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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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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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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_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주도하다


1815년 이후 35개의 제후국과 네 곳의 자유도시 중 단 몇 곳만 헌법과 의회를 갖추었는데, ‘독일연방’은 이들의 느슨한 결합이었다. 독일연방은 19세기 말쯤 5천5백만 명의 인구와 계층을 아우르는 평등한 선거권(남성의 선거권)을 통해 선출된 제국 의회로 국가와 사회의 제도를 정비했으며, 완전한 정당 체제를 자랑하는 독일제국이 됐다. 제국 수도 베를린은 1815년 20만 명의 인구를 가진 프로이센의 수도였으나, (1815년 4월 1일 태생인) 비스마르크가 사망한 1898년에는 약 2백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였다. 5천 명 이상 규모의 행정구역에 사는 인구가 1815년에는 불과 10퍼센트였으나, 19세기 말에는 50퍼센트를 웃도는 수준으로 늘어났다. 농업국가 독일은 19세기를 거치며 강력한 산업국가로 발돋움했다. 1900년쯤에 이르자 독일은 철강과 제련 산업에서 대영제국의 규모를 능가했으며 무엇보다도 ‘새로운 산업’인 화학과 전기공업에서 선두를 달렸다. 10)


I. 알트마르크 융커의 젊은 시절(1815~1847)


1845년 아버지가 74세를 일기로 운명한 뒤, 비스마르크는 작센 지방의회의 보궐선거에서 기사 작위 의원으로 선출됐다. 또 예리초프Jerichow군의 군수직도 노려볼 만한 영향력을 쌓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비스마르크는 지역 차원을 넘어서는 활동 범위, 곧 영주재판권(Patrimonialgerichtsbarkeit)을 새롭게 꾸미느라 벌어진 정치 대결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영주의 독립성을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강변하고, 정부가 권한을 넓혀 간섭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했다. 이 협상에서 비스마르크는 강력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보수적인 영주들, 특히 마그데부르크의 고등법원 원장 에른스트 루트비히 폰 게를라흐Ernst Ludwig von Gerlach(1795~1877)와 밀접하게 협력했다. 게를라흐는 아돌프 폰 타덴과 사돈 간이었으며, 프로이센 보수파의 선봉으로 활약하던 인물이다. 이런 활동으로 비스마르크는 정치가로서 자신의 미래 전망을 높게 평가했던 게 분명하다. 21)


1846년 비스마르크와 요하나 폰 푸트카머는 인생을 함께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경건주의에 충실한 요하나의 부모는 비스마르크를 사위로 맞는 걸 전혀 반기지 않았다. 1847년 1월 초 그는 과감하게 포메른의 외진 구석인 라인펠트Reinfeld의 요하나 집으로 찾아갔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약혼은 완벽히 성사됐다. 비스마르크는 요하나에게서 자신이 필요로 한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평생 충실했으며 솜씨 좋게 집안을 꾸리면서 자녀를 사려 깊게 돌보았고, 무엇보다도 남편의 세계관에 자신을 무조건 맞추었으며, 어떤 결정을 하든 충직하게 따랐다. 남편의 친구는 그녀의 친구였으며, 남편의 적은 자신의 적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비스마르크는 자신에게 맞는 삶을 탐색하느라 매우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약혼을 비롯해 1847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그는 안정된 토대 위에서 자신의 뜻을 안팎으로 활발히 펼치며 그동안 굶주린 야망을 달랠 기회를 잡았다. 22-3)


II. 영주에서 정치가로(1847~1851)


1847년 여론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은 사건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소집하겠다고 선포한 ‘통합신분제의회’였다. 모든 지방 토호들을 대상으로 소집된 이 회의에는 대략 6백여 명의 남자들이 참가할 예정이었다. 4월 11일 왕이 ‘통합의회’를 개회했다. 폰 브라우히티슈Von Brauchitsch 가문의 대표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참가 자격을 포기하고 나서야 비로소 비스마르크는 5월 초 의회에 참가할 기회를 잡았다. 의회에 입성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5월 17일, 32세의 최연소 의원은 첫 데뷔무대에서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 비스마르크는 마치 두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선명한 그림을 그려내는 표현력에 재치와 신랄한 촌철살인을 담아내는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을 줄 알았다. 심지어 그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도 연설만큼은 귀담아들었다. 보수 진영에 재능 있는 연설가의 씨가 적었던 덕에 젊은 의원은 계속 연설을 쏟아내고 인맥을 확장하며 빠른 속도로 ‘정파’의 지도급 인사로 발돋움했다. 26-7)


1850년 5월 오스트리아는 제후 펠릭스 슈바르첸베르크Felix Schwarzenberg(1800~1852)의 지휘 아래 혁명 시위를 진압하고 유럽 내 정치적 입지를 다시 강화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크푸르트의 독일연방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시도했는데, 합스부르크 왕조를 배제하고 독일연방을 이룩하고자 하는 프로이센의 시도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런 일촉즉발 상황에서 슈바르첸베르크는 러시아의 지원을 확신했다. 러시아 차르에게 프로이센 중심의 연합 정책은 일정 부분 ‘혁명’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센 선제후국’ 문제로 군사적 충돌까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프로이센 정부가 충돌을 피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라인펠트에서 이 소식을 들은 비스마르크는 환호했다. 11월 29일 슈바르첸베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오토 폰 만토이펠은 프로이센을 각각 대표해 올뮈츠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의 내용은 프로이센이 연합을 포기하고, 프랑크푸르트 의회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34-5)


프로이센 여론은 ‘올뮈츠 협약’을 굴욕에 가까운 정치적 패배, 일종의 ‘수치’로 받아들였다. 정부는 의회에서 협약 체결을 합리화해야만 하는 곤혹스러운 지경에 처했다. 1850년 12월 3일에 열린 하원 회의는 말 그대로 비스마르크의 독무대가 됐다. 이 무대가 그의 출세를 결정지었다고 하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는 더 이상 융커의 순전한 이해관계만을 대변하지 않으며, 국가이성에 방향을 맞춰 진정한 국인國人이 무엇인지 헤아릴 줄 아는 언어를 구사한다. 그의 이런 태도는 이미 저 교조적인 보수, 게를라흐를 중심으로 한 극단적인 보수의 원칙 위주 정치로부터 확연히 거리를 둔 자세이다. 1851년 봄에 프랑크푸르트로 프로이센의 의회 대표를 다시 파견하는 일이 시급해지자, 비스마르크의 이름이 명단에 올랐다. 4월 말 왕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무수한 에움길을 거쳐 그동안 36세가 된 남자는 자신이 대학생 시절 꿈꿔온 목표를 이루었다. 그는 외교관이, 그것도 정상급 외교관이 됐다. 35-6)


III. 프랑크푸르트,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의 외교관(1851~1862)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로 파견됐을 당시 오스트리아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비스마르크가 프랑크푸르트로 보내진 까닭은 그가 ‘혁명’의 확실한 적대자라는 면모를 보였고, 올뮈츠 협약이 맺어질 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협력을 이끌 대변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왕과 궁정당은 정확히 이런 이유로 비스마르크를 선택했다. 오스트리아가 보수라는 공동의 이해관계에 연대감을 보이며, 1848년 이전처럼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대우하면서 의회를 이끌어 가리라는 비스마르크의 예상은 빠르게 실망으로 바뀌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속내는 전혀 다른 목표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유형의 오스트리아 패권 정치”의 대표자인 제후 슈바르첸베르크의 주도 아래 합스부르크 왕조는 1848~1849년 혁명으로 겪은 위기를 보란 듯 이겨내고 유럽 중부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오스트리아의 이런 헤게모니 정책의 관점에서 독일연방은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40-1)


비스마르크는 연방의회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확실하게 흔들며, 독일연방 내에서 프로이센의 동등한 위치를 인정받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권위에 몇 차례 흠집을 낼 수는 있었다. 거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은 세 가지다. 오스트리아 쪽이 희망한 연방의 통일된 언론 관련 법안, 빈이 베를린에 목줄을 걸려 했던 이 법안은 끝없는 논쟁 끝에 결국 오스트리아에게 아무 실익이 없는 형식적인 수준으로 의회를 통과했다. 1848년에 창설된 독일 함대의 해체를 둘러싼 갈등이 오랜 줄다리기 끝에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독일의 교역 정책에서 누가 선도적 위치를 점하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다. 오스트리아의 관세동맹 가입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1853년에 고작 12년의 기한을 가지는 교역 계약만 체결됐다. 1854년 관세동맹이 소독일 중심으로 하노버까지 확장된 것은 경제와 교역, 정치 분야에서 프로이센이 합스부르크 왕조를 누른 매우 중요한 승리이다. 43)


1854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 독일연방이 서유럽 강대국들과 연합하는 노선이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안간힘을 썼다. 프로이센 대표 비스마르크는 불굴의 집요함과 섬세한 수완으로 1855년 1월 과반수로 오스트리아가 상정한 안건을 부결시켰다. 연방의회는 러시아를 상대로 군대를 동원해달라는 오스트리아의 요구 대신, 러시아든 서유럽 강대국이든 연방을 위협할 시 전쟁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1815년 이후 그리고 혁명의 해인 1848~1849년을 넘어서도 건재했던 유럽 강대국들의 조화는 이 전쟁으로 혼란에 빠졌다. 세 마리의 검은 독수리(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가 구축했던 동맹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프랑스와 영국을 신뢰할 만한 동맹으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진 단절은 그동안의 모든 권력 구도를 뒤흔들어 유동적으로 만들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첨예한 대립은 유럽 권력 구도에서 프로이센에게 더 좋은 기회를 잡도록 해주었다. 44-5)


프로이센 정부는 1857~1858년에 위중한 변화에 직면했다. 이 변화는 비스마르크의 향후 경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857년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불치의 뇌졸중에 걸려 국가를 통치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1858년 10월 초 왕세자 빌헬름은 정부 결정과 의회 동의를 얻어 섭정으로 권좌에 오름으로써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즉각 새 내각을 구성했다. 빌헬름은 정부가 시대의 정당한 요구와 필요를 ‘세심하게 개선하는 손길’로 돌볼 것이라고 하면서, 프로이센이 독일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자세’를 추구하는 정책을 펴고, 군대를 쇄신하는 재편성을 실행하겠다고 선포했다. 새로운 시대’의 출범과 더불어 비스마르크는 영향력을 잃었다. 1859년 1월 베를린에서 그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파견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오스트리아 대표는 이 사실을 알고 비스마르크 앞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859년 2월 말 비스마르크는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퇴임사를 했다. 48-9)


1862년 5월에 열린 의회선거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비록 다양한 그림자가 드리우기는 했지만, 압도적이며 빛나는 승리를 자축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전체 353석 가운데 292석을 차지했다. 이로써 왕 빌헬름이 최우선 과제로 꼽았던 군대 개혁이 위기에 처했다. 2월에 전쟁 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이 발의한 입법안은 군대 예산 증가, 육군 강화, 효율적인 3년 복무기간, 사실상 폐지를 목표로 한 향토방위군 편제 개혁을 목표로 제시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복무 기간과 향토방위군 편제 개혁에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왕은 군대 개혁안의 핵심 쟁점만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했기 때문에 군대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헌법 갈등으로 비화했다. 비스마르크는 9월 22일 바벨스베르크 공원에서 이뤄진 장시간 대화 끝에 의회의 저항을 무릅쓰고 군대 개혁을 실행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결심으로 비스마르크는 왕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다. 왕은 이날 바로 그를 수상으로 임명하기로 했다. 53-5)


IV. 위대한 프로이센과 제국 창설자(1862~1871)


비스마르크가 임명된 9월 23일 의회는 308 대 11이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군대 개혁을 위해 정부가 요구한 예산안을 거부했다. 비스마르크의 첫 번째 공식 입장 표명으로, 내각은 9월 29일 1863년도 예산안을 철회했다. 그다음 비스마르크는 의회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기념비적인 인상을 남겼다. “독일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프로이센의 힘을 주목합니다. (···) 프로이센은 힘을 모아 이미 몇 차례 놓친 유리한 순간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빈조약에 따른 프로이센 국경은 건강한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시대의 중요한 문제는 말과 표 대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말과 표 대결은 1848년과 1849년의 위중한 실수였습니다. 우리의 결단은 철과 피로써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오늘날까지도 비스마르크라는 이름에 붙는 ‘철과 피(철혈재상)’는 폭풍과도 같은 분노를 일으켰다. 자유주의의 신문들은 국내 정치의 갈등을 향한 시선을 외교 무대로 돌려 무력 통치를 꾀하는 수작이라며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58-9)


한편 이미 오래전부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둘러싸고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위기가 1863년 말에 확 불꽃을 일으키며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위기로 연방의 정세가 새롭게 바뀌며 판도를 결정할 카드 패를 다시 섞었다. 11월에 덴마크 제국 의회는 슐레스비히 공국(덴마크 왕이 ‘동군연합同君聯合’으로 다스리던 공국)을 덴마크 국가로 합병한다고 결정했다. 비스마르크와 오스트리아는 합심해 이 요구를 거부했다. 비스마르크는 덴마크와 프로이센의 갈등에 유럽 강대국들이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 그런 결정을 내렸을 뿐이다. 오스트리아 정부도 같은 이유로 비스마르크와 보조를 맞춘 것이 분명하다. 오스트리아 내각은 철저히 합스부르크 왕조의 이해관계와 국가이성에 맞춰, 1863년 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서 프로이센과 보조를 맞추기로 결정했다. 이는 중소 공국들의 입장을 깨끗이 무시한 처사였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으로 독일연방 정치에서 비스마르크의 입지가 급격히 확장되었다. 65)


1866년 4월 말 오스트리아의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는 군대에 동원령을 내렸다. 빈 내각은 엘베강 지역 공국들의 운명을 결정할 책임은 독일연방이 져야 한다고 선포했다. 이는 사실상 ‘가슈타인 협약’의 폐기 선언이었으며, 이미 “일종의 선전포고”였다고 로타르 갈은 썼다. 이후 몇 주 동안 시도된 마지막 대화, 양강 노선을 유지해 평화를 유지하자는 물밑 대화(‘미션 가블렌츠Mission Gablenz’)를 프로이센이 추진했지만, 오스트리아가 이를 거부했다. 5월에 빈은 나폴레옹 3세의 회의 제안(프로이센은 이미 수용한 제안)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6월 12일 합스부르크 왕조는 프랑스와 비밀 협약을 맺어 오스트리아가 승리하더라도 베네토는 포기하는 반면, 오스트리아가 독일 내의 영토를 차지해 프로이센에 손해를 입히더라도 프랑스는 중립성을 지키며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더 나아가 프로이센이 차지한 라인강 서쪽 지역을 프랑스가 간섭하기 좋은 독립국으로 만든다는 합의도 이루어졌다. 70)


# 가슈타인 협약(1865년 8월 14일 조인) : 독일 공국들의 지배권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공동으로 가지는 형태를 지속하되, 임시적인 소유권 분할에 합의한 협약. 이로써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는 홀슈타인을 각각 차지했다.


앞선 전투의 승리에 이어, 7월 3일 쾨니히그라츠의 전투는 몰트케의 천재적인 전술과 오스트리아 전장총보다 우월한 성능의 프로이센 격침발사총 덕분에 프로이센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오스트리아 군대는 괴멸 수준으로 패배했다. 그러자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는 나폴레옹 3세에게 중재역을 맡겨 즉각 휴전 협상을 제안했다. 비스마르크가 중시하는 두 가지 핵심은 독일 북부에서 프로이센의 권력 위상을 다지는 것,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독일연방에서 빠지는 것이었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에게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에게 독일연방의 해체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카이저의 동의는 “오스트리아 황제 국가가 참여하지 않는 새로운 독일의 탄생”에 기여한다고 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소독일 중심의 통일을 인정하고, 프로이센이 마인강 북부에 새롭게 다질 국가에 일절 간섭하지 않으며, 프로이센에게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의 소유권을 양도하기로 약속했다. 71-2)


하노버, 헤센 공국, 나사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그리고 자유도시 프랑크푸르트 등을 전면 합병함으로써 프로이센 국토는 예전보다 상당히 커졌다. 세 곳의 정통 선제후選帝侯 가문들이 영토를 잃게 된 것은 빌헬름 1세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러시아의 차르 역시 이런 혁명적인 변화를 ‘왕조의 연대’를 공격하는 행위라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과 긴밀히 맞물리는 영토, 예전 면적보다 5분의 1이 늘어난 영토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만 있다면 그런 염려는 불식해도 좋았다. 이로써 독일의 주도권 다툼은 끝났다. 1866년이 유럽 중부 역사를 결정한 해라는 말은 조금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는 라인강 서쪽 지역을 넘길 것과,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단독으로 다스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비스마르크는 시간을 끄는 노련한 전술로 일단 결정을 유예해가며, 프랑스의 지나친 요구를 함께 막자고 설득하면서 8월에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바덴과 보호 및 방어동맹을 맺었다. 72-3)


독일 민족운동이 1866~1867년의 성취를 일종의 과도기로 보았으며,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독일통일을 완성해야 한다고 요구한 반면, 비스마르크는 주도면밀한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그가 무엇보다도 중시한 것은 연방의 내적 구조를 튼튼히 다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 국가들을 상대로 신중한 유화정책을 펼쳤다. 일단은 보호와 방어동맹 그리고 관세동맹을 맺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 두 가지 동맹이야말로 마인강을 이어주는 두 개의 든든한 다리이기 때문이다. 로타르 갈은 비스마르크가 중시한 것을 이렇게 정리했다. “양쪽의 결속, 구조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군대 제도와 상업과 관세정책, 위기 시 자동적으로 기능할 동맹이 전역에 걸쳐 동일한 효과를 갖도록 법제화에 신경 썼다.” 이런 방식으로 차근차근 다진 조직은 갈수록 촘촘해졌다. 결국 독일의 모든 왕조와 정부는 자국 이익과 국력 제고라는 목적으로 북독일 연맹에 가입했다. 77)


1870년 7월 숨 가쁘게 달아오른 위기의 출발점을 제공한 인물은 호엔촐레른 왕조 적통으로 스페인 왕의 후보에 오른 레오폴트 폰 호엔촐레른Leopold von Hohenzollern(1835~1905)이다. 스페인은 1868년 9월에 국민 대다수가 지지한 군부 쿠데타를 겪었다. 군부는 복고적 성향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여왕 이사벨 2세Isabel Ⅱ가 스페인을 떠나도록 강제했다. 이후 왕을 옹립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빗나가자 스페인 정부 수반인 육군 원수 후안 프림Juan Prim은 1870년 2월 호엔촐레른 왕조의 왕자 레오폴트에게 스페인 왕관을 제안했다. 비스마르크는 호엔촐레른 왕조에게 왕위를 받아들이라고 단호하게 충고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압력으로 7월 12일 레오폴트의 왕 후보 지명은 철회됐다. 이로써 프랑스는 호엔촐레른 출신의 스페인 왕을 막으려는 목적을 이루었으며, 어느 쪽으로 보나 당당한 외교적 성공을 맛보았다. 그러나 파리의 실권자들과 이들에게 자극받은 여론은 이 성공으로 만족해하지 않았다. 79-80)


후보 지명 철회 선언 이후 프로이센은 이 문제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래서 파리 내각은 이 선언이 발표되고 난 뒤 프로이센 왕이 사안에 개입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프랑스 대사 베네데티는 프로이센 왕에게 호엔촐레른 왕자를 다시 후보로 내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구속력 있는 확약을 받으라는 지시를 받고 요양을 위해 바트엠스Bad Ems에 머물던 빌헬름을 찾아갔다. 프랑스 정부는 스스로 모든 퇴로를 끊어버렸다. 요구한 성명이 거부당한다면 파리 정부는 유럽 강대국들 눈에 패배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이렇게 된다면 파리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는 불 보듯 환한 일이다. 나폴레옹 3세와 그의 각료들은 군 동원령과 선전포고를 통해서만 프랑스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7월 14일의 동원령 결의로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그다음 7월 19일 베를린에 프랑스 정부의 공식적인 선전포고가 전달됐을 때, 이미 양측은 전선으로 군대를 속속 집결시켰다. 80-1)


1871년 1월 28일의 휴전협정은 즉각 프랑스 국민의회를 선출해 이 기관을 프랑스 국가의 합법적 대표로 삼는다는 조항을 포함했다. 2월 5일에 선출된 국민의회는 아돌프 티에르를 ‘행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티에르와 파브르가 비스마르크와의 협상을 통해 끌어낸 ‘베르사유 잠정 평화조약’은 2월 26일에 양측이 서명을 했으며, 3월 1일에 국민의회의 비준을 받았다. 프랑스는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 외에도 영토를 할양해야만 했다. 알자스 로렌의 일부 지역은 독일제국의 땅으로 합병됐다. 마침내 비스마르크는 남독일 국가들의 정부가 북독일연방에 가입하겠다고 선언한 타협안을 도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11월 협약들Novemberverträge’로 북독일연방 헌법은 가벼운 수정을 거쳐 독일제국의 헌법이 됐다. 드디어 소독일 민족국가가 탄생했다. 바이에른과의 협약에 서명한 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부하 관료들을 돌아보며 감동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독일통일을 해냈소, 그리고 카이저 옹립도.” 82-4)


V. 제국의 안정화와 평화 수호(1871~1890)


1871년 이후 평화 수호는 비스마르크 외교정책의 최고 목표였다. 1871년 이후 유럽 평화는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복수 욕구로, 다른 한편으로는 발칸반도에서 서로 충돌하는 러시아와 합스부르크 왕조의 이해관계로 위협을 받았다. 프랑스의 복수 의지와 관련 모든 유럽의 정치가를 비롯해 프랑스의 정치가 역시 명확히 간파했던 사실은, 프랑스가 홀로 독일제국을 누르려는 시도를 감행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도전은 다른 강대국들과의 연합으로만 가능했다. 비스마르크는 그래서 다른 강대국들과 연합해 프랑스를 고립시키려는 정책에 집중했다. 그가 보기에 이런 정책은 프랑스가 다시 왕정으로 복귀하지 않고 공화국으로 남을 때에만 실현될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러시아나 합스부르크 왕조 같은 강대국을 등에 업지 못하도록 독일제국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의 동맹을 맺으려 분주히 노력했다. 이런 노력은 1873년 ‘삼제동맹’으로 결실을 맺었다. 91-2)


1875년 여름부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이 속속 봉기에 합류했다. 이 저항운동을 오스만제국이 잔인하게 짓밟자 러시아는 1877년 4월 전쟁을 선포했다. 러시아와 튀르크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구상을 아들 헤르베르트에게 받아쓰게 했다. ‘키싱겐 구술(Kissinger Diktat)’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이 기록에서 비스마르크는 가능한 경우들 가운데 ‘최악’이라 여기는 것을 “코슈마르 드 코알리숑cauchemar des coalitions”, 곧 독일을 겨눈 유럽 강대국들의 “결탁이라는 악몽”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이 가장 중시하는 외교정책의 원칙을 정리했다. 자신이 그리는 그림은 “그 어떤 영토의 확보가 아니라 전체적인 정치 상황,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모든 강대국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정치 상황이며, 혹시라도 강대국들이 우리를 겨누고 결탁하는 일만큼은 막을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93-4)


국제 갈등 상황이 산스테파노 평화조약으로 예봉이 꺾이고, 핵심 쟁점을 둘러싼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회의 덕분이다. 1878년 6월 13일에서 7월 13일까지 제국 수상 관저에서 열린 이 회의는 비스마르크가 의장을 맡았으며, 유럽의 모든 강대국 정상이 참석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전쟁으로 얻은 영토 일부를 포기했다(불가리아 남부 지역 행정 자치구인 동東루멜리아). 그러나 1856년 루마니아에게 잃었던 베사라비아 및 소아시아 지역은 자국 영토로 편입됐다고 주장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와 루마니아는 완전한 독립을 얻었으며, 불가리아는 자율권을 가지기는 하지만 튀르크에 조세를 바쳐야 하는 공국이 됐다. 그리스는 이피로스와 테살리아의 일부를 얻었으며, 영국은 키프로스섬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유할 권리를 각각 차지했다. 독일과 프랑스를 제외하고 유럽의 모든 강대국은 이 전쟁의 결과와 베를린 회의로부터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 94)


1870년대의 독일 근대화에 정부와 의회 다수파가 상당히 기여한 사실은 한편으로는 문화투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창설공황(Gründerkrach, Panic of 1873)’이라고 역사에 기록된 경제 위기로 그늘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은 경제가 활황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런 번영에는 프랑스가 전쟁배상금으로 지불한 50억 금프랑(환산하면 약 42억 마르크)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제 부흥으로 활력을 얻은 주식회사의 설립은 거리낌 없는 주식 투기의 위장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1873년 5월에 시작된 주가 폭락은 오스트리아를 필두로, 이탈리아, 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휩쓸었으며 가을에는 독일을 강타했다. 많은 유대인 금융 종사자가 주식시장에서 활동한 탓에, 주식시장 붕괴가 빚은 심리적 충격은 “독일에서 근대 반유대인주의가 탄생한 순간”의 배경이 됐다. 호황의 갑작스러운 끝은 성장 둔화의 시기로 이어졌다. 이 시기는 몇몇 단기적인 회복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1890년대까지 지속됐다. 97-8)


국내 정치의 또 다른 주요 문제는 좌파자유주의자인 루돌프 피르호Rudolf Virchow(1821~1902)가 ‘문화투쟁’이라는 개념으로 집약해 표현한 것이다. 한쪽에는 비스마르크 정부와 자유주의가, 그 반대편에는 가톨릭교회와 이를 대변하는 정당인 중앙당(Zentrum)이 서로 문화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 싸움이 ‘문화투쟁’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동기가 다발로 묶여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우선 주목해야 하는 동기는 비스마르크가 애초부터 종파 정당의 결성을 매우 꺼렸다는 점이다. 가톨릭을 전면에 내세운 정당은 그 의회 활동의 출발점과 목표점을 로마 교황청의 이해관계로 삼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며, 실제로도 그랬다. 두 번째로 살펴야 하는 동기는 폴란드와 관련한 것이다. 예전부터 비스마르크를 항상 사로잡았던 근심은 프로이센의 동쪽 국경이 폴란드 민족운동으로 위협받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비스마르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문화투쟁의 뿌리는 폴란드 문제에 있다고 강조하곤 했다. 98-100)


1878~1879년에는 국내 정치의 극적인 사건들이 봇물 터지듯 일어나면서 정치와 의회의 세력 관계에 결정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민족자유주의자들은 더는 비스마르크가 의회를 장악하는 기둥 노릇을 하지 못했으며, 보수가 다시금 힘을 얻었고, 중앙당과의 협력이 가능해졌다. 1878년 초여름에는 카이저 빌헬름 1세를 겨눈 두 번의 암살 시도가 벌어졌다. 첫 번째인 5월 11일에 카이저는 몸 성히 살아남았지만, 6월 2일의 두 번째 시도에서는 중상을 입었다. 오래전부터 사회민주주의가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보았던 비스마르크는 이 기회를 이용해 사회민주주의에 일대 타격을 가하기로 결심했다. 1878년 10월 제국 의회는 “사회민주주의가 공동체를 위협하는 행위를 방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다분히 자의적인 법 조항은 권력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실행할 행동 공간을 활짝 열어두었다. 사회민주주의에게 합법적으로 허락된 유일한 활동은 제국 의회와 지방의회 선거에 참여하는 것뿐이었다. 102-4)


사회복지 법안의 입법이야말로 비스마르크가 국내 정치에서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과이다. 그가 이 법안을 책임지고 주도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사회민주주의를 겨냥한 양면 전략이라고 보는 평가가 우세하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다. 노동자를 생활의 기본적인 위험 요소로부터 보호해줌으로써 노동자 계층이 왕조 국가에 호감을 느끼도록 유도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최신 연구는 사회주의 법과 사회보장 정치의 시작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을 확인했다. 사회민주주의와는 별개로 사회보장 정치는 비스마르크가 그 중요성을 의식하고 추진한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포괄적인 노동자 보호법의 제정에 반대하기는 했지만(특히 일요일 노동 금지법을 반대했다),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폐해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노동자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위치를 정부 대책으로 개선해줄 필연성을 깨달았다. 105-6)


비스마르크는 사회보장을 위한 세 가지 법안, 산업재해와 노년 연금과 상해보상의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통 크게 양보를 해야만 했다. 의회의 다수 의원이 세금으로 사회보장의 재원을 마련하려는 수상의 의중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노년 연금과 상해보상의 경우에만 (조촐한) 국가보조금을 지급하는 안을 관철시켰다. 비스마르크의 국내 정치 성과를 총평해보자면, 몇몇 성공에도 “그 자신과 독일을 위해 설정한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다는 오토 플란체의 진단은 정확하다. 그가 특히 간절히 원했던 재정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중앙당은 문화투쟁을,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사회주의 법을 각각 이겨냈다. 비스마르크는 제국 의회의 힘을 제한하지도 못했고, 정부를 위한 안정적인 다수 확보도 실패했다. 1879년 관세 문제에서는 대기업과 농업의 이해관계를 하나로 묶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이 계획한 다른 분야들의 주요 쟁점에서 비스마르크는 이런 성과를 끌어내지 못했다. 106-7)


발칸반도에서 무르익어가는 대결 분위기는 비스마르크를 혹독한 시험대 위에 세웠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서로 이해충돌을 빚으면서 저마다 독일의 지원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노골적인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자 진력했다. 결국 이런 노력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만큼은 막지 못했다. 차르는 삼제동맹이 사망했다고 선포했다. 1887년에 만료되는 삼제동맹을 다시금 연장하는 일은 불가능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어떤 경우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연결된 끈은 살려놓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1887년 6월 러시아와 비밀리에 ‘재보장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프랑스가 도발해 독일을 공격할 경우 중립을 지키며, 독일제국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차르 제국을 도발해 공격할 때 중립을 견지한다는 의무를 이행하기로 했다. 이 조약이 제국의 다른 동맹들과 합치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숱한 논란이 빚어졌다. 109-110)


1888년 3월 9일 제국 의회에서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의 사망을 공표하면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예정된 권좌 교체를 바라보는 비스마르크의 속내는 착잡하기만 했다. 1887년 말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불치병을 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비스마르크는 “정말 불행한 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왕세자 빌헬름이 “성미가 급해 입을 다물어야 할 때 다물 줄 모르며, 아첨에 귀가 얇아 짐작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가운데 독일을 전쟁에 빠뜨릴 수 있다”고 걱정했다. 프리드리히 3세의 장례를 치르고 몇 시간 뒤, 비스마르크는 젊은 카이저를 예방하면서 이제 전혀 다른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을 실감해야만 했다. 젊은 카이저는 무엇보다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원했다. 국가는 자신이 통치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늙은이’를 떨쳐버리고 싶었다. 이로써 국가라는 배의 조종간을 손수 잡아 온 비스마르크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하기만 한 시한폭탄이었다. 112-3)


갈등은 1890년 3월 15일 마지막 정점을 찍었다. 카이저는 이른 아침 통보도 없이 외교부에 나타나 비스마르크를 격렬하게 힐난했다. 어째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그토록 우호적으로 꾸미는지 카이저는 따져 물었다. 당시 빌헬름 2세는 러시아가 곧 오스트리아를 선제공격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여러 의견 차이로 갈등을 빚던 와중에 이제는 외교정책을 두고 심각한 분열이 빚어졌다. 젊은 카이저 주변을 맴도는 비공식 참모들, 이를테면 참모총장 백작 발더제, 카이저의 친구 백작 오일렌부르크, 추밀원 고문관 홀슈타인, 카이저의 삼촌 대공 프리드리히 폰 바덴은 하나 같이 비스마르크에게 등을 돌린 정적들이자 러시아에 반감을 품었다. 이들의 말에 홀린 카이저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1890년 6월로 기한이 끝나는 재보장조약의 연장, 러시아 쪽이 원하는 연장을 해줘서는 안 된다고 흥분했다(비스마르크가 실각한 뒤 이들은 실제로 연장을 막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외교정책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115)


VI. 권좌에서 물러난 후(1890~1898)


비스마르크가 1893년 8월 말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병이 심해졌을 때, 카이저의 측근들은 빌헬름 2세에게 서둘러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직언했다. 1894년 1월에 극적으로 ‘화해’가 이루어졌다.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궁을 방문해달라는 카이저의 초대를 받아들였다(베를린 시민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석 주 뒤 빌헬름 2세는 답방을 위해 프리드리히스루를 찾았다. 두 번의 만남에서 카이저는 정치 이야기는 한사코 피했다. 그에게는 오로지 여론에 비치는 모습만 중요했다. 다시 말해 이 ‘화해’는 순전히 형식적인 겉보기 연출일 뿐이었다. 빌헬름 2세는 실각한 수상을 계속해서 불신했으며, 비스마르크는 이 젊은 카이저를 경멸하는 태도를 전혀 바꾸지 않았다. 비스마르크가 유서에 정한 비문은 이렇다. “제후 폰 비스마르크, 1815년 4월 1일 생, 1898년 7월 30일 졸. 독일 카이저 빌헬름 1세의 충직한 신하.” 분명 죽은 비스마르크는 이 비문으로 빌헬름 2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남겼으리라. 124-6)


에필로그_논쟁의 대상 비스마르크


보수주의와 민족자유주의 진영의 엘리트들은 비스마르크를 이상적 정치인으로 추켜세웠으며, 폭넓은 계층이 민족 영웅으로 섬겼다.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의 숭배는 그가 죽고 난 뒤 엄청나게 확장되면서, “결국 역사적 실제 인물 비스마르크의 면모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됐다.” 이런 신격화가 몰고 온 치명적 오류는 “섬세한 신경에 유연하며 항상 중도를 유념했던 외교관”이 목이 긴 전투화를 신은 호전적인 ‘철혈재상’이라는 이미지에 묻혀버리면서, 과격한 민족주의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가 생시에 한사코 멀리했던 민족주의가 사후에 비스마르크를 집어삼킨 셈이다. 무수히 많은 재향군인회, 함대 출신 해군 협회, 무장 촉구 단체 등은 앞다투어 죽은 자 비스마르크를 독점적으로 차지했다고 호들갑을 떨었으며, 범독일 민족주의 연맹은 그 제국주의적 야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비스마르크를 내세웠다. 이런 신격화는 이미 1914년 이전에 치명적 파괴력을 자랑했다. 131)


1918년 이후 정치 우파는 비스마르크를 거리낌 없이 공화국과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의 수단으로 편취하면서, 바이마르공화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책임자들은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유산을 이처럼 국수적이고 민족주의적으로 왜곡하고 변조하는 일에 단호히 대처하지 못했다. 좌파자유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자들, 그리고 가톨릭 성향의 정치가 대다수도 비스마르크의 인격과 업적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전래적 입장을 고수했을 뿐이다. 이런 경향을 막으려 진력한 사람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다. 슈트레제만은 로카르노 조약(1925)과 베를린 조약(1926)에서 자신의 ‘국가적 현실정치’를 아주 선명하게 담아내면서 드러내놓고 비스마르크라는 모범에 의존했다. 하지만 정치 현장은 고루한 민족주의의 비스마르크 신화에 장악당했으며, 이런 상황은 ‘제3제국’의 시기를 넘어서까지 지속됐다. 반민주적인 비스마르크 신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차츰 청소됐다.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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