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이도 준’
일본에서 한자와 나오키(2013 TBS 드라마, 최종화 간사이지구 시청률 최고 45.5% 기록) 원작 소설로 유명한 작가이지요. 2019년 이전에는 ‘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 ‘하늘을 나는 타이어’ 등 단 몇 권의 책으로만 우리나라에서 접해볼 수 있었지만 이 두 권은 현재 절판된 상태였지요. 그런데 작년 6월을 기점으로 근 9년 만에 이케이도 준의 소설을 우리말로 만나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 1권 ~ 3권) 그리고 올 1월,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일곱 개의 회의’가 한글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토록 유명한 일본 소설 작가의 책이 왜 우리나라에선 번역이 되지 않고 있는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 들었습니다만 작년부터 그의 소설이 계속 우리말로 번역 출간되고 있기에 독자로서 상당히 기쁘고, 기대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책 뒤 표지를 장식하는 띠지의 문구처럼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단숨에 읽되, 자신의 이야기 같다고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대목은 더욱 즐겨주시길.” 이라는 작가 인터뷰 대목처럼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물론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한글 제목 : 내부고발자들:월급쟁이의 전쟁, 2020년 1월 8일 개봉)도 우리나라에서 개봉됐지만,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한 번 책을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멈추기 힘든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가히 일본 최고의 스토리텔러 & 페이지 터너(책장 넘기기가 바쁠 정도로 흥미진진한 책)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대기업 소닉의 자회사이자 중견기업인 도쿄겐덴에서 벌어진 비뚤어지고 잘못된 기업 윤리 의식이 만들어 낸 부품(나사) 원가 후려치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영업 실적 강요 및 하달식 구조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부정과 군상을 소설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이전 소설 ‘하늘을 나는 타이어’ 에서도 보이고 있는 중소기업을 향한 대기업의 횡포 그리고 그 불합리하고 온전치 못한 갑과 을의 경쟁 구도에서 흥망성쇠의 운명 가도를 달리고 있는 하청업체들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스토리는 자영업과 회사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 제가 보기에도 한숨과 탄식, 안타까움이 빚어지는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도 했는데요. 기업과 그 기업의 부품 역할을 감당하는 구성원들이 오로지 성장을 목표로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운명 공동체로서 부정을 항거하지 못하고 그 부정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가담하는 모습들이 소설 속 여기저기에서 나타납니다.
“출세하려 하고 회사나 상사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하니까 괴로운 거지. 월급쟁이의 삶은 한 가지가 아니야. 여러 가지 삶의 방식이 있는 게 좋지. 출세라는 인센티브를 외면해버리면 이렇게 편안한 장사도 없지.” 도쿄겐덴의 영업 1과 만년 계장 핫카구의 말 속에서 조직사회의 구성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핫카쿠라는 캐릭터가 한편으론 한없이 부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쓰면서도 달콤하고 한 번 빠지게 되면 헤어나올 수 없는 중독성 강한 승진과 출세라는 강력한 프레임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일이란 말이지, 돈을 버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거야. 사람들이 기뻐하는 얼굴을 부면 즐겁거든. 그렇게 하면 돈은 나중에 따라와. 손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장사는 망해.” 고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행위, 고객을 배신하는 행위는 결국 자기 목을 조르게 된다고 말한 도쿄겐덴 부사장 무라니시 교스케의 말에서 저는 제대로 된 기업윤리 의식을 가진 경영자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수익 지상주의와 기업의 목표치 달성에 급급해서 원래의 잊어버린 그 장사의 의미를 상실한 채 하청기업의 목을 (원가 절감) 경합이라는 단어로 죄고 누르는 기업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영업 1과 계장 야스미 다미오(핫카구)가 과장 사카도 노부히코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하면서 예상치 못한 대기 발령 조치를 받은 사카도 노부히코의 이면에 숨겨진 인사 배경을 통해 낱낱이 드러나는 중견기업 도쿄겐덴의 추악함을 이 소설을 통해 충분히 느껴보시길 추천합니다.
겉치레의 번영인가, 진실한 청빈인가. (나사) 강도 조작을 눈치챘을 때 핫카쿠는 후자를 선택했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어떤 길에도 미래를 열어줄 문은 분명 있을 테니까.
불공정과 부조리, 양심과 어긋나며 반대의 길을 가는 썩어 문드러져 가는 속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승진과 출세 가도를 달리는 패망에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는 브레이크 없는 겉치레의 번영이 상당히 유혹적으로 느껴질 때가 가끔 있지만, 저는 만년 계장으로 때론 다른 구성원들에게 민폐처럼 느껴지는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조직의 부정과 비리에 눈감거나 편승하지 않고, 진실한 청빈으로 살아가는 핫카쿠가 더 멋있는 인생처럼 느껴집니다. 저 또한 그런 모습을 닮아가야겠지만, 현실 세계에선 막상 용기가 잘 나지 않네요. 저 또한 거대한 기어 부품에 맞물려 더 열심히 뛰며 움직여야 하는 작은 부품에 지나지 않는 구성품에 불과한 것뿐일까요?
이케이도 준의 다음 작품이 또 기대됩니다. ‘하늘을 나는 타이어’에 이어서 역시 이케이도 준은 기업과 경제, 금융 소설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출판사 리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케이도 준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거침없는 ‘속도감’과 미야베 미유키의 통렬한 ‘사회적 시선’을 한데 지닌 작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 책은 출판사 비채에서 제공해 주신 책으로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