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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 12,600원 (10%700)
  • 2019-06-24
  • : 58,371
나를 빈털터리로 만들 것이 분명한 여행을 떠나기 전날 이 책의 서평단에 선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올 것이 없었는데 택배가 도착했고, 내용물은 책이었다. 그래서 블로그를 확인하고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현실로 끌어당겨지는 느낌이었다. 조금 전까지 나는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열망 하나로 가장 가볍고 잘 마르는 옷들을 찾아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발까지는 여유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한밤중에 독서를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읽고 있는지도 잘 몰랐던 상태였던 것 같다. 첫 독서를 마치고 남겼던 일기의 한 부분을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처음 책을 펼쳤을 때 나는 약간 어색했다. SF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여서였겠지만 그 어색함이 이제 막 첫 소설집을 세상에 선보인 작가의 미숙함 때문은 아닐까 의심하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이야기들을 읽어 나갔다.

처음 나에게 이 작가의 이름 세 글자를 각인하고 나를 매료시켰던 (다시 읽어도 좋았다. 읽을수록 좋았다.) 관내분실처럼 빛나는 단편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섣불리 첫 독서를 마쳤다. 그렇지만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에 다시 읽어 보기로 생각했다.”

‘다시 읽어 보기로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참 잘한 결정이었다.

그렇게 가장 가벼운 것들로 묶은 짐 꾸러미에 책이 한 권 더해지게 되었다. 가제본 상태라 그렇게 무거울 리 없었는데도 킨들도 짐이라며 빼 버리고 스마트폰에 킨들 앱을 설치한 것으로 대신한 효율만능주의 신봉자에게 책 한 권은 양장본만큼 묵직한 존재감이었다. 두고 온 현실의 무게가 다시 느껴지는 듯했다.

여행길의 여유 때문인지 두 번째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어색함에 익숙해졌다. 이상하게 여겼던 문장이 다시 보였다. 스쳐 지나갔던 장면이 다시 보였고, 이야기가 보였다. 우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또한 우리가 살며 만들어나가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였다.


▪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평화는 자원의 분배가 문제되지 않는 제한된 환경에서만 가능한 일일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 ‘유린타운(Urine Town)’이 떠올랐다. 우리말로는 ‘오줌 마을.’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마을도 이 단편 속의 마을처럼 작고, 아주 엄격하게 통제된 사회이다. 다른 점은 순례자들의 출발점인 마을이 외부와의 단절을 통해 불가능처럼 보이는 평화와 안정을 추구했다면, 이 오줌 마을이 외부와의 격리를 통해 쌓아올린 것은 단 하나라는 사실이다. ‘공포’

단순하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사실 두 마을은 많은 점에서 다르다. 오줌 마을은 수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오줌을 누려면 돈을 내야 하는 극단적이어서 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주목한 점은 이 부분이었다.

오줌 마을을 통제하는 세력은 자본주의의 정점으로 마치 악 그 자체로 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악을 통해 이 마을의 질서가 유지된다. 누군가의 봉기로 화장실이 모두에게 무료로 개방되는 이상향을 이룩해내더라도 금방 처음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수자원의 고갈로 문제가 생기는 것. 그리고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다시 또 비슷한 법과 규칙, 그리고 체계를 만들어냈다.

어떤 사람들이 선하지 않은 것은 정말 그 어떤 사람들만의 문제일까.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이상향에 가까운 한 마을의 존재. 그런 마을이 존재한다는 가정만으로도 생각해 볼 주제가 많았다. 그리고 그 마을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순례자들에 대해서도.


▪ 스펙트럼

이야기를 다 읽고 떠오른 생각이 ‘과연 과학자였던 할머니가 기뻐하셨을까’였으니 이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만큼 즐기지 못한 것 같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고작 그 정도의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몰랐다.” (p82)


▪ 공생 가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비록 어제보다 나은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우리의 어떤 특성은 여전히 야만적이며, 선량하고 약한 것들을 다치게 한다. 인류의 발전을 이끄는 외계 생명체의 존재에 대한 상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만큼 우리의 선한 특성이 우리의 야만적인 특성과 동떨어져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좀 엉뚱하지만 쌍둥이 패러독스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빛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빛과 소금. (이런 말을 농담이라고 하고 있다.)

181쪽을 펼치면 내가 바람둥이처럼 사랑하고 다음 단편에서 잊어버리고 말았던 문장들을 다시 볼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기억날 때마다 다시 읽어 볼 것 같다.


▪ 감정의 물성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을 덧붙이고 싶지 않다.


▪ 관내분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이야기가 영화화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접하고, 자기만의 생각을 발전시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힘을 가지는 것은 사람들이 읽고 개개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감정에서 생각을, 생각에서 말을 덧붙일 때라고 믿기 때문이다.


▪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이 이야기를 읽고는 두 단어가 머릿속에 남았다. 목적과 대표성.

한편으로는 Deepsea Challenge (2014) 라는 다큐멘터리를 기억나게 한다. 어린시절의 꿈을 쫓아 심해 탐사에 도전하는 제임스 카메론과 팀원들의 이야기였다.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사람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깊이. 생명활동의 한계를 넘어 마침내 그곳에 도달한 한 명의 사람이 묘사하는 심해의 고요가 궁금하다면 한번쯤 볼만한 영상이다.

나는 이 우주 영웅 이야기의 다음 다음이 궁금했다. 후대에 재경이라는 인물이 어떤 방식으로든 재평가되지 않았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장차 도망칠 우주에서 또 장차 사라질 지구 깊은 곳 생태계로 눈을 돌리게 되면, 언젠가 그녀가 남긴 흔적 한 자락은 발견되어 기억되지 않을까 하는 동화 같은 상상. 동시에 언젠가는, 언젠가는 소수가 소수가 아니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녀가 속한 집단이 모두의 집단이 되는 날, 그녀가 진정으로 인류를 대표하여 무언가를 해낸 사람임을 인정받는 날이 반드시 오지 않을까.

그런 날이 앞당겨지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가 속한 집단 전부의 실패가 되는데,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렇지 않다.” (p308)


이야기를 모두 읽고 나서 나는 잠깐 허무했다. 한 책으로 세 번째 독서를 막 마쳤을 때였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는 이 이야기들을 쓴 작가의 다음 책을 기다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책이 아직 존재하기도 전부터 이야기들을 발견하고 엮어내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맺음말: 기억에 남는 독서였습니다.

여행 중에 읽고, 여행 중에 씁니다. 저는 사회에 던져진 물음을 구체화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논의에 동참하도록 이끌 수 있는 사람일까요. 작가님의 이 책은 저를 아직 논의할 내용이 많은 사회의 한 지점으로 이끌었습니다.

앞으로 며칠 뒤 집으로 돌아가면 남겨두고 온 현실의 많은 문제가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어쩌면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책을 읽는 내내 저에게 던져졌던 물음은 기억될 것이고 몇몇 상황에서 더 나은 행동을 하도록 저를 이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허블 출판사와 출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도움을 주신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한초엽 작가님, 이렇게 예쁜 책을 한발 앞서 접할 기회를 제공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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