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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바람님의 서재
  •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 정이현
  • 12,600원 (10%700)
  • 2018-09-25
  • : 1,203

어느덧 중견의 반열로 들어가게 된 정이현 작가. 평온해 보이는 중산층의 일상 이면에 자리잡은 불안감, 위선, 희망 없는 허무함 등을 문장으로 끄집어내온 그녀의 새 소설. 작은 판형에 150페이지 남짓한 분량이라 장편보다는 중편소설이 맞다.

재건축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1기 신도시에서 약사로 살아가는 세영과 사춘기의 까탈함도 없이 묵묵히 공부에 열중하는 중2인 딸 도우, 동해안의 낡은 호텔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뒤 대학강사를 접고 호텔 경영에 뛰어든 남편 무원.


40대 중반의 세영은 생일날 아침 자살을 꿈꾸며 잠자리에서 누워 있을 정도로 삶에 애착이 없다.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훼손된 남편과의 관계를 되살릴 수 있다는 헛된 희망도 없으며 한 달에 한두번 밖에 집에 들리지 않고 용건만 간단히 나누는 남편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다.

동갑인 남편 무원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았지만 낡아빠져버린 더이상 사업이 잘 될 가망이 없는 호텔에 머문다. 가족이나 학계에서 관계맺은 이들과 단절된 혼자만의 외로운 생활을 자청해 현실에서는 고립됐지만 인터넷 카페에서는 아내의 직업을 사칭해 여약사처럼 활발하게 글을 올리고 댓글을 단다. 그러다 자신을 스토킹하던 카페회원에게 신분이 발각되자 전전긍긍하며 혼란에 빠진다.


딸 도우의 학부모위원회 부위원장인 세영은 도우의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던 2명의 가해자와 1명의 피해자가 연루된 학교폭력 사건을 다루는 위원회를 핑계를 대고 끝내 참석하지 않는다. 오래된 동네에서 가해자 부모를 다 알고 지내는 처지에서 곤란한 상황에 빠지지 않고 싶었지만 그녀가 불참한 그날 회의에서는 1표 차이로 가해학생들에게 관대한 처분이 내려진다. 피해 학생은 그 뒤 등교를 거부하다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만다.


아이의 조문을 두고도 갖은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는 학부모 대표들. 그러나 세영의 딸 도우는 그리 친하진 않았지만 중학생 남자애 답지 않게 친구를 배려할 줄 알았던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고 엄마의 반대에도 조문을 간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아이들에게 안정성과 높은 수입을 보장하는 직업만이 최고임을 강조하고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아닌 나만 피해보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얄팍한 처세술만을 가르쳐왔다. 왜 학교에서 친구를 왕따시키면 안 되는지가 아닌 왕따가 돼서는 안 된다는 식이다.


절대 손해를 볼 수 없다는 그런 마음가짐이 난민에 대해,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비정규직들에게,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여자들에게, 종교와 신념에 따라 총을 들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성폭력의 희생자들처럼 약자들에게 무차별적인 비난과 혐오를 가하고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마음의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 약자를 혐오하면서도 부끄러움이나 아무런 자책도 없이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그런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주장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기도 한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나 아이 학교폭력 사건에서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고 회피하려고만 했던 세영이지만 자살한 학생의 보호자가 했다고 전해들은 "학교 것들 다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 소문에 지레 놀라 장례식장에 딸을 찾으러 급하게 찾는다. 알지도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딸의 안전을 기원하던 그녀는 조문도 하지 않고 아이에게 집에 가자고만 소리친다. 나는 과연 편협한 자기가족 중심주의에서 자유로운가를 되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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