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에서 뻗어 나온
다채로운 이야기들
얼음 그 자체보다는 얼음의 속성에서 착안한 발상이 흥미롭다.
서평단으로 선정되기 이전에 출간된다는 소식을 보았을 때부터 이 책에 흥미가 있었다.
(실제로 5월 SF 독서모임을 위한 선정도서 투표 목록에도 끼워 넣기도 했다)
SF 소설에 관심 있다면 다들 들어봤을 법한 익숙한 이름들이라 어느
정도 재미를 보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위원으로 참여하신 SF 평론가 심완선 님의 저서 및 인터뷰집이
좋았던 지라 다양한 작품들이 적절하게 잘 구성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다른 편집위원인 문지혁 작가님이 〈고잉 홈〉에서 색다른 스타일의 SF 소설을
선보인 적이 있어 이미 알려진 작가들이지만 그들의 새로운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겠다는 기대도 품었다.
나에게는 믿고 보는 맛집의 신메뉴 얼음찌개(?)와도 같은 책이었다.
아는 맛집에서 내놓은 아는 맛인 듯하면서도 새로운 맛, 김치찌개 맛집의 얼음찌개는
의외인 듯 아닌 듯 예상보다 더 맛있었다.
얼음이 테마이나 직접적으로 얼음을 다루기보다는 얼음 혹은 얼어붙음에서 착안한 이야기들이었고, 사실 그럴 것 같았기에 이 점에 대해서는 놀라진 않았다.
허나 같은 ‘얼어붙는다’에서
출발한 이야기라 하여도 작가마다 풀어내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었다.
사실 얼음이 아니어도 상관없지 않은가 싶기도, SF로 보기 애매하다
싶기도 하였지만 모든 작품이 제각각 매력적이었다.
〈얼어붙은 이야기〉는 가상의 세계에 현실의 이야기가 가미된 부분이 눈에 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자신이 소설 속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이야기가 더러 있어 왔지만, 이 작품은 현실
배경을 섞고 SF와 더불어 여러 장르를 버무려 기존의 작품들과 차별적이다. 이 작품이 아마 여섯 작품 중에 가장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까. 얼음이
빠져도 상관없을 작품이라고도 느꼈다. 개인적으로는 ‘제6조사실’ 이야기를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르에 강한 작가는 다른 장르도 잘 쓴다는 것으로 작가님 미스터리 써 보실 의향은 없으신 지.
〈채빙〉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감상은 ‘역시 구병모’였다. 일단 잘 읽혔고, 얼어붙은
세상이 아닌 얼음이 녹아 귀하게 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환경 파괴로 인해
변해버린 디스토피아 세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많으나, 이처럼 파괴된 환경 탓에 원시의 생활로 돌아간다는
설정은 보기 드물다. 우연이 만들어낸 ‘나’의 모습을 보고 여러 오해를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흥미롭다.
〈얼음을 씹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은 본모습을 드러낸다. 남편에 이어 딸마저
잃어버린 ‘나’가 애처롭지만 다른 이들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궁지에 몰린 가난한 이의 결말이 안타깝다. 전체적으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라서 평소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계속 읽게 만드는 몰입감 높은 작품이었다. 다 읽고 나서 제목을
보니 더욱 기분이 묘했다. 누구도 욕할 수 없는 현실이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귓속의 세입자〉 이 역시 얼음이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던 소설. 얼음 땡! 하듯이 순간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괴생물과의 이상한 동거(?) 이야기인데, 큰 사건은 없으나 함께 하며 점차 변해가는 해빈을 지켜보는 일이 소소하게 재미있었다. 약간 회사 PTSD가 오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만.
〈차가운 파수꾼〉 작가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아, 이거 연여름’할 듯한 작품이었다.
연여름 작가를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 보길 추천한다. 기존에 읽었던 연여름 작가의 작품보다
더 마음에 들었던 작품. 작가 특유의 분위기도 좋았고 등장인물이 모두 매력 있었다. 녹아내리는 세상에서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가는 기울어가지만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이들의 모습은 눈부시다. 얼리는 능력을 가진 파수꾼의 이름이 ‘선샤인’인데, 이름이 역설적이면서도 참으로 잘 어울린다.
〈운조를
위한〉 기술 발전 속에서 소외되는 가치. 자신의 삶에서 회환을 느끼던 운조는 어느 날 우연히 미래로
보내지고 그 안에서 자신이 잃어버리던 가치를 되찾는다. 당연히 해야 될 일이라는 명목으로 인위적으로
생명을 조작하던 운조는 이상한 외형을 한 존재에게서 오히려 공감을 느낀다. 이미 깨달아버린 운조는 이제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