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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자본주의 문명 제2부 : 발전 과정
  • 배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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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15
  • : 370

제2부 


제7장 국가 건설의 실제 


"1791년 12월 해밀턴은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에서 연방정부가 적당한 수준에서 세율을 책정하고 관세를 부과하며 미국의 제조업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퍼슨과 매디슨은 해밀턴의 보고서에서 관세 수입으로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대목을 보고, 부패한 영국의 정치적 관행을 떠올렸다. 더욱이 제조업이 발달하면 거기에 고용되는 빈민이 증가하고, 그래서 공화국의 사회적 기반이 위축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농업에 전력을 기울였던 남부를 대표하는 정치인들도 대부분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북부에서도 적잖은 정치인들이 해밀턴의 보고서에 불만을 표시했다. 북부에서 대두하던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해밀턴의 제안과 달리 관세를 높게 책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해밀턴의 보고서는 의회에서 채택되지 않았다. 그 대신, 제퍼슨과 매디슨을 중심으로 해밀턴을 비판하는 당파가 뚜렷하게 형성되었고, 이들을 〈공화파〉Republican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29-30)


"당대인들은 정당과 파벌을 구분하지 못했고, 당파를 조만간 사라져야 할 현상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은 지속되었고, 당파도 예상과 달리 사라지지 않았다. 더욱이, 1800년에는 정권이 연방파에서 공화파로 넘어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두 당파의 대립 구도는 흔히 〈제1당 정당 체제〉First Party System라 불린다." "공화파는 남부의 지지를 바탕으로 1820년대 중반까지 계속해서 집권할 수 있었다. 이것이 제퍼슨과 매디슨을 거쳐 제임스 먼로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버지니아 왕조〉의 몸통이다." "그래도 제퍼슨은 해밀턴이 추진하던 공채 상환을 중단하지 않았다. 부채는 정치를 오염시키는 폐단이므로 신생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청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제정책이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점은 제퍼슨 행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간주되는 루이지애나 매입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 광대한 영토 매입은 연방정부의 권력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31, 35-6)


"미국의 정치는 1815년부터 〈화합의 시대〉Era of Good Feelings에 들어갔다. 연방파는 해밀턴의 부국강병책을 중심으로 집결했지만, 공화파가 그런 정책을 대부분 계승함에 따라 뚜렷한 색채를 잃게 되었다. 더욱이 연방파는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공화파만큼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상인과 금융인을 비롯한 자산가들을 비호하면서도, 그에 따르는 부패와 권력의 집중을 면밀하게 경계하지 않는다는 공화파의 비판에 주의를 기룽리지 않았다. 반면에 공화파는 그런 비판을 제기하며 각지에서 민중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데 열의를 보였다. 결국 연방파는 점차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고, 이는 〈제1차 정당 체제〉의 해체로 이어졌다. 더욱이, 1815년에 미영전쟁이 끝난 다음에 대두한 국민주의nationalism가 정치적 대립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이른바 〈제2의 독립전쟁〉을 계기로 미국인들은 종교적, 문화적, 지역적, 정치적 차이를 뛰어넘어 하나의 국민으로서 유대 관계를 확인하기 시작했다."(46-7)


"존 마셜은 1801년 1월부터 1835년 7월까지 34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법원장직을 역임하면서 미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한 제도적 지주를 수립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1819년 다트머스 대학 판례에서 마셜은 미국 헌법이 모든 계약이 아니라 개인의 재산과 경제적 가치에 관한 계약을 보호한다는 취지를 지닌다고 해석했고, 그것도 사적 계약을 정치적 권위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큰 관심을 지닌다고 이해했다. 이 판결은 다트머스대학이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학문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마셜 법원은 다트머스 대학 판례를 통해 법인─원래 의료나 교육 같은 비영리사업을 목적으로 만드는 단체─이 헌법의 보호를 받는 제도로서, 정부가 변경하거나 폐지하는 등, 간섭하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마셜은 법인이란 정부가 창조하는 법적 존재이지만, 그 취지가 정부의 운영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부가 자의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고 천명했다."(61-3)


제8장 발전 동력의 재편 


"19세기 초부터 시장경제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사회적 상승이나 하강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분위기 속에서 미국인들은 과거에 비해 더욱 물질적 풍요에 주목하고 또 주력하던 풍조를 보여 주었다. 이제 미국인들은 〈제 힘으로 성공한 사람〉self-made man,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부귀영화를 누리며 성공을 구가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러러보았다. 이런 관념은 나중에 〈미국인의 꿈〉American Dream이라 불리는 면면한 전통으로 발전한다." "다른 한편 경제발전과 빈부 격차가 동시에 전개된다고 지적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들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함께 랄프 왈도 에머슨을 중심으로 문명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대안을 모색하던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미국인의 꿈〉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71-3)


"미국식 자수성가의 대표적 사례였던 앤드루 잭슨을 지지하는 〈잭슨파〉Jackson Party는 보통 사람들을 대변한다는 구호 아래 정치인과 결탁해 특권을 확보하는 상공업자들을 경계했다. 잭슨파는 우호적인 언론기관과 접촉하고 지역별로 정치단체를 조직하며, 휘장을 두르고 노래를 부르며 대중 집회를 열고 가두 행진을 벌이는 등,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중 정치의 기법들을 도입했다. 그 결과,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유권자는 1824년 24%에서 4년 뒤에 58%로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그중 56%가 잭슨을 지지했다. 그러자 선거에서 패배한 애덤스와 클레이도 추종자들을 모아 정파를 조직하고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결국 잭슨파는 주권재민과 다수결의 원칙을 강조하는 〈민주당〉Democratic Party이라 불리게 되었고, 애덤스파는 그와 달리 법의 지배와 소수의 권리를 옹호하는 〈휘그당〉Whig Party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렇게 수립된 〈제2차 정당 체제〉는 1850년대 중엽까지 한 세대 동안 유지된다."(74)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공황 때문에 각 주의 정부는 재정적으로 심각한 난관에 부딪혔다. 많은 주들이 은행을 수립하고 운하를 건설하는 데 투자했으나, 공황 때문에 채무 불이행 사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권과 부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잭슨과 민주당은 자유방임을 역설했다. 그들이 말하던 자유방임은 정부가 기업을 규제하거나 개혁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부가 소수의 유력자들을 비롯한 〈특수 이해관계자들〉special interests을 비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결국, 1820년대부터 일부 주들이 뉴욕을 뒤따라 법인 설립을 자유화하며 유한책임제를 도입하는 조치를 취했고, 1850년대에 이르면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주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혁명과 건국을 통해 수립되었던 자본주의의 정치적 토대 가운데서 정치적 권위와 경제 권력을 분립시킨다는 원칙이 실제로 구현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85-6)


"〈미국형 제조 체제〉American system of manufacturing는 기계화와 표준화, 그리고 대량생산이라는 특징을 지녔다. 이런 특징은 물론 노동력을 적게 들이면서도 일정한 규격에 따라 많은 물량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요소였다. 그것은 토지를 비롯한 자원이 풍부한 반면에 노동력이 부족한─특히 장인의 숙련 노동력이 부족한─미국의 특이한 조건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대중이 주도하는 미국의 독특한 시장 특성도 반영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부자는 언제나 있었지만, 시장을 주도하지는 못했다. 그들이 원하는 사치품은 장인이 많은 유럽에서 생산되고 있었던 만큼, 거기서 수입해 사용할 수 있었다. 반면에 중산층이 영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매우 두터웠고, 노동자도 높은 임금 수준 덕분에 유럽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탄탄한 구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인구와 경제가 함께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미국에서는, 대중이 주도하는 시장이 대단한 활력을 지니고 있었다."(99-100)


"미국의 부르주아지는 (유럽과 달리) 귀족과 평민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층이 아니라 사회질서의 상층을 차지하는 계급이었다." "흔히 대·중·소 세 부류로 구분되는, 부르주아지 가운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대부르주아지가 바로 엘리트와 그 가족으로 채워진다. 엘리트는 흔히 어떤 선발 과정을 거쳐 뽑힌 사람들이나 그럴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훨씬 제한된 의미로 쓰인다─사회적 위계질서에서 최상층을 차지하고 거기서 제도적 권위를 누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소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엘리트 연구를 주도한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에 따르면, 그들은 대개 사회적 위계질서와 더불어 자신들의 지위를 다음 세대로 물려주는 데 성공했다.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지위에 머무르지 않고 일생 동안 지위가 상승하거나 하락하는 것을 경험하지만, 그래도 엘리트는 상당히 견고한 집단으로서 지속력을 지닌다는 것이다."(122, 125)


"미국의 노동자들은 기계를 부수며 산업 발전에 항의하지 않았다.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에, 기계는 노동자를 대체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고 노동자의 작업을 지원하는 기능을 발휘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개선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렇지만 미국의 노동자들도 심각한 문제점에 부딪혔다. 우선, 빈부 격차가 더 커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부유한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격차는 농촌보다 도시에서 더욱 심했다." "무엇보다도, 시장경제 자체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체제였다. 시장경제는 수요와 공급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에 따라 좌우되며, 언제든 일정치 않은 자연환경뿐 아니라 사람들의 취향과 감정에 따라서도 변덕스럽게 바뀐다. 불황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느닷없이 찾아와서 누구든 떨게 만들었다. 그처럼 예측할 수 없고 원인도 알 수 없는 불황을 미국인들은 〈공황〉panic이라 부르기 시작했다."(131-3)


부록: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 동력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욕구가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 가운데 가장 강력한 요인으로 부각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도 권력이나 위신이나 명예, 또는 신앙을 추구하는 욕구가 존재하며, 사람에 따라 물질적 이해관계보다 훨씬 강력한 동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실,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은 전근대 사회에서는 그런 욕구가 인간을 움직이는 매우 강력한 동기로 존재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을 움직이는 동기에도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물질적 이해관계를 강조하는 유물론적 시각에서는, 그것이 포착되지 않는다." "종교와 이데올로기에서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를 거쳐 과학과 기술에 이르는 넓은 의미의 문화는 이미 1980년대부터 문화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인간의 주체적 능동성이 부각되는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조엘 모키르는 근대 서양의 대두 요인으로 과학의 진보와 기술의 혁신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장 문화〉에 주의를 환기한다."(159-62)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내재적 모순은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과 그 동력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계질서를 옹호하는 소수의 특권 집단과 평등주의를 추구하는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립은 결국 정치적 발언권을 지니는 시민이 집단적으로 내리는 결정에 따라 경제성장을 자극하거나 소득 재분배에 기여하는 등,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민의 개념이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의 예상과 달리, 자본주의 사회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되는 단순한 구조로 개편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계급으로 통합되지 않고 여러 집단으로 분열되었으며, 중산층도 다양한 계급으로 분화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재적 모순과 사회적 대립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국제 질서와 함께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요인이다."(166-7)


제9장 노예제 


"19세기 미국은 산업혁명과 시장경제의 발전을 겪으며 빠른 빠른 속도로 성장했지만, 외환 측면에서는 고질적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유럽에서 수입하던 공산품 이외에 산업혁명에 필요한 기계류의 수입도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농산물과 수산물을 비롯한 일차 산품의 수출이 늘어나도 적자를 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역에 따라 사정이 크게 달랐다. 적자는 주로 북부에서 나왔고, 남부는 그것을 대부분 메웠다. 바꿔 말해 북부의 상인들이 해외에서 공산품을 수입해 남부에 공급하고, 그 대금을 남부의 공장주들이 농산물 수출로 벌어들인 돈으로 결제함으로써 무역적자를 대부분 메웠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850년대 가장 중요한 수입품은 63.2%를 차지한 공산품이었고, 가장 중요한 수출품은 61.6%를 차지한 원자재였다. 수출품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품목은 면화였다. 즉, 면화는 19세기 전반기 미국의 경제발전에 가장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190)


"농장주들은 작업 일지를 바탕으로 노예들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내도록 압력을 가했다. 특히 일을 잘 하는 노예에게 식품이나 의복 같은 선물을 주며 더 많은 성과를 내도록 유도한 다음, 같은 작업 조에 편성된 다른 노예에게도 그만한 성과를 내지 않으면 채찍질을 가하는 방법을 썼다. 따라서 노예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작업을 완수하고 채찍질을 모면하기 위해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일해야 했다. 게다가, 두 손 모두 바른손으로 써서,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일을 해내라는 압력에 시달리기도 했다. 더욱이, 농장주들은 기록을 토대로 해마다 더 많은 작업량을 노예들에게 부과했다. 그 결과, 1801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어느 농장에서 노예 한 사람이 하루에 딴 면화가 28파운드였으나, 1846년 미시시피에서는 그 양이 341파운드로 12배 이상 늘어났다. 남부의 농장은 관리 기법의 측면에서 볼 때 나중에 북부에서 대두하는 대기업들에게 선례를 제공했다."(192)


"노예는 본질적으로 인간이면서도 주인의 소유 아래에 있는 재산으로서 복합적 성격을 띠며, 따라서 시장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19세기 남부에서 노예 매매가 지엽적인 현상이 아니라 중심적인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거기서 노예는 값비싼 '상품'이었다. 노예 가격은 젊은 남성의 경우에 가장 높았는데, 19세기 초에 200달러 정도였다. 그렇지만 노예무역이 금지되자 600달러로 급등했고, 게다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상승해서 내전 직전에는 1,500달러 수준에 도달했다." "따라서 남부의 농장주들은 노예가 재산으로서 지니는 가치도 십분 활용하고자 했다. 노예를 담보로 잡혀 자금을 마련하고, 그것을 이용해 토지를 매입하거나 다른 사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그래서 은행을 비롯한 금융업, 면방직 같은 제조업, 철도나 운하를 건설하는 토목업은 물론이요 심지어 증권에도 손을 뻗쳤다. 이런 측면에서 농장주들은 자본가와 다를 바가 없었다."(197-9)


"폭력은 특히 노예 여성에게 벗어나기 어려운 공포였다. 젊은 여성은 농장주에게 손쉬운 능욕의 대상이었다. 농장주는 마음이 내키면 강간을 저지를 수 있었고, 또 마음에 들면 첩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의 아들이나 조카 등, 농장주 일가의 남성도 그에 못지않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에 저항하는 여성은 채찍질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보복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제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남부 백인 사이에 만연한 성적 방종을 질타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늙은 여성은 다른 종류의 폭력에 대한 공포, 즉 가족과 강제로 이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농장주는 돈이 필요할 때는 물론이요 다루기 어려운 노예를 처벌할 때도 노예를 팔았고, 그래서 흔히 노예의 가족생활을 깨뜨렸다. 따라서 매매라는 형태로 나타나던 이 폭력은 노예 가족의 핵심 구성원 가운데서도 특히 여성에게 언제나 잠재적 공포로 존재했다. 노예제 아래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욱 심각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202)


제10장 내전 


"미국의 인구는 1810-60년 반세기 동안 724만 명에서 3,144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1810년에는 북동부에 거주하는 인구가 349만 명으로, 전체 인구 724만 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8.1%를 차지했다. 반면에 남동부 인구는 268만 명이었고, 그 비율이 36.9%였다." "1860년대에 북부로 취급되던 북동부의 인구는 1,059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그래도 전체 인구 가운데서 차지하는 비율은 33.7%로 크게 줄었다. 남동부 인구는 537만 명으로 늘어났지만, 그 비율은 17.1%로 북동부보다 더 크게 줄었다. 반면에 북중부와 남중부를 합친 서부의 인구는 1,487만 명에 이르렀고, 그 비율은 47.3%로 훨씬 크게 늘어났다." "서부에서도 노예제가 없는 지역의 자유인 인구는 남쪽에 비해 4배가 넘는 속도로 증가했다. 바꿔 말하면 19세기 서부에서는 자유인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났고, 그 가운데서도 노예제에 의존하는 남쪽보다 그렇지 않은 북쪽에서 훨씬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222-3)


"속도에 못지않게 중요한 또 다른 차이도 있었다. 서부로 이동한 이주민은 남에서나 북에서나 새로운 자연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서부 내륙이 〈교통 혁명〉 덕분에 동부 해안과 연결되자, 새로 이주한 농민은 환금작물을 재배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기후가 온난 다습한 남쪽에서 면화와 사탕수수를, 또 한랭 건조한 북쪽에서는 옥수수를 재배하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따라서 남쪽에서는 농장주의 주도 아래 노예제에 의존하는 농장 농업이 발전한 반면에, 북쪽에서는 자영농이 주도하는 자작 농업이 확립되었다." "인구 분포를 토대로 배정된 하원 의석은 건국 초기부터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노예제를 허용하는 노예주들에 비해 그렇지 않은 자유주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 수치는 그 이후에 진행된 인구 변동과 서부 팽창 덕분에 더욱 기울어졌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관계는 건국기에 45 대 55였지만 1840년대에는 40 대 60으로 바뀌었다. 더욱이 내전 직전에는 35 대 65로 기울어졌다."(224-5)


"미국은 이미 17세기 초부터 대서양 연안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 토지를 차지한 데서 출발했고, 건국 이후에는 외국인 귀화 정책과 원주민 이주 정책에서 보듯이 그런 식민주의적 자세와 정책을 유지했다. 그런 전통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남쪽에서 텍사스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차지하고 북쪽으로는 오리건까지 손을 뻗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바다를 건너 쿠바마저 스페인으로부터 매입하고 니카라과를 텍사스처럼 장악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내전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제국주의적 팽창 노선이 미국인 대다수의 지지를 얻었을 뿐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이견과 분열의 단서가 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팽창을 통해 확보한 영토에서 노예제를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금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 미국인들은 합의를 도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전의 원인은 노예제를 넘어 서부 영토에서, 나아가 식민주의 전통에서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237-8)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은 결국 정계 개편을 초래했다. 캔저스-네브래스카 법안을 저지하지 못한 북부의 정치인들은 휘그당을 되살리는 대신에 새로운 정당을 조직했다. 거기에는 노예제를 반대하던 휘그당원들, 자유토지당에 가담했던 사람들, 노예제 폐지 운동가들, 그리고 심지어 이민 반대론자들도 참여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노예제를 폐지하고 흑인에게도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대다수는 노예해방이나 인종 평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노예제의 확산과 농장주 세력의 확대를 저지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특히 서부 영토에 노예제와 농장주가 정착하지 못하게 저지함으로써, 자영농이 되려는 노동자들을 위해 충분한 토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자영농 공화국을 지향하던 정치인들은 1854년 7월 전당대회를 열고 제퍼슨을 뒤따른다는 뜻에서 공화당Republican이라는 명칭을 선택했다. 그리고 〈자유 노동, 자유 토지, 자유 인간〉이라는 구호도 채택했다."(246-7)


"링컨은 폐지론자들과 달리 노예제에 대한 도덕적 비판에 주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예제 폐지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하고는, 설령 폐지한다 해도 해방 노예들을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내기가 어렵고 또 그렇다고 해서 미국에서 백인과 평등한 지위를 누리며 살게 하기도 어렵다고 부연했다. 이처럼 인종 평등을 부인하는 조심스러운 언행은 당대 미국에 인종주의가 만연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정치적 고려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대다수 미국인들은 인종 평등이 혼인을 통한 인종 혼합을 가져올지 모른다고 우려했고, 그래서 1860년대부터 새로운 용어 'miscegenation'을 만들어 쓰며 인종 평등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링컨이 주력한 것은 노예제에 대한 정치적 비판이었다. 그는 이렇게 호소했다. 노예제란 결국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착취하는 전제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제는 시민의 자치를 지향하는 공화주의와 공존할 수 없는 제도였다."(251)


제11장 재건과 신남부 


"공화당은 이미 1864년에 남부의 재건에서 반란 가담자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웨이드-데이비스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었다. 그러나 링컨과 존슨이 그와 같이 엄격한 조치가 오히려 통합을 방해할 것이라며 거부하고 온건한 노선을 천명함에  따라, 의회는 재건 정책의 주도권을 잃었다. 그렇지만 전후에 남부에서 사태가 악화되자, 의회를 지배하던 공화당은 급진파의 주장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1866년 6월 급진파는 의회에서 수정조항 제14조를 통과시켰다. 제1항에서는 노예제에서 해방된 흑인을 시민으로 규정함으로써 1857년 드레드 스코트 판례를 무효화했다. 흑인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원주민과 달리 미국의 관할권 아래에 있으므로, 미국의 시민이자 그들이 거주하는 주의 시민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제1항의 〈적법 절차〉due process of law와 〈법률의 평등한 보호〉equal protection of the laws 구절은 이후 소수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중요한 근거로 활용된다."(281-4)


# 다만 수정조항 제14조 1항의 해당 구절은 차후에 '법인'의 권익을 보장함으로써 엘리트의 권력을 보호하는 기능도 지니게 되었다. 


"흑인 참정권은 새로운 정치체제에 반발하던 남부 백인들에게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그것은 인종주의적 편견에 물들어 있던 이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연방의 권위와 공화당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남부 정치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따라서 수정조항 제14조와 제15조에 불구하고, 인두세 납부 실적과 문자 해독 능력을 비롯해 흑인의 참정권을 제약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활용했다. 그리고 그런 장치에도 불구하고 참정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장에 나타나는 흑인을 저지하고자 물리적 폭력을 가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백인 연맹〉이나 〈붉은 셔츠〉 같은 준군사 조직을 결성하고 공개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테러에 의지해, 민주당은 1870년대 중엽에 이르면 남부에서 공화당을 밀어내고 정치권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것이 남부 백인들 사이에서 〈구원〉Redemption이라 불리던 정치적 변화였다."(288-9)


"연방정부는 남부에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하고자 했으나 그에 반발하는 민주당과 남부 백인의 저항을 제압하지 못했다. 또 흑인의 참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법률을 집행하고 질서를 확립할 만한 역량을 지니지 못했다. 연방은 내전을 계기로 압도적으로 우월한 군사력을 구축했으나, 재건 시대 남부의 행정과 치안, 그리고 사법을 관장하는 데 필요한 인력과 자원까지 확보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남부의 주 정부나 지방 정부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테러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며, 연방정부가 테러범들을 체포하고 처벌하는 데 협력하지 않았다. 범인들 가운데서 사법 처리를 받은 인물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1870년대 중엽에 이르러, 공화당은 남부에서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하는 작업을 단념하게 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연방의 권위는 남부 주들의 집단적 저항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었으나, 재건이 끝날 때에는 남부에서 과거의 정치 체제가 부활하는 것을 막지 못할 만큼 위축되었다."(293)


"남부의 정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구원자들〉Redeemers이었다. 그들은 민주당 안에서도 주로 법조계와 기업계 출신의 남부 정치인으로서, 남부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재건을 주도했던 공화당 급진파에 대한 반발이었을 뿐 아니라, 남부를 내전으로 이끌었던 기존 엘리트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그들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먼저 자치와 백인 우월주의를 확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투표장으로 가는 흑인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백인 우월주의 단체를 억제하지 않았고, 또 인두세 납부 실적이나 문자 해독 능력을 근거로 투표 자격을 제한하는 제도적 장치도 철폐하지 않았다. 그런 장치가 빈곤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백인 빈민의 참정권까지 침해하는 데도 개의치 않았다. 〈구원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남부의 정치체제를 민주주의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구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권위였다."(302-3)


"대법원 역시 흑인의 권리 신장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는 흔히 〈민권법 판례〉Civil Rights Cases이라 불리는 1883년 판례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흑인이 자신들의 지위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법원에 제기했던 다섯 건의 소송을 하나로 묶어서 다룬 판례였다. 여기서 연방 대법원은 연방헌법 수정조항 제14조와 1875년 민권법─기차나 선박, 음식점이나 숙박업소 같이 공중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시설에서 인종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이 개인 사이의 사적 관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수정조항 제14조는 개인이 다른 개인과 맺는 관계가 아니라 주에서 제정하는 법률이나 시행하는 조치로 인해 권리를 침해당하는 경우에 한해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문구에 얽매이는 편협하고 인위적인 해석이라는 소수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다수 의견에 따라 1883년 민권법 판례는 연방의 권위가 남부의 인종 관계까지 미치지는 않는다고 단언했다."(313-4)


"남부는 재건 이후에 산업화와 도시화를 추진하면서 면모를 일신하고자 했으나, 남부 경제가 담배와 면화, 곡물과 염료 등, 몇몇 농산물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경시할 수 없었다. 〈신남부〉라는 구호는 농업이라는 전통적 토대를 허물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그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상공업을 이식시키는 발전 방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전을 계기로 농장이 해체되었지만, 남부 농업에는 노동력이, 그것도 저렴하고 순종적인 노동력이 여전히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고, 그런 노동력은 물론 노예제에서 해방된 흑인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남부는 우선 해방 노예에게 자영농으로 독립할 수 있는 토지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농장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또한 소작제도와 수확물 유치권 제도를 도입했으며 참정권을 박탈하고 마침내 인종을 격리하는 체제를 수립했다. 이런 뜻에서 저렴하고 순종적인 노동력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악면 높은 인종 격리 체제의 대두를 가져온 근본적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326-7)


제12장 법인 자본주의 


"미국을 향한 〈대량 이민자들〉은 대체로 출신 국가나 지방에 따라 특정 지역에 모여들었고, 그래서 미국의 대도시에는 다양한 민족 문화권이 형성되며 미국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했다. 이는 이주의 물결이 이민 사이에서 일어나던 일종의 연쇄반응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민은 고국에서 〈뿌리 뽑힌 사람들〉uprooted이 미국에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미국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 인식은 미국이 〈용광로〉melting pot처럼 다양한 민족 내지 인종과 그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잡다한 요소들을 서로 융합해 미국 문화를 만들어 낸다는 관념의 일환이다. 그런 인식이나 관념과 달리, 이주자들은 고국에서 형성된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전통에 의지하며 미국으로 이주하고, 또 그것을 미국 문화에 덧붙이며 미국의 문화적 다양성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옮겨 심긴 나무처럼 〈다른 땅에 옮겨 심긴 사람들〉transplanted이라 할 수 있다."(345-6)


"〈트러스트〉trust 제도는 주주가 어떤 사람에게 주식의 관리권을 위탁하고, 그 수탁자에게 주주의 권리를 행사하며 기업을 통제하게 만드는 방안이었다. 이런 방안에 따라 여러 기업의 주주들이 주식 관리권을 어떤 인물이나 기구에게 위탁하면, 수탁자는 그들 기업에 대해 위탁 주식에 상응하는 통제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트러스트는 여러 기업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실체를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트러스트는 위탁자와 수탁자 사이의 신뢰를 전제로 성립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안정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이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은 이미 1870년대부터 철도 회사에 도입되었던 지주회사holding company라는 제도였다. 지주회사란 스스로 사업을 벌이지 않고, 주식이나 채권, 또는 부동산 같은 자산을 소유함으로써 다른 기업을 지배하며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실제로 사업을 벌이고 수익을 올리는 여러 기업들을 몇몇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369-71)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다른 많은 사람들의 돈을 끌어들여 큰 자본을 모은 다음에, 그것을 다른 기업에 투자해 지배적 영향력을 장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주회사는 기존 법률에서 허용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의회의 특별 입법을 통해서만 설립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89년, 뉴저지는 기업가들이 그런 규제를 회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지주회사가 허용되자, 미국의 기업계에는 합병의 바람이 불었다. 특히 1895년부터 1904년까지는 그 바람이 유난히 거세게 불었다. 채 10년도 되지 않는 그 기간에 모두 1,800개 이상의 기업이 사라지면서 157개의 기업으로 통합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법률은 미국 기업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즉, 국가가 기업 사이의 제휴나 연합을 억제하는 반면에 통합을 허용하는 정책을 채택함에 따라, 기업계를 이끌던 엘리트는 법인이라는 제도에 의지하며 여러 기업을 통합함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려 했다고 할 수 있다."(371, 376)


"혁명기 미국인들에게 부패란 본질적으로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지녀야 하는 미덕을 저버리는 것,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적 이익이 공적 권위의 행사에 과도하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식민지 시대에 뿌리 내린 구체제의 관행이 지속되었다. 예를 들면, 공직자들은 식민지 시대와 마찬가지로 토지를 비롯한 국가의 자원에 관해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행태를 보였다." "그와 같은 부패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결합한) 자유방임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현상인 듯하다. 즉, 자본주의 문명이란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을 구분하고 정치과정에서 경제활동을 해방시킴으로써 경제 권력에 자율성을 부여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정치적 권위의 개입을 요청하며, 따라서 정치적 권위와 경제 권력 사이에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수립하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19세기 말 미국에서 서로 떼어 놓을 수 없이 얽혀 있던 자유방임과 부정부패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402-4)


"돌이켜보면, 그것은 미국의 권력구조에 일어난 중대한 변화였다. 건국기에 수립되었던 넓은 뜻의 권력구조에서 경제 권력은 뚜렷한 위상을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전환기에 이르면, 대기업에 집중된 경제 권력이 종교적 권위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권위에도 못지 않게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부 미국인들은 스포츠를 즐기듯이 돈을 버는 일에 뛰어들 수 있었고, 나아가 교회나 국가의 제재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돈을 쓸 수 있었다. 그들이 누리는 권력은 20세기 말에 이르면 교회와 국가를 넘어 사회의 제재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더욱 확대된다. 그런 권력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으로 집약되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더욱이, 그것은 법원의 자유주의적 신조─특히, 사용자와 피고용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라고 가정하고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 관계를 외면하는 보수적 안목─덕분에 안전한 지위를 누렸다."(407)


부록: 19세기 미국에서 국가가 지니는 성격 


제13장 대안과 개혁 


"19세기 말 미국에서 거론된 여러 대안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농민이 제시한 인민주의populism라 할 수 있다. 그것은 1890년대 미국의 정치 지형에 거센 바람을 몰고 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렸다. 그 결과, 엘리트에게 집중된 권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던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바꿔 말해, 미국 자본주의에 내재하던 평등주의적 동력이 위축되었다." "대표적으로 1860년대 미국 농민들이 조직한 그레인지Grange 운동은 자신들이 거둔 성과를 성장의 동력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 운동은 여성에게 평등한 지위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더욱이 흑인에 대해서는 참여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등, 인종주의에 얽매여 있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한계로는, 그레인지 운동이 정치적 토론이나 행동을 억제하는 방침을 선택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 한계로 인해, 그레인지 운동은 농민이 관심을 지녔던 정치적 쟁점에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했다."(423, 427-8)


"19세기 말에는 미국의 노동자들도 공화주의 전통에 입각해 기존 체제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했으나, 농민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 실패했다. 농민과 달리, 그들은 위축되는 경로 대신에 성장하는 경로에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그 경로는 그들에게 독립적인 〈생산자〉라는 관념을 버리고 종속적인 임금노동자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그런 변화에 앞장선 새뮤얼 곰퍼스는 〈생산자〉 대신에 노동자, 그것도 숙련 노동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조합원이 사고나 질병, 또는 해고 같은 난관에 부딪혔을 때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상당한 금전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어야 했다. 그 대신, 조합원들은 사용자에게 맞서는 쟁의와 교섭에 관해 노조 지도부에 권한을 위임하고 거기서 결정되는 방침을 준수해야 했다." "곰퍼스는 이와 같은 노선을 〈순수 노조주의〉라 불렀지만 그것은 〈생산자〉나 공화국 같은 정치적 개념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사업 노조주의〉로 여겨졌다."(441, 449-50)


"곰퍼스는 (노동운동의 정치적 역할을 제한하는) 자발성 원칙voluntarism을 강조했다. 노사 관계는 국가를 비롯한 제삼자의 개입 없이 노동자와 사용자의 자발적 노력과 직접적 협상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곰퍼스는 노동자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등,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노동단체를 정치 세력으로 바꾸는 데 대해 분명하게 반대했다. 국가가 노사 관계에 개입하는 데 반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단체가 국가의 운영에 개입하는 데에도 반대했다. 따라서 자발성 원칙은 미국노동연맹이 기존의 양대 정당 이외에 제삼의 정당을 창설하는 운동에 힘을 보태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정당정치를 밑받침하는 선거제도를 비롯해 미국의 정치체제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뜻에서, 그 원칙은 정치와 경제 두 영역 사이에 경계선을 설정하고 노동단체의 활동을 그 경계선 안으로 한정한다는 함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453-4)


"어째서 혁명론이 미국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주목을 끌지 못했는가, 특히 사회주의가 취약한 입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런 의문은 당대부터 중요한 관심사로 취급되었다." "이에 대해 독일의 사회과학자 베르너 좀바르트가 얻은 결론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유럽과 달리 미국에서는 일찍이 민주정치가 도입됨에 따라 노동자들이 정치과정에 참여해 영향을 끼쳤고,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생활수준을 누렸으며, 또 사용자와 대등한 사회적 지위를 지닐 뿐 아니라 나아가 그것을 향상시키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기존 체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자는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좀바르트는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유력한 대안으로 간주되지 않는 이유를 노동자도 기존 체제에 적응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데서 찾는다고 할 수 있다."(458)


"중산층은 흔히 계급으로 간주되지만, 이 책에서는 하나의 계층으로 취급된다. 그것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며, 계급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내적 결속력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산층은 자본가나 노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한 관심사로 취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흔히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서서히 위축되는 운명을 지닌 집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예단과 달리, 중산층은 오늘날에도 분명히 건재를 누린다." "중산층은 19세기 중엽부터 노예제뿐 아니라 도시에서 심화되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촉구하며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개혁 운동은 내전을 계기로 퇴조를 겪었다가 재건 시대에 부흥기를 맞이했는데, 그때에는 빈곤, 음주, 도박, 매음, 절도, 폭력 등 도시문제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것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근대 세계에서 대두한 인도주의가 노예제 폐지에 따라 도시를 중심으로 사회문제로 관심을 돌린 결과이다."(471, 478)


"진보주의는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사회운동이었다. 그것은 엘리트와 중산층 이외에 다른 많은 미국인들도 참여한 거대한 운동이었고, 또 사회복지관에서 시청과 공원을 거쳐 철도와 은행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제도에서 개선책을 도입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진보주의에서 부각된 가치가 무엇보다도 반독점과 효율성, 그리고 사회적 화합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한다. 그런 가치는 분명히 20세기 전환기에 미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특히 중산층에서 강조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산층은 대체로 자본주의 발전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였던 만큼 제한적 처방을 선호했던 듯 싶다. 이는 기존 질서를 혁신하는 대신에 민주정치를 보강하고 경제성장에 성공하기만 하면 계급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적 화해와 국민적 통합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들의 낙관적 전망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498)


제14장 제국주의 


"미국인들은 식민지를 건설하던 시기부터 지리적으로 팽창하는 데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이미 17세기 중엽에 원주민을 쫓아내고 그 토지를 차지하며 자신들을 '아메리카인'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18세기 중엽에는 애팔래치아산맥 너머 서부에서 토지를 얻기 위해 워싱턴을 앞세워 프랑스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며, 또 19세기에는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인 데 이어 그에 못지않게 넓은 땅을 멕시코로부터 빼앗았다. 이런 팽창은 원래 개인들이 기업을 수립하고 그것을 통해 추진하던 사사로운 계획의 소산이었고, 건국 이후에야 비로소 국가의 공식적 사업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그런 전통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워싱턴처럼 미국을 이끌던 엘리트였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해외 팽창이나 제국주의에 앞장서던 엘리트가 미국의 경우 대체로 기업계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주도 세력의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505-6)


"주류에 속하는 미국인들은 여전히 기독교와 공화주의를 대전제로 받아들였으나, 점차 국가를 비롯한 공동체보다 기업에 적합한 행동 윤리를, 특히 대기업에 필요한 행동 윤리를 중시했다. 그들의 새로운 덕목에서 소박하고 건전한 삶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으로 대체되었고, 거기에 필요한 축적과 진보가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로 간주되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그런 가치를 위해 육체를 정신에, 감성을 이성에 종속시키면서, 대기업의 관리 체제에 순응하며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자세를 갖추고자 노력했다. 바꿔 말하면, 미국 사회가 진보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기계의 일종이라 보고, 자신들이 거기에 들어 있는 수많은 부품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는 관념에 물들었다고 할 수 있다." "차별의 근거 역시 표면상 공화주의적 덕목에서 자본주의적 행동 윤리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가부장제와 인종주의 같은 고질적 편견을 넘어 사회적 다윈주의 같은 새로운 이념까지 포함할 만큼 넓어졌다."(507-8)


"그들이 보기에 미국은 먼저 라틴아메리카에서 열강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고, 다음에는 아시아에서 중국의 분할을 저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 지역으로 진출해 식민지나 속령을 확보하는 데 나서야 한다. 거기서 미국은 폭정이나 혼란, 또는 야만을 뿌리 뽑고, 주민에게 안정과 자유, 그리고 문명의 혜택을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렇지만 주류 엘리트들은 식민지를 확보하는 데 따르는 문제점도 경시하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미국이 식민지를 거느리면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다른 일부는 식민지 주민이 유색인이며, 그래서 인종주의적 이유에서 미국 시민과 통합되기 어렵다고 보고 제국주의 팽창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타협안은 식민지나 속령을 미국의 주권 아래 두는 경우에도 미국의 일부로 통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그 주민을 미국 시민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미국의 흑인이나 원주민처럼 종속적 위치에 묶어 둔다는 것이었다."(509)


"그런 전망과 과제에 관해, 미국의 엘리트 가운데 일부는 새로운 발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시장 가운데 중국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중국은 인구나 자원 측면에서 가장 큰 나라였고, 그래서 열강 사이에서 경제적 패권을 좌우할 관건을 쥐고 있었다. 바꿔 말해 중국을 열강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차지한다면, 나머지 나라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열강이 서로 이권을 존중하며 지배와 착취를 계속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더욱이, 중국을 포함해서 낙후 지역에서 지배와 착취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했다." "거기에 근대적 제도와 문화를 도입하면 낙후 지역이 근대 사회로 발전하는 동시에, 미국도 교역과 투자를 늘리며 오랜 기간에 걸쳐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바꿔 말하면, 제국과 식민지가 제로섬 게임에 빠지지 않고 모두 이득을 얻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518)


부록: 제국주의 연구에 대한 논평 


"제국을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한마디로 제국을 다른 국가나 종속 지역에 대해 지배적 권위를 행사하는 국가로 규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자면, 〈어떤 제국이나 국가가 외국을 통치하거나 외국으로 통치권을 확대하는 정책, 또는 식민지와 속령을 획득, 보유하는 정책〉이라는 정의를 들 수 있다. 이 정의는 제국주의를 명확하게 규정한다는 장점을 지니지만 경제와 사회, 그리고 문화 영역을 경시한다는 단점을 지닌다." "필자는 〈제국이란 어떤 지역에서 지상至上 권력을 추구하면서 국제관계에서 자국을 정점으로 위계질서를 수립하고자 하는 국가〉로 정의한다. 여기서 주안점은 제국이 장악하고 행사하는 강대한 세력에 주목하는 대신에 그런 세력을 갖고서 제국이 수립하고자 하는 위계적 국제 질서에 주목하자는 데 있다. 바꿔 말해 어느 국가가 자국을 정점으로 어떤 질서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지 살펴보면, 그 국가가 제국인지 아닌지, 또 제국이라면 어떤 제국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568-9)


"다음 난관은 이데올로기에 있다. 특히 레닌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고 내지 최후 단계라고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처음부터 자본주의에서 떼어 낼 수 없는 부분이며 자본주의 자체가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의 학자들은 제국주의가 본질적으로 경제적 이해관계와 분리되어 있는 정치적 현상이라고 본다. 그들은 제국과 식민지 사이에 있었던 교역이 식민지에 적잖은 부담이 되었다고 해도, 제국에는 뚜렷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주장은 물론 식민지가 그 대신에 전략적 가치를 지녔다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바꿔 말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와 관계가 없다는 견해에 힘을 실어준다." "레닌주의자들이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민낯으로 깎아내리며 자본주의가 사라지기를 고대한다면,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그에 맞서 오욕으로 얼룩져 있는 제국주의의 역사에서 자본주의를 끌어내고자 시도한다. 그 때문에 양자는 모두 사실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570-1)


"1960년대에는 몇몇 비판적 학자들이 제국주의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뒤에도 저개발국가에 남아 있는 종속적 위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위상이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국제적 차원에서 수립되는 분업 체계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들이 그렇지 않은 여러 나라와 함께 공업 제품을 수출하고 농수산물과 광물자원을 수입하는 교역 체계를 수립하는데, 여기서 공업 제품은 높은 가치를 지니고 농수산물과 광물자원이 낮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불평등한 교환관계가 성립한다." "세계체제론은 적잖은 매력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결함을 안고 있다. 그 이론에서는 중심부-주변부 관계를 중심으로 국제적 분업 체계가 변화를 겪지 않는 구조로 간주한다. 물론, 세계체제 이론가들은 한국, 미국, 일본 등, 몇몇 나라가 주변부에서 반주변부, 또는 중심부로 진입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나라를 예외적인 성공 사례로 취급하는 데서 멈춘다."(573-4)


"필자는 세계체제론자들이 중시하는 구조적 제약에 공감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주목하는 국제 분업과 사회구조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널리 알려져 있듯이 외교는 결국 내정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시야를 정치에 한정하지 말고 다른 영역으로도 확장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초점을 국제 질서에 맞추고 시야를 정치·경제에서 사회·문화까지 확장하면, 제국주의의 본질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제국주의가 국제관계에서 자국을 정점으로 위계질서를 수립하려는 프로젝트라면, 그것은 바꿔 말해 한 국가가 자국 내에 존재하는 사회질서를 국제관계로 확장하려는 프로젝트라 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제국은 원래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내부로 통합함에 따라 성립하며, 그래서 본래 국제 질서를 내부의 사회질서로 흡수하며 발전하는 체제라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을 정점으로 형성되는 국제 질서는 제국 내부에 존재하는 사회질서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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