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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님의 서재
  • 우남 이승만 연구
  • 정병준
  • 31,500원 (10%1,750)
  • 2005-06-30
  • : 1,294
1부 한말•개화기 : 성장•교육•개화운동

1 가계와 왕족 의식
이승만은 양녕대군 16대손으로 조선 왕조에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면서도, 대외적인 활동에서 왕족 의식을 드러내는 이중적 의식을 보여 훗날 제왕적 대통령을 예비했다.

2 학업과 독립협회 참여
과거제가 폐지되자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영어와 서구식 문화, 기독교를 습득한 그는 협성회 활동을 통해 언론의 중요성을 체득했고, 독립협회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3 미국 유학과 망명
민영환의 개인 밀사 자격으로 도미한 이승만의 외교 활동은 가쓰라-테프트 밀약 체결로 무산됐지만, 미 고위관료들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일방적인 대미 외교의 근간이 됐다.

2부 일제시기1 : 외교독립노선과 외교 활동

4 외교독립노선의 형성과 특징
1)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 이후 미국에 한층 경도되어 유화적인 대일관을 견지하였고, 미일전쟁이 수반되지 않은 무력투쟁과 해방 후 한국민의 자치 능력에 회의적이었다.
2) 그는 문호를 개방하여 통상의 자유를 누리는 교역상의 한반도중립화론을 주장하고, 임시정부 수립과 대미외교, 자치정부론을 내세운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모방했다.

5 1910~30년대 외교 활동
1) 재미 한인 지도자들로는 무력투쟁의 박용만, 실력양성의 안창호, 외교노선의 이승만이 있었고, 박용만과 안창호는 최일선에서 죽음을 맞은 반면 이승만은 후방에 남았다.
2)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임된 이승만은 곧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직에 임명되자 대통령을 자임하여, 통합 상해 정부 출범시에 자신의 대통령 취임을 관철시켰다.

6 태평양전쟁기 전시 외교 활동
1) 1세대 이민자의 노령화와 동지식산회사의 파산으로 조직력이 약화되었고, 상해 임정과의 갈등도 해소되지 않은 채 주미외교부를 설치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2) 김구의 후원으로 중경 임정과의 관계를 회복한 이승만은 얄타밀약설을 주장하며 반소•반공 노선을 강화하여 미 군부의 지지 속에 해방 정국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3부 일제시기2 : 국내 연계와 지지 기반

7 1910~20년대 국내 민족주의 세력과의 관계
3•1운동을 전후하여 강화된 국내의 이승만 지지 세력은 독립협회 활동 경험과 기독교로의 개종, YMCA 핵심 멤버 및 기호 출신으로 연결되며 흥업구락부 조직을 주도했다.

8 이승만의 국내 지지 기반 흥업구락부(1925~38년)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창립한 동지회의 국내버전인 흥업구락부는 실질적 활동이 미약했고 다수가 친일로 돌아섰지만 민족주의 계열내에 이승만의 지지기반을 형성했다.

9 태평양전쟁기 단파방송 사건과 국내의 이승만 인식
전시 정보 통제 속에서 입소문으로 전해진 이승만의 단파 방송은 실제보다 과장되어, 그는 민족 해방을 염원하는 좌우파 지도자들에게 국외 민족운동의 중추로 각인되었다.

4부 해방 직후 : 정부 수립 노선과 활동

10 조기 귀국과 동경 회합
소련과의 협상을 통한 신탁통치를 염두에 둔 국무부와 달리 미 군정은 공산주의자들과의 거래를 반대하고 자유정부의 확대를 구상했는데 이는 이승만의 의중과 일치했다.

11 정계 부상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조직
1) 인민공화국은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었고 미 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이승만을 회유하기 위해 주석으로 추대했지만, 그를 민족 지도자로 선전하는 효과만 가져왔다.
2) 독촉중협은 좌우를 포괄한 명목상 한국 정부 역할을 하면서 총선거를 실시한 후 북한 지역으로의 확대를 꾀했으나, 친이승만적인 우익 일변도의 구성으로 통합이 무산됐다.

12 1946년 지지 기반 강화와 단독정부 수립 제안
1) 반탁운동의 기세를 등에 업고 군정을 접수해 정부를 세우려던 임정의 시도는 미군정의 신뢰를 잃는 계기가 되어 비상정치회의의 주도권을 이승만에게 일임하게 됐다.
2) 광산 스캔들에 휘말려 민주의장직을 사임한 뒤 시작한 남선순행은 지방 우익들을 결집시켜 군중을 동원하고, 경찰력으로 좌익을 예비검속, 억압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13 1945~47년 정치자금 조성과 운용
1) 그에게 대규모 정치자금을 조성해 준 대한경제보국회는 친일 경제인 단체로서, 이들은 친일 행위에 대한 보험 및 일제가 남긴 자산과 생필품•공산품의 이권을 노렸다.
2) 조성된 정치자금은 46년 9월의 총파업을 분쇄할 우익 청년 단체의 동원과 반탁 시위의 지원에 사용됐고, 자신을 지지하는 언론 매체의 확보와 사설 고문비로 쓰였다.

14 1947~48년 우익 진영의 분화와 단독정부의 실현
1) 좌우합작에 기반한 임시정부 수립이 제2차 미소공위의 진전으로 가시화되고 미군정과 한민당마저 등을 돌리자, 이승만과 김구는 격렬한 반탁시위와 테러를 조직했다.
2)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여운형이 암살되자 이승만의 남한 단독 총선거 주장이 힘을 받았고, 장덕수 암살로 임정과의 통합도 물거품이 된 후 49년 6월 김구마저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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