도 필요한 것이이었다. 작가는 당신, 아버지를 마주하고 글을 썼다. 작가에게 시대와 아버지를 마주하는 일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테이블의 분위기를 서술하던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테이블은

세계의 끝을 향해 뻗어 있었다

먼바다처럼 막막하고

고요했다.

(86쪽)

 


 이 글을 쓰는 동안 눈이 내렸다. 창밖에서 흰 알갱이가 소리 없이 떨어지는 모습 위로 실내의 둥근 조명이 겹쳐 보였다.

 세상에 진주가 이렇게 많았던가.

 작가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고립의 장소처럼 느껴지는 ‘진주’는 소설 『진주』가 세상에 나오면서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음은 분명하다. 에필로그에서의 말처럼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 우리에게 와 닿았다. 막막하고 고요했던 테이블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당신과 나 사이

들판 같은 책상 위로

캥거루 한 마리가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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