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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지
  • 펄 벅
  • 29,700원 (10%1,650)
  • 2009-05-01
  • : 612

  중국 북부 지역에 사는 가난한 농군인 '왕룽'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 변발을 하고 생활을 하던 왕룽이 후에 남쪽 지역으로 갔을 때 그의 머리를 보고 돼지 꼬리와 같다며 놀린 사람들이 있었을 뿐 정확하게 어느 시대인지는 알기가 어렵다. 다만 왕룽이 젊었던 시절에도 남쪽에서는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찌 되었든 소설의 1부인 <대지>에서는 중국의 농촌 풍경이 주요 배경이다.


  중학생 때 처음 이 소설을 접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읽은 책은 1부만 있던 책이었나 보다. 워낙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다시 읽게 되었다. 내 기억 속에서 『대지』는 한 농군이 그야말로 땅에만 붙어서 사는 이야기였는데 다시 읽고 나니 생각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더 많이 다룬 소설이어서 놀랐다. 하긴 땅을 파서 농사만 짓고 사는 이야기였으면 펄 벅이 노벨문학상까지 받기는 어려웠겠다. 


  소설의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대지』는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다. 다른 게 아니라 표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헐리웃에서 펄 벅의 작품을 영화로 만든 적이 있는데 그 영화에서는 중국의 정서를 드러내기보다도 당시 미국인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로 색을 입혔다고 한다. 어쩐지 표지 사진에 있는 왕룽의 부인인 '오란'은 그렇게 추녀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다 헐리웃에서 나온 영화의 한 장면을 표지 사진으로 갖다 쓰게 되었을까. 


  왕룽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오란은 흙과 아주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아무래도 옛 사람들은 현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더욱 흙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도대체 흙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나라에서 예전에는 집 안의 곳곳마다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게 다 흙이나 지푸라기로 집을 지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죽고 나면 대지(자연, 흙)로 돌아가고 썩고 난 뒤에도 몸을 이루던 원자는 분해되지 않고 흩어져서 다른 물질이나 생명체의 일부가 된다는데, 흙과 지푸라기로 집을 지으면 자기 아닌 다른 존재가 깃들어 있을 수도 있다고 여길 만하다. 흙은 그야말로 모든 생명체의 원천이고 또 생명체를 살게 하는 곡식과 채소, 나무 등도 땅에 뿌리를 박고 산다. 땅이 있어야만 생명들은 살 수가 있다. 


  류츠신의 소설 『삼체』에서는 지구인이 삼체 문명에게 끔찍한 공격을 당한다. 그리고 자기가 살던 땅에 발을 붙이고 살기가 어려워지는 내용이 이어진다. 삼체 문명의 '지자'가 지구인에게 모든 인류가 전부 호주 땅으로 넘어가서 살 것을 명령하자 그때부터 인류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그때는 발 붙이고 살 땅은 있었기에 희망이 있었다. 인류에게 중요한 건 다른 무엇보다도 땅이었다. 


  왕룽의 장남은 집안이 부자가 된 이후로 남에게 보이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 집안의 모든 살림을 부자라는 칭호에 맞게 바꾸고 꾸며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왕룽은 그보다도 항상 땅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땅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이요, 아래(땅)를 보는 자세는 겸손함 그 자체다. 왕룽이 겸손한 자세를 평생 일관된 모습으로 유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도 가난했을 적에는 소박하고 겸손했으나 부의 맛을 보고 난 이후에는 허세도 들어가고 애욕에 눈이 멀기도 하고, 하여간에 땅이 아닌 다른 것들에 눈을 여러 번 돌리기도 했다. 그런 모습들이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처한 현실에 따라서 바뀌기 마련이고 그게 바로 삶에 대처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왕룽은 다른 누구보다도 평생 땅을 사랑했다. 


  그에게 자식과 손자들을 안겨준 것은 다 땅 덕분이었다. 왕룽이 젊은 시절, 그러니까 부자가 되기 전에는 흉년이 들면 사람이 굶어 죽어나가고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는 괴소문까지 돌았다. 땅에게서 아무것도 거두어 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였다. 그렇지만 그는 항상 땅을 믿었고 그리하여 돈이 없던 시절에도 땅을 조금씩 사들였다. 처자식과 아버지를 먹여 살리기 위해 남쪽 땅으로 가서 인력거를 끌 때에도 고향의 땅을 잊지 않았다. 


  책의 1부를 다 읽고 책장을 잠시 덮으면서 뒤에 남은 이야기가 아직도 많다는 게 기쁘기보다 걱정이 되었다. 왕룽과 칭서방,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이 땅에서 농사를 짓는 이야기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는데 뒤에는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이야기가 더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 때문에. 하지만 하는 수 없다. 펄 벅이 천 쪽이 넘어가는 소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끝까지 읽어야만 알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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