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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아무리 작은 집단이라도 그곳에 많은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 테이블에는 최근 대학을 졸업한 젊은 여성도 있었는데, 중미의 촌락민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간호학교에 막 입학한 이였다. 그녀가 부러웠다. 사회에 대한 기여가 너무 간접적이고 불확실한, 글을 쓰거나 가르치고 법을 업으로 삼고 설교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나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이들-목수, 간호사, 농민, 통학버스 운전사, 어머니-에 관하여 생각했다. 자기 손으로 무엇이든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빗자루 하나라도 만들고 싶다는 평생의 바램에 관한 시를 쓴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나는 떠올렸다.(13)

교수가 되었을 때 나는 도저히 내 경험을 교실 바깥에만 놔둘 수 없었다. 가끔씩 나는 왜 그토록 많은 선생들이 1년을 학생들과 보내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종류의 삶을 살아왔는지, 자신의 사고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무엇을 신봉하는지, 또 자신 스스로나 학생, 세계를 위해 무엇을 원하는지를 결코 밝히지 않는지 궁금해했다. 그렇게 감춘다는 사실 자체가 무언가 끔찍한 것-문학, 역사, 철학, 정치학, 예술 등의 연구를 자기 자신의 삶과 옳고 그름에 대한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의 확신과 분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15)

나는 언제나 전통적인 교육의 수호자들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교육이라 함은 단지 새로운 세대로 하여금 낡은 질서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도록 준비시키는 것일 뿐, 그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15)

사람들은 경험이 풍부하다. 그들은 변화를 바라지만 무력하고 고독하다고 느끼며, 다른 것들보다 웃자란 잔디 잎사귀가 되어 잘려나가길 원치 않는다. 다른 누군가가 첫 번째나 두 번째로 움직여 신호를 보내길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어떤 시기에서는, 대담한 사람들이 나타나 위험을 무릎쓰고 첫 번째로 움직이고 다른 이들이 그들이 잘려나가지 않도록 신속하게 뒤따르게 된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그러한 첫 번째 움직임을 만들 수도 있다.(19)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중 머리말 청중과의 대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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