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소설은 거의 읽어본 적이 없다. 돈 카밀로 시리즈 정도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탈리아인이긴 하지만 국가 정체성은 자취조차 느낄 수 없는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을 포함해도 몇 권 되지 않는다.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한다는 신념 아래 자기 신분을 감추고 익명으로 글을 쓰며,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엘레나 페란테의 대표작 '나폴리 4부작'을 읽었다. 익숙하지 않은 지명과 낯선 이름들로 초반에는 진도가 나가는데 좀 힘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흡입력과 감정의 진솔함이 이런 어려움을 딛고 총 2,300페이지가 넘는 4권을 읽게 한 힘이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나폴리 외곽의 빈민가에서 자란 두 여인의 60년에 걸친 우정, 사랑, 배신 등을 다룬 이야기. 작가로 지식인으로 명성을 얻은 엘레나 그레코가 갑자기 사라진 친구 릴라를 그리워하며 그녀와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엘레나는 지적으로나 성적 매력으로나 평생 열등감을 느껴온 ...릴라를 향해 자신의 평생에 걸친 고통과 혼돈을 털어 놓는다.
이 소설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른 주인공의 운명의 변화와 가치관의 충돌, 성장을 피해가지 않는다. 소설의 도입부인 2차 대전 직후부터 좌파와 우파의 극렬한 대립, 68운동, 페미니즘과 테러리즘의 영향, 80년대 이탈리아를 휩쓴 마니풀리테 운동을 거쳐 세계화의 한 가운데서 혼란이 극대화된 21세기 초까지 이탈리아 사회를 그대로 관통한다. 대하소설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소설을 읽으며 이탈리아의 현대사를 따라가는 재미도 못지 않다.
자라면서 내게도 열등감을 안겨줬지만 온통 매력이 넘치던 친구들이 있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엘레나 역시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대학을 나오고, 책을 써서 유명한 작가가 돼 명문 집안의 아들과 결혼하는 등 주변 친구들에겐 범접할 수 없는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선 고향 친구들에 대한 우월감 못지 않게 뿌리 깊은 열등감이 자리 잡는다. 동네가 돌아가는 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사람들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법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리석게도 못 된 남자에 이끌려 가정을 박차고 나오지만 세 딸도 자란 뒤 결국 그녀를 떠나고 만다. 60년이 지나 그녀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