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희망이란게 있다면 희망없는자 덕분이다
  •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존 돈반.캐런 저커
  • 36,000원 (10%2,000)
  • 2021-06-01
  • : 2,807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드라마 우영우를 보는 다른 시각

가끔은 실용적인 목적에서 책을 들게 된다. 작년 어느 즈음에 아이 중 하나가 장애 판정을 받고 복지카드가 발급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얄팍하게도 내 자신의 일로 닥치게 되자 그간 뒤로 미뤄 놨던 장애와 관련된 책들에 손이 가기 시작했다. 예전에 사두었던 그린비 출판사의 장애학 시리즈를 훑어보았지만, 닥친 현안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책들이어서 스킵했다. 그리고서 뇌과학 관련 서적 몇 권을 들척이다 손에 잡게 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우리 아이가 자폐에 해당되지는 않지만, 지능과 관련된 장애이다 보니 혹시나 싶었고 외조카 중 한 아이가 자폐로 진단받은 바 있어 관련 정보라도 습득하자는 심정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TV가 없고 드라마는 일년에 1시간도 안보는 나이기에 세간의 조명을 받고 있다는 ‘그’ 드라마도 대학동기들의 카톡에서 하도 떠들어 대기에 인터넷 기사를 검색해 보고서야 자폐(아니 정확하게는 아스퍼거증후군)증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휴가중이던 지난 수요일 다른 이유로 정신의학과를 방문했는데, 거기에서 책장에 꽃힌 이 책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책을 감싸는 비닐이 그대로 있는걸 봐서는 그 의사는 그 책을 상담용으로 비치해 놓은게 분명했다. 피식 웃음이 나고 간단하게라도 이 책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라딘에서만 2만권 가까이 팔린 이 책은 아주 쉽게 읽힌다. 어려운 개념도 없고 그저 자폐가 하나의 병증으로 인정되고, 원인에 대한 다양한 이유들이 추정되고, 별 근거도 없는 이유로 냉정한 엄마들이 비난받게 되고, 자폐가 하나의 병증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이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이루어지기까지의 부모들의 투쟁과 조직화(주로 미국에서)의 과정과 함께 다양한 방법으로 치료를 시도하지만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하고는 정형화된 방법의 치료가 이루어지지 못한 역사들을 차분하게 소개한다. 아무 생각없이 쓰여진 글을 따라가기만 하던 내가 약간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은 책의 중간쯤인 430페이지에 “자폐 스펙트럼”이란 말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이 개념은 오스트리아의 의사 아스퍼거가 발견했다고 보고한 “타인과 교류가 어려우나, 지능이 특별히 뛰어나고 따라서 학자나 음악가 등으로 성공적인 경력을 보여준”, 후일 또다른 자폐증자가 ‘된’ 아스퍼거 증후군과 맞닿아 있다. 1980년대 런던 자폐자 연구그룹의 로나 윙이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자폐성향을 언어와 지능의 양 극단에 일렬로 늘어서게 만드는 하나의 스펙트럼이라는 개념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많은 논란을 불러있으켰고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발간하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소위DSM)에 1994년이 되어야 채택되었다. 하지만 2013년 DSM-5에서는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진단명은 사라지게 된다. 한데 아스퍼거 증후군이 자폐라는 넓은 스펙트럼의 한켠에 자리하고 특정한 부분에서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자폐가 장애라는 개념은 애매하게 되버린다. 스펙트럼의 끝에서 자폐증은 “정상상태”와 만나게 되며, 이 경계는 아주 흐릿하게 되었다. ‘아스피’라는 고기능 자폐인이 이렇게 많다면 사회가 왜 이들을 질환자로 규정하고 지원해야 하는가? 아니 왜 이들이 환자로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 한 발 더 나아가 자폐가 질병인가? 이런 질문들과 함께 ‘신경다양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개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폐증은 단순한 발달장애가 아니라 신경학적 차이로 봐야 하며, 따라서 “모든 자폐인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존재”이다. 한데 그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자폐를 없애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여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가? 우리는 ‘신경다양성’이라는 말에서 쉽게 ‘성적 다양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맞다. 성소수자들의 정체성 켐페인을 문화적 배경으로 하여 신경다양성의 주장 역시 자폐증자의 존재론적 지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쯤되면 내가 왜 자폐 스펙트럼이란 말에 불편해지지 시작했는지가 분명해진다. 자신의 목소리로 발언할 수 있는 ‘아스피’들이 자폐증자 - 나는 의도적으로 자폐증자라고 적는다. 소위 정치적올바름(PC)을 주장하는 이들이 자폐가 질환이 아니라며 ‘증’자를 빼고 적을 것을 주장하나, 자폐가 질환이 아니라면 왜 굳이 자폐를 고치려 그토록 많은 수고를 하고 있는가? 장애를 장애라고 말하는 것은 비하가 아니다. 오히려 이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그 질환이 보이지 않게 되고, 이런 방식으로 그 질환과 대면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 PC의 나쁜 문제해결 방식이다 -를 대표하여 자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내세울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심한 장애를 겪는 자폐인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자연스럽게 잊어버릴수 있게 된다.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들, 밤중에 나가 돌아다니다 물에 빠지거나 차에 치일까봐 24시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 성인이 된 후에도 하루에 두 번이상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이들 자폐인들은 인터뷰를 할 기회도, 저녁뉴스에도 결코 나오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정도 자폐인(장애인)이다”는 말이 감동을 주는가? 그렇다면 속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내 견지에서는 그렇다. 만일 신경다양성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자폐를 신경학적 차이로 봐야 한다면, 사회가 왜 자폐증자들을 돌봐야 하는가? 그들이 사회속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배려와 지원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폐인들 대부분은 성인이 되어서도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가족단위에서 각자 알아서 감당해야하는 우리 상황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택받은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우는 가족에게 버림받거나, 가족이 파탄나는 경우가 수다한 것이 현실이다. 나는 그래서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싫다! 그 드라마가 당의정을 듬뿍 바르고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는 모양을 취해서 흥행에 성공하는 것을 보는 것이 불편하다. 나는 우영우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전장연의 시위가 오버랩 되곤 한다. 만일 드라마 우영우의 메시지가 소수자, 장애인에 대한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고 그에 대해 그토록 많은 시청자들이 공감한다면, 왜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심 밖이고 싸늘한 시선일까? 감히 주장하건데, 드라마 우영우의 인기는 전장연의 날 것 그대로의 장애를 보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그 날 것이 있다는 것을 외면하는데서 느끼는 죄책감을 덜어주며 장애를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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