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H·M이 남기고 간 마지막 내러티브>
-『환자 H·M』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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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지만, 내가 가장 공감하는 것은 매킨타이어가 이야기 한, “인간은 스토리텔링을 하는 존재다.”라는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과거의 사실들을 엮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분명 이야기 속에 살고, 그 이야기를 기록해나간다. 그런데 우리가 만드는 인생이란 이야기책에는 많은 오탈자와 함께 덩그라니 빈 페이지로 남아있는 공백들이 수두룩하다. 키워드나 단편적인 지식으로는 아는 내용이지만, 그것을 알게 된 맥락 또는 그 지식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는 경우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많은 지식이나 경험은 이야기-맥락과 단절된 단순한 사실들, 즉 ‘의미기억’으로 축약되곤 한다. 의미기억은 우리 머릿속 백과사전으로 비유할 수 있다. 반면,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생생한 경험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자서전적인 기억은 ‘일화기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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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을 한다는 것은 ‘의미기억’과 ‘일화기억’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우리 정신 속에 널려있는 단절된 사실들을 끌어 모아, 그들의 맥락이나 기원을 서로 연결 지어 생명력이 넘치는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는 것은 곧 주체성을 형성하고 ‘나’라는 존재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런 맥락에서 결국 삶이란 응축된 기억-스토리(Storage)이며, 삶의 의미란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가치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나의 인생’이라는 내러티브-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 존재는 대상화되고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역사를 망각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닌 대상, 인적자원-상품이 된다. 바로 여기, 헨리 구스타브 몰래슨, 통칭 “환자H·M”으로 알려진 사람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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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는 어렸을 적 자전거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 평생 간질발작 증세로 고통 받았다. 그의 인지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무작위로 찾아오는 발작으로 사회생활이 불가능했다. 세월이 흐르며 발작 빈도수가 늘어나는 등 병세로 인한 일상생활의 어려움이 점점 커지자, 그의 주치의는 효과가 없는 지겨운 약물치료가 아니라 ‘실험적’인 방법을 시도한다면 치료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그를 설득했다. Lobotomy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뇌엽절제술이 그것이다. 두개골을 열어 ‘문제를 일으키는’ 뇌의 한 부분을 떼어내는 수술이다. 그러나 수술을 시작하고 헨리의 두개골을 열었을 때, 그는 떼어내야 할 ‘망가진’표적 지역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신중한 의사였다면 지금으로서는, 그리고 현재 의학계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수술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이야기해야 했다. 적어도 실험적인 시도를 위해, 좌반구나 우반구 중 어느 한 부분을 수술한 뒤 경과를 지켜보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학적 지식에 목마른 연구자였던 스코빌은 헨리의 내측측두엽 전부를 빨아냈다. 양쪽 내측측두엽에 구체적인 표적을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양쪽을 다 파괴해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환자에게는 가장 위험성이 큰 도박인 동시에, 의사이자 연구자로서의 스코빌에게는 가장 이득이 큰 행위였다. 수술대 위에 오른 환자는 그렇게 의사의 소견에 따라 뇌과학계에서 가장 귀중한 실험체, “환자H·M”으로 만들어졌다. 그 대가로, 환자 H·M은 새로운 기억을 기록하고 만드는 능력을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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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또는 실패한 수술의 결과인 환자가 왜 뇌과학계의 보물이 된 것일까? 그것은 그의 존재가 뇌과학계에 둘도 없을 ‘가장 깨끗한 변인통제 대조군’’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까지 누적된 뇌에 관한 데이터들은 전부 ‘망가진 뇌 기관’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것뿐이었다. 망가진 것과 온전한 것을 대조하여 뇌의 각 부분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뇌과학의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과학적 엄밀성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뇌엽절제술 환자에게서 의미 있는 데이터를 뽑아낸다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정상 환자’의 데이터에 지나지 않았다. 변인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고, 대조군이 명확하지 않은 실험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데이터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이 대다수의 ‘온전한 일반인’에게도 진리라는 것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헨리는 간질 외에는 어떠한 정신 질환도 없는 ‘일반인’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를 대조군으로 삼아 뇌에 관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면, 과학적으로 엄밀한 지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엄밀하고 정확한 지식과 인류의 진보라는 이름아래, 핸리 몰래슨은 그의 이름과 인생을 빨려버리고, 환자 H.M으로 남은 것이다 살아 숨 쉬는 이 완벽한 실험대상은 과학자들에게 인간 기억에 대한 신경학적 기초를 탐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로제타 스톤같은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수술 후 수백번의 뇌실험과 임상 테스트로 여생을 보냈다. 어느 하나 기억에 담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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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비극은 우리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것이 한 때의 감상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우리는 그 연민의 너머, 우리가 진정으로 고민해봐야 할 문제의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는 작업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매커니즘을 파헤쳐보아야 한다는 문제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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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의 자료에 따르면, 헨리는 상냥하고 온순하며 순수한 존재로 묘사된다. 유순하고 수동적이고 참을성이 많은 완벽한 실험대상. 그가 인간미 없는 애완동물처럼 여겨지게 된 이유는 일차적으로, 편도체가 제거된 동물들이 흔히 보이는 경향성과 마찬가지로 그가 감정과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MIT 랩에서 실질적으로 보호자 역할을 했던 ‘수전 코킨’박사의 태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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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의 수전 코킨 박사는 몰래슨을 깊이 연구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코킨은 몰래슨에 대해 쓴 책을 디트리치보다 먼저 내기 위해 그와 경쟁했다. 본 책의 저자는 “코킨은 몰래슨에 대한 정보를 숨기거나 윤리적 문제가 있는 실험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코킨은 책을 먼저 냈다. 코킨의 책은 국내에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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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를 관리하고 보호한 코킨의 열정에는 양면성이 있다. 분명 그는 헨리가 무분별하게 언론 및 연구자들에 노출되어 시달리는 것을 막고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가진 학계에서의 권위는 순전히 ‘중요한 인간 연구재료를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권’에서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헨리라는 복덩이 자원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 강한 소유욕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핸리를 대상으로 하는 그 어떠한 연구도 그에게서 환자 H·M에 대한 ’사용권‘을 허락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가 가진 ’독점권‘이 인정되어 헨리의 생전 모든 기록물, 헨리를 대상으로 한 모든 실험 자료가 그의 소유였으며, 심지어는 핸리의 사후 그의 ’뇌 조직‘과 헨리의 모든 뇌 절편을 데이터화 하여 뉴런 지도를 그려낸 ’Brain-observatory 프로젝트의 데이터‘ 또한 그의 ’독점적 소유물‘이 되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자 헨리와 관련한 모든 자료를 파기하고 자신의 논문만을 남기겠다는 선언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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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를 담당했던 연구자 수전 코킨의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 우리의 평범한 이웃을 “환자H·M”으로 만드는 매커니즘은 ’상대를 대상화 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한 내러티브의 단절‘이다.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없는 핸리 구스타브 몰래슨이라는 한 인간은 ’환자 H·M’이라는 프로젝트로 대상화되어 인격이 말살된다. 수전 코킨은 핸리 몰래슨을 철저히 대상화하였고 자신의 소유물로 여겼다. 수전 코킨은 헨리의 모든 기록물, 그의 건강, 그의 경제력을 보호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도적이거나 공동체주의적인 것의 소산이 아닌, “냉장고에 음식을 안전하고 오래 보관”하려는 의도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렇다. 헨리 구스타브 몰래슨이 수술대 위에서 물리적으로 “환자 H·M”이 된 것, 그리고 평생 “환자 H·M”으로 소유되고 끝내는 죽음조차도 해방이 될 수 없었던 이 모든 비극의 중심에는 그를 철저히 대상화하고 타자화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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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노예제도가 성행했던 시대에도, 노예들에게 사랑을 할 자유는 있었다. 심지어는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해방을 쟁취하는 역사도 있었다. 그러나 고도로 문명화 된 (혹은 세련된 지배의)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노예들은 일말의 사랑, 자유의 가능성도 말살된 존재들이다. 헨리에게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느냐, 그 때의 이야기를 해보라는 연구자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모르겠어요, 생각이 안 나요” 이후에 이어지는 그의 독백은 밑도 끝도 없이 세상에 던져져버린, 고독하고 처절한 실존주의적 인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하루하루가 새롭게 시작한다. 내가 어떤 기쁨, 어떤 슬픔을 겪었는지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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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주, 한 해, 그 모든 시간이 흘러가면서 우리는 기억이라는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 흔적이 쌓이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 꼬이고,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헨리는 현재를 붙잡아두지 못한다. 그는 더 이상 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고치지 못한다. 그는 과학과 문명의 이름아래 철저히 ‘노예’로 살았으며, 영원히 해방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를 의학계, 뇌과학계의 영웅으로 대접하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그는 자신의 의지로 영웅적 헌신을 하려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대상’으로 살았고, 그렇게 삶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을 타자화한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이야기’를 잃었고 주체성을 잃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지금까지 일궈왔던 이야기까지 모두 빼앗긴 ‘절대적 타자’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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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H·M」은 끝내 자신의 내러티브를 남기지 못한 헨리에 대한 기록이자, 그를 H·M으로 만들었던 스코빌 박사, 그의 손자가 써내려간 반성과 고발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의학계가 은폐해 버렸던 인간 ‘헨리 몰래슨’의 이야기를 추적하고, 헨리를 대신하여 그 이야기들을 짜내어준다. 염려와는 달리 그의 이야기를 어림짐작하여 꾸며내는 일은 없었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헨리(타자)와 자신 사이의 공백은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다리를 놓아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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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채택한 방식처럼 우리가 그를 추모하는 방법은 그를 영웅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의 내러티브를 우리의 이야기로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 2의 H·M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선, 단순히 그의 이야기만을 특수한 사례로 받아들여 금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저마다의 사람들이 써내려가는 내러티브를 존중하고, 함께 나누는 ‘건강한 공론장’을 만드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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