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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님의 서재
  • 미국인 이야기 1 : 독립의 여명 1763~1770
  • 로버트 미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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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21
  • : 446

프롤로그 뒷심이 되어주는 진리들 


"영국의 제도는 인간이 만들어낸 정부 형태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아메리카인은 영국의 정치제도가 자유에 부여해준 오래된 보호와 격려의 역사에 경의를 표했다. 영국의 정치제도는 제국의 자유, 그리고 영국인과 아메리카인의 자유를 보호했는데, 그보다 앞선 제국들의 전제적 행태와 그 당시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횡행하는 전제에 비하면 아주 뛰어난 업적이었다. 이 널리 공유된 전제 조건에 따르면, 이런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은 필연적이고 불변하는 질서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식민지인이 머릿속에 품었던 이런 전제 조건은 그들이 그토록 경의를 표한 현실과는 상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세계에서는 여건이 많이 달랐고, 완전히 새롭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래도 신선한 사회가 생겨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혁명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결과적으로 어떤 형태를 갖추게 되었는가? 그토록 많은 것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지다니,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17)


1장 견제받는 대국 


"유럽인에게 위대한 국가는 영국이 아니라 세련된 프랑스였다. 유럽의 귀족들이 볼 때 영국의 군주제는 진정한 의미의 군주제가 아니었다. 1세기 전에 영국인은 한 명의 왕을 참수했고 다른 왕은 쫓아버렸다. 유럽인의 눈으로 볼 때, 영국인은 불안정한 족속이고 대의정치에 사로잡혀 있으며 왕이라는 사람은 각종 권리와 자유의 장전章典 때문에 겨우 사장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였다. 영국인은 예측 불가능하고 제한된 정부를 두고 해외에서의 거친 모험에만 몰두하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해외 활동은 유럽의 여러 제국에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영국인에 대한 이런 생각은 편견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 영국인의 에너지는 엄청나며 전쟁, 무역, 식민지 지배 등으로 그 힘을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1760년 당시에 성장 잠재력이나 힘과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능력, 그리고 국력을 동원해 확정된 정책을 밀어붙이는 힘 등의 측면에서 어떤 나라도 영국을 따라오지 못했다."(29-31)


"그러나 정부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18세기 영국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살펴보면 그 당시 영국의 보수적인 문화가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영국의 관습법과 오래된 전통이 말해주듯이, 정부는 '왕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했다. 왕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국내 정책의 핵심이었고, 해외 정책도 국내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됐다. 영국에서 모든 정부는 왕의 정부였다." "동일한 (또는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역할을 수행하고 그런 뒤 물러갔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정부는 의회와 마찬가지로 같은 종류의 일을 계속해서 수행했다. 공공정책과 관련해 의회가 한 일은 별로 많지 않았다. 의회는 통치자가 아니었고, 국가의 에너지와 활동의 원천도 아니었다. 국가는 저 혼자 내버려두었을 때 봉사가 가장 잘 수행되었고, 자유는 의회의 간섭꾼이 끼어들지 않을 때 가장 활짝 피어났다. 지주계급은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알아서 챙겼고, 그 결과로 국가와 왕에게 봉사했다."(41-2, 45)


"17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 아메리카에 13개 식민지가 건설됐고, 모두 영국의 감독을 받았지만 거의 자치적으로 행정을 펴나갔다. 식민지와 영국 왕실 사이의 형식적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윤곽은 알려져 있었지만, 식민지가 실질적으로 자치 행정을 펴나가고 있다는 객관적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객관적 현실과 영국에서 상상하는 것 사이의 불일치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영국과 아메리카의 거리는 아주 멀었고 의사소통이 불완전했기 때문에, 서로 의사소통이 원활하고 발달된 식민지 행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식민지는 왕실의 허가에 따라 건설됐고, 식민지의 행정적 권위는 국왕의 이름으로 행사됐다. 그러나 그 권위는 3대 영주식민지인 메릴랜드,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에서는 애매모호했고, 2대 법인식민지인 로드아일랜드와 코네티컷에서는 유명무실했다." "식민사업부는 식민지의 감독을 주로 맡는 정부 부서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른 장관들의 질투심 때문에 무능한 장관들이 임명됐다."(59-61)


2장 두 번 태어난 사람의 자녀들 


"영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아메리카인도 관직을 그들끼리 나눠 가지면서 평화를 유지했고, 대체로 그런 식으로 질서를 유지했다." "식민지의 정치적 이권은 별로 많지 않았고, 설령 있다고 해도 영국에 거주하는 어느 장관이나 국왕이 임명한 총독이 그 이권을 배분했다. 그래서 아메리카의 '부들'들은 그보다 더 큰 먹잇감을 노렸다. 바로 투기나 농장 건설용 토지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또한 공사 계약, 18세기에 자주 벌어졌던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장비 계약, 도로·다리·부두 및 기타 경제 개발에 필요한 시설 계약 등을 확보해 그 이권을 나눠 가졌다. 이런 활동 덕분에 13개 식민지 정부는 영국 정부에 비해 할 일이 많았다. 자칭 식민지의 소 의회들little Parliaments은 활기가 흘러넘쳤고 상당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권에 따라 만들어진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분파주의가 미국 혁명 이전 식민지 의회의 의사 절차를 지배했다. 그러나 13개 식민지가 모두 분열되거나 분파주의로 혼란을 겪지는 않았다."(91-2)


# 부들 :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관직추구형 인물


"파당은 관직 배분으로 배를 불리고 권력자의 손에 있는 자원을 통해 영양분을 얻는다. 그들은 갈등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이끌어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계를 해체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갈등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잘 알고, 그 이상으로 밀어붙이면 정치제도가 붕괴할 수 있다는 점도 알았다. 그리하여 당파 게임이 운영되는 규칙이 마련되었는데, 반대파에 대한 폭력 행사를 금지한다는 규칙이었다." "또한 그들은 영국에서 벌어진 내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반란이나 내란이 일어나며 정치 관직, 미개발된 대륙, 사회질서 등 많은 것이 위태롭게 되리란 점을 인식했다." "이렇게 하여 18세기의 식민지에는 전반적인 안정 속에서 당파주의가 자리 잡았다. 역설적이게도 갈등을 만들어내는 힘이 정치질서에도 기여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백인은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유권자 수가 많아지면 선거운동이 격렬해지기도 하지만, 유권자 자신들이 정치제도의 일부라는 사명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95-6)


"아메리카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국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종교는 그런 여러 방식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심지어 혁명에 미온적이고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도 종교는 중요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아메리카에서 종교가 문화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종교는 가치, 이상, 세상을 바라보고 반응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13개 식민지는 각각 달랐지만 그래도 그러한 공통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이 문화 덕분에 사회적 동요와 전쟁의 위기 때 단합할 수 있었다. 물론 각 식민지의 교회는 서로 달랐다. 하지만 그런 표면 아래에는 유사성이 더욱 강하게 존재했다. 교회 지배 구조는 평신도들이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어서 회중교회 민주주의를 형성했고, 아메리카의 목사는 유럽의 목사에 비해 훨씬 위세가 약했으며, 종교 생활에서는 교회 의례보다 개인의 신앙 체험을 중시했다. 영국국교 내에서도 예배 절차는 예식과 성직자의 권위를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저교회파low-church의 관습을 상당히 따랐다."(103-4)


"휘그 사상은 정치적 자유를 유지하는 데 두 종류의 위협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백성의 전반적인 도덕적 부패였다. 이런 부패의 결과로 결국 사악하고 전제적인 군주가 생겨난다고 보았다. 다른 하나는 행정부의 권력이 입법부를 침탈하는 것이었다. 권력자들이 혼합 정치체제에 의해 잘 보호되는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언제나 이런 침탈을 시도해왔다고 본 것이다. 미국 혁명을 살펴보면 이런 급진적인 휘그 사상이 아메리카인의 마음속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에서는 반체제를 표방하는 주변 세력만이 휘그 사상을 받아들였다." "신앙의 각성을 통해 두 번 태어난 사람들, 그들의 자녀이자 17세기 종교적 전통의 후예였던 이들이 바로 미국 혁명을 만든 세대가 되었다." "1760년 이후에 여러 정치적 위기를 겪으며, 이런 도덕적 사상은 엄청난 시련을 만난다. 하지만 신의 섭리에 따라 위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미국 혁명에 강렬한 이상주의를 만들어냈다."(107-8)


3장 혁명의 태동: 위에서부터 아래로 


"캐나다, 아메리카 서부, 플로리다에는 모두 인디언 '문제들'이 있었고, 이 문제들은 전쟁이 아닌 방식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식민지 정보가 가장 많았던 무역청은 오래전부터 인디언 문제에 대해서는 현지 수준의 대응이 아니라 제국 수준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무역청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인디언에게서 백인 아메리카인을 보호하려면 인디언과의 무역을 규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면 갈등의 주요 원인인 백인 무역업자들의 인디언 수탈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백인 토지 수탈자들이 인디언 영토에 침입하는 것도 중단시키자고 했다. 그런 제국 수준의 대 인디언 문제 대책은 모두 영국군의 활용을 전제로 했다. 여기에 몇몇 사람들은 군대로 관세를 거두어들이고 아메리카 사회를 단속할 수 있을 거라고도 믿었다." "상비군을 두기 꺼려한 영국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에 상비군을 두기로 한 결정은 의회에서 놀라울 정도로 쉽게 통과됐다."(115-6)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760년 후반부터 경제 불황이 식민지를 서서히 압박하고 있었고, 영국의 상황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였다. 아메리카에서 전쟁이 끝나가자 국왕 군대에 들어가는 음식과 보급품의 주문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이는 당연히 아메리카 경제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 곧 사회 모든 계층이 경기 변화를 체감했고, 특히 군부대 납품에 곡식 판매를 의존했던 농부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1763년이 되자 불경기는 더욱 심해졌다. 경제 불황에 대한 설명은 합리적인 경우가 별로 없지만, 아메리카인들은 1760년대 불황의 원인을 영국의 새 (과세) 법안들과 관련지어 생각했다." "아메리카인들은 경제적 관점에서 항의를 표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물론 많은 아메리카인이 자신들을 대표할 수 없는 식민기관에 의한 과세 조치는 그들이 오랫동안 누려온 영국 신하로서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현지인은 새로운 정책들이 호주머니를 얄팍하게 한다는 사실에 더 집중했다."(135-6)


"1764년 늦겨울에 이르러 9개 식민지 의회가 총독이나 대리인을 통해 영국에 항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들은 세수 증대를 위해 과세를 해야겠다는 영국 의회를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권리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 권리를 누렸다.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권리는 언제나 사치품 같은 것이었다. 아메리카인들은 곧 그것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설탕법 투쟁에 실제로 관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식민지 사회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 가령 상인이나 식민지 의회의 의원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가끔 그들보다 권력이 없는 사람들한테서 지원을 받았다. 나중의 인지세법 위기 사태에서 이 지도자들은 그런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주 시선을 돌렸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권리를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하게 되었다. 장인, 가게 직원, 기타 각종 노동자들 같은 이들의 사례는 다른 사람들을 깨우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분명한 사실은 위에서 시작된 것이 단지 상층부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146-8)


4장 인지세법 위기 


"매사추세츠에서 폭력 행위가 처음 시작됐다. 글을 발표하고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기로 결심한 소수의 사람들은 매사추세츠 인지 분배관으로 임명된 앤드루 올리버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열 나인Loyal Nine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자유의 아들들로 명칭을 변경했다." "폭동이라는 거친 일을 도모하기 위해 그들은 유경험자를 동원했는데, 바로 최근에 통합된 노스 엔드와 사우스 엔드의 폭도였다." "로열 나인이 한 일이라고는 지역 내의 적 하나를 다른 적으로 대체해준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폭도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앤드루 올리버와 수년 동안 관직을 차지해온 관리들을 적으로 삼으면 되었다. 올리버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와 그의 일파는 인지세로 이득을 볼 상황이었다. 올리버의 매형인 토머스 허친슨이 인지세를 지지했다는 소문 역시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친親 영국적인 자들을 강타하는 일은 곧 자유를 위해 일격을 가하는 것을 의미했다."(181-2)


"파괴 행동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총독으로서는 더는 놀랄 것도 없었다. 인지세법에 대한 반대는 다소 강력하게 표명됐지만, 1765년 8월 말에는 더 이상의 폭력이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폭도의 행동은 다소 지나쳤고 시청도 유감을 표시했지만, 올리버를 타도하려는 8월 14일의 폭동에 대해 누구도 사죄하지 않았고 동의 없는 과세에 반대하는 것을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다. 8월 26일의 폭동은 로열 나인이 예상한 것보다는 좀 더 과격했지만, 그렇게 된 데 대해 그들은 별로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허친슨은 공적이었고 올리버의 매형이었으며 인지세법을 지지했다. 그러니 그에게 따끔하게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8월 26일의 폭동은 제한적인 의미에서만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 8월 말에 이르러 주요 식민지인 버지니아와 매사추세츠는 각자의 방식으로 인지세법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들이 한 일은 실제로 자신들의 예상보다 더 많은 움직임을 만들었다. 이제 반대 운동의 확산은 불가피하게 보였다."(188-9)


5장 반응 


"조지 그렌빌은 인지세법이 정식으로 발효되기 석 달 반 전에 수상직에서 해임됐다. 새로운 내각은 바탕이 튼실하지 못했다. 로킹엄 경은 이른바 '로킹엄 휘그'라는 지지자들이 있었으나, 그 세력은 안정적이지고 견고하지도 못했다." "아메리카 문제는 로킹엄 휘그들이 관직에 취임하자마자 그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아메리카인들이 설탕법을 폐지시키기 위해 영국 상품의 소비를 크게 줄이자 무역이 몇 달 동안 침체됐다. 게다가 영국 상인들은 경제 침체기에는 부채를 회수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신중한 상인들은 경제의 건전성이라는 관점에서 탄원서를 작성했다. 그들은 모종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현재 상황이 더 악화되리라고 예측했다." "의회가 1766년 1월 14일 재개됐을 때, 내각은 인지세법 철폐를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식민지가 의회의 주권에 도전해오는 이 당황스러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과 문제였다. 13개 식민지는 영국 의회의 권위를 부정했다."(216-7, 220-1)


"1월 28일에 내각은 하원을 설득해 전체 위원회를 결성하게 했고, 이어 위기에 대응하는 행동 강령을 구체화할 제안을 고려하도록 유도했다. 2월 3일, 콘웨이는 영국 의회가 〈사정이 어찌 되었든 모든 경우에〉 식민지를 구속하는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갖고 있다고 선언하는 결의안을 발의했다. 선언법Declaratory Acts의 바탕이 되는 이 결의안을 도입하면서, 콘웨이는 의회에 분명히 과세권이 있지만 과세권을 행사하는 확고한 방편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제 내각이 할 일은 만약 인지세법이 법령집에 오르게 된다면 심각한 경제위기가 국가에 닥치리라는 인상을 의원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각이 언론의 격렬한 공격을 받으면서 철폐 작업은 더욱 어려워졌다." "제임스 스코트는 17세기 초 벤 존슨의 영국 비극에서 이름을 딴 안티세야누스라는 필명으로 가장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 만약 내각이 인지세법에서 양보한다면 앞으로 아메리카에서 어떻게 세금을 거두려고 하는가?"(226-8)


"아메리카인들이 모든 세금에 반대하지는 않는 충성스러운 신민임을 보여주어 하원을 안심시키기 위해, 내각은 경외할 만한 인물인 벤저민 프랭클린을 하원에 출두시켰다. 프랭클린의 가장 멋진 논평은 안티세야누스가 제기한 것과 비슷한 질문에 대답할 때 나왔다. 아메리카인들이 이 세금을 회피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들에게 다시 세금을 부과할 수 있겠는가? 프랭클린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내부세와 외부세를 구분했다. 그는 의원들에게 식민지는 오로지 내부세에 반대할 뿐이라고 말했다. 영국 해군이 바다에서 제공하는 보호에 대한 무역 관련 세금은 영국에 기꺼이 납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각은 하원에 프랭클린의 증언과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보내온 수많은 증거를 검토할 시간을 일주일 주었다. 그리고 2월 21일, 콘웨이는 인지세법을 철폐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도입했다. 인지세법 철폐 결의안은 276대168로 가결됐다. 철폐 법안은 3월 17일 마지막 독회를 했고 다음 날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229-31)


6장 셀던의 페니 


"존 셀던은 의회가 찰스 1세와 싸우던 시기의 의원이다. 그는 식민지 지식인들에게는 주변적인 인물에 불과했지만 〈국왕의 10펜스가 그의 것이라면 나의 1페니도 그에 못지않게 나의 것〉이라는 그의 격언은 인지세법 위기 때 널리 인용됐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말이 당시 재산이 가진 중요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인들은 경험이나 사상, 여론 등에서 로크파였다. 대부분의 가정이 조상이나 가문에 기댈 수 없었던 사회에서 부는 아주 중요했다. 조상에 기대기에는 아메리카 사회가 너무나 유동적이었다. 물론 땅이 대부분의 부를 제공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상업에서 생겨나는 돈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무튼 사람은 물질적 재산에 의해 신분을 획득했고, 가문, 성장 환경, 교육 등은 덜 중요했다. 게다가 재산은 정치적 권리도 부여했다. 모든 식민지에서 실질적 재산의 소유가 유권자의 필수 조건이었고, 보통 암묵적 합의에 따라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차지했다."(235-8)


"인지세법은 〈우리에게 노예제의 족쇄를 영원히 고정시키려는 첫 번째 조치〉일 뿐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널리 퍼져 있어서 단순히 프로파간다로 치부할 수 없었다." "새로운 정책들에 대한 설명에 식민지인들이 불안감을 느낀 것은 합리적인 반응이었다. 정책들의 목표는 누가 봐도 영국의 국가 부채 축소와 식민지 방어였다. 어쩌면 아메리카인의 이기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상비군이 아메리카에 주둔하는 것을 우려하는 태도를 단지 인색함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영국에서도 평화시의 상비군 유지가 결국 명예혁명을 촉발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인들은 프랑스가 캐나다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왜 그런 상비군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상비군으로 명분 없는 세금에 대한 저항을 무력 진압할 의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세금, 행정, 안보 등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아메리카인의 우려와 의혹은 합리적인 반응이었고, 그들이 느끼는 불만 또한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인 것이었다."(249, 253-4)


"18세기 (과격파) 공화주의자들─존 트렌차드, 토머스 고든, 벤저민 호들리 등─은 후세에 이름을 널리 알린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혁명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데 이들은 로크의 사상을 뛰어넘는 영향을 미쳤다." "휘그들과 영국 정부가 영국의 제도, 역사, 자유에 대해 기쁜 찬가를 부르는 동안, 과격파들은 사라져 가는 자유와 영국 정치와 사회에서 늘어나는 부정부패에 대해 슬픈 만가를 불렀다. 그들은 고대 로마 이래 모든 정부 내에는 인민을 노예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정치적 예레미야 예언자들에 따르면, 부정부패와 도덕적 타락의 극치는 자유의 파괴이며, 그 자유를 내각의 독재가 대체할 것이었다. 이런 음울한 예측은 영국의 지체 높은 휘그 지도부와 수많은 추종자를 결코 설득하지 못했지만, 아메리카에서는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이 이를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인지세법의 위기가 정점에 도달했을 때, 그 예측은 아주 설득력 있고 타당한 것으로 보였다."(258-61)


"아메리카인들이 음모론을 상식적 진리로 받아들이게 만든 또 다른 상황은 그들이 믿는 개신교의 가르침이었다. 그들은 각성하고 복음을 믿으며 정신적 부흥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자녀였고, 자유를 침해하려는 사악한 음모가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 영국에서 꾸며지고 있다는 소식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식민지의 건설자들은 18세기 기준으로 볼 때 지속적인 음모의 초창기 계획을 피하여 아메리카로 건너왔다. 공무원과 그들의 보조자라는 형태로 영국에서 아메리카로 건너오게 될 타락, 나태, 방탕의 이야기에 아메리카인들은 당연히 혐오감을 느꼈다." "폭군의 사악한 의도에 영합하는 게으르고 방탕한 공무원들에 대한 증오는 곧 적법한 정부를 신봉하는 정직하고 근면한 자유인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공포와 망상이 식민지 전역에 책임 있는 공공질서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물론 아이러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아이러니는 인지세법으로 시작된 기나긴 위기 상황 속에서 생겨난 것이었다."(264-6)


7장 찰스 톤젠드의 유산 


"아메리카인들도 즐거움을 느꼈고, 법안 폐지에 안도했지만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은 어떤 분위기 또는 불안이 존재했다. 음험한 내각이 아메리카인에게서 자유를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은 아주 강력했다." "영국에 대한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아메리카 정치의 당파주의는 더욱 심각해졌다. 실제로 여러 식민지들에서는 인지세법을 철회시킨 것이 오히려 현지 권력 구도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때때로 주요 관직이나 의회의 장악 세력이 바뀌면서, 사람들에게 어디에서나 어느 편인지를 분명하게 밝히도록 강요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제 각 지역의 정치에서 식민지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안이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즉, 영국의 지배에 대한 적개심 말이다. 식민지 정치인들이 이 적개심을 활용할 수 있는 곳에서는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다. 대세를 잡은 측은 반대파가 영국 내각의 정책을 지원한다고 매도하면서 사건을 일으켜 정계의 변화를 유도했다."(271-2, 275-6)


"채텀 백작(피트) 내각의 재무장관 찰스 톤젠드는 세 가지 아메리카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첫째, 숙영법Quartering Act─식민지는 해당 지역에 주둔하는 영국 군대에 병영이나 술집 또는 빈 건물 등을 숙영 장소로 제공해야 했다─을 준수하기로 동의할 때까지 뉴욕 식민지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켜야 한다. 둘째, 납, 유리, 종이, 화가의 물감, 차 등의 품목이 식민지에 수입될 때에는 관세를 납부해야 한다. 셋째, 각 식민지에 본부를 둔 아메리카 관세 위원회를 설립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제안은 1767년 6월 말에 이르러 법안으로 구체화됐고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톤젠드는 자신의 세입 증가 방안이 순전히 '외부세'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인지세법 철폐를 둘러싸고 벌어진 혼란스런 상황에서, 일부 의원은 식민지인이 오로지 내부세만 반대하고 이런 외부세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듯하다. 그러나 세입법은 아메리카인들이 이미 경험했던 공포와 적개심만 부활시켰을 뿐이었다."(293-5)


8장 보스턴이 선두에 나서다 


"1768년 9월 22일, 도시회의가 보스턴에서 개최됐다. 회의는 66개 도시와 여러 구역에서 온 70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고, 9월 27일에 폐회되기 전까지 또 다른 30개 도시에서 27명의 대표가 도착해 참가했다." "도시회의에서 작성한 서류들은 식민지의 정치체제론을 개진하지도 않았고, 군대 도착에 무력으로 맞서겠다고 위협하지도 않았다. 〈회의의 결과〉에서는 최근 식민지 사태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의회 소집을 원하는 도시회의의 뜻을 명백하게 밝혔다. 이러한 요구 사항은 식민지 저항운동의 발전을 살펴볼 때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런 회의가 열렸다는 사실 자체였다. 도시회의는 범죄 단체도 불법 단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운동의 외연을 넓혔다." "도시회의가 끝난 다음 날, 14연대와 29연대의 병력 일부를 이동시키는 수송선이 보스턴 항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10월 1일에 일렬로 도열함한 포함들을 뒤로 하고 보스턴 항구의 부두에 상륙했다."(333-4)


9장 영국의 서자들 


"영국군에게 총으로 저항하려던 식민지인의 의지는 핼리팩스에서 보낸 함대가 보스턴 해안 근처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사라져버렸다." "보스턴 사람들의 이를 갈게 한 것은 군대의 주둔 그 자체였다. 시민들은 시내 한가운데에서 상비군의 레드코트를 날마다 봐야 했고, 보스턴 넥에 주둔한 군대를 날마다 지나쳐야 했다. 그들은 시청으로부터 강제로 탈취한 땅 위에다 초소를 세우기까지 했다. 또한 시민들은 거리에 있는 보초병들로부터 검문을 받아야 했다. 개인적 자유에 익숙한 시민은 모욕을 느꼈고 화가 났으며 명예가 손상되는 느낌을 받았다. 보초병들의 도전은 시민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사태의 명확한 상징이었다." "이런 식의 대치 국면에서 군 지휘관들은 평화와 조화를 원했을지 모르나 대중의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았고, 영리하게 또는 때때로 악의적으로 신문을 이용해 대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어떤 이야기들은 순전한 날조였는데, 시 당국과 영국군의 표현에 따르면 불순한 날조였다."(372, 376-8)


"1770년 3월 5일, 보스턴 부두 노동자들과 영국 주둔군 사이에 시작된 사소한 시비가 11명이 죽고 다치는 커다란 유혈 사태로 번졌다." "1765년 이래 아메리카에서 영국 권력의 적법성은 의문시되어왔다. 견제받지 않은 권력은 결국 보스턴의 자유와 목숨을 파괴했다. 피해자들은 엄청난 분노를 느꼈고, 영국과 아메리카의 관계를 정의하는 정치 이론을 냉정하게 검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 뒤 몇 년 동안 아메리카인은 영국의 정치체제에 대해 계속 생각했고, 자신의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몇 년 전 식민지에서 널리 존경받은 윌리엄 피트는 영국 의회에 나가서 아메리카인은 〈영국의 자식이지 사생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경험은 많은 아메리카인으로 하여금 과연 피트의 말이 사실인지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보스턴 학살로 이어진 최근의 역사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들은 영국의 서자일지 모르나, 그래도 아메리카의 적자라는 점이다."(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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