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전쟁 전야
1. 임진왜란과 사람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투 방식을 선호하였는데 이것이 그를 일본 장악으로 이끈 힘 중 하나였다. 또한 히데요시는 전쟁이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교섭으로 전환하는 속도도 빨랐다." "'일본 통일'을 완수한 히데요시는 일본의 생산 체제를 새로운 기준으로 편성하였다. 동일한 기준 척도를 사용해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여 각 토지의 생산량을 확정하는 동시에, 해당 토지를 경작할 사람도 정하였다. 토지 경작자인 농민층은 토지 소유자인 다이묘에게 직속되었고, 따라서 그 사이에 있던 중간층의 수탈을 배제되었다. 배제된 중간층은 농민이 되거나 다이묘에 속하는 무사가 되어야 했다. 다이묘는 히데요시가 명령하면 확정된 생산량에 따라 군사를 동원해야만 했다. 히데요시가 생산 체제를 급격히 재편한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단기간에 대규모의 침략군을 편성하기 위해서이지 않았을까?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된 일본은 그의 의도에 따라 침략 체제의 길을 착실히 밟아 가고 있었다."(18-20)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의 해결은 선조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명나라의 법전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이자 이성계의 정적이던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고려 말에 명으로 도망친 윤이와 이초의 모함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이를 수정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명에서 조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고 미루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선조대에 더욱 적극적으로 수정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데, 1588년 유홍이 개정된 『대명회전』 한 질을 가지고 오면서 최종적인 해결을 보게 되었다. 선조는 신하들의 요청으로 '정륜입극 성덕홍렬正倫立極 盛德洪烈'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200년간 각고의 노력으로도 이루지 못한 '윤리를 바로 세운 커다란 공'을 다름 아닌 선조가 세운 것이다." "후대에 선조가 재위한 시기를 '목릉성세穆陵盛世'로 칭송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없었더라면 선조의 시기는 티끌 하나 없는 융성한 시대로 기억되었을 것이다."(22-4)
"임진왜란 당시 명의 황제였던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에게는 '태업한 황제'라는 오명이 따라다닌다. 그런데 그에게 또 다른 별명이 있다. 바로 '고려 황제'다. 황제의 업무를 거부하던 신종이 유독 열성을 다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조선은 명의 구원병을 움직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신종을 칭송하였고, 신종은 자신의 언행에 열렬히 반응해주는 조선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선물을 내려 주었다. 국내의 정치는 상관하지 않고 조선의 일에 팔을 걷고 나서는 신종을 두고, 중국인들은 '고려 황제'라며 비꼬았다. 신종은 선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어린 시절 왕위에 올라 유능한 스승들을 만나 정치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는 점과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 흔들림 없이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강하게 느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선조가 신하들 사이의 정치 분쟁에 개입하면서 자신에게 권위가 집중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한 반면, 신종은 정치를 외면해 버렸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27-8)
2. 전쟁 전 세 나라는 어떤 관계였을까
"본래 조선인이 외국을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나라의 공식적인 임무를 띠고 파견되는 사절만이 외국을 경험할 수 있었다. 조선과 가장 가까운, 그리고 '익숙한' 외국은 명이었다." "사행원들은 정해진 길을 따라 북경에 들어간 후에도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 없었다. 조선의 사신에게는 주어진 임무가 있었다. 대개 조선 국왕의 국서國書를 명 황제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북경의 지정된 숙소에서 대기하다가, 명 황제의 조회에 참석하여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명 황제의 회답을 받아 돌아가는 임무 외에 개인적인 행동은 허가되지 않았다." "한편 명에서도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조선의 사절과 같이 정기적인 형태는 아니었으며 규모도 크지는 않았지만, 국왕의 책봉이나 명나라의 중요한 일을 전하기 위한 사절들이 조선을 방문하곤 했다. 그렇다면 명나라 사람들은 실제의 조선을 얼마나 알 수 있었을까. 중요한 것은 조선 사람이든 명나라 사람이든 자신이 보고 싶은 면만을 보고자 했다는 사실이다."(31-4)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1587년에 쓰시마對馬의 소씨宗氏에게 조선 국왕으로 하여금 일본으로 항복하러 오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히데요시가 조선에 대해 가지고 있던 관념의 한 면을 보여 준다. 그는 조선이 쓰시마 옆의 어느 지역 정도이며 자신의 명령에 쉽게 따를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인식을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1590년 조선 국왕에게 보낸 국서의 내용이다. 그중에서 자신이 명을 침략할 예정이니 그때가 되면 협조하라는 대목에 주목해 보자. 이는 조선과 명이 맺고 있던 관계, 곧 '명 중심의 국제 질서'에 대한 지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거나 이를 무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전쟁이 시작된 후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들은 조선이 매우 넓고, 조선인들과 말이 통하지 않으며, 조선인들이 자신들을 '해적'이라고 여기며 도망치거나 공격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세 나라 모두 자신이 인식하고자 하는 모습으로만 남을 인식하고 있었다."(35-9)
3. 침략의 서막
"1590년, 조선에서는 통신사행단을 구성하였다. 정사正使에 황윤길, 부사副使에 김성일, 서장관書狀官에 허성이 임명되었다. 이들이 들고 간 조선 국왕의 국서는 '일본 국왕'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고 앞으로 신뢰 관계를 맺어 우호를 유지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이때 오다와라 지역의 호조씨를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진한 상태였다. 다른 나라의 사신을 불러 놓고 자리를 뜬 데다가 기약도 없이 기다리게 한 행위, 그 자체가 외교 관계에서 있어서는 안 될 무례한 행위였다. 물론 히데요시는 통신사 일행을 항복 사절로 여기고 있었기에 이러한 행위를 꺼리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국왕의 국서를 받은 히데요시가 내놓은 답서에서 〈나의 소원은 세 나라에 아름다운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余願只願顯佳名於三國而已〉라는 부분은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 일면을 보여준다. 히데요시의 야망은 그 실현 가능성과 별개로 이제 조선 사람들도 아는 사실이 되었다."(42-4)
2부 전쟁과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
1. 벽에 부딪힌 전쟁, 협상의 시작
"일본군의 요구는 표면적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구한 대로 길만 비켜 주면 일본군은 조선에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은 채 조용히 명으로 향했을까? 국왕을 데리고 여기를 피하라는 요구는 히데요시의 말과 같이 조선에서 통치권을 포기하고 일본의 요구에 전면적으로 따르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초부터 히데요시는 조선을 일본과 동등한 나라로 보고 협조를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고 할지라도 조선이 오랜 기간 관계를 맺어 온 나라인 명을 '배반'하고 일본에 협조할 리가 없었다. 이덕형을 답을 듣고 저들은 〈명 침략에 협조해 달라〉는 명분은 물론 〈명 침략을 위한 길을 빌려 달라〉는 요구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다. 일본에서 교섭을 전담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쓰시마 측 인물들은 이후 더 이상 조선에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후일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에서 보낸 교섭자 심유경과의 대화에서 전혀 다른 요구 조건을 내세웠다."(58-9)
"명은 복잡한 관료 체계와 지방 조직을 갖춘 큰 나라였다. 장수를 임명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파견하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많은 시간이 들었다. 따라서 그 전에 조선이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당하지 않도록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이 목적으로 선발되어 조선으로 왔으며 이후의 강화 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인물이 바로 심유경이다." "1592년 8월 17일에 의주에서 선조와 만난 후 곧장 평양성으로 향한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만나 50일간의 휴전을 약속하고 돌아왔다.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편지도 하나 얻어냈는데 다만 명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원할 뿐이라는 내용이었다. 앞서 조선과의 교섭에서는 명을 침략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태도를 완전히 바꾼 것이다. 명과 교섭하는 자리에서 명을 침략하겠다는 말은 당연히 통하지 않을 것이다. 교섭 상대가 받아들일 만한 조건을 제시한 후 유리한 지점을 찾아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68-9)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심유경을 붙잡은 채로 12월 25일 의주에 들어왔고, 평양성으로 진격하였다. 한편 평양성의 일본군은 휴전 기간 동안 안심하며 심유경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나라의 대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명군은 심유경의 이름을 사칭하여 평양성에서 일본군을 불러내어 습격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성 전투가 재개되었다. 일본군의 저항은 거셌다. 현재 전해지는 〈평양성탈환도平壤城奪還圖〉 등에도 나타나 있듯이 일본군은 성벽에 빼곡히 늘어서서 창을 들이밀거나 조총을 쏴대어 명군과 조선군이 접근하기 어렵게 하였다. 성안에는 여러 겹의 방어 구역을 설치해 두었다. 그러나 명군은 이전의 패배를 통해 배운 점이 있었다. 성을 공격하기 위해 대포 등의 무기를 준비해 온 것이다. 병력도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은 평양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한성으로 모여들었다. 1593년 1월의 일이었다."(71)
2. 협상의 조건, 허세와 타협
"원래 히데요시가 조선에 직접 건너와 일본군을 지휘할 계획이었다. 일본군은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지 않고 중대한 결정을 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끝내 조선으로 오지 않았고, 모친의 사망 등으로 나고야를 떠나 있는 기간이 생기면서 조선 현지 사정의 전달과 명령의 하달 사이에 시간차가 크게 발생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히데요시가 조선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1593년 1월 23일에 일본군은 명군에 밀려 한성으로 후퇴했다는 사실과 군량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히데요시가 이 서신을 받은 것은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마침내 꿈에서 깨어났다. 4월 12일에 구체적인 후퇴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한성에서 퇴각하라는 명령과 동시에 진주성을 남김없이 섬멸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전쟁이 불리한 상황에 빠졌음을 깨달은 이후 히데요시의 전략적 전환은 매우 빨랐다."(83-5)
"히데요시가 제시한 7개 강화 조건을 간단히 요약하면 ①명나라와 일본의 혼인, ②무역 재개, ③화친 서약, ④조선 4도의 할양, ⑤조선 왕자와 신하를 인질로 요구, ⑥조선 왕자(임해군과 순화군)의 송환, ⑦조선의 서약서 작성이다." "교섭이 언제까지나 평행선을 달릴 수는 없었다. 타협 지점을 찾아야 했고, 마지막으로 히데요시는 본심을 내비쳤다. 히데요시는 사실 영토나 보물과 같은 실물을 요구하지 않겠으며, 무엇보다 명예가 중요하니 영토를 줄 수 없다면 이를 대신할 다른 무언가를 달라고 하였다." "요약하자면, 그는 결코 유리하지 않은 입장에서 손에 쥔 것도 없이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얻고자 하였다. 협박과 허세, 회유와 설득을 함께 사용하였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그가 필요로 한 것은 혼례(인질=명예)와 영토(실물)였고, 그중에서 좀 더 중요시한 것은 명예였다. 협상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히데요시는 매우 현실적인 교섭가였다. 그는 시세의 변화에 대한 적응이 매우 빨랐다."(86, 95-6)
"1593년 6월 말, 부산에 머물러 있던 심유경이 한성으로 출발하였다. 당초에 '히데요시의 7개 조건'을 최초로 전달받은 이들 중 하나가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심유경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상의하여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고자 했다. 혼례와 조선 영토 할양은 사실상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가 고안한 방법은, 고니시 조안 등 '일본 사신' 일행을 명나라 조정에 보내 사죄의 뜻을 표하고 명나라의 고위 관료를 일본으로 파견하게 하는 것이었다. 명나라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칙사의 화려한 행렬이 교토에서 히데요시를 접견하는 장면이 연출된다면, 히데요시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1593년 8월 이후, 명군은 무장 유정을 지휘관으로 하는 일부 병력만을 남기고 모두 철수하였다. 일본군도 울산에서 거제, 김해 지역에 이르는 일부 지역을 지킬 병력만 두고 나머지는 철수하였다. 전쟁이 강화 교섭기로 접어들었다."(101-2)
3. 조선과 명, 명과 명, 일본과 일본의 갈등
"조선이 판단하기에 명군 지휘부는 교섭을 추진하는 절차를 지키지 않을 뿐더러 교섭의 내용도 거짓투성이였다. '히데요시는 명 침략의 야욕을 가졌던 자이며 지금도 전혀 반성하고 있지 않은데 그가 책봉과 조공을 바란다니 이는 심유경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결국 교섭은 파탄이 나고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 조선이 강화 교섭 자체에 반대하고 전쟁만을 우선하였던 것이 아니라, 당시 명군 지휘부의 강화 교섭 방식을 불신한 것이었다. 게다가 강화 교섭이 진행되면서 송응창의 조선 비난과 권한 남용이 심해지자 조선의 저항감이 높아져 갔다. 이대로 명군 지휘부에 끌려다니다가는 후일 교섭이 파탄 나고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 명나라가 더 이상 조선을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1594년 2월, 마침내 조선 사신 김수가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는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성곽을 늘리고 있으며 도발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명을 침략하려 한다는 소문 등을 보고하였다."(108-9)
"1595년 5월 22일, 히데요시는 3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명·조선과 일본의 화평 조건'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 조건은 조선의 왕자다. 그런데 영토에 대한 규정이 여전히 흥미롭다. 조선의 8개 도 중에서 일본이 4개 도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 것이다. 명과 조선은 인정하지 않았던 전제조건이다. 어쨌든 히데요시는 이 전제를 근거로 조선의 왕자가 인질로 온다면 그의 영지로 내리는 형식을 취하여 '일본이 가지고 있는' 4개 도를 돌려주겠다고 하였다." "두 번째는 명과 조선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심유경이 조선의 왕자(인질)를 데리고 웅천 왜성에 온다면 일본이 만든 왜성 중 10개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칙사, 즉 명나라 사신에 대한 부분이다. 명나라에서 파견한 사절의 행렬이 자신에게 오는 장면이 실현된다면 '명나라가 사죄를 하였다'라며 선전할 수 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양보'를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히데요시의 양보가 조선의 입장에서는 전혀 양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124-7)
3부 협상 결렬, 다시 시작된 전쟁
1. 1596년 9월, 오사카에서 벌어진 일
"마침내 9월 1일 책봉사가 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만났고 대화를 나누었다. 9월 3일 책봉 의례가 행해졌다. 히데요시는 기쁘게 책봉을 받았고 이로써 '일본 국왕'이 되었다. 강화 교섭에 공로를 세운 이들도 함께 명나라의 관직과 그에 상응하는 관복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의 통신사에 대해서는 전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책봉 의례가 끝난 후 며칠 동안 심유경이 직접 히데요시와 만나 이야기하고 서신도 전했으나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히데요시는 〈명은 자신을 책봉해 주었으니 적대시하지 않겠으나 조선은 무례하니 화친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책봉사와 통신사에게 즉시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조선을 다시 침략할 의지를 밝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여러 가지 소문이 난무하였으나 공통된 부분은 〈명과는 적대하지 않겠다〉, 〈조선은 무례하니 다시 침략하겠다〉였고, '무례'의 근거는 〈명과 일본의 교류를 방해〉했으며 〈통신사가 늦게 옴〉 그리고 〈왕자가 오지 않았다〉였다."(136-8)
"히데요시는 왕자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책봉사와 통신사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책봉사의 책임자였던 이종성이 도망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통신사가 책봉사보다 늦게 온 데다가 관직이 높지 않은 자라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이대로 전쟁을 끝낼 수 없었다. 책봉 의례를 마친 후, 그는 책봉사 일행과 담판을 하여 조선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낼 약속을 받고자 하였다. 그는 명나라를 적대해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은 이미 책봉사를 보냈기에 더 이상 받아 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조선에 집중하였다. 책봉사는 그의 요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명나라가 종주국이 되어 책봉까지 해주었는데 무엇을 더 바란다는 것인가. 같은 국왕의 나라인 조선과 '화해'하고 전쟁을 끝내라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전쟁 위협을 가해서 혹은 정말로 다시 전쟁을 일으켜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했다. 교섭 결렬 선언 후 히데요시의 요구는 단순해졌다.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것이었다."(140-1)
2. 새로운 전쟁과 협상의 재개
"정유재란은 임진왜란과 여러 부분에서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1597년 2월 21일 일본군 장수들에게 내린 명령서에서 그 일면을 살펴보자. 총 21개 항목 중에서 열일곱 번째는 〈전라도는 철저히 공략하고 충청도와 그 외의 지역은 가능한 만큼만 공격할 것〉, 열아홉 번째는 〈군사 행동이 끝난 후에는 성을 지을 장소를 논의하고 다수결로 성을 지킬 장수를 정한 뒤, 일본으로 돌아오기로 결정된 장수들이 성을 쌓을 것〉이다. 이는 곧 이 전쟁이 명나라를 침략하거나 조선 전역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일본군은 실제로 충청도 직산稷山까지 북상하여 전투를 치른 후 남하하여 남해안에 성을 쌓고 주둔하였다." "일본군은 조선 백성을 사로잡아 포로로 끌고 가거나, 코와 귀를 베어 가는 일을 자행하였다. 이 전쟁은 영토를 얻을 가능성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영토를 주겠다'는 약속을 할 수 없었기에 조선인 납치를 허락하거나 코와 귀를 증거로 포상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147-51)
3. 전쟁의 종결 - 전쟁과 평화, 전투와 강화 교섭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는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공식적인 철수 명령은 그의 사후 당분간 히데요리를 보좌하여 공동으로 정권을 담당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다이로大老들에게 맡겨졌다. 그들의 고민도 적지 않았다. 일본군은 무조건 철수해야 했다. 전쟁의 명분은 이미 사라졌다. 전쟁을 일으킨 자도 죽었다. 일본군을 최대한 안전하게 귀국시킨 후, 하루라도 빨리 일본을 안정시켜야 했다." "일본 측은 조선에 왕자는커녕 자그마한 공물을 요구할 상황도 아니었다. 몸만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어도 다행이었다. 일본군의 교섭은 오직 무사 철수를 목표로 할 뿐이었다. 이는 일본군과 대치 상태에 있으면서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명군의 이해 관계와 맞아 떨어졌다." "한편 진린은 이순신의 설득에 마음을 바꾸었다.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수군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러 온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수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160-3, 166)
"〈이슬로 왔다가 이슬로 사라지는 삶인가. 나니와(오사카)의 영광은 꿈속의 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기 전에 남긴 시다. 오로지 서정적이고 몽환적이기만 하다. 이 시처럼 히데요시는 자신의 영광스럽던 시절에 대한 기억과 자식에 대한 걱정만을 지닌 채 영원한 잠에 들었을 것이다. 그는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의 행위가 가져온 참혹한 전쟁을 기억해야만 한다. 명의 황제 신종 만력제는 1620년까지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임진왜란 후 명나라는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황제는 여전히 국내 정치 문제의 해결에 관심이 없었다. 후계 구도에 대해서도 손을 놓았다. 신종 만력제의 사후 명나라는 약 24년을 더 지탱하다 멸망하고 말았다. 선조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국왕으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었다. 신하들의 경쟁 구도를 교묘히 이용하여 정치의 중심에 자신을 두었고, 광해군 책봉 문제와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오히려 그에게 권력이 집중되게 하였다. 선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왕권은 약해지지 않았다."(167-9)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전 정권의 전쟁을 반성하며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명당 유정이 일본 내부의 정치 상황과 이에야스의 의도를 알기 위해 일본까지 파견되기도 하였다. 조선은 오랜 교섭 끝에 조건을 정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국왕으로 일본을 장악하고 있으며 국교를 요청한다는 국서를 보낼 것, 그리고 임진왜란 때 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범인(범릉적犯陵賊)을 잡아 보내라는 것이었다. 국서는 이에야스가 정권의 담당자로서 공식적으로 국교를 요청한다는 증명이었고, 범릉적의 송환은 조선에 행한 범죄를 반성하라는 요구였다. 절차와 명분을 중요시하는 조선의 조건이었다. 조건은 우여곡절 끝에 '성사'되었다. 이후 국서는 수정 과정을 거쳐야 했고, 범릉적은 진범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은 국서를 받아들이고 범릉적을 처형함으로써 일본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1607년 조선에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후 조선과 일본의 우호 관계는 에도 막부가 멸망하기까지 250여 년이나 이어졌다."(1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