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종말
‘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또 하나의 불안이 추가되었다. ‘지금도 살기 힘든데, 또 무슨 변화가 내 삶을 덮쳐 힘들게 할까?’ 그런 불안 심리 때문에 요즈음 서점가에서는 ‘4’자가 붙은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다. 한편, 교육계에서도 나름 자극을 받은 것인지 공교육 교과과정에 ‘코딩 교육’을 추가하겠다고 나섰다. 결국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 사회가 보이는 반응이란 “새로운 지식, 스펙을 더 익히자”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이상하게도 세월이 흐를수록 ‘이만하면’ 먹고 살 길이 탄탄할 것 같았던 길 위의 사람들이 취업난 속에서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체감하는 ‘4차 산업혁명’이란 ‘혁명’이 아니라 망망대해에서 만나는 또 하나의 파도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혁명적 변화 앞에서 우리가 진정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을 방해한다.
‘커네빈 프레임워크’는 인과 관계에 따른 문제 상황을 묘사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분류체계인데, 이 모델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문제를 4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복잡성 / 난해성 / 혼돈/ 단순성. 우리가 지금까지 직장에서 다루던 문제들의 대부분은 ‘단순’하거나 ‘난해’한 일에 속한다. ‘단순한 일’은 매뉴얼대로만 하면 해결되는 일로서 저임금 노동자를 사용하고, ‘난해한 일’은 분석과 조사를 통해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전문 지식을 통하여 일을 해결하는 고임금 고학력자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즉, 고임금을 얻기 위해서 ‘전문적’ 자격과 학위를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탄탄한 인생 계획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하면서 문제의 양상은 혼돈, 복잡의 성격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복잡하고 혼돈스러운 문제의 해결은 매뉴얼과 전문 지식이 아닌,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비효율을 일으키는 ‘제약요인’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를 ‘앙트프레너’ 즉 ‘기업가 정신’이라고 부른다.
즉 경제 시스템이 변화하면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희소자원은 ‘이력’과 ‘스펙’이 아니라 ‘기업가 정신’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의 분석에 동의한다면, 이제 문제는 이 기업가 정신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로 바뀐다.
첫 번째, 인간의 동물적인 방어기제, ‘손실 회피 심리’를 초월하는 것이다. 즉, 불안정을 거부하지 말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매일이 안정되고 변화 없는 일상처럼 느껴지더라도, 그 이면에는 항상 유동하는 변화가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다만 그 변화 정도가 축적되어 나를 덮치기 전까지는 인식을 거부하고 있을 뿐. 따라서 안정에만 매달려 변화를 거부하다가 그 누적되어 감당할 수 없는 가변성을 맞이하느니 오히려 그때그때의 작은 변화에 적응하고 피드백을 받아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린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 새로운 전자기기 사용법을 습득하는 방법이 그러하다. 오히려 어른들이 이를 너무 딱딱하고 고지식하게 학습하려하는 것이다.
두 번째,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의 추상성 때문에 많은 오해가 있지만, 여기서는 ‘설계된 것에서 선택’하는 소비적이고 허용된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지를 만드는 자기결정적인 자유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런 자유는 인터넷과 자유 플랫폼 시대를 이용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준다. 지금은 누구나 저비용으로 자기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음악을 생산-유통하는 인터넷 음악가들, 틈새시장을 파고드는 어플리케이션 제작자들, 킥스타터를 이용하여 창작물을 만들어 파는 작은 공방들. 큰 회사의 부속품이 되어 정해진 업무를 하고, 자신의 창조적 발상을 현실화하려면 상부로 기획안부터 통과시켜야만 했던 과거와는 엄연히 다른 모습이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 저비용, 적은 시간 투자로 창작물을 널리 알리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 가능한 시대이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에 대한 치열한 고민 끝에 나름의 해답을 찾았다면, 형식적인 단계를 밟지 않아도 세상에 자기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더 좋은 것은 이러한 방식이 ‘직업’이라는 틀에서 하는 일보다 더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그 일에 내 인생을 올인 하지 않고 취미나 부업 정도로 시작해도 성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노동은 ‘하기 싫은 일’도 임금을 받기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사람은 그 일에 몰입할 수 있게 되며, 마주하는 위험과 문제들을 즐기고, 관련 지식을 능동적으로 익히기까지 한다. 음악을 정말 사랑하는 뮤지션이 내놓은 음악을 최고급 인공지능이 만든 음악보다 선호하고 마음이 움직이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그 뮤지션이 음악 만드는 것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노동이 기계에 비해 비효율적이었던 이유도 그 일들이 대부분 단순 알고리즘의 ‘하기 싫은 일’이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에 맞게 ‘개인이 어떻게 적응하면 좋을까’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러나 개인 못지않게 사회시스템도 발 맞춰 변화해야한다. 아니 오히려 사회시스템의 발빠르고 올바른 변화가 개개인의 변화를 서포트 해줄 수 있어야 한다. 먼저, 개개인의 자유로운 창조 작업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복지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다. 부자에게서 돈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준다는 단순 인과적 사고가 아닌, ‘사회 시스템의 공동구매’개념으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창조적인 작업도 생리적인 기반이 만족되어야 가능하다. 아무리 음악 하는 것이 좋다고 해도, 먹고 살기가 요원하면 섣불리 음악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작은 창조자’들에게 사회 시스템이 ‘가치 투자’하는 형식으로서의 복지가 필요하다. 뜬 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지도 모르지만 ‘워랜 버핏’이 투자하여 엄청난 수익을 얻는 바로 그 방법이다. 두 번째, 교육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아직도 공교육 시스템은 과거의 ‘단순/난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적자원’을 생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별 교사들과 교육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문제해결력과 창조적 사고를 강조하도록 어느 정도 개선은 되었으나, 국가가 교육과정을 만들고 이에 따라 교육하기를 강요하는 현 시스템 상에서 아이들이 ‘앙트프레너 정신’을 임계점 이상으로 끌어올리기는 요원하다. 가장 창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공간이어야 할 교육의 장이 가장 강력한 관료제에 묶여있기에, 교사들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라는 공간은 달라지지 않는다. 관료제는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학교는 산업혁명기의 죽은 지식과 사고를 키워내는 공간이다. ‘앙트프레너’로 가득한 미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국가 통제의 관료제적 학교를 탈피하여, 새로운 시도와 아이디어를 가지고 아이들에게 몰입하는 교사를 양성하고 이들이 자유롭게 교육할 수 있도록 교육 제도의 전면적인 개편이 필수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