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에서 '정선'은 고향이 있으나 온통 아픈 기억 뿐인 고향을 가지고 있고, '자흔'은 고아이며 정확한 고향을 모른다. 자흔은 어려서부터 전국 각지를 떠돌면서 살았다. 그녀에게 과연 정 붙일 만한 곳과 사람이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정선의 내면에는 고통의 상처가 너무 깊어서 자흔이 기댈 곳이 없었다. 정선에게 있어서 집은 쉴 틈도 없이 쓸고 닦아야만 하는 곳이고, 자흔에겐 진득하게 붙어있을 정도로 정을 붙일 만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어둠의 사육제」는 냉혹한 서울살이를 하면서 스스로 척박하고 냉정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주인공의 심리를 세심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기가 제일 힘들었다. 지독하게 아픈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자기 집 하나 장만할 꿈을 가지고 있던 '나'는 친한 언니에게서 금전적으로 상당한 손해를 입었고, 인생에게 등을 돌려버림으로써 마음은 한없이 식어 갔다. 그런 그녀가 친척이 사는 아파트에 머물다가 만난 '명환'이란 사내에겐 다리가 한쪽 없었다.
교통사고 때문에 아내와 아이, 그리고 자신의 다리 한쪽을 잃은 사내에겐 나와 달리 집이 있었다. 그것도 피의자가 준 위로금으로 마련한 집이었으며, 피의자의 가족이 사는 곳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있는 집이었다. 그는 피의자와 그의 가족 곁을 맴돌며 그들에게 정신적인 압박을 가했다. 어떤 협박도 없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는 비로소 집과 위로금 따위의 욕망을 모두 버리고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한 뒤 주인공에게 집을 양도하려고 마음 먹는다. 나는 그를 미친놈 취급한다.
집이 없어서 친척 집의 베란다에서 자는 여자와 널찍한 집이 있으나 사랑하는 가족이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 이 소설에서 명환은 요즘 젊은이들이 잘 쓰지 않는 말투를 쓴다. 말 끝마다 '~했소.'라는 그의 말은 쓸쓸함과 씁쓸함을 더욱 짙게 만드는 분위기를 풍겼다. 「야간열차」에서 '동걸'은 무거운 책임감을 덮어 씌우는 집에서 탈출할 꿈을 은밀히 꾸며 열심히 생활하는 자다. 그에겐 생계를 책임져야 할 동생들과 어머니가 있다.
그와 얼굴이 똑 닮은 동생인 '동주'는 학창 시절 돈을 벌러 나섰다가 몸을 크게 다쳐 장애를 입었다. 동주는 한 자리에 누워서 일어설 수도 없는 몸이었다. 동걸에게는 언제든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나, '나'에게는 떠나는 일과 머무르는 일이 매한가지였다.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에서 멀리 벗어나거나 전혀 떠오르지 않는 곳으로 떠났을 때 불면증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있다. '나'는 형수와 함께 머무는 집이 아닌 동걸의 집에서 비로소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동걸은 아직 떠나지 못했으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질주」에는 이런 문장이 실렸다. <저 병동의 팔층에 어머니가 누워 있으리라. 인규는 고개를 떨구고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인생은 그의 상처 난 손바닥 안에 있었다. 그의 운명도 그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본문 225쪽) 나는 미신이나 사주 팔자, 민간신앙, 풍수지리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어쩌다 한 번씩 손금을 들여다보면서 그리고 인터넷에 나와 있던 손금에 따른 사람의 성향이나 운세 등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 내가 정말 그렇게 될까?'하고 질문하기도 한다. 안 믿는다고 여기면서도 그쪽에 대한 정보를 들을 때 잠시 귀가 솔깃해진다. 내가 믿든, 안 믿든 그런 것들이 사람들의 생활 깊숙이 침투하여 떠도는 것 같다. 「진달래 능선」에서 '정환'에게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툭하면 학대를 하는 아버지가 있는 집은 집이 아니었고, 딸아이가 심장병을 앓다가 일찍 세상을 뜨고 남은 처자식마저 떠나가 버린 뒤의 집은 '황씨'에게 있어서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집 아닌 집들이 있다. 그래서 집을 가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집을 그리워할 수 있다. 마지막에 실린 「붉은 닻」은 한강 소설가의 데뷔작이다. '동식'의 아버지도 동생인 '동영'도 집안에 가만히 붙어 앉아 있지를 못하고 나다녔다. 아버지는 술에 절어 집에 들어오곤 했다. 동식은 아버지의 혼령이라도 찾아올 것만 같은 집(문방구 안쪽)과 동네를 떠나길 간절히 원했으나, 동영이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 과연 그 일이 가능할 것인가, 자문하게 된다.
동식은 아버지, 동생과는 다르게 귀소 본능이 유난히 깊었는데, 황혼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만 봐도 불안할 정도였다. 핏줄이면서도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 속에 전혀 다른 꿈을 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동식의 집. 마음 붙일 구석이 없는 공간, 잠을 편히 잘 수 없는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지독하게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