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성적이고 무비판적인 확증편향에 저항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깜짝 놀랄 만큼의 논리 정연함과 타당성이 입증되지 않는 한, 나는 거대하고 단단한 방패를 세워두고 자기 논리라는 보이지 않는 창을 든 채 상대를 무차별적으로 찔러댔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나의 아군이 되어 주었고, 선입견은 그런 나를 훌륭한 갑옷으로 무장시켰다.
그런데 나의 아군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이며, 누가 나에게 그런 훌륭한 갑옷을 선물한 걸까?
저자는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이 나를 무거운 갑옷으로 무장하게 하고, 무비판적으로 적진을 향하게 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 모두를 심각한 무지에 이르게 했음이다.
저자에 의하면
극적인 세계관은 우리를
세상을 실제보다 나빠지고 있는, 비정상에 가까운 곳으로 간주하게 했고,
이분법적 사고를 추구한 나머지 양극단에 놓인 이상값만을 바라보게 했으며,
현상이 눈에 보이는 너머로 어떻게 이어질지 속단하게 했다.
또한 공포를 유발하여 타당한 증거를 제시해도 믿지 않게 했고,
특정 생각에 지나치게 동조하게 하여 나머지 생각을 들여다보지 않게 했으며,
의도적으로 다급함을 부추기며 잘못된 선택을 내리게 했다.
확실히 그것은 우리의 본능으로 자리하여
되레 자신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음이다.
이 책 한 권이
나의 편향에 근거한 세계관을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뒤바꾸어 놓았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한 데이터가 과연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날 것의 데이터(팩트가 팩트로서 작동하는지)인지, 고통받는 소수의 사례를 통계와 명시적 증거라는 이름 앞에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언론에 중립을 기대하지 않으면 어디에 중립을 기대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