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제1장 넓은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 -춘추 · 전국시대
"천조天朝라는 것은 글자에서 읽히는 것과 같이 '천자天子의 조정'을 가리킨다." "천조 혹은 천자가 통치하는 공간이 천하天下이다. 일찍이 중국인의 마음속에는 하늘의 관념이 있었는데, 이에 따르면 우주를 주재主宰하는 하늘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천하를 통치할 대행자를 덕이 있는 사람 중에서 선택하여 그에게 천명天命을 내려 하늘의 아들, 즉 천자에 임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천자란 하늘의 위임을 받아 천하를 통치하는 덕을 갖춘 사람인데, 천자가 덕을 잃어 천의(天意, 실제로는 백성의 뜻이다)에 반하여 멋대로 행동을 하게 되면 하늘은 분노하여 다른 사람에게 천명을 내리게 된다. 이른바 혁명革命이다. 옛날부터 새로운 왕조의 창설자는 이전 왕조가 덕을 상실했기 때문에 새롭게 자신이 천명을 받았다고 하는 천명사상으로 자신의 왕조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진奏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이래, 적어도 유교가 국교화되었던 한대漢代 이후는 황제가 천자로서 천하를 통치하는 구도가 확립된다."(18-9)
"그렇다면 애초에 천하란 도대체 무엇일까? 〈넓은 하늘 아래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모든 땅에는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 『시경』소아小雅·북산北山〉 천하의 중심에는 반드시 천자(왕)가 존재하고 그 위덕威德이 미치는 범위가 천하인 것이다. 천하와 천자는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니 이것이 현재의 세계라는 개념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관념적으로 천하는 천자의 덕에 응하여 마음대로 신축伸縮하고, 명확한 경역境域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천자의 덕이 높으면 높은 만큼 천하는 확대되고 반대의 경우에는 축소되는 것이다. 현실의 황제가 통치하는 천하도 이와 같은 것으로, 영역의 확대 및 조공국의 증대는 황제가 덕을 갖추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천하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현실의 왕조 치하에 있어서는 천하가 넓은 의미[중화와 화이의 지역을 모두 포함한 지역], 좁은 의미[중국 왕조가 실제로 지배하고 있는 지역] 두 가지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20-2)
"넓은 의미의 천하에서 기능했던 것은 화와 이의 명분을 올바로 만드는 화이 질서이고, 천조가 이 질서를 올바르게 운영하는 한 천하는 안정된다. 한편 좁은 의미의 천하(중국 국내)에서는 천조를 이끌어가는 사람인 천자의 정당성이 요구되는데 특히 유교가 정통 사상이 된 이후에는 덕치德治와 예치禮治가 군주 지배의 근거라고 여겨졌다." "예禮라고 하는 것은 예의범절 등 일상적인 행동거지도 포함되지만, 보다 넓게는 질서유지를 위한 규범(준칙) 또는 규범의식이나 혹은 이러한 것들의 구체적인 행위 형식인 의레와 제도를 의미한다. 예는 곧바로 넓은 의미, 좁은 의미의 두 가지 천하를 포괄하고 천조의 휘하에서 세밀한 예치의 구조가 형성되어간다. 이후에 천조 중국은 예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예치 국가 중국이 탄생한 것이다. 이제 이 책에서는 천자 혹은 천조에 의해 넓은 의미, 좁은 의미 두 가지 천하에서 이루어지는 예치(덕치)주의의 통치 구조를 천조 체제天朝體制라고 칭하고자 한다."(43-4)
제2장 천조 체제의 구조 -진·한
"천조의 예치 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군주가 집행하는 하늘에 대한 제사와 조상에 대한 제사, 두 가지 의례이다. 군주는 이 두 가지 제사 의례를 수행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보장했다. 제천 의례와 조상 제사는 왕조 지배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었고, 군주의 전권專權 사항이 되어 역대 왕조에서도 답습되었다." "두 가지의 제사 중의 하나에서는 하늘의 아들(천자)로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야 했는데 이는 수도의 남쪽 교외(즉, 남교南郊)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교사郊祀라고 칭해진다. 또 하나는 왕조 창업자의 자손에게 천자의 혈통이 계승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조상(선왕)에 대한 제사를 지내야 했고, 이는 선왕의 위패(즉, 신주神主)를 안치한 종묘에서 실시되었다. 하늘에 대한 제사인 교사와 선왕에 대한 제사인 종묘사는 군주가 행하는 대표적인 제사가 되었고, 이후 유교가 완전히 국교화되는 후한(25~220) 이후가 되면 교묘郊廟로 총칭되면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46-8)
"전한 말기, 왕망 시대부터 후한에 이르는 시대는 참위사상(讖緯思想, 일종의 예언설)의 유행, 왕조 교체 등의 사정도 있어서 유가가 황제 지배의 정당화에 기를 쓰고 노력하던 시대였다." "원래는 다른 존재였던 황제와 천자는 유가의 조작操作을 통해 동일화, 일체화가 시도되면서 황제 한 사람이 두 가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일찍이 주 왕조의 군주는 천자(수명자)와 왕(통치자) 두 가지 칭호를 사용했고, 한 이후의 군주는 천자(수명자)와 황제(통치자)의 두 가지 칭호를 구분해 사용하면서 절대 권력자로서 천하에 군림했던 것이다. 황제는 단순히 법의 강제력만으로 민중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다. 천명을 받은 덕을 갖춘 천자라야 사람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고, 덕치와 예치를 내세우면서 그 신분을 보장했던 것이다. 황제가 여러 종류의 예를 제정하여 계속 천자라고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황제의 호칭과 천자의 호칭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은 명, 청 시대에 이를 때까지도 변경되지 않았다."(57-8)
"천하일가天下一家란 유교의 궁극적인 이념으로 천하가 하나의 가족이 되는 것을 말한다. 유교의 논리는 『대학』大學의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가족애를 순차적으로 확대하여 이를 천하에 이르기까지 넓혀가는 것이다." "그런데 천하를 황제의 집안이라고 해석하면, 사심私心이 생기는 소강의 세에서도 천하일가의 실현이 가능해진다. 왕조의 성립 자체가 천하일가이기 때문에 황제는 공공연히 천하일가를 표명하면서 하늘의 보장을 획득한다. 여기에서 천자의 천하 통치와 황제의 군현 지배는 완전히 겹쳐지게 되고, 이른바 천자와 황제의 일체화가 완성된다." "천하일가를 실현했던 황제는 천자로서 행하는 제천 의례를 통해 천하일가를 하늘에 보고했고, 황제로서는 선제先帝의 종묘를 제사지내는 것으로 자신의 지위의 정통성을 얻었다. 공적인 천자로서의 제천 의례와 사적인 황제로서의 종묘 제사, 두 가지의 본질적은 모순은 천하일가를 바꾸어 해석하는 것으로 해소되었던 것이다."(61, 67)
# 『예기』의 예운편에서는 '천하를 공적인 것으로 삼는' 시대를 '대동大同의 세世'(요·순시대)라고 부르고, '천하를 집으로 삼는' 와중에 가장 평화롭게 다스려지는 시대를 '소강小康의 세世'라고 칭했다.
제3장 북쪽의 천하, 남쪽의 천하 -한·위진남북조(1)
"고대 중국인 속에서 발생했던 중화(중하, 화)라는 관념은 항상 이적(夷狄, 오랑캐)과 대비되는 것으로 발전해왔다. 이러한 화와 이의 구별(유가의 말에 따르면 '화이의 별別'이라고 부른다)은 중화 왕조의 대외 정책을 일관하는 구조였고 역대 왕조들은 화와 이의 차이를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을 행했다. 이 경우에 일반적으로 화와 이의 구별은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졌고, 화의 우위성이 끊임없이 강조되었던 것에 대해서는 1장에서 지적했다. 두 가지 관점이란 다음과 같다. (1) 민족의 차이(한족인가, 그렇지 않은가), (2) 지역의 차이(중심인가, 주변인가), (3) 문화의 차이(예, 의의 유무)" "(1), (2)에 비해 (3) 문화의 차이는 민족적으로는 한인이 아니더라도 중화 문화인 이른바, '예, 의'를 체득하면 화가 된다는 관점이다. 화의 입장에서 말하면 중화의 천자가 행하는 덕화德化를 통해 이를 화로 변화시키는 것이고 또한 천자가 통치하는 천하가 주변을 향해 확대된다는 것이기도 했다."(74-7)
"그렇지만 어느 정도 예, 의의 유무로 정당화를 시도한다고 해도 한족의 이夷에 대한 민족적인 멸시 관념을 완전히 불식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왜냐하면 기능 개념은 결국 위정자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는 개념이고, 실체 개념을 뛰어넘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족문제는 이가 화를 통치하는 한, 항상 최대의 현안 사항으로 지속되었다. 결국 지배 민족이 된 이는 한족의 천시를 받는 채로 화를 향한 독자적인 행보를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현실에 가장 먼저 부딪쳤던 것은 4세기 이래 화북에 잇달아 정권을 수립했던 이른바 오호五胡였다. 오호가 한족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머지않아 화북을 통일하여 남북조시대의 북조를 탄생시켰고, 그 속에서 수, 당 왕조가 엄연히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 호족胡族의 중화 지배는 점차 한족에게도 수용되었고, 어느덧 호와 한의 융합이라는 국면이 일상적인 모습이 되어갔다. 그렇다면 호족은 어떤 방법으로 화이의 구별을 하지 않게 되었을까?"(79-80)
"불과 5살 때 즉위한 북위의 6대 황제 효문제孝文帝는 머지않아 친정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정책에 착수했다. 이것이 북위가 중화 왕조로 이행하는 것을 단숨에 가속화시키게 되었다. 역사상 유명한 효문제의 화화華化 정책이다." "선비족의 중국화에는 호복胡服, 호어胡語의 금지와 호족의 성姓을 한족의 성으로 변경하는 것 등이 있었는데, 이러한 조치들은 선비족을 한족과 동등한 입장에 두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효문제의 통치 방침은 선비족을 철저하게 중국화하는 것으로, 화이의 구별을 지양하는 문벌 귀족제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미 이 시기에는 선비족의 다수가 한어를 이해했고, 이전에 비하면 화화 정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효문제는 그러한 상황을 더욱 밀어붙였고, 선비족을 중화 문화 속에 녹아 들어가게 만들고자 했다고 생각된다. 효문제의 입장에서는 이것만이 호와 한이 어우러진 최고의 경지였고, 중원 왕조의 확립을 향한 커다란 도전이기도 했다."(98-101)
제4장 천하와 천하 질서 -한·위진남북조(2)
"중국 왕조가 동아시아의 번왕을 내신으로 삼은 것은 전연에 의한 고구려왕의 책봉이 그 효시이다. 355년, 전연은 고구려의 고국원왕에게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영주자사, 낙랑공, 고구려왕'이라는 관직을 하사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주제군사, 정동장관(이상은 무관), 영주자사(문관)'는 내신에게 수여되는 관위였고, '낙랑공'은 5등작의 제1등 공작이었으니 똑같이 내신에게 사용되는 작위였다. 본래 외신의 왕작만 가지고 있던 고구려왕의 내신화가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연이 370년에 멸망하자 고구려는 413년 동진으로부터 책봉을 받는데, 전연과 거의 같은 관직을 수여받고 있다. 물론 번왕의 내신화라고 해도 완전히 중국 왕조의 내신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번왕이 내신으로 관료제적 질서 속에 그 위상이 부여되었던 것은, 중국 왕조에게 있어서 국내의 신하와 동등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번왕에 대한 영향력을 일정 정도 행사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135-6)
"거꾸로 번왕의 입장에서 보면, 내신이 되는 것으로 중국의 권력 중추에 가까워지게 되었고 이것은 대내적으로도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자신의 기반 강화와 연결될 수 있었다. 특히 대내적으로는 중화 황제로부터 인증 받은 왕, 장군의 신분으로 부하들에게 관작을 임시로 수여하면서 중화 황제의 승인(관직 수여)을 얻어 국내의 정치적 질서를 강화했다. 왕권의 취약함을 중화 황제의 권위를 통해 보강했던 것이다. 즉 번왕의 내신화는 화와 이 쌍방에게 있어서 이득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남조와 북조 양쪽과 번국의 이해가 가장 첨예한 형태로 드러났던 곳은 복수의 번국이 대립하고 항쟁했던 한반도였다. 북쪽에서부터 공세를 가하는 고구려에 대해 백제와 신라는 항상 수세의 입장에 놓여 있었는데, 여기에 남쪽에서 왜국도 가담하면서 한반도의 국제 정세는 어지럽게 변화했다. 삼국과 왜국은 반도에서의 주도권 쟁탈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중국 왕조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136-7)
제5장 중국의 대천하와 왜국의 소천하 -남조, 수, 당
"이상하게도 478년에 왜왕 무가 조공한 것을 마지막으로 왜국의 내조來朝는 바로 중단되어 버렸다." "왜국의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왜국 측의 사정과 크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사정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왜국 국내에서의 왕권 확립과 이에 동반하여 이루어진 중국 중심 책봉 체제로부터의 이탈 움직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의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왜국의 독자적인 천하관의 형성이다." "일본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고분에서 와카타케르의 이름이 새겨진 도검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야마토 왕권의 지배권이 확대되고 있음을 뒷받침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동시에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도검에 새겨진 '천하'라는 두 글자이다. 물론 도검에 새겨진 천하는 어디까지나 왜국 입장에서 본 천하인 것이고, 그 천하를 통치하는 사람이 치천하대왕이라고 하는, 왜국의 독자적인 천하관이 생겨났음을 눈치챌 수 있다."(142-4)
"고구려, 백제, 신라의 한반도 삼국 중에서 개별적인 천하관 형성의 움직임이 최초로 드러났던 것은 고구려에서였다. 위대한 부친인 호태왕(재위 391~412)을 현창하기 위해 장수왕(재위 413~491)이 414년에 건립했던 유명한 호태왕(광개토왕) 비문 1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백잔(百殘, 백제),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屬民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조공이란 바로 천하라는 공간에서 화와 이의 상하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이고, 천하를 전제로 삼아 성립된 것이다. 사실 호태왕 시대 북부여의 지방관이었던 모두루의 묘지墓誌에는 〈천하 사방에서 이 국군(國郡, 고구려의 땅)이 가장 성신聖信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되어 있어 이미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천하관이 존재했다는 것은 명확하다." "고구려에서는 호태왕 시기에 영락永樂이라는 연호가 제정되었는데, 왜국의 최초 연호라고 알려진 다이카[大化]보다도 250년 이상 빠르다. 이 연호 제정에 더해 천하, 중화, 조공이라는 개념도 왜국보다 앞서 형성되었다."(148-9)
"왜왕은 대천하에서의 동이(번왕)와 소천하의 천자라는 이중 잣대를 지니고 있었다. 이때 두 가지 기준의 조화를 이루어내기 위해 왜국이 선택했던 방책은 책봉을 받지 않으면서 조공하는 것이었다. 책봉을 하지 않아도 수의 입장에서는 왜국이 조공국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고, 왜국의 입장에서는 수의 신하가 아니라는 점이 입증되는 것이다. 동이의 왜국은 태연하게 수에 조공을 하면서도 자국의 논리를 관철시켰다. 이를 통해 소천하의 천자로서 가지고 있는 왜왕의 긍지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대국가의 완성은 왕권의 완성이었고 또한 일본 천하관의 완성이기도 했다. 일본은 국내에서 중화(중국)라고 공언했고, 국가의 실효적 지배 영역인 '화내'化內와 왕화王化가 미치지 않는 '화외'化外를 합하여 일본의 천하로 삼는 고유한 천하관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이 경우에 화외로는 '이웃 국가'[隣國]인 당, '번국'인 신라 그리고 '이적'인 하이, 준인, 남도인南島人 등이 『대보령』大寶令으로 규정되었다."(156-8)
제6장 동아시아의 천하 시스템 -당
"일본의 소천하가 완성된 것보다도 더 이른 시기에 중국에서는 북조로부터 탄생한 수가 남북조를 통일하면서 오랜만에 하나의 천조, 하나의 천하로 된 본래의 중화 왕조를 회복시켰다. 수의 뒤를 이은 당을 합해서 흔히 수당제국이라 부른다. 다만 영역의 측면에서는 당이 훨씬 광대했고, 적극적인 대외 확장 정책과 더불어 당은 유사 이래 최대의 판도를 보유하면서 유라시아 대륙 동부에 군림했다. 특히 태종 이세민(재위 626~649)은 중화의 천자이면서 유목민의 수장으로서, 중화와 이적에 군림하는 유일무이한 제왕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은 복속한 이민족들에 대해 한대 이래의 전통적인 수법으로 지배를 행했다. 기미정책羈縻政策이라 불리는 것으로, 기미의 기羈는 말의 재갈을 고정시키기 위해 재갈에 매는 것이었다. 미縻는 소의 고삐를 의미한다. 소와 말을 묶어놓아 풀어놓지 않는 것과 같이 이민족의 부족장에게 당의 관직을 주면서 회유하고 그들을 통해 이민족 전체를 간접적으로 지배하려는 것이었다."(166-7)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와는 달리 당의 북방, 서방에서 유목과 농경을 영위하던 여러 민족들이 세운 국가들은 당보다 훌륭하면서 열등하지 않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이 군신관계를 적용할 수 없었다." "이에 당은 돌궐, 위구르, 토번 등 유목민의 여러 국가(토번도 일단 유목국가에 포함시켜 둔다)와 한집안이 되었는데 이는 바꾸어 말하면 천하일가 아래에서 개별적인 서열이 장인-사위, 아버지-아들, 형-동생 등의 종법 질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과 유목민의 여러 국가들 사이에 임시로 만들어진 천하일가를 상정하고, 당의 천자와 번왕을 가족에 비견하여 양자의 관계를 규정한 것이다. 이는 또한 천조의 궁극적 이념인 천하일가의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진, 화와 이가 공존하는 넓은 의미의 천하에서 가시화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본래 군신 질서가 적용될 수 없는 유목민의 여러 국가들을 천하일가의 개념으로 연결시키면서 천조의 논리에 끌어들인 것이 종법 질서였다고 볼 수 있다."(180, 184)
"당대의 동아시아를 살펴보면, 당을 중심으로 하는 대천하와 당의 주변을 둘러싼 주위 여러 국가들이 소천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중국으로부터 비교적 멀리 떨어진 일본과 베트남이 거의 모든 것을 소천하로 재현했던 소제국小帝國의 양상을 드러냈던 것에 반해, 이웃 국가인 신라나 고려 혹은 발해 등은 대천하에 바짝 붙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개념들이 소천하에서 표면화한 일이 거의 없었다. 어디까지나 잠재적 요소로서 존재했던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국제정치 시스템을 일극적一極的, 일원적인 책봉 체제론 개념으로 파악하기에는 반드시 무리가 있다. 책봉(조공) 관계도 포함하는 대천하와, 중국 주변에 있는 여러 개의 소천하가 천하 관념을 매개로 하여 유기적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정치 시스템, 여기에서는 이를 '천하 시스템'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자 한다. 이는 또한 10세기 이후 다극화와 다원화의 경향이 강해지는 동아시아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새로운 관점이 된다."(191-4)
제7장 천조의 행방 -오대십국, 송, 요, 금
"송 태종을 계승한 진종(재위 997~1022)은 1004년에 요遼와 '전연의 맹'을 체결한다. 전연의 맹의 특징은 뭐라고 해도 양국의 영토를 획정하는 명확한 국경선을 설정했다는 것이다. 그 국경을 유지하고 양국의 대립을 회피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 서서(誓書, 서약서)에서 언급한 약속이었고, 이후 중국과 주변 여러 국가들 사이에 맺어졌던 몇 개의 맹약들에서도 모두 전연의 맹이 그 본보기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실제로 1044년에 송과 서하 사이에 맺어진 '경력화약'慶歷和約에서는 송을 군주, 서하를 신하로 삼는 군신 관계로 정했지만 세폐와 국경의 획정은 전연의 맹에 준하여 행해졌다. 또한 시대가 흘러 1142년에 금과 남송의 '소흥화의'紹興和議에서는 금이 군주이고 남송이 신하가 되면서 거꾸로 '군신 관계'가 맺어진 것을 제외하면 그 이외에 국경, 세공歲貢, 서서, 사절의 교환 등은 모두 전연의 맹이 본보기가 되었다. 11세기 초부터 13세기 초를 '맹약의 시대' 혹은 전연 체제라는 용어로 통괄하는 까닭이다."(218-9)
"적어도 당시의 송과 요가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주권국가들의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양국이 대등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맹약에 의해 영토를 획정했고, 평등한 입장에서 서서와 치서 문서를 교환했고, 절대적인 군신 질서 대신에 상대적인 종법 질서를 적용했고, 혹은 서로 간에 북조와 남조 등의 호칭을 사용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물론 대등했다고 해도 양국의 관계가 완전히 평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상대적이라고 여겨지는 종법 질서도 송이 형이고 요가 동생이 되었듯이 명확하게 상하 관계가 포함되어 있었고, 송에게 일방적으로 부과되었던 세폐도 요가 상위의 입장에서 취한 조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요의 입장에서는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취했던 것이었고, 송은 그럭저럭 체면을 지켰다고 하는 것이 실상에 가깝다." "이렇게 획득한 대등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요가 중국의 원칙에 따랐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즉, 천하 관념은 전연의 맹의 성립으로 소멸된 것이 아니었다."(220-1)
"그런데 금과 맺은 소흥합의(1142)에는 전연의 맹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다. 이때에 중국 황제가 외국 군주에 대해 처음으로 정식 신하를 취했던 것이다. 소흥화의가 송에게 있어서 매우 굴욕적인 것으로 여겨진 이유는 명분상의 상하 관계까지 포함하여 모든 측면에서 송이 하위에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금의 장종(재위 1189~1208)과 선종(재위 1213~1223)을 섬겼던 한인 조병문 등은 『춘추』의 논법을 들고 나와 화와 이의 차이는 민족의 차이가 아니라 예와 의의 유무라는 것을 맹렬히 강조했다. 여기에 중원을 영유하고 있다는 정통 의식도 더해지면서 금도 후반으로 가면 남송을 '만황'蠻荒, '도이'島夷 등으로 부르며 이적으로 여기는 관점이 생겨났다. 금이 문화, 지역의 측면에서 자국을 중화로 여겼던 것에 반해 남송은 민족의 측면에서 금을 이적으로 여기며 폄하했다. 이는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희에게서도 보이는데, 그의 사상 기조에는 '화이의 구별' 의식이 짙게 드러나고 있다."(232, 242)
제8장 천하일가의 완성 -원
"원과 청은 국가의 성립 과정이 다르다. 왜냐하면 청은 후금국이 그대로 발전하여 중국을 영유한 국가인 것에 반해 원은 유라시아 규모로 팽창했던 대몽고국이 얼마 후 분열되어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탄생했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누르하치를 청의 창업자인 태조라고 부르는 것은 어떠한 위화감이 없지만, 칭기즈칸을 원의 태조라고 호칭하는 것은 반드시 유보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하게 되면 칭기즈칸은 대몽고국 창설자이고, 원은 대몽고국이 분열된 이후에 탄생한 여러 칸국 중에서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된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칭기즈칸은 원의 창업자인 동시에 다른 여러 칸국의 창업자이기도 하다는 것인데, 이를 일부러 원 태조라고 하는 중화풍의 창업자로 만들어버렸던 것은 쿠빌라이의 국가가 조작한 결과였다. 중화 지역에서 성립한 쿠빌라이의 국가(=원 왕조)는 한법을 따라 칭기즈칸을 국가의 시조로 떠받들며 중화 제국의 겉모습을 보강했던 것이다."(255-6)
"쿠빌라이가 자립했던 1260년 5월, 대몽고국에서 최초로 연호가 만들어졌다. 그 연호는 중통中統이었다. 중통은 중화 지역에서 정통 왕조를 개창했다는 쿠빌라이 국가의 결의 표명이었다. 본래 하늘의 아들(천자)이란, 공간(천하)과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이고, 연호는 천자가 다스리는 천하에 흐르는 시간을 표시하는 것이다. 연호는 항상 천자에 뒤따르는 것이었고, 그 치세를 상징하는 기호의 역할을 맡았다. 중국 왕조가 전통적으로 책봉국에게 역歷을 수여했던 것은 책봉국들이 중국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천자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는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정삭(正朔, 역)을 받든다'라고 한다. 쿠빌라이가 연호를 제정한 것은 그가 중화풍의 천자로서 중화 지역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내외에 천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쿠빌라이의 국가는 예전 칭기즈칸 시대의 대몽고국과 같지 않다. 머지않아 쿠빌라이의 국가가 가진 독자적인 천하관 아래에서 중화풍의 국호를 제정하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257-9)
"1264년 막냇동생 아릭부케를 타도한 쿠빌라이는 연호를 중통에서 지원至元으로 바꾸었다. 새 연호인 지원은 『역경』의 〈지극하도다, 곤원坤元이여. 만물이 그러므로 생겨나고, 이에 하늘에 순종하고 이어받는구나〉에 근거한 것으로, 이때의 연호 개정에는 특별한 목적이 담겨 있었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한지에서 전통적인 천조의 논리를 따라 쿠빌라이의 국가가 천조로서 가진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보다 반석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건원의 건乾은 하늘이고 곤원의 곤坤은 땅이며 원元은 시초始初를 의미한다. 즉 건원이란 천지만물의 근원이 있는 우주 생성의 원리 혹은 하늘 그 자체를 가리킨다." "결국 지원이라는 연호는 하늘의 법칙으로 쿠빌라이의 중화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다." "1271년 11월, 쿠빌라이는 새로운 국호를 정하고 천하를 향해 공표했다. 국호는 대원大元이었다. 정식으로는 대원 예케 몽골 울루스, 즉 대원대몽고국大元大蒙古國이고 줄여서 대원국이다. 이른바 원조元朝의 탄생이다."(260-1, 264)
제9장 천하일가에서 화이일가로 -명
"원·명 혁명은 일반적인 역성혁명과는 달리 이夷에서 화華로의 왕조 교체가 수반되었다. 따라서 화(명) 스스로 이(원)의 중화 지배를 인정하고 이에서 화로의 왕조 교체를 정당화해야 했다. 이는 주원장이 북벌을 할 때 내린 격문檄文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격문에 따르면, 이전에는 이였던 원도 덕을 갖춘 군주(쿠빌라이)가 천명을 받으면서 중국에 들어와 중화 지역을 통치했다. 그러나 이미 덕을 상실하여 이로 돌아가 버린 지금은 중화의 지역을 떠나 덕을 갖춘 새로운 군주(주원장)에게 그 지위를 양도해야 한다. 원이 이민족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쫓아내려는 것이 아니다. 덕을 상실하고 이적으로 회귀한 원이 중화의 땅(=중국)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문제인 셈이다. 〈중국은 안에 있으면서 이적을 제어했고, 이적은 밖에 있으면서 중국을 받을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이의 차이를 안과 밖(중심과 외연), 예와 의의 유무로 해석하면서 완벽하게 원·명 혁명이 정당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286-9)
"확실히 명은 민간무역의 측면에서는 폐쇄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외 정책 자체는 소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 간에는 다른 시대 이상으로 적극적인 교류가 전개되었다. 홍무 연간에만 해도 17개의 국가가 내공來貢하여 명 황제와의 사이에서 군신 관계가 맺어졌던 것은 적극적 외교의 표방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주원장이 이렇게까지 화이 통합에 힘을 들인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원·명 교체기의 혼란으로 붕괴되었던 국제 질서를 재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새로운 왕조인 명에게는 그러한 의무가 있었다. 또한 명의 직전에 있었던 원이 화와 이를 포함한 광대한 영역을 보유한 다민족 복합국가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명이 원을 대신해 새롭게 천명을 받은 이상,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원에 필적하는 혹은 원 이상의 영역을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단순히 중화의 부흥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이夷에 대한 지배도 실현할 필요가 있었다."(302-4)
"일반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질서를 조공 체제라고 칭하는데 단적으로 말해서 조공 제도가 완전히 체제화했던 것은 이후에도 이전에도 명대뿐이다. 3대 황제 영락제(재위 1402~1424)는 이를 화이일가의 관념으로 보강했다." "영락제와 참모들의 목표는 황제와 번왕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혹은 할아버지와 손자인 '의제적 가족 관계'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면복을 하사한 조선과 일본은 아버지와 아들, 피변관복을 하사한 류큐와 안남 등 그 이외의 국가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가 되어 모든 번왕이 가족 질서 속에 배치되었다. 화이 질서는 가족 질서로 전환되어 마땅히 화이일가의 상황이 화와 이의 넓은 의미의 천하에서 구현되고 가시화된 것이었다. 화이일가의 구현 배경에는 대외 정책이 조공 제도로 일원화되었던, 명의 이른바 조공일원체제가 있었다." "조공일원체제로 인해 모든 번왕이 책봉을 받고 관복을 수여받는 것으로 명의 황제와 번왕 사이에 가족 질서도 설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319-20)
제10장 화이변태와 중외일가 -청
"청조의 3대 황제인 순치제(재위 1643~1661)가 말한 천하일가란, 만주족과 한족이 가족과 같이 일체화한 상황을 의미한다. 명의 영락제는 전통적인 천하일가를 대신하여 화이일가라는 관념으로 자신의 천하 통치를 정당화했다. 이가 화를 지배하는 청대에는 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꺼렸고, 만한일가라는 청조 특유의 독자적인 관념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청조는 이 관념을 실제 정치에서도 구현해 보였다.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만한병용책滿漢倂用策이다. 관청의 정점에는 반드시 만주인과 한인 두 사람을 두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피했다. 예전에 원조에서 관청에 반드시 몽골인으로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두어 한인에 대한 감시를 행했던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청조는 가능한 한 만한滿漢이 대등해보이는 조치를 시행했다. 만한 서로 간의 통혼을 장려했던 것도 하나의 예이다. 만한의 대립이 남아 있던 국가 초기에는 청조가 만한일가를 정치 이념으로 내세운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340-1)
"그러나 본래 만한일가는 만인(때로는 몽골인도 포함)과 한인에 한정되는 개념이었고, 이 용어 자체는 그 이상으로 넓어질 수가 없었다. 다민족국가인 청조에게 있어서는 결코 만족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만한일가와 함께 천하일가라는 용어도 국가 초기 이래 일반적으로 활용되었다. 다만 실정에 가장 적합한 화이일가만은 청조에서 계속 단연코 거부했다. 그러한 와중에 새로운 주장이 나왔는데, 바로 '중외일가'라는 용어이다. 원래 중외中外는 조정과 지방, 혹은 국내와 국외 등 안과 밖, 중심과 주변의 지리적, 공간적인 범위를 표시하는 개념이다. 이는 또한 장성을 사이에 두고 그 남쪽의 중국과 북쪽의 만주와 몽골, 나아가서는 중심이 중화와 주변의 이적이라는 관계를 순수하게 지리적인 관점에서 다시 파악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이일가라는 솔직한 표현을 싫어했던 청조에게 있어서 가장 알맞은 용어였고, 전 시대에 걸쳐 천하일가와 함께 청의 통치 방침으로서 선전되었다."(341-2)
"건륭제(재위 1735~1796)는 중국 본토에서는 황제로서 군림했고, 만주와 몽골 지역에서는 한汗이었으며, 티베트에서는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이었고, 신강 위구르에서는 이슬람교의 보호자로서 행동했다. 바로 다민족국가인 청조의 성격을 한 몸에 체현한 사람이 건륭제였던 것이다. 오족(五族, 만·한·몽·화·장)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민족이 독자적인 문화를 계속 유지하면서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계. 이른바 오족 공존五族共存의 세상이야말로 건륭제가 바라마지 않는 이상적인 천하였다. 이런 어려운 요구에 건륭제 자신이 대응한 것이 그가 만들어낸 '황청의 중하(중화)'였다." "여기서 중화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구별은 청조에 대해서 공순恭順한가 아니면 반역적인가에 따라 이루어졌고, 순종과 거역의 이치가 양자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청조의 판도에 들어오면 중화이고, 그래서 복종하는 번부의 백성은 황제에게 덕화된 중화의 백성으로 여겨지면서 겉보기에는 중국 본토의 백성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되었다."(352-4)
제11장 중화민족의 대가정 -근현대
"청조를 유지하는 것(변법파)과 청조를 부정하는 것(혁명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고, 이것은 그대로 만주족의 처우와도 연결되었다. 변법파는 만주족의 중화 지배를 인정하면서 한족을 포함한 오족의 공존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를 풀어서 말해보면, 건륭제가 실현한 '황청의 중하'를 유지하면서 '황청의 대일통'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시작으로 열강의 침략에도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혁명파의 생각에서는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어떻든 간에 부패해버린 만주족의 청조를 타도하고 한민족에 의한 공화제 국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진정한 중화를 회복하고 내부의 결속을 도모해야 열강에 대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만주족을 중화에서 쫓아내 혁명을 성취할 필요가 있다. 황청의 중하 속에서 균형을 지키고 있던 '대일통'과 '화이의 구별' 관념은 각각 변법파와 혁명파라는 양극단으로 분열해버렸던 것이다."(378-9)
"종래 중국에서는 수많은 왕조가 흥망을 거듭했지만, 일본의 국호처럼 시대를 초월하여 불리는 국가의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량치차오는 천하의 중심이면서 문명이 뛰어난 지역을 막연하게 지칭하는 중국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국민국가의 명칭으로 삼자고 주장했고, 후세에 점차 정착하게 되었다. 1901년, 량치차오는 국가 명칭으로서의 중국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받아들인 민족이라는 개념을 결합해 중국 민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2년에는 중국 민족을 대신해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고, 이를 근대의 국민국가를 이끄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국민의 개념에 견주고자 했다. 즉 당시 청조 치하의 사람들에게 중화민족이라는 아이덴티티(귀속 의식)를 가지게 하는 것으로 '중국' 국내의 사람들에게 결속과 통일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민족 복합국가로서 대청 왕조의 성격은 중화민족이라는 허구 아래에서 확고하게 중화민국에도 계승되었다."(384-5)
"한편 일본에 망명한 쑨원은 도쿄에서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하여 혁명운동을 지속했고 얼마 후 1919년에는 국민정당인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이 시기에는 임시대총통 시대와는 달리 그의 오족공화에 대한 생각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쑨원이 구상한 중화민족이란 『임시약법』이 규정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률적으로 평등한 오족의 총칭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한민족이 주체가 되는 중화민족이다. 쑨원은 분명하게 이적에 대한 멸시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우월한 한민족이 열등한 이민족을 한민족으로 동화시키는 것으로 중화민족이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이를 쑨원의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라고 칭하기도 한다. 한민족이 중화민족이 된다고 해도 실체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다. 다만 한민족 이외의 여러 민족들은 한화되면서 문명을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중화민족 개념의 제시는 직설적인 한화漢化라는 표현을 피해간 현대판 화화華化정책이기도 했다."(387-8)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