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은 《중국본토》에서 '자이덴스트라세Seidenstraße'라는 말을 썼다. '비단길'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동과 서가 예부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연결되었다는 표현이었고, 그런 생각(실제로는 소망에 가까운)이 담겨 있었다. 리히트호펜은 아마 별다른 생각 없이 《중국본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 알베르트 헤르만은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자이덴스트라세'를 멋지게 포장했다. 《누란樓蘭》 등을 쓴 그의 영어본 《실크로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대단히 환영 받았다. 그러자 실제로 그런 길이 있는지 없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채 그 길은 당연히 있는 길이 되었다. '실크로드'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행과 출판 등에서 뛰어난 산업 아이템이 되었다. '실크로드'는 이렇듯 태어날 때부터 낭만적이었고, 지금은 캐치프레이즈 같은 것이 되었다. 이 두 가지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문명'은 동·서에만 있고, 그 사이에 놓인 광활한 땅은 점點과 선線의 통과 지역에 불과했다."(37-8)
"유목민은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민족이다.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거의 모든 유목민은 유랑에 고통스러워한다. '유遊'라는 글자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한자는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출유出遊나 유학遊學에서의 의미, 즉 '나간다'라는 의미다. 유목에서 '유遊'는 이동, '목牧'은 목축을 가리킨다. 즉 '이동 유목민'이라는 뜻이다." "유목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유목민의 세계는 실로 거칠고 능력주의·실력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습득해야 하는 능력은 말을 잘 타는 것이다. 또 기상이나 자연환경 전반에 민감해야 한다. 가족이나 가축에 대한 주의 깊은 시선과 배려는 물론 계획성과 인내력, 순간적인 판단력과 과감성이 필요하다. 이렇게 유목민 집단에 대한 귀속성과 강한 개인의식, 얼핏 모순처럼 느껴지는 두 가지 면이 개인의 인격 안에 공존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52)
2장 중앙유라시아의 구도
"더 큰 유라시아 세계사의 '시간'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적어도 10세기부터 시작된 거대한 '투르크 이슬람 시대'라는 조류 속에 유라시아가 있다. 그 조류 가운데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종착지가 티무르왕조와 제2차 티무르왕조인 무굴왕조였다. 그리고 '공간'이라는 면에서 말하면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걸친 '종적 구조'가 오랜 역사를 통해 존재하고 역사와 인간에 엄청난 역동성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최고의 사례가 역시 두 개의 티무르왕조다. 이 동서 유라시아의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층 구조는 바다와도 연결된다. 여기에는 더 거대한 구도가 숨겨져 있다. 그 근거로 16세기 중반 무렵부터 활발해진 포르투갈의 인도 해역으로의 진출을 들 수 있다. 내륙에서 티무르왕조의 남하, 바다에서 포르투갈의 출몰은 연이어 발생했다. 이 '종적 관계의 구조' 속에서 '땅과 활의 시대'와 '바다와 총포의 시대'가 동시에 존재한 셈이다.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이 무굴왕조를 둘러싼 중층 지역 속에서 발생했다."(83)
"'이란'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현재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란'은 근대에 이르러 서양과 러시아 열강에 의한 외압 속에서 계속 축소된 '근대국가'를 말한다. 따라서 보통 사용되고 있는 이란의 의미로는 자연환경의 이란고원조차 생각할 수 없다. 한편 거대한 '이란'이 있다. 예부터 외압을 견디어온 이란고원을 포함해 넓게 사용하고 있는 역사상의 개념이다. '이란 자민(이란의 땅)'이라는 오래된 기원을 가진 개념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아무에서 미스르까지'의 땅, 즉 아무 강에서 이집트까지를 말한다. 이 드넓은 땅은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아케메네스왕조가 지배했던 영역과 필적할 정도로 상당히 넓다. 아케메네스왕조가 지배했던 '문명 세계'를 '이란'이라고 불렀다. 아무 강 건너편의 '야만족의 땅'은 '투란'이라고 불렀다. 문명관에 따른 구분이었다. 거기에는 일종의 가치관이 부여되어 있다. 고대 이후 중국 '문명'을 기준으로 한 화이사상, 또는 고대 그리스의 '헬렌'과 '바르바로이'의 관념과 비슷하다."(85-6)
"서북유라시아의 대초원에는 카자흐 스텝이 펼쳐져 있다. 끝없는 대초원이 볼가 강까지 이어진다. 이곳은 오히려 몽골 초원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이 거대한 초원 지대는 볼가 강을 넘어 돈 강, 드네프르 강, 도나우 강 입구까지 계속된다. 남쪽은 카프가즈 산맥의 북쪽 기슭에서 흑해 북쪽 연안 일대를 모두 덮고 카르파티아 산맥의 동쪽 기슭까지 이어진다. 말 그대로 대초원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유목민 군단과 그 국가를 길러냈다. 몽골 고원에 이어 유목 국가의 '제2의 요람'이다. 몽골 세계제국 시대에는 페르시아어로 '다쉬트 이 킵차크'라고 총칭했으며, 이는 '킵차크의 초원'이라는 의미이다. 페르시아어는 몽골 시대에 국제어로 사용되었다. 칭기스칸의 장남 조치를 비롯한 그 가문과 그들의 영지를 조치 울루스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킵차크 한국'이라고 부르는 곳은 '다쉬트 이 킵차크'라는 당시의 국제용어에서 유래했다. 이 서북유라시아 대초원이 조치 울루스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88-9)
3장 유목 국가의 원형을 찾아서
"헤로도토스가 저술한 《역사》 전편의 클라이맥스인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이 막 시작하기 직전에,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이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전개한 북진 작전의 상대는 스키타이다. 때는 기원전 514년 또는 513년경이다." "그 당시 그리스인의 관념으로 유럽은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라는 두 해협을 경계로 북쪽에 펼쳐진 땅 전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그 남쪽 가운데 동쪽으로 펼쳐져 있는 곳을 '아시아', 서쪽은 '리디아'(이른바 아프리카)라고 불렀다. 아시아와 유럽을 지금처럼 동쪽과 서쪽이 아니라 남쪽과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온난하거나 뜨거운 날씨, 풍요의 땅에서 사치스러울 정도의 문화의 꽃이 핀 것은 아시아 쪽이었다. 유럽은 한랭하고 소박한, 무례함의 땅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스키타이나 그리스 또한 위의 관념에 따르면 모두 '북쪽의 땅', 유럽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스키타이-페르시아 전쟁'을 아시아와 유럽 최초의 대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106-8)
"스키타이 국가는 동방에서 진출한 사르마타이 집단에게 밀려 슬금슬금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기원전 3세기 중반 무렵에는 완전히 해체되고 만 듯하다." "그러나 그 사르마타이 또한 4세기 동방의 중앙아시아 방면에서 밀려온 파도에 휩쓸렸다. '사르마타이 연합'은 와해되었고 훈족의 패권 아래 흡수되었다." "이런 경위를 일괄해서 말하면 서북유라시아 방면에서는 유목 군사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연합체가 계속 형성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사이 동방에서 새로 나타난 무리에 의해 중심 집단의 교대와 연합체의 재구성이 이루어지는 것도 이곳의 '정치 전통'이 되었다." "13·14세기 몽골의 서북유라시아의 도착과 장기적인 지배가 그 마지막 파도였다. 조치 울루스를 정점으로 하는 300년에 걸친 느슨한 정치 시스템 속에서 태어난 러시아는 이 전통의 파도(초원 세력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확장하는)를 뒤집는 형태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진했고, 러시아라는 '유라시아제국'을 전前근대의 마지막에 출현시켰다."(120-2)
"한편 스키타이와 병립했던 아케메네스왕조 또한 다양한 지역 사회를 포함한 '거대 국가' 패턴의 원류를 이룬다. 즉 스키타이와 아케메네스라는 남북 양국은 그 후 유라시아 역사의 이중 국가 패턴(그것도 광역 국가의)의 원류인 것이다." "'세계제국' 아케메네스왕조를 실제적으로 건설한 다리우스 1세는 장대한 구상을 토대로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고 여러 갈래의 국가·사회의 건설 사업을 펼쳤다. 중앙과 속령이라는 양면을 기본으로 배려하며 재조직했던 다리우스의 여러 시책은 총체적으로 국가·사회·경제·문화 건설의 요점을 거의 망라하고 있다. 그 후 인류사에서 '국가'라는 점의 원형, 특히 '제국 지배의 원형적 이미지'라고 해도 좋은 형태의 대부분은 모두 다리우스의 국가 건설 사업 중에 나오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의 도시 문명의 의미만을 오로지 높이 내걸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주장이나 언설의 대부분은, 물론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얼마나 편협하고 독선적인 것이지 부정하기 힘들다."(124, 127-8)
"동반부에서는 유목 국가의 형성이 서반부보다 훨씬 늦었다. 사실 '중화 본토'도 아케메네스왕조를 기준으로 보면 시기적으로 크게 늦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중국 본토의 전국시대 이전 동방의 유목민들은 말을 키우고는 있었지만 뛰어난 기마 기술과 그를 뒷받침할 각종 마구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이동 목축의 범위 또한 지극히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이루어졌다. 유목민이라고는 하지만 걸어 다니는 유목민이었고, 따라서 유목 생활의 내용이나 집단의 규모도 작았으며 군단이라는 의미 또한 매우 미약했다. 그런데 그것이 크게 변한 것이다. 도시 주민과의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또 하나의 의미를 전한다. 유라시아 서반부에서 발달한 기마 기술과 그것을 전제로 운영되는 넓은 범위의 활용이라는 말 그대로 유목 사회 시스템이 동방의 유목민들에게 거의 완전하게 전해졌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로 희미한 존재였던 유목민들은 기동성과 집단 전술을 몸에 익히면서 급속도로 군사화되었다."(137-8)
"《사기》 〈흉노열전〉에서 권력을 장악한 묵돌은 냉정하고 과감한 타고난 군사 지휘관으로서(아마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일정 부분 이상화되어 묘사되고 있다. 거기에는 사마천의 명확한 의도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즉 자기가 속한 한왕조를 개국한 유방에 대한 묘사는 묵돌의 경우와 전혀 다르다. 사마천이 말하는 묵돌과 유방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우열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씩씩하고 용감한 영웅은 다름 아닌 묵돌이다. 어딘가 무능하고 어리석으며 칠칠치 못한 유방의 멍청한 모습을 《사기》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마천은 사태를 주시하며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읽으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기록했다. 그것을 전혀 몰랐던 것은 후세의 독자들이었다. 그것은 당시 현실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중화'라는 가상적인 의식의 세계가 사전에 시야를 한정시키고 그 좁은 시야로 《사기》를 읽고 그 속에 담긴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뒤집힌 역사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148-9)
4장 초원과 중화를 관통한 변동의 파도
"한나라와 흉노 간의 총력을 기울인 장기전은 결국 두 제국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공격을 받은 흉노는 연합 주권의 형태 그 자체가 크게 흔들렸고 몇 가닥의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편 공격을 한 한나라는 국가·사회의 내부에서 혼란이 발생했다. 직접적으로는 거액의 군사비 지출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 나고 말았다. 무제를 중심으로 한나라 정부는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고, 소금·철·술을 전매로 바꾸었으며 '균륜', '평준' 등의 물가 조절 정책 같은 다양한 정책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려고 시도했다. 무제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련의 전매제도는 이후 중화왕조에서 계승했고 세수의 절반 가까운 부분을 차지했다." "전쟁 비용 염출을 위한 당연한 결과로서 경제의 왜곡까지 더해져 사회에 짙은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결국 한무제 사후 그의 후계자가 된 소제昭帝는 곧바로 흉노와 강화를 맺는다. 한나라의 약속 파기에서 시작된 '흉노-한 전쟁'은 다시 한나라의 요청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180-2)
"유연은 예의 묵돌의 후예로 선우 왕가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계보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성을 중국풍으로 유劉라고 쓴 것은 한나라의 초대 황제인 유방이 종실의 딸을 묵돌에게 시집보낸 이후 한나라의 공주와 통혼에 의해 한왕조 유씨의 피가 선우 왕실에도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왕실의 신성한 혈맥인 유씨 자체가 후한의 현제 이후 촉한의 황제였던 유비 일문 이후 정치적인 존재로는 단절되었기 때문에 이 흉노 왕족이 함께 쓰는 유씨야말로 제대로 된 유씨였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유연은 몸속에 과거의 두 제국인 흉노와 한의 피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초원과 중화의 틀이 무너지고 서로 난입해서 공방을 벌이는 난세였던 당시 유연이야말로 귀한 존재 가운데서도 귀한 존재였고 왕자 중의 왕자였다. 두 왕권의 혼혈이라고 해도 좋을 존재, 그 자체가 당시 아시아 동쪽에서 뛰어나게 우수하고 신성한 상징이었던 것이다."(203-4)
"한의 황제가 된 유연은 불과 2년 뒤인 영가 4년(310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진왕조 타도 작전이 한창일 때였다. 유연은 상징적인 혈통과 재능에 더해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운명을 지닌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이른 죽음은 흉노왕조를 단명하게 만든 하나의 원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정치 상황을 다시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연이 없는 흉노족의 한왕조는 이미 초라해진 진왕조를 몰아냈다. 영가 5년(311년) 진의 수도 낙양은 한왕조의 흉노 군대에게 함락되었다. 이 전후의 동란을 일반적으로 영가의 난이라고 부른다. 난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정권 교체였다. 이 사건을 진왕조에 대한 흉포한 '이민족의 반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중화사상의 산물이다." "애초에 이 시대에 있어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시대는 현실적으로 '이민족'과 '한민족'을 확실하게 나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근대주의의 편협한 '민족'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곳에서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다."(222)
"이번에는 시대를 건너뛰어 선비 탁발부가 결성한 대국은 북위라는 화북의 통일 정권으로 성장한 다음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고 각각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라는 이름으로 바꾼 다음 그 북제가 수隋에서 당으로 바뀐다. 즉 이들 정권은 모두 선비 탁발부 집단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일련의 국가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라고 또렷하게 선을 긋기 어렵다. 대국에서 북위를 거쳐 마침내 당에 이른 국가는 중화풍의 왕조 이름을 바꾼 연속된 국가였다. 권력의 실제 그 자체의 연속성, 공통성에 착목하면 현실적으로는 '탁발拓跋 국가'라고 일괄해서 취급하는 것이 적절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5호 16국 시대'라고 하면 이 시기만이 '주변의 야만족'들이 중화에 도발한 시대라고 별다른 의심 없이 그 오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중국사에서 순수한 한족왕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잘해야 한漢·송宋·명明 정도밖에 안 된다. 북위나 당나라는 중화왕조로 보고 5호 16국은 이민족의 왕조로 보는 것은 사기에 가깝다."(224-5)
5장 세계를 움직인 투르크-몽골족
"5세기를 전후하여 초원 세계는 동쪽에서 차례로 투르크·몽골계 연합체인 유연, 투르크 색깔이 짙은 고거, 이란계가 정권 중심인 에프탈이라는 세 부류의 유목 국가가 나란히 있는 상황이었다. 이 삼국의 동서에는 강력한 정치 세력이 있었다. 동쪽은 탁발 국가에서 유래한 북위가, 서쪽은 이란고원을 중심으로 한 사산조페르시아가 그것이다. 이들 삼국과 두 나라, 모두 5개의 국가가 서로 착종한 정치 관계를 맺고 항쟁했다." "또한 이런 사태를 좀더 시야를 넓혀 바라보면 남중국의 남조와 동지중해 지역의 동로마 또한 다분히 깊은 관계와 이해로 얽혀 있었다. 즉 유라시아 동서에서 7개국이 진주처럼 꿰어져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역사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7개국의 갈등은 '유라시아 시대'의 방문을 알리는 최초의 종소리였다. 그러나 그 각축 상황은 겨우 반세기로 끝났다. 6세기 중반 무렵 중앙유라시아의 한쪽 구석에서 보다 격렬한 시대와 정국을 주도할 강력한 유목 국가가 갑자기 출현했다. 그것은 돌궐이었다."(248-9)
"그러나 돌궐이 유라시아 동서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하나로 통합한 것은 불과 30년 정도였다. 583년 돌궐은 동서로 분열했다. 동돌궐은 몽골고원을 본거지로 삼아 그 주변을 지배했고 서돌궐은 천산 산중을 근거지로 중앙아시아와 서북유라시아를 지배했다. 그런데 이러한 돌궐의 동서 양분은 돌궐 국가의 급격한 확대가 이루어진 초기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동쪽과 서쪽 두 개로 담당 지역이 양분되어 있었는데 결국 그대로 분할되고 만 것이다.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투르크계 주민을 기반으로 하는 한편 크고 작은 분권 세력이 할거했던 돌궐은 극히 이완된 연합체였다. 게다가 '국가' 전체를 통합시킬 수 있는 중앙권력은 거대한 판도와 비교할 때 너무나도 미약했다. '세계제국'을 지속시킬 수 있는 정치기구가 아직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대한 돌궐의 동서 분열은 탁발 국가에 행운을 안겨주었다." "581년 양견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대대로 물려받았던 작위인 수국공隋國公에서 따서 수왕조를 열었다."(253-5)
"아마 성립 초기의 당왕조는 다시 강력해진 동돌궐의 속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관계가 곧바로 역전되었다. 동돌궐의 지배 아래에 있던 철륵鐵勒을 비롯한 설연타薛延陀 등 투르크계 여러 부部가 독립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막 당나라의 제2대 황제가 된 태종 이세민은 630년 이를 기회로 삼아 일거에 힐리 카간을 밀어붙였고, 동돌궐의 옛 속국과 독립을 지향했던 여러 부를 회유하며 자신을 카간으로 섬길 것을 요구했다. 또한 청해 지방의 토욕혼을 굴복시키고 더 나아가 급속하게 국가를 형성한 감숙회랑이 이끄는 토번과 화친을 맺은 당왕조의 세력권은 단숨에 아시아 동방 전체를 덮을 만큼 넓어졌다. 태종 이세민이 내륙 아시아의 군장들로부터 '천가한天可汗'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투르크-몽골어로 '텡그리 카간'이었다." "계보로 보면 선비 탁발부 출신으로 부계나 모계 모두 분명 흉노로 거슬러 올라가는 당나라의 태종은 유목민들이 보기에 적합한 투르크 몽골의 왕이었다."(256-7)
"동돌궐은 744년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한 토쿠즈오구즈Toquz-Oghuz 연합에 의해 무너졌다. 토쿠즈오구즈 또한 투르크 계통이었다. 위구르는 ('안사의 난' 이후 급속도로 무력해진) 당왕조와 안전 보장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거액의 경제 지원을 받는 화친 계약을 맺었다. 이것은 당왕조 중앙정부의 재정을 극도로 약화시켰고, 마침내 당은 탁발 국가의 전통이었던 조용조租庸調를 근간으로 하는 세금 체계에서 양세법兩稅法에 의한 세금 징수 시스템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역대 중화왕조에서 소금 전매가 중앙 재정의 근간이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위구르의 주도는 정치·군사 면에 그치지 않았다. 돌궐 이후 투르크 국가와의 인연을 강화한 소그드 상업 세력과 결탁한 위구르는 소그드인의 대상들을 활용해서 자기들의 영향 아래에 있는 당왕조 중국에 말을 주고 비단을 받는 '견마絹馬 무역'을 확대했다. 물론 국제 상품인 비단은 소그드 상인의 상업망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그 너머로 전매되었다."(267-70)
"키타이(거란) 국가는 그 속에 유목 사회와 농경 사회를 품고 있었고 그 점에 대해 말하면 '유농遊農 복합 국가'라고 표현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위구르 유목제국에서 명확해진 유목과 도시의 관계는 키타이 국가에 이르러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즉 단순히 유목 국가, 농경 국가로 구분하는 도식을 적용할 수 없는 시대로 이미 접어들었다. 유목 국가는 뭉치기도 쉽지만 깨지기도 쉬웠다. 그것이 장점이기도 하고 약점이기도 했다. 붕괴되기 쉬운 것은 연합체가 갖고 있는 숙명이었는데, 다르게 표현하면 중앙권력과 그것을 지탱하는 기구·조직이 국가 전체의 총량과 비교해서 극히 작았다는 점으로 압축된다. 그런데 키타이 국가에 이르러서는 그 결점이 상당히 수정되었다. 키타이 국가는 유목 국가의 구조에 농경 국가의 시스템을 수용해서 당시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력함과 지속력을 손에 넣었다. 즉 유목 국가는 키타이 국가 이후 국가 시스템이 변했다. 즉 국가의 형태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287-9)
6장 몽골의 전쟁과 평화
"주로 혈연 또는 의리를 통해 유사 혈연으로 맺어진 소규모 집단을 편의상 '씨족'이라고 부르고 그런 '씨족' 집단이 지연地緣이나 정치적인 이유(이 경우도 '피'로 맺어진 친소 관계가 강조된다)로 하나로 모인 것을 편의적으로 '부족'이라고 부른다. 고원에 할거하는 여러 세력 가운데 동부의 흥안령 일대를 타타르Tatar, 콘기라트Qonggirat, 중부의 오르콘 토라 일대의 케레이트Kereyit, 북부의 셀렝게 유역의 메르키트Merkit, 그리고 서부의 알타이 일대의 나이만Naiman 등이 유력했다." "그러나 몽골('맹골萌骨', '몽올蒙兀')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오랫동안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던 듯하다. 약소 집단인 몽골부가 부상한 것은 12세기 무렵으로 테무진 등장의 전야라고 해도 좋다. 이때만 해도 몽골은 신흥 세력이었다. 12세기 끝 무렵 테무진은 몽골 집단의 리더로 부상했다." "여기에 용모와 언어가 제각각인 유목민들이 테무진이라는 일개 권위자 아래로 모여드는 양상이 벌어졌다. 이를 정치 연합체 외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320-1)
"1206년 칭기즈칸을 칭한 테무진이 휘하의 유목 연합을 '대몽골국'이라고 명명하면서 몽골은 국가의 이름이 되었다. 인종과 민족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것이 몽골 확대의 열쇠다. 이때 '몽골'에는 '민족'이라는 용어로 부를 수 있는 동일성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모여든 몽골이 '몽골 공동체'가 된 것은 칭기즈 체제에 의한 유목 집단의 재편성이 일단 종료되고 대외 원정에 나서는 1211년부터다. 전후 6년에 걸친 금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은 거국일치擧國一致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몽골과 금의 전쟁' 동안 신흥 '대몽골국'의 성년 남자 대부분은 고비사막의 북쪽에 있는 본거지(막북漠北)를 떠나 막남漠南의 땅에 병참기지를 구축하고 화북 전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국가 건립 후 곧 이어진 이 대작전에 의해 '대몽골국'의 유목민들은 자신들이 '몽골군'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속으로는 다양한 부족과 씨족에 속해 있었지만 겉으로는 '몽골'이라는 하나의 덩어리라는 것을 막대한 전리품과 함께 자각했다."(322)
"동부 천산의 남북에 나라를 세운 불교·통상 국가인 '천산 위구르'와 그 서쪽인 천산 산중, 이리 강의 계곡에 나라를 세운 무슬림왕국인 '천산 카를루크'(카라한왕조와도 관계된)는 모두 투르크계 지배자를 섬긴 작은 국가였다. 두 국가 모두 일찍부터 몽골로의 귀속을 결정했다. 그리고 두 국가가 참가해서 역시 투르크계 이슬람 대세력인 호라즘샤왕국을 붕괴시킨 결과로 중앙아시아에서 서북유라시아, 서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던 투르크계 여러 집단이 차례로 몽골에 편입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특히 서북유라시아 초원의 킵차크족은 이보다 10년 후 '바투의 서쪽 원정'에 의해 조치 울루스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로 불과 4개의 천인대를 갖고 있었던 조치 집안은 일거에 30배가 넘는 대병력을 획득했고 몽골제국 전체에서도 굴지의 군사력을 지니게 되었다." "몽골은 대부분 '동료'를 늘려 그것을 '몽골'이라는 이름 아래로 차례차례 편입했다. 편입·재편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 조직화야말로 몽골의 확장에 큰 디딤돌이었다."(330-1)
"1260년을 정점으로 하는 제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무력에 의해 제5대 몽골 대칸의 지위를 손에 넣은 쿠빌라이는 방대한 인구와 드넓은 판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놓고 근본부터 재검토해야 했다." "몽골제국은 이후 쿠빌라이 집안이 독점하게 된 대칸의 '대원 울루스'를 중심으로 서방의 세 영역을 포함한 '세계 연방'의 색채를 짙게 드러냈다. 이른바 이중 구조로 이루어진 몽골제국을 쿠빌라이가 받아들였다고 말해도 좋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경제와 유통의 조절을 통해 유라시아 규모로 통상을 유도해서 분유分有 체제가 강화된 몽골제국 전역에서, 유라시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세계'를 연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쿠빌라이는 그 전제로 남중국의 남송을 접수하고 마침내 중국 전토를 판도에 넣었으며 남쪽의 습윤 아시아와 뜨거운 바다를 시야에 넣었다. 몽골제국이 확대되어가는 역사 속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바다 진출을 이루었다."(336-7)
"남송의 '유산'은 쿠빌라이 정권이라는 이용자의 도움으로 활짝 꽃을 피웠다. 몽골제국 전체에서 생각하면 쿠빌라이의 우방 훌레구 울루스는 중동의 동쪽 절반을 지배했다. 즉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의 무슬림 해상 세력은 모두 몽골의 손에 장악되었다. 쿠빌라이의 대칸 정권인 '대원 울루스'를 중심으로 동서가 호응하는 형태로 몽골의 해상 진출과 동서 해양 무역의 장악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여기에 8세기 이후 무슬림 해양 상인의 동진이라는 시대를 관통하는 현상과 당나라 말기 이후 남송을 거쳐 해양에 대한 지향성을 높여갔던 강남이라는 풍요로운 산업사회가 쿠빌라이의 '대원 울루스'라는 강력한 추진력에 의해 하나로 묶여 확실한 모습으로 시스템화되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내륙과 해양이 참된 시스템으로 결합된 시대의 개막이었다. '유라시아 대교역권'이라고 불러야 할 초대형 통상·교류의 소용돌이가 13세기 말기인 1280녀대 끝자락에 명확해졌다."(343-4)
"몽골의 확대와 그 후의 통치를 통해 군사·정치조직의 몽골과 상업·경제 조직의 무슬림 및 위그르와의 공동화 또는 일체화가 두드러졌다. 이런 면에서 이들을 각각 몽골 지배의 '겉'과 '속' 얼굴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당시 이들 상업 세력은 자기 이외의 누군가를 선택해서 '파트너'로 함께 활동했다. 그리고 그것이 발전하면 자금을 모아서 대형 자본을 만들어 그것을 토대로 공동 또는 단체로 각종 경제 활동을 영위했다. 그것을 투르크어로 '오르톡Ortoq'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동료', '동업자'라는 뜻이었는데, 그것이 변해서 '조합'이라는 의미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쿠빌라이는 이전부터 몽골과 표리일체의 관계였던 오르톡 무리를 더 강력하게 정권 내부로 끌어들였다. 그 가운데 유력자를 정부 고관, 그것도 경제·실무 부문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해서 오르톡이라는 조직과 다양한 영리 활동을 통째로 국가 관리 아래에 두었다. 오르톡들은 쿠빌라이와 그 브레인들이 고안한 새로운 '세계 전략'의 첨병이었다고 보아도 좋다."(351-4)
7장 근현대사의 틀에 대해
"전근대의 유라시아 세계사는 군사력이 뒷받침된 정치권력이 사람들과 지역을 하나로 묶어 '국가'를 만들었다. 전근대의 유라시아뿐만 아니라 근현대의 세계에서도 '민족'은 (그 이후에) 만들어졌다. 분명히 '민족'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경우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확실한 유래와 전통을 가진 '민족'뿐만 아니라 막 만들어진 '민족'도 있다. '민족'이라는 생각 자체가 작위성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근현대에 '소수민족'이 마구잡이로 만들어졌다. 아마 국민국가가 '소수민족'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국가라는 환상 속에서 국가의 '주체'가 되는 '다수 민족'이 설정되고 거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 '소수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나 현재를 바라볼 때 '민족'이라는 말 속에 다양한 변화가 있고, 현실에서는 도저히 하나로 묶을 수 없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하나로 묶어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도에서 단색으로 칠할 수 있는 '민족'은 오히려 소수이며 때로는 부자연스럽기도 하다."(400-4)
"지구상에 있는 각각의 지역과 문명권에는 고유의 가치와 역사가 있고 각각 순위를 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그 결과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문명권, 중동, 중앙아시아, 러시아, 유럽, 남·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이 각각 병렬되고 만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오히려 일종의 '문명주의'가 숨겨져 있다. 현대의 눈을 들이대고 과거에도 분명히 그러했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역사와 지역을 분리한 것이다. 물론 역사시대에 그런 지역 분리가 적당한지 여부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 또 거론되는 여러 지역 사이의 연쇄나 역사 전개에 대한 통찰 또한 없다. 이들 모두 현대 본위의 접근 방식이다. 아니 그보다 과거의 유럽 중심주의와 비교해 각 지역을 '평등하게 다룬다'는 미명으로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기는 분위기조차 존재한다. 그러나 과도한 분리는 오히려 역사의 현실을 숨기는 일이 되고 만다. 그렇게 본래의 역사에서 분리된 연구는 '지역사'나 '문명권사'로 한정되어 인류사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404-5)
"유라시아라는 용어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입힐 필요가 없다. 유라시아라는 틀이 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부분도 많다. 역사시대에도 그러했고 현대에도 유라시아라는 시각이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화의 역사를 열어젖힌 근대 서구는 극단적으로 무장한 군사 국가였다. 요컨대 세계사는 유목민이라는 땀냄새를 풍기는 군사 권력이 통합하는 시대에서 인력을 초월하는 육·해·공의 거대 전투력을 가진 시대로 이행한 것이다. 그 근대 서구형 문명이 몽골을 정점으로 하는 유목 국가를 '야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딘가 몹시 어리석고 웃기는 일이다." "이제까지의 역사상像·문명상像의 왜곡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고 할 때 아마 중앙유라시아와 유목민의 역사는 유력한 하나의 시점이 될지도 모른다. 근대 세계에서는 원래 '국가'라는 것에 배치되는 주변적인 존재로 여겼던 유목민이 사실은 과거 인류사를 유지하고 '국가'라는 것에 대해서도 최대의 담당자였다. 바로 여기에 세계사라고 불리는 큰 패러독스가 있다."(405-6, 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