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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님의 서재
  • [전자책] 유신
  •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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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9
  • : 20

프롤로그 -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그대에게


유신시대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뼈대를 만든 시기다. 유신체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민주화운동 세력조차 유신시대에 만들어진 사람들이었다. 1970~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세력은 한마디로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세대였다. 그들은 목이 터져라 자유와 민주를 외쳤지만 정작 자유를 누려본 적도, 민주주의가 몸에 밸 기회도 갖지 못한 불행한 세대였다. 유신시대는 일제가 키워낸 식민지 청년들이 장년이 되어 사회를 운영해간 시기였다. 이 시기는 친일잔재 청산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 친일잔재를 청산하려던 세력이 거꾸로 친일파에게 역청산당한 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참혹하게 보여준 시기였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의 ‘퇴행’은 박정희가 체질에 맞지 않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틀을 벗고 젊었을 때부터 익숙한 일본식 모델을 ‘한국적 민주주의’로 포장해 들고나온 것이었다. 유신시대는 김근태와 그 벗들에게 내란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을 뒤집어씌운 자들이 일으킨 진짜 내란의 시대였다. 15-6)


제1부 헌정의 파괴


1971년 4월의 제7대 대통령 선거와 5월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박정희에게 큰 충격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의 거센 도전을 받아 상당히 고전했고,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당인 공화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야당인 신민당이 의석을 크게 늘리며 개헌 저지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제 헌법 절차에 따라 정상적인 방법으로 박정희가 대통령직 네 번째 임기에 도전하는 길은 완전히 막혀버린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야당에 정권을 내준다는 것은 꿈도 꿔본 적이 없고, 집권 세력 안에서도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집권 세력 안에서 김종필이 2인자로 부상하는 것을 막으려 공화당 안에 백남억,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등을 주축으로 한 ‘4인 체제’를 구축했다. 4인 체제의 실력자였던 김성곤(쌍용그룹 창업주)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로 5·16 직후 김일성의 밀사로 남파되었다가 처형당한 황태성 등과 함께 경북 지방에서 좌익 활동을 한 바 있었다. 20)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으로 정치자금을 주무르며 실력자로 부상한 김성곤은 1975년 박정희가 물러나는 것을 전제로 2원집정부제 개헌에 대한 구상을 다듬으면서, 지방의 시장·군수와 경찰서장 등에 자기 사람을 심는 데 분주했다. 박정희는 김종필(JP) 계열의 내무장관 오치성을 내세워 김성곤 등 4인 체제가 지방 요직에 심어놓은 사람들을 제거했고, 이에 분노한 김성곤 등은 야당이 내무장관 해임 건의안을 내자 이에 동조하여 오치성의 해임 건의안을 통과시켜버렸다. 이것이 유신 1년 전의 이른바 10·2 항명파동이다. 박정희의 특명으로 김성곤 등 공화당 의원 23명이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고문과 구타를 당했는데, 김성곤은 콧수염이 뽑히는 모욕을 당하기까지 했다. 10·2 항명파동으로 공화당 안에서 박정희의 친정 체제가 확립되었다. JP계와 4인 체제 사이의 이이제이, 3선개헌과 정보정치의 주역이었던 ‘날으는 돈가스’, ‘공포의 삼겹살’ 김형욱에 대한 토사구팽 등을 거치며 집권 세력 내부를 완전히 평정한 것이다. 20-1)


미국 대통령 닉슨은 1969년 7월 아시아에 있는 미국의 동맹국은 “스스로가 자신의 방위에 대하여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국은 이 정책에 따라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고, 한반도에 주둔했던 미군의 철수도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북한의 전면남침이 임박했다고 떠들어댔지만, 미국은 유신이 선포된 1972년 10월의 한반도 안보 상황은 한국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파악했다. 무엇보다도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중국과 소련 두 사회주의 강대국은 서로 반목하면서 각각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런 데탕트 분위기에서 이북이 중국이나 소련의 지원 내지는 동조 없이 한반도에서 전면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한반도 안팎으로 여러 가지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자 박정희는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이어 12월 27일 새벽에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22-3)


박정희는 유신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미국과 협의하거나 미국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 국무총리 김종필이 주한 미국대사 하비브를 통해 미국에 공식적으로 계엄 선포와 국회 해산에 대해 통보한 것은 유신 선포 하루 전인 1972년 10월 16일 저녁이었다. 하비브는 뒤늦은 통보에 불쾌해했지만, 국회에서 야당 의원이 공개적으로 비밀공작의 윤곽을 꼬집어 말할 정도로 소문이 파다했던 초헌법적 조치가 곧 취해질 것이라는 점을 미국이 사전에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닉슨 독트린을 통해 아시아에서 한 발을 빼기 시작한 미국은 아시아의 동맹국들이 반공독재 체제를 강화하여 미국이 한 발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려는 것을 묵인해줄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는 박정희보다 3주 앞선 9월 21일, 공산주의자와 파괴분자들이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촉발하고 있다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을 중단시켰다. 마르코스의 독재 체제 강화를 묵인했던 것처럼 미국은 박정희의 독재 체제 강화를 묵인해주었다. 27)


박정희에게는 메이지유신 말고도 따라 배운 또 하나의 유신이 있었다. 바로 유산된 유신, 쇼와유신(昭和維新)이다. 군부 내의 급진파 청년장교들과 기타 잇키(北一輝) 같은 초국가주의자들은 메이지유신을 재현해보자고 1936년 2월 26일 천황 친정을 명분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등 대신 여럿을 살해했지만 천황의 복귀명령으로 진압되어 주동자 15명이 사형을 당했다. 의회정치의 타도, 구정치인들의 부정부패 일소, 재벌 해체, 빈부격차 해소 등을 주장한 박정희의 생각은 쇼와유신을 추진하다가 진압당한 황도파 청년장교들의 생각을 빼닮았다. 1930년대 일본의 급진파 청년장교들이 10년 정도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못 견디고 뛰쳐나갔다면, 박정희는 1년여에 불과했던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 실험이 혼란이라며 판을 깨버렸다. 박정희의 강력한 식민지 체험이 만들어놓은 내면화된 세계관이 해방 30년이 다 되어서 제도로, 체제로 등장한 것이다. 33-4)


제2부 헌법 위의 한 사람


유신헌법 제40조는 대통령이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일괄 추천하여 후보자 전체에 대한 찬반을 투표에 부쳐 선출하도록 했다. 형식적으로는 간선의원이지만 사람들은 ‘관선의원’이라 불렀다. 이렇게 추천받은 국회의원의 임기는 지역구에서 선거로 선출된 의원 임기 6년의 절반인 3년이었다. 국회는 지역구에서 선거를 거친 ‘민선의원’ 146명과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의원’ 73명으로 구성되었다. 유신정우회(약칭 유정회)는 이렇게 선출 방식도 다르고 임기도 절반밖에 안 되는 73명의 ‘여권’ 의원들이 모인 교섭단체였다. 유신국회였던 제9대와 제10대 국회에서 의석수로는 원내 제1교섭단체였지만, 정당이 아니니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편찬한 《대한민국정당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유정회는 원내 제1교섭단체였지만 정당도 아니었고 정강정책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서 이른바 ‘신체제’를 표방하면서 여러 정당들이 해산한 뒤 통합되어 출현한 대정익찬회와 유사하다. 37-9)


박정희는 5사단장 시절에 만난 윤필용을 총애하여 7사단장, 1군 참모장, 군수기지 사령관, 1관구 사령관 등 새로운 보직을 맡을 때 대부분 윤필용을 데리고 갔다. 5·16 군사반란 당시 윤필용은 육군대학에서 수학 중인 관계로 이른바 ‘혁명주체’가 아니었지만, 박정희와의 개인적인 인연 덕분에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또는 비서실장 대리로, 육군 방첩대장, 수경사령관으로 20년간 최측근에서 박정희를 보좌했다. 윤필용은 육군 방첩대장으로 있던 1965년 5월 원충연 대령 등이 주도한 쿠데타 모의를 적발하는 공을 세웠다. 원충연은 윤필용이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을 할 때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맡았던 박정희의 또 다른 측근이었다. 1960년대 초반에 발생한 수많은 반혁명 사건은 사실 모두 조작된 것인데, 원충연 사건만큼은 병력 동원이 계획된 실체가 있는 사건이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다른 반혁명 사건의 주역들은 모두 금방 풀려났지만, 원충연은 박정희가 죽고 난 다음에야 16년 만에 풀려났다. 43-4)


유신을 단행하기 이전에도 박정희는 2인자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조금 치고 나간다 싶으면 다른 측근들의 견제가 집중되었다. 김종필 세력이 칼을 맞았고, 김성곤 등 4인 체제도 몰락했다. 유신을 전후한 시기에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후락이 평양에 가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와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자 그의 대중적 인기는 치솟았다. 유신의 기획과 실행 과정에서 이후락의 역할은 뚜렷했다. 윤필용도 처음에는 이후락을 견제했으나 이후락에 대한 박정희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보고 그와 손을 잡았다. 이후락과 윤필용이 가까워지는 것을 정작 그들의 보스 박정희는 바라지 않았다. 박정희뿐이 아니었다. 김재규의 뒤를 이어 보안사령관을 맡은 강창성은 이후락-윤필용의 구도에 맞서 박종규와 손을 잡았다. 이들 4인 이외에 박정희의 측근 한 사람이 등장한다.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뒤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있던 박정희의 골프 파트너 신범식이다. 45)


윤필용이 이후락과 작당하여 박정희가 노쇠하였으니 물러나게 하고 다음은 ‘형님’(이후락)이 해야 한다는 불경한 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것을 박정희에게 고자질한 이가 바로 신범식이다. 신범식도 자신이 윤필용 사건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강창성은 윤필용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육사 11기 이하의 장교들로 구성된 하나회라는 비밀 사조직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강창성은 사건을 확대하여 하나회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를 준비했다. 위기에 빠진 전두환, 노태우를 구해준 것은 박종규와 서종철(국방부 장관), 진종채(박정희의 대구사범 후배로 전두환의 전임 보안사령관) 등 영남 출신 장성들이었다. 그들은 박정희에게 강창성을 보안사령관에 그대로 두면 “경상도 장교의 씨가 마르겠다”며 박정희 자신이 군대 내의 친위대로 육성한 하나회가 초토화되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일국의 장성을 잡아다 모진 고문을 가한 강창성은 전두환 등 신군부가 집권한 뒤 감옥에서 삼청교육을 받았다. 45-7)


윤필용 사건으로 방아쇠가 당겨지면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그 여파로 박정희 주변의 권력구도가 크게 변화했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을 제외하고는 핵심 측근들 모두가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갔다. 윤필용은 감옥으로 갔고,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김형욱은 윤필용이 잡혀가자 바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핑계로 대만으로 빠져나갔다가 미국으로 망명해버렸다. 이후락은 윤필용 사건으로 흔들린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 납치 사건에 적극 나섰다가 교체되었고, 강창성은 토사구팽당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재일동포 사회에 반박정희 정서가 폭발하도록 하여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미수(육영수 서거) 사건을 낳았고, 경호실장 박종규는 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 후임자가 된 것이 차지철이고, 중앙정보부장 자리는 신직수를 거쳐 김재규에게 돌아갔다.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구도는 박정희 자신만이 전모를 알고 있는 윤필용 사건에서부터 짜인 것이다. 48)


1974년 1월 8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1호의 주요 내용은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긴급조치로 금지한 행위를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 역시 금지되었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대통령의 명령이 법률과 동일한 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이 긴급조치이니 3권분립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박정희의 집권 18년 중 절반 이상인 120개월가량이 계엄령, 위수령, 비상사태 또는 긴급조치였다. 유신시대는 1973년에 몇 달과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이듬해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될 때까지의 몇 달 만을 제하곤 쭉 긴급조치의 억압과 공포가 지속된 시기였다. 60)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통일운동가 8명의 목숨을 앗아간 박정희 정권 시기 최악의 공안사건이다. ‘재건’이란 말로 알 수 있듯이 이미 1964년에 인혁당(인민혁명당)이란 이름의 단체를 결성하려 했다는 대대적인 공안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1964년의 사건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10년 뒤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2차 인혁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두 사건은 주요 피해자는 물론 그 가해자도 겹친다. 1차 사건 당시의 라인업이 중앙정보부 수사과장 이용택, 검찰총장 신직수, 법무부 장관 민복기였다면, 10년 뒤 이용택은 중앙정보부 6국장, 신직수는 중앙정보부장, 민복기는 대법원장으로 사건을 처리했다.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엄청난 고초를 치렀음에도 개별적으로 공개적인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지만, 1차 인혁당 사건의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인지 비밀지하혁명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데는 주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조심하려 해도 험난한 세월은 이들을 비껴가지 않았다. 65)


비도덕적인 유신정권은 학생과 시민들이 불법적인 체제에 도전하는 것을 못 견뎠다. 그들에게는 이 저항의 배후에 반드시 ‘불순세력’이 있다는 강박증이 있었다. 그 강박증은 불순세력이 없으면 만들어내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었다. 1964년에 인혁당이 조직된 바 없으니 인혁당 ‘재건’이란 시나리오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재판과정에서도 고문으로 받아낸 진술 이외에 “반국가단체 결성 및 국가전복기도를 위한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조직명, 강령 및 규약, 조직체계, 조직활동 관련 물증이 제시되지 않았다.” 참으로 기가 막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2차 인혁당 사건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부르고 있지만 ‘인혁당 재건위원회’라는 반국가단체는 비상군법회의 검찰 측 공소장이나 대법원 판결문 어디를 보아도 만들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인혁당 재건위’가 아니라 ‘인혁당 재건단체’라는 모호한 말로 배후조직의 성격을 규정했고, 박정희 정권은 무고한 사람을 8명이나 잡아 죽였다. 68)


#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 : 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도예종, 하재완, 여정남, 송상진


제3부 금기, 저항, 상처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면서 박정희는 우리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우리의 출생의 의미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규정해버렸다. 일본 군국주의식 사고방식이 꽉 박힌 박정희와 자유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는 맞지 않았다. 인혁당 사람들을 사형시킨 1975년에 박정희 정권은 무려 225곡의 가요를 금지곡으로 묶었고, 대마초 단속을 통해 이장희, 윤형주, 신중현, 김추자 등 인기 절정의 가수를 포함한 27명을 구속했다. 김민기나 신중현은 이름이 들어가면 무조건 금지되는 영예를 누렸다. 〈아침이슬〉도 금지곡이었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구절은 검열관의 귀에는, 태양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이고, 묘지는 박정희 치하의 남조선이고, ‘붉게 타오르고’는 적화통일로 들렸던 모양이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는 월북을 기도하는 노래처럼 들렸고, 가는 데마다 ‘하면 된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던 시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패배주의의 상징으로 퇴출당했다. 98-9)


1968년에 교통사고로 숨진 모더니스트 김수영은 버드 비숍의 여행기를 영어로 읽다가 득도하듯이 단절된 전통과 만나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라는 절창(〈거대한 뿌리〉)을 남겼다. 그 후배들도 먼 길을 돌고 돌아서야 더러워진 전통, 흩어져버린 민중과 다시 만났다. 청년문화 논쟁은 ‘엘리트’와 ‘대중’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심화시켜 우리가 잃어버린 ‘민중’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감도 한층 심화시켜주었다. 1960년대에 사람들은 미친 듯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한편에는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가 있었고, 또 한편에는 김지하의 〈황톳길〉이나 〈서울길〉이 있었다. 이제 박정희의 〈잘살아 보세〉도, 대중가요 〈흙에 살리라〉도 불편해했던 도시적 감성을 지닌 젊은이들은 제 목소리로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아침이슬〉)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김지하가 〈아침이슬〉을 처음 듣고 예견했듯이 앞으로 무엇이 올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젊은이들은 저 거친 광야로 나섰다. 100)


자본주의화를 겪은 모든 나라에는 저마다의 슬프디슬픈 여공애사(女工哀史)와 소년노동의 피눈물 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교적 가부장제의 유산에 식민지 지배와 전쟁과 압축적 근대화를 겪은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은 슬프기로 한다면야 다른 어느 나라의 자매들보다 더 슬픈 이야기가 많지만, 다른 나라 여공애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빛나는 순간들을 갖고 있다. 흔히 유신시대라 불리는 1970년대에 노동운동의 주역은 여성 노동자였다. 장기간에 걸친 군사독재에서 1970년대처럼 노동운동 내에서의 성비가 여성 쪽으로 기울었던 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여성 노동자들은 1970년대 내내 노동운동을 책임졌고, 대학생들조차 변변히 데모를 하지 못했던 유신의 마지막 순간 YH 사건을 통해 철옹성 같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는 단초를 열었다. 너무나 단단했기에 작은 충격도 흡수할 여지가 없어 깨져버린 박정희 정권과는 반대로, 그 시절의 여성 노동자들은 한없이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무한히 강해질 수 있었다. 101)


자본은 늘 재단사가 미싱사를, 미싱사가 미싱 보조를, 미싱 보조가 시다를 갈구게 하여 생산목표를 달성했다. 그래도 군대와 달랐던 것은 담임은 반장을 야단치고, 반장은 조장을 야단치고, 조장은 또 어린 여공을 야단치다가 서로 붙잡고 막 울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소박한 자매애, 형제애가 노동운동의 기초였다. 신순애는 ‘중등수업 무료’라는 유인물을 보고 찾아간 노동교실에서, 어느 날 사장이 “깡패가 죽어서 가마니로 덮어놨으니 구름다리 밑에 가지 마라”라고 했던 말의 주인공이 전태일임을 처음 알았다. 장시간 고된 노동을 마치고 공부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여기서만큼은 그를 ‘7번 시다’가 아닌 신순애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7번 시다 신순애는 2년 반 동안 같이 일한 7번 미싱 언니의 이름을 모른다. 또래의 청소년들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를 책으로 배웠지만, 이제 비정규직의 어머니가 된 그 시절의 여공들은 그 시를 노동조합이나 야학에서 눈물로 체험했다. 106)


1970년대에 민주노조의 깃발이 오를 수 있었던 데는 개신교의 산업선교회와 천주교의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 같은 산업선교 또는 노동사목 조직의 역할이 매우 컸다. 너무도 열악한 노동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개선해보려는 노동자들이 손을 내밀 곳이라곤 교회밖에 없었다. 분신 1년여 전 전태일은 “저희들의 아버님”인 ‘국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식 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주십시오”라며 탄원서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반도상사 노동자들이 호소문을 전하려 노동청에 찾아가자 노동청 간부들은 “일도 안 하고 유인물이나 뿌리고 다니는 나쁜 아이들”에게 이런 불순한 짓은 “사회를 어지럽히는 범죄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호통을 쳤다. 당시 노동운동의 지원에서 종교계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나 빨갱이로 몰릴 가능성이 적었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어 권력이 쉽게 탄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25-6)


1970년대 들어 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의 활발한 활동으로 동일방직, 반도상사,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 등에 연이어 민주노조가 들어선 것은 5·16 군사반란 후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직된 노총과 산별연맹이라는 공식적인 체계에 균열이 발생한 것을 의미했다. 유신정권은 이 균열의 진원지로 두 단체를 지목했다. 특히 1974년 2월 반도상사의 농성으로 분출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어용노조 결성을 통해 체제 내로 흡수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중앙정보부는 적극적으로 산업선교회와 노동자들을 분리하려고 하는 한편, 산업선교회에 대한 전면적인 내사에 착수했다. 중앙정보부는 1974년 5월에 조화순 목사를 구속했다. 표면적으로는 노동자들과 함께 간 야외예배 설교를 문제 삼은 것이지만, 사실은 반도상사 노조 결성의 배후로 지목한 것이다. 전두환이 광주학살로 집권한 뒤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노동조합법을 개악할 때 악명 높은 ‘3자개입 금지’ 조항을 넣은 것은 바로 산선의 활동을 의식한 결과였다. 127)


제4부 유신의 사회사


나는 박정희 시대의 특징을 ‘조국 군대화’라 부르고 싶다. 전쟁이 법적으로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고 60만이 넘는 대규모 상비군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었지만, 민간인인 이승만이 지배했던 시기와 군인인 박정희가 지배한 시기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유신 직후인 1973년 1월 20일 박정희는 국방부를 순시한 자리에서 “앞으로 법을 만들어서라도 병역을 기피한 본인과 그 부모가 이 사회에서 머리를 들고 살지 못하는 사회기풍을 만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박정희는 병무비리의 근절을 위해서는 병무청만이 아니라 유관기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로 1973년 2월 26일 대통령 훈령 제34호로 ‘병무행정 쇄신에 관한 지침’을 제정했다. 이에 따르면 “병역기피자는 유신과업과 국민총화를 저해하는 ‘비국민’적인 행위자”로 규정되었다. ‘비국민’(히코쿠민)이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전쟁책동에 비협조적인 사람들을 체제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즐겨 쓰던 흉포한 언어였다. 153-4)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당시 박정희는 사회 저명인사나 특권층, 부유층의 자식들에 대해서 열외를 인정하지 않고 엄격하게 관리했다는 점이다. 유신시대에는 고위공직자나 재벌, 언론사 사주, 국회의원 등 상류층 자식들의 병적기록표에는 ‘특’이라는 도장이 찍혀 별도의 관리를 받았다. 이렇게 열심히 병역기피자를 없앤 것은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상당한 비율의 병역기피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징병제도가 운영되다가 갑자기 병역기피자가 일소되었다는 것은 군대에 사람이 차고 넘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군사정권은 방위 제도를 만들고 전투경찰을 만들어 소집된 청년들을 정권유지를 위해 써먹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남았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기업에 배치되어 병역의 의무를 대신하는 산업특례요원들이었다. 기업이 자격을 취소하면 당장 현역으로 끌려가야 하는 산업특례요원은 군대라는 목줄로 죄어 맨 현대판 노예노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군인들이 장악한 국가는 자본에 이렇게 베풀 줄 알았다. 156)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군의 공세가 강화되고 공산군이 사이공이나 프놈펜에 몇 킬로미터까지 육박했다는 보도가 거의 매일 신문에 실리던 1975년 초반은 한국에서 반유신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때였다. 4월 17일 크메르 정부는 공산 크메르루주군에 항복을 선언했고,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자 이웃 라오스의 좌우 연립정부에서 우파는 사실상 몰락했다. 인도차이나에서 도미노 이론이 현실로 나타나는 가운데 박정희는 모든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라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여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과 반대를 금지했다. 5월 21일의 여야 영수회담 이후 그동안 나름 유신반대 투쟁에서 일익을 담당해온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8월 17일 반유신 세력의 통합을 위해 애써온 마지막 독립군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월남 패망’의 위기는 박정희로 하여금 잠시나마 민주화운동 세력의 거센 도전을 뿌리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164-5)


어쩌면 베트남 파병은 이남보다 이북에 더 극단적인 변화를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김일성은 베트남을 한국의 제2전선으로 보고 대규모 파병을 단행한 박정희에 맞서 한반도를 베트남의 제2전선으로 만들기 위해 이북 사회가 조금이나마 유연성을 견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했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정치사에도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위로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장세동, 안현태 등 신군부의 주요 인물들이, 아래로는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의 장교나 하사관들 상당수가 베트남에 파병된 자들이었다. 이들 중 실제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자는 극소수라 하더라도, 유격대원과 민간인의 구분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을 잠재적 베트콩으로 보고 총을 겨눴던 경험을 가진 자들이 광주학살의 주역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베트남에서 부와 경력을 쌓은 일부 장교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으로 똘똘 뭉쳤다. 167-8)


유신 쿠데타로 또다시 헌법을 짓밟은 직후인 1973년 1월의 연두 기자회견에서 박정희는 “10월유신이라고 하는 것은 곧 새마을운동이고,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곧 10월유신”이라고 선언했다. 박정희의 말이 아니더라도 유신시대는 곧 새마을운동의 시대였다. 김정렴을 비롯한 유신정권의 핵심요인들이 입을 모아 증언하듯이 새마을운동은 “순전히 박 대통령의 개인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새마을 교육에서 활용되던 교재를 보면 “각하께서는 (중략) 새마을운동의 개념에서부터 사업 내용, 그리고 전개 방향에 이르기까지의 자세한 지침을 손수 구상하셨고, 때에 맞추어 국민 앞에 제시·설명하셨다”고 한다. 박진도와 한도현이 잘 설명했듯이 “새마을운동은 처음부터 정연한 이론이나 체계를 갖고 시작된 것이 아니고, 최고 지도자의 소박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한때 국정의 최고 정치철학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렇기에 새마을운동은 “박정희라는 개인 그리고 유신체제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177-8)


많은 관찰자들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농촌진흥운동을 빼닮았다고 지적한다. 박정희가 1970년 제창한 ‘새마을 가꾸기’란 조선총독부의 ‘아타라시이 무라 쓰쿠리’를 글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농촌진흥운동이 박정희에게 미친 영향을 가장 상세히 기술한 것은 조갑제였다. 최길성 교수의 연구성과를 인용하여 조갑제는 새마을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의 유사성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운동의 이념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이 ‘자조, 자립, 협동, 충효애국’이고 그것의 집약적 표현이 국민교육헌장이었던 데 대해서 우가키 총독의 농촌진흥은 ‘자립, 근검, 협동공영, 충군애국’과 교육칙어였다. 박정희, 우가키 두 사람 다 농촌 출신 군인이었다. 두 운동의 현장 지도자들은 새마을연수원과 농도강습소에 의해 각각 양성되었다. 〈새마을노래〉와 〈농촌진흥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농가경제 5개년 계획, 육림일과 애림일, 모범 부락의 선정 등 공통점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178-9)


1968년 7월 15일 문교부 장관 권오병은 국민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1969학년도부터 중학교 입시를 폐지하고 추첨으로 입학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중학교 무시험 제도의 채택은 중등교육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데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이에 더해 유신 쿠데타 직후의 추상같은 분위기에서 박정희 정권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대한 평준화를 단행했다. 1974학년도부터 서울과 부산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는 연합고사를 통해 학군별로 총인원을 선발하여 추첨 배정하는 방식으로, 1975년도에는 대구, 인천, 광주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당시는 한국 사회에 일류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학연·학벌 사회가 강력히 자리 잡고 있던 때였다. 그 정점에는 경기고-서울대의 특권적 교육재화를 보유한 사람을 가리키는 ‘케이에스(KS) 마크’가 있었다. 서울에는 5대 공립이니 5대 사립이니 하는 명문고가 있었고, 전국 각 지역에도 지역의 명칭을 딴 명문고들이 강력한 학연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201-3)


박정희는 이 학연 체제의 바깥에 있었다. 박정희 자신만이 아니었다. 이후락, 김형욱, 박종규, 차지철 등 군 출신 실력자는 말할 것도 없고 민간 관료 중에도 명문고 출신이 아닌 자가 훨씬 더 많았다. 명문 고등학교를 나온 육사 출신과 서울법대 출신들이 세상을 쥐고 흔들며 ‘육법당’의 전성시대를 구가한 것은 박정희가 죽은 다음의 일이다. 박정희는 명문 고등학교의 기득권을 박탈하는 악역을 경기고 출신인 민관식에게 맡겼다. 훗날 민관식은 자신이 경기고 출신이 아니었다면 평준화라는 개혁을 도저히 실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무시험과 같은 충격요법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입시지옥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병폐라는 공감대가 사회 전반에 단단히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벌과 일류 고등학교를 따지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 중학과 고교의 평준화는 박정희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다운 정책이며 그가 행한 가장 급진적인 사회개혁이었다. 203)


제5부 유신체제의 붕괴


1960년대 말 이후 한국의 수출 팽창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발이었다. 1964년 중국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미국 재무성은 1966년 2월 ‘중공봉쇄’라는 기본정책에 따라 유럽으로부터 원료원산지 증명이 없는 가발을 일체 수입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제재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로 중국제 원료를 사용한 제품으로 미국 시장의 90퍼센트를 석권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가발 산업이 몰락했다. 당시 뉴욕의 한국무역관 부관장으로 있던 장용호는 한국산 가발이 유망할 것이라 생각하여 무역공사를 사임하고 발 빠르게 왕십리에 종업원 10명의 소규모 가발공장을 차렸다. 장용호는 회사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YH무역이라 지었고, 부사장에는 동서인 진동희를 앉혔다. 가발은 불티나게 팔려 YH무역은 2년 만에 면목동에 5층 건물(현재의 녹색병원)을 마련했고, 인천에 제2공장을 지었으며, 창사 4년 만인 1970년에는 종업원 수가 무려 4,000명을 넘어섰다. 장용호는 1973년 고액 개인소득자 순위에서 무려 7위를 차지했다. 207-8)


유신체제의 억압에 대한 불만은 널리 퍼져 있었지만 1979년 상반기에는 그 불만이 저항으로 표출되지는 못했다. 사복들이 캠퍼스에 쫙 깔려 있고, 로마병정 같은 복장을 한 전경들이 여러 대의 닭장차에 타고 앉아 있던 대학가에서 1979년에는 1학기가 다 가도록 이렇다 할 학생 데모조차 일어나지 못했다. 겉으로 볼 때는 태평성대였다. 학생들도, 야당 정치인들도, 재야인사들도, 민주투사들도 깨지 못한 그 위장된 태평성대를 제일 먼저 깨고 나온 것은 “이 나라의 배고프고 예쁜 아가씨들”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야당 당사로 뛰어들면서 YH무역 사건은 한 개 회사의 노사문제가 아니라 정국의 뇌관이 되었다. 이 충격파를 흡수하기에 유신체제는 너무나 경직되어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간 지 만 24시간이 된 8월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고위대책회의는 신속한 강제해산을 결정했다. 진압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실신해 업혀가다 깨어나 농성장에 남은 스물둘 김경숙이었다. 212-3)


때로는 대사(큰 뱀), 때로는 왕사쿠라라 불렸던 유진산의 죽음은 싫든 좋든 한국의 야당사에서 한 세대가 저물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유신체제와의 정면대결을 회피했던 것은 꼭 유진산만이 아니었다. 유신헌법의 중선거구 제도에 따라 공화당과 사이좋게 동반 당선된 대다수의 신민당 의원들은 좀 더 ‘현실적’이고 좀 더 타협적이었다. 그러나 대의원들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은 야당다운 야당, 정권을 비판하고 견제하고 싸우는 야당을 바랐다. 1979년 5월 30일에 거행된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의원들은 “아무리 새벽을 알리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다”고 외친 김영삼을 선택했다. “신민당은 유신체제에 참여하고 있으며 유신체제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체제라고 보는 견해는 크게 잘못”이라며 중도통합론을 강조해온 이철승이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더라면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로 농성장소를 옮기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216-9)


유신의 종말이 채 20일도 안 남았던 1979년 10월 9일, 내무부 장관 구자춘은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이 “북괴의 폭력에 의한 적화통일혁명노선에 따라 대한민국을 전복,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위대”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라는 불법불온 단체의 전모를 파악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남민전이 북의 지령을 받지 않는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이라고 했지만, 속칭 반체제와는 성격이 완전히 판이하다고 강조했다. 남민전 사건은 일반 국민, 나아가 당시의 ‘반체제’ 재야인사나 청년학생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남조선’이라는 명칭, 북의 김일성에게 ‘피로써 충성을 맹세’하는 서신을 보냈다느니, ‘남조선해방전선기’를 걸어놓고 칼을 잡고 가입선서를 했다느니, 총기와 폭약을 준비했고 실제로 무장조직을 만들어 재벌 집을 털었다느니 하는 내용은 남민전이라는 이름의 조직이 기존의 민주화운동 선상에 출현했던 여러 조직이나 운동 행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220)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 연쇄살인이 있고 채 1년이 안 된 1976년 2월 29일, 청계천 3가의 태성장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이재문, 김병권, 신향식 등 3인은 남민전의 결성식을 가졌다. 이재문은 1차 인혁당 관련자이고, 김병권은 해방전략당, 신향식은 통혁당 관련자였다. 꼭 그렇게 모으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1960년대를 대표하는 전위조직 관련자들 중에서 탄압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남민전이 결성되고 바로 다음 날인 3월 1일, 명동성당에서는 전 대통령 윤보선, 전 대통령 후보 김대중, 원내 최다선 의원 정일형, 종교인 함석헌 등 저명인사 11인이 서명한 ‘3·1 민주구국선언문’이 3·1절 기념미사의 마지막 순서로 낭독되었다. 시위도 농성도 없이 달랑 선언문 한 장 성당에서 읽었을 뿐인데 김대중 등 11명이 구속되었다. 공개적인 영역, 합법적인 영역에서의 모든 활동은 철저히 차단된 것이다. 독재정권에 대한 싸움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투쟁을 한다면 비합법, 비공개, 지하활동밖에는 길이 없었다. 223-4)


경찰이 남민전이라는 거대한 지하조직을 적발한 것은 뜻하지 않게 유신정권의 심장부에서 권력투쟁을 격화시켰다. 중앙정보부는 방대한 조직망에도 불구하고 남민전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수집하지 못했다. 남민전과 같은 조직을 적발해내는 것이 중앙정보부의 임무였음에도 대어를 낚은 것은 경찰이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남민전 사건이 터지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무능을 질타했고, 박정희도 김재규에 대한 신임을 거두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남민전 사건은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그 구성원들도 남의 달콤한 꾐에 속아 넘어가는 단순한 사람들이 아닌 교사, 학생, 지식인 등 이른바 ‘아는 사람’들이며 사회지도층도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썼다.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남민전에는 오른쪽으로는 이재오에서, 왼쪽으로는 김남주에 이르기까지 인재가 참 많았다. 유신은 그런 시대였다. 그 어둠의 시대는 남민전의 적발과 함께 저물어가고 있었다. 226)


1979년 8월의 YH 사건 이후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 부마항쟁의 발발과 계엄령 선포 등으로 상황은 절정을 향해 숨 막히게 치달아가고 있었다. 파국은 너무나 갑자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와버렸다. 유신체제 수호의 총책임자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친형과도 같은 각별한 사이였던 박정희를 총으로 쏴 죽인 것이다.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 사건 수사 책임자 전두환은 10·26 사건을 “김재규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고 어처구니없는 허욕으로 빚어낸 내란 목적의 살인 사건”이라고 규정했다.1 박정희의 추종자들에게 이 사건은 ‘패륜아’ 김재규가 공적으로는 ‘국부’요, 사적으로는 ‘은인’인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는 자들이 자기들끼리 총 쏘고 죽이며 엄벙덤벙 난리굿을 친 사건이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김재규의 어설픈 총질로 민중봉기에 의한 유신정권 타도의 기회를 날려버린 아쉬운 사건이었다. 242)


우리 역사에는 또 다른 10·26 사건이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을 거치면서 너무 얌전해진 탓인지 진보진영에는 대의를 위해 제 몸을 불태우고 제 피를 흘린 열사들은 일일이 이름을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넘치지만, 제 목숨을 바쳐 적의 피를 흘리게 한 의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른쪽 동네라고 사정이 다른 것은 아니다.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김재규는 5·16과 유신이라는 박정희의 내란에 동행했으면서도 결국 이 내란을 종식시켰다. 김재규의 행동을 내란 목적 살인으로 몰고 간 것은 전두환의 내란이었다. 김재규가 사형당한 것은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이었다. 252-3)


에필로그 – 도청에 남은 그들을 기억하자-광주, 그 장엄한 패배


광주 사람들은 광주의 소식이 전해진다면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대구에서도 시민들이 마땅히 들고일어날 것이라 기대했다. 전국의 시민들이 들고일어나야 살인마 전두환의 집권을 막을 수 있을 텐데 어느 곳에서도 그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공수부대를 몰아냈을 때의 기쁨도 잠시,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감이 몰려왔다. 총을 내려놓자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날 모두가 총을 내려놓았다면 광주는 우리 가슴에 오늘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았을 것이다. 끝까지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승패가 문제가 아니었다. 왜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인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걍’ 내려놓을 수 없었다. 텅 빈 도청에 전두환과 그 졸개들이 씩 웃으며 들어온다면 지금까지 죽은 사람은 뭐가 되고, 지금까지 싸운 건 또 뭐가 되느냐는 것이다. “산 사람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내려놓자고 했고, 죽은 이들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놓을 수 없었다.” 257)


도청의 진압이 있고 꼭 1년 뒤인 1981년 5월 27일 서울대에서 벌어진 광주학살진상규명 시위가 진압되어 갈 때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고 도서관 5층에서 공부하던 김태훈이라는 학생이 ‘전두환을 처단하라’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치고 몸을 던졌다. 그 꼴을 안 보았으면 모를까, 본 사람들은 또 광주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광주의 죽음과 대면하면서 1970년대의 낭만적인 민주화운동은 치열해졌고, 엘리트 중심에서 보다 민중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83년 9월 김근태를 의장으로 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결성되었을 때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옴두꺼비는 뱀의 길을 가로막아 스스로 잡아먹히지만, 뱀의 몸 안에 독을 뿜어 죽게 하고 그 몸 안에 알을 낳아 수백 마리의 새끼 두꺼비들이 뱀의 몸을 파먹으며 자란다는 것이다. 수많은 광주의 자식들은 ‘1980년 5월 26일 밤 내가 광주에 있었더라면 나는 총을 들었을까’라는 질문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2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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