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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고 글쓰는 곳
  • 핑거스미스
  • 세라 워터스
  • 16,920원 (10%940)
  • 2016-03-15
  • : 5,868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이 소설을 각색하여 만들었다는 점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 체로 소설을 읽었다. 어디까지 읽다 보면 이 소설은 반전이 기막히구나, 싶다가 어디까지 읽으면 이 소설은 페미니즘 소설이구나, 싶다가 어디까지 읽으면 이 소설은 시적인 장면으로 가득하구나, 싶다가 어디까지 읽으면 이 소설은 가면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890쪽 분량의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다르게 읽히고 다른 점이 보이는 특별한 소설이었다. 


  책을 상당 부분 읽고 난 뒤에 유튜브에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에 대한 영상을 찾아 봤다. 드라마도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그건 안 봤다. 영화의 결말은 정말 멋졌고, 이런 놀라운 결말을 미리 봤으니 소설을 읽어도 색다르게 놀라울 점은 없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소설과 원작이 완벽하게 같은 결말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니, 정말 바보 같았다. 소설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고 영화도 소설과는 딴판이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결말이 멋졌다는 것. 


  소설의 제목인 "Fingersmith"는 소매치기란 뜻인데 이 소설이 시적인 장면이나 단어로 가득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런 상태로 글을 읽어나가면 제목에 얼마나 많은 뜻이 담겨있는지 머리가 띵하도록 깨닫게 되리라.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신사와 숙녀란 단어가 이 소설에서 얼마나 경멸이 섞인 단어로 쓰였는지도. 나중에는 해당 단어만 봐도 넌덜머리가 날지 모른다. 


  신사와 숙녀의 가면을 자신이 썼든 남이 씌워주었든 그것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민낯은 더럽거나 아니면 지독하게 슬프다. 상류 사회에서 신사의 가면을 쓰고 살았던 릴리 삼촌은 잉크 때문에 항상 혀가 새까만 사람이었다. 이 이미지 또한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 그는 책 속 세상에만 갇혀 사는 헛똑똑이였고(실제로 똑똑하지 않은데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실생활에서 깨우치고 배우려 하지 않는 자였다. 


  그리고 정말 알아야 할 걸 알지 못하는 눈 먼 자였고, 생물학적으로는 그렇게 늙지 않았음에도 정신적으로는 이미 늙어버려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 자였다. 릴리 삼촌이 지배하고 있었던 브라이어 저택은 그의 추악한 꿈에서 결코 깨어날 수 없는 잠든 공간이었다. 영화의 결말이 멋졌다고 말한 이유는 그렇게 잠들어 있기만 할 것 같던 공간이 아름다운 현실로 깨어났기 때문이다. 


  모드가 브라이어 저택에서 숙녀의 가면을 쓰고 지낼 적에 그녀는 나이를 먹지 못하게 단속 당하는 어린 아이에 가까운 처지였다. 여기서 나이를 먹는다는 건 생물학적으로 늙어간다는 의미보다 자아 실현을 위해 왕성한 노력을 하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독립도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모드는 릴리 삼촌 때문에, 조용하고 말 잘 듣는 소녀를 원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자아 실현이니, 독립이니 하는 일을 꿈꾸기가 어려웠다는 말이다. 전족을 하지 않은 비대한 발이나, 코르셋을 입지 않아 가늘지 못한 허리는 어느 시대의 어느 나라에서는 여성에게 있어서 수치였다. 자라거나 커지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건 여성들의 신체에만 그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도 막아야만 한다고 여겼던 점들이 있었다. 이렇게 쓰다 보니 이 소설이 페미니즘을 유독 강조했다고 드러내는 듯한데, 그건 아니다. 가면 뒤에 숨겨져 있었는데 마주해야 할 진실과 진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더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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