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인사人事'에 의해 '천재天災'가 발생한다는 논리를 '천견론天譴論'이라고 칭한다. 저자에 따르면 천견론은 과학이나 신앙이 아니라, 정치 공간에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동원된 정책 수단이다. 정치의 득실과 재이災異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은 순자荀子나 왕충王充 같은 송대宋代 이전의 사상가들이 이미 주장한 바이지만, 송대에도 천견론은 소멸되기는커녕 군주가 "이치[理]에 의거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이끄는 방편이었다. 신종대를 보면, 재해와 이변은 신법에 반대하는 대신들이 왕안석의 전횡을 타도할 때 뿐만 아니라, 왕안석에 의해 "일어나야 할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것을 경하"하는 대응 수단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30)
왕안석은 그저 재이와 연관된 사태를 소멸시키려는 사고방식에서 한걸음 나아가 "군주는 재이를 계기로 자신의 행동이 '천하의 올바른 이치[天下之正理]'에 맞는지를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군주된 자의 근심은 이치를 궁구하지 않는 것"에 있으며, "궁리窮理야말로 정치의 요체"인 것이다.(56) "재이가 구체적인 사상에 대한 '응보[應]'가 아니며 군주의 수덕修德에 의한 궁리가 중심 과제"가 되면서, "리理의 권위를 보증"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여기서 변함없이 '천天'이 등장한다. 단, 이때의 천天은 "리理의 근본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고 군주의 시책에 일일이 끼어들어 쓸데없이 참견을 하는 유의지자有意志者"의 의미를 상실한다.(57)
이로써 재이는 "어떤 개별적 현상에 의해 기계적으로 발생"하는 사태가 아니라 "군주의 마음의 준비에 대한 감시와 억제 기능을 가진 현상으로서 파악"되었다.(71) 주희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일신一身의 사욕私慾을 이겨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으로 돌아간다"고 주석을 달았을 때, '예禮'의 치환이 '천리의 절문'인 것은 그러한 이유이다. 주희는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우선시하는 욕망이 기질氣質로서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여 "'천리의 절문', 즉 규범으로서의 예禮에 합치한 말과 행동을 해 나가는 것이 당연히 사람으로서의 올바르고 본래적인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80)
"북송北宋에서 맹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제일인자는 왕안석이다."(98) 왕안석은 "당대唐代 이래로 중시되어 오던 시부詩賦를 시험과목에서 제외하고, 그 대신에 책策(시사문제에 관한 대책)과 논論(역사비평)을 중시하였다." 또한 "'겸경兼經'이라는 명칭 하에 <논어>와 <맹자>를 모두 과거의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결국 <맹자>는 이러한 계기를 시작으로 하여 경서로서의 취급을 받게 되었다."(101) 왕안석은 "본성[性]은 서로 가까운 것이지만, 습관[習]이 서로를 멀어지게 한다"(<論語> 陽貨)는 공자의 말을 빌어, 성性에 선험적인 시비是非나 선천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性이 원인이 되어 구체적인 형태로서 발현한 상태가 문제"라고 말하였다.(99)
주희는 "본성 그 자체에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는 왕안석과 호남학파의 주장을 배척하고, 인의예지仁義禮知를 본성으로 인정한 한유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장재張載의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합한 것'이라는 규정"을 기본으로 삼아, 사람은 본래 선한 본성을 갖추고 있으며, 다만 "기질의 소위所爲에 의해 악행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이 세상에서 악을 없애기 위해서는 기질을 선으로서의 본성으로 되돌리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인의예지를 "사람의 마음에 미리 부여된 리理로 간주하는 것"이 주희의'성즉리설性卽理說'이다. 아울러 이러한 리理는 그 "본래적인 올바름과 선함"의 근본 원리인 천天에 기대고 있기에, 성性은 리理를 통하여 우주와 연결된다.(110-2)
주희는 자신을 비롯한 도학자들이 맹자를 마지막으로 끊어진 도통道統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했다. 주희와 그 문류門流가 보기에 당대는 공자와 맹자가 통치자에게 도道를 가르치던 상황과 유사한, 그들 나름의 '르네상스'였다. 주희에 따르면 "요순에서부터 공자·맹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그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도道'는 그 후 천사백 년에 걸쳐서 단절"되었는데, "그것을 다시 부흥시킨 이가 바로 주돈이이고, 그러한 성과가 <태극도설>이다."(157) 주희가 '성性과 정精'을 분리한 것처럼, "리理에는 형상이 없으며 기氣에 붙어 있는 것"이라는 자신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창할 때 "<태극도설>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구절은 아주 적당한 재료"였다.(168-9)
이제 "도道의 담당자는 군주의 지위를 얻은 자에게만 한정될 수는 없다. 오히려 공자 이후는 '왕王'이 아니라, '사師'라고 하는 것이 도통 계승자의 성격이 되었다."(199) 주자학이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독서인讀書人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로서 그들에게 살아 있는 목표를 제시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때의 독서란 "성인이나 현인들이 글로 써서 남긴 텍스트 등을 통하여 마땅히 그러해야 할 세상의 올바른 모습에 관하여 배우는 작업이었다."(202) 사서학四書學을 학습하여, 오경五經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 "<주례>는 국제國制, <의례>는 가례家禮로 삼고, 여기에 <예기>를 더한 삼례의 학을 부흥시키는 것"이 주희의 실천적 목표였다.(221)
<주례>를 중핵으로 삼아, "치민治民을 위해서는 확고한 (국가) 조직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고 방식"은 왕안석의 신학에서 유래한다. 이에 대항하여 등장한 "정이의 도학道學·리학理學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위정자 자신의 인격 도야와 민중에 대한 풍속 교화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통치 제도를 중시하는 주례형周禮型과 수양 교화를 중시하는 대학형大學型"은 서로를 배제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수레의 양쪽 바퀴와 같은 관계로 청말淸末에까지 이르렀다. 다만 주자학에서는 이념으로서의 수기치인이 압도적인 무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형大學型으로 그 무게 중심이 기울어지게 되었다."(243-4)
비록 왕수인이 주창한 명대의 양명학이 각자에게 '천리로서의 양지良知'가 갖추어져 있다는 취지에서, '심心·성性·리理'를 구별하는 주희의 사고방식에 반대했지만, 이들의 관점이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바로서의 리理에 대하여 존경의 염念을 가지고 경건하게 유지하는" '존덕성尊德性'과 "학문에 의해 견문을 넓히고 리理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해가는" '도문학道問學'을 이항 개념으로 구분 짓고, 주자학과 양명학을 대비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후세에 만들어진 이미지에 근거한 이야기이다."(131-3) 제3자의 입장에 서 있는 자들에게, 주자학이나 양명학이나 모두 '송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집단이었다.
"주자학을 따르든지 아니면 양명학에 영합하든지 간에 명대明代 독서인들이 공통 과제로서 삼았던 것"은, '송학'이 품고 있던 문제인 "수신을 완성한 인물이 지도자가 되어 형성·유지해갈 질서를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자 실천방안이었다. 여기서 "정돈된 질서, 즉 그들의 용어로 '예교禮敎'가 한층 더 전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것이 거경궁리居敬窮理에 의한 것이든지, 아니면 현성양지現成良知 이든지 간에 궁극적인 목표는 동일하였다. 단지 그 방도가 달랐을 뿐이다."(250) 실천론을 배제하고 심성론心性論으로 축소시킨 '송학'은 한당漢唐의 훈고학을 재평가하는 자신들의 방법론을 '한학漢學'으로 칭한 청대 고증학자들이 창안해낸 개념이다.(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