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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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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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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사회의 무지


1장 무지란 무엇인가?


# 무지의 여러 분류들

1. How에 대한 무지 : 런던(의 여러 모습)에 대해서 안다.

2. What에 대한 무지 : 런던이라는 도시를 안다.

3. 의식적 무지 : 시칠리아 주민들이 마피아를 전혀 모르는 듯이 행동한다.

4. 무의식적 무지 :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등장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인지하지 못한다.

5. 자발적(고의적) 무지 : 타조가 모래밭에 머리를 박고 있다.

6. 비자발적 무지 : 기독교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교도를 비난할 수 없다.

7. 능동적 무지 : 새로운 이주민들이 원주민의 존재와 영토 소유권을 무시한다.

8. 수동적 무지 : 특정 분야나 행동에 필요한 지식을 활용하지 못한다.


2장 무지에 관한 철학자들의 견해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에서 인식론적 전환을 불러일으켰다. 인식론은 우리가 어떻게 지식을 습득하고 해당 지식의 신뢰성 여부를 판단하는지를 다룬다. 반면에 무지의 인식론은 우리가 어떻게, 왜 무지에 머물러 있는지 다루었다.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피론을 필두로 한 회의주의학파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다." "회의주의자들은 소크라테스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대상이 동일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동일한 인상을 받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같은 물체라도 서로 다른 환경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회의주의자들은 (회의懐疑, skepsis의 본뜻인) '조사照查, investigation'를 믿었다. 다시 말해 기존의 믿음이나 확신을 두고, 이를 뒷받침하거나 위배하는 사례를 분석하며 지식을 얻을 때까지 판단을 유보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회의주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확신하는 독단적 회의주의와, 그것조차 확신하지 않는 반사적反射的 회의주의다."(36-7)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유명한 회의론자이자 16세기 고대 회의주의 부흥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미셸 드 몽테뉴는 보르도 시장 시절 가톨릭과 개신교 간 전쟁을 몸소 겪었다.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데카르트는 저서 《방법서설》(1637)에서 몽테뉴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그에게 답하는 방식을 통해 의심에서 확신으로 나아가는 이른바 방법론적 무지를 구현했다." "17세기 회의주의는 외양과 현실 간 격차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바로크 시대 세계관의 핵심이었다." "18세기 대표 철학자인 조지 버클리나 데이비드 흄은 둘 다 지식이라는 주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던 17세기의 전통을 이어 갔다." "카를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해관계와 노동자 계급의 허위의식 등 지식 습득을 방해하는 사회적 장애물에 대해 논의했고, 프로이트는 지식에 무의식적 거부 반응을 보이는 심리적 장애물이 있다고 주장했다."(37-9)


3장 집단의 무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상류층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많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배 계급이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하층민에게 정보를 아예 주지 않거나 잘못된 정보를 주는 방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긴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가난한 자들이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수 있도록 '환상에 불과한 행복'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지적, 도덕적, 정치적 헤게모니' 개념을 제시한 그람시는 지배 계급이 단지 힘만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설득, 강요, 동의를 결합해 통치한다고 보았는데, 설득은 일부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피지배 계급 또는 하위 계급은 자신을 지배하는 자의 눈으로 사회를 보는 법을 배운다. 이후 미셸 푸코는 이들의 지식을 가리켜 '예속된 지식savoirs assujettis'이라 했다. 이들에 따르면 하위 계급은 자신들만의 표본이 없기 때문에 지배 집단의 표본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수밖에 없다."(43-5)


"인식론의 사회적 전환에 큰 자극을 준 것은 철학 외부에서 부상한 페미니즘이었다. 남성은 '내가 모르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라는 원칙에 따라 여성의 지식과 신뢰성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해 왔다. 고대 로마에서 근대 초기 유럽에 이르기까지 신뢰할 수 없는 지식을 가리켜 '노파의 이야기aniles fabulae'라고 치부했을 정도다." "18세기 여성의 무지를 논한 저서는 '소피아'라는 필명으로 출판된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은 여성》(1739)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1792)가 있다. 소피아는 여성 무지의 책임이 '미신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지 않은 남성에게 있다'고 비난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시민정부의 헌법 자체가 여성의 이해력 증진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며 '오늘날의 여성은 무지로 인해 어리석거나 사악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고 주장했다. 또한 여성이 '순수라는 허울뿐인 명분 아래 계속 무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46, 49)


"19세기와 20세기 여성 학자와 과학자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남성이 여성의 성과를 끈질기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성과 여성의 공동 작업에서 그와 같은 경향이 두드러졌다. 남성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빛을 보지 못한 불운한 여성 과학자에는 메리 애닝, 리제 마이트너, 로절린드 프랭클린 등이 있다. 메리 애닝은 지금도 주로 화석 수집가이나 중개인으로 소개된다. 이 때문에 19세기 전반기에 도싯에서 공룡 화석을 발굴해 고생물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묻히기 일쑤다. 물리학자인 리제 마이트너는 1930년대에 오토 한과 함께 핵분열을 발견했지만, 이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주인공은 남성 동료인 오토 한뿐이었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DNA의 암흑 여인'으로 불린다. DNA를 발견해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이 그녀의 지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인용 기억상실' 중 하나에 해당한다."(50-1)


4장 무지의 연구 


"우리는 보통 초기 역사 시대를 무지의 시대로 여긴다. 하지만 모든 시대가 무지의 시대라고 해야 겸손할 뿐 아니라 정확할 것이다. 바로 다음의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지난 두 세기 동안 눈부시게 성장한 집단 지식이 대다수 개인의 지식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인류 전체를 놓고 보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개인은 자신의 조상보다 조금 더 알 뿐이다. 둘째, 새로운 지식이 확산되면 다른 지식은 사장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 중국어 등 세계적 언어를 지식으로 습득하는 것이 증가함에 따라 다른 언어의 소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또한 개념 차원에서 보면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체될 때는 (전환 과정에서 과거의 지식 일부가 손실되는) '쿤 손실'이 발생한다." "셋째, 최근에 정보의 양이 급속하게 늘기는 했지만, 이는 엄연히 지식의 증가와는 다르다. 지식 증가는 정보와 달리 검증, 소화, 분류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57-8)


"의학자, 철학자, 심리학자들은 초기 무지 연구에 기여했지만 각자 몸담은 분야가 달라 서로 고립되어 있었다. 이후 무지에 관한 책과 논문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사회학자들이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제 '아그노톨로지Agnotology'는 여러 학문을 아우르는 분야로 자리매김했다." "무지 연구에 대한 관심이 지난 40여 년 동안 특히 왕성하게 일어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그 중 하나는 연구 그 자체의 발달이다. 특정 문제를 연구할 때 그것을 뒤집거나 반대로 돌려 상반된 측면을 살펴봄으로써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제 기억을 연구하는 학생들은 망각으로 눈을 돌렸고, 언어를 연구하는 학생들은 침묵을 연구하고 있다. 성공은 늘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학자들은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도 연구한다. 또한 지식 사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데 힘입어 학자들 사이에 지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고, 그에 따라 무지 연구도 뒤따르게 된 것이다."(64-5)


5장 무지의 역사 


"무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바로 '없음'을 어떻게 연구하느냐 하는 점이다." "다소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무지의 개념을 시대별로 살펴보는 것이다. 해당 사례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이자 학자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자신의 무지와 다른 많은 이의 무지에 관하여〉라는 편지가 자주 언급되어 왔다. 페트라르카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해 자신은 '모른다는 점을 안다'고 하면서, 그가 무지하다고 주장하는 네 명의 젊은 베네치아인에 맞서 자신을 변호했다." "무지의 역사를 알기 위해 최근에는 그림자를 보고 누군가를 추적하는 것과 같은 간접적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후향적 방식'으로, 지식의 증가에서 무지의 점진적 감소로 초점을 옮기는 것이다." "두 번째 접근 방식은 셜록 홈즈가 하는 것처럼 이른바 '설득력 있는 부재'를 연구하는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무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비교를 통해 중대한 부재를 드러낼 수 있다."(71-2)


# 셜록 홈즈는 경주마 실종 사건을 조사하던 중 경비견이 그날 밤에 짖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래서 경비견과 친밀한 사람이 범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코넬 치얼라인은 서구인들이 근대 초기 레반트(동지중해 연안) 지역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특히 아랍의 위대한 역사학자 이븐 할둔의 저서를 비롯한 일부 도서가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특정 정보 역시 도서관 소장 도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관행은 '빈 역사'라고 부르며, 기록 보관소에 특정 자료가 없는 것을 중요한 현상으로 본다." "세 번째 방식은 기존의 승리주의 서사를 뒤집어 무지의 감소 대신 무지의 증가, 혹은 무지의 폭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에서는 언어의 소멸, 책의 소각, 도서관 파괴, 발견의 집단적 망각, 지식인의 죽음 등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한마디로 승자보다는 패자, 성공보다는 실패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접근법의 가치는 전통적인 이야기의 편향성, 즉 역사학자들이 흔히 '편견'이라고 부르는 것을 드러내는 데 있다. 하지만 (이 방식만 활용할 경우)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마찬가지로 편향적일 수 있다."(72-3)


6장 종교의 무지 


"무지는 종교의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는데, 부정신학否定神學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부정신학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어떤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으며(예를 들면 '신은 유한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함으로써 '신이 무한한 존재'임을 설파한다), 무지를 통해 신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종교 지도자들은 종종 야훼, 하나님, 알라의 의도를 안다고 자신하지만, 종교는 인간의 무지로 인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종교인들의 믿음을 자신과 다른 지식으로 여기기보다 지식의 부재라 단정 짓고, 무지를 비난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은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에서 전도해야 했지만, 본국의 동료들에 비해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그들이 개종시키려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선교사들이 쓴 글을 보면 신도들을 무지하다고 여긴 경우가 흔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개종한 이들 스스로도 그 같은 견해를 받아들였다."(77, 83)


"개인 차원이든 집단 차원이든 타 종교에 대한 무지는 숨기거나 위장하는 행위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강제 개종이 이루어졌을 때 더욱 그렇다. 신대륙에 끌려와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했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은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의 토착 신앙을 끝까지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 종교에 박해가 이루어지는 한 위장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공개적으로는 어떤 종교를 지지하면서 실제로는 그와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시아파가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시행해온 위장을 아랍어로 '타키야taqiyya'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두려움'이나 '신중함'의 뜻도 담겨 있다." "종교개혁 이후 서유럽이 가톨릭교, 루터파, 칼뱅파 지역으로 분열되면서 '그릇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위장이라는 관행을 따랐다. 이 위장은 당시 장 칼뱅 등이 니코데미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니코데미즘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바리새인 니코데모가 남몰래 밤을 틈타 그리스도를 만나러 간 것에서 유래했다."(93-5)


"'불가지론자agnostic'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영적 지식gnosis의 부족을 의미한다. 기록상 최초의 불가지론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로, 그는 '어떤 사람도 신에 관한 분명한 진실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독실한 불가지론'은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숨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구약성서(이사야 45장 15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유대인 학자 모세 마이모니데스는 '부정적 속성을 제외한 채 창조주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신론자야말로 논의에 포함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18세기 이신론자들이 믿었던 신은 세상을 창조하기는 했지만 그다음부터는 자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치 시계 장인이 만든 시계가 스스로 작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이끌어냈다. '신을 살피려고 들지 말라. 인간의 적절한 연구 대상은 인간이다.'"(95-7)


7장 과학의 무지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는 과학을 점차 커지는 구체球體로 상상했다. 표면에 추가되는 모든 것은 주변의 무지와 더 광범위하게 접촉한다는 개념이었다. 특정한 문제가 해결될 때마다 또 다른 문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과학자들의 시선은 항상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일단 안개가 걷히면 과학자들은 선택적 무지를 실천한다. 특정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일부 데이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이 같은 선택을 무지의 관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선택이 잘못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미국 철학자 존 듀이가 말한 '진정한 무지'를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무지는 겸손, 호기심, 열린 마음을 동반할 가능성이 높아 유익하다. '예상치 못한 무지'는 연구 과정에서 일어나는 뜻하지 않은 발견을 뜻한다. 무지는 놀라움으로 이어지는데, 놀라움은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게끔 만들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지식의 창을 열어 준다."(104-5)


"무지의 주요 유형 중 하나는 알고 싶지 않은 데서 비롯된 의도적 무지다. 이는 특정 아이디어, 특히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반감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칼 포퍼가 말한 적극적 무지와도 연관된다." "이 같은 의도적인 맹목 사례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 파스퇴르의 미생물 발견, 멘델의 유전 법칙, 막스 플랑크의 양자론 등에 대한 저항이 있다. 플랑크가 '과학은 장례식을 한 번 치를 때마다 진보한다'는 쓴소리를 남긴 것은 양자론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반감에서 비롯되었다. 이 말의 뜻은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설득해 깨닫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마침내 죽고 진리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한다는 것이다. 기성세대 중에는 자신의 전문적 자본을 투자한 이론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 사람이 많다.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이해되지만,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107-8)


8장 지리학의 무지 


"영국의 지리학자 브라이언 할리는 지도의 '침묵'(그가 공백보다 선호한 용어) 연구에서 지도가 지리적 지식을 널리 확산시키던 시기에 일부 국가의 왕들이 자국의 자원이 다른 나라에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자국 지도를 비밀에 부친 사실에 주목했다. 16세기에 포르투갈 역시 인도, 중국, 아프리카, 브라질에 무역 기지를 세우고 제국을 건설하면서도 지도를 포함한 자국 정보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1504년 마누엘 1세는 지도 제작자들이 콩고 너머의 서아프리카 해안을 지도에 표시하지 못하게 하고, 기존 지도까지 검열하도록 했다." "스페인 정부는 스페인 제국에 대한 지식을 철저히 통제해 항해사 수업을 담당하는 학자들은 외국인들에게 지식을 전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 16세기 후반 모스크바 대공국에 살던 네덜란드 상인은 그 지역의 지도를 구할 수 없었는데, 지도를 유출하는 것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비밀주의는 유럽 정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146-7)


"환경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확산되었다. 생물 다양성의 감소는 이제 대중이 주목하는 사안이다. 2014년 엘리자베스 콜버트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출간해 최근의 생물 다양성 감소를 지구 역사상 발생한 다섯 번의 대멸종 이후 여섯 번째 대멸종으로 보았다." "기후 변화에 대한 지식은 꽤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이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스웨덴 물리화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는 1896년에 이미 지구 온난화를 예측했다(독자 여러분의 짐작대로 당시 선배 학자들은 그의 예측을 무시하고 넘어갔다). 1938년 영국 공학자 가이 캘런더는 지난 반세기 동안 온난화가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과학자들은 지구 온난화가 자연적인 주기로 일어난 게 아니라 화석 연료를 태워 생긴 온실 효과 때문이라 알고 있었다. 나쁜 소식이 대개 그렇듯 과학자들의 이 같은 발견은 (꽤 오랫동안) 거의 무시되거나 깡그리 부정당했다."(155-6)


2부 무지의 결과


9장 전쟁의 무지 


"전쟁에서 군사 작전은 다른 무엇보다 무지와 지식 간의 싸움이다. 아군의 계획을 적군이 모르게 철저히 관리하는 한편, 적군의 계획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웰링턴 공작이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전쟁의 모든 기술은 언덕 저편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에 실패할 때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전쟁은 적의 움직임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한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는 양쪽 진영 모두 무지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그나마 정보를 좀 더 확보해 중대한 실수를 적게 한 쪽이 승자로 등극한다." "무지 중에서도 지휘관의 무지는 문제가 된다. 일반 병사들은 보통 자신들이 다음으로 공격하고 후퇴할 시간과 장소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지식의 공백은 소문으로 채워진다.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후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참호 안에 나돌았던 가짜 뉴스를 주제로 선구적인 연구 논문을 집필했다."(160-2)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무지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회학 교수인 제임스 깁슨은 베트남전을 다룬 책에서 지식의 부재가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공백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이유로 전쟁을 얕잡아 보거나 무시한 데  따른 공백도 있다는 것이다. '군부대는 효율성으로 평가받는데, 민간 사상자에 신경 쓰는 것은 여기에 방해만 되기 때문에 군 관료들은 ··· 민간 사상자 수를 집계하는 데 무관심했다'고 깁슨은 설명했다." "침략자들이 군사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최대 약점은 외부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공격하는 국가의 언어, 관습, (열대 기후를 포함한) 지형에 대부분 무지하기 때문이다. 언어에 대한 무지는 미국인 대다수가 이른바 베트남의 같은 편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의 공산주의는 물론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외부 개입이 혁명에 찬물을 끼얹기는커녕 불을 더욱 지핀다'는 정보의 속뜻은 무시했다."(173-5)


10장 비즈니스의 무지 


"비즈니스에서 특정 무지는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득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매에서는 입찰자들이 서로 얼마까지 부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지 못할 때 판매자가 이득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거래 당사자들의 '대칭적 무지'는 거래 이윤으로 이어진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더 흔한 것은 '비대칭적 무지'다. 이와 관련해 미국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가 제시한 '레몬 시장의 법칙'은 유명하다. 이 법칙에 따르면 중고차 시장에서는 불량 중고차(레몬)가 좋은 중고차를 몰아내는 현상이 발생한다."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는 정보를 사고파는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이름을 알렸다. 애로의 역설은 자신이 구매하려는 상품에 대해 미리 알고 싶어 하는 고객의 욕구와 돈을 받기 전 정보를 완전히 누설하지 않으려는 판매자의 욕구가 상충하는 점을 지적한다.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핵심은 상대적 무지다. 모든 참가자가 어느 정도 무지하지만, 그나마 덜 무지한 참가자가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183-4)


# 레몬 시장의 법칙 : 판매자는 자신이 파는 중고차의 좋지 않은 상태를 잘 알고 있지만 밝히지 않고, 구매자는 제대로 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차를 사게 된다. 이처럼 정보의 불균형으로 인한 무지를 비대칭적 무지라 한다.


"위장 혹은 특정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숨기는 '전략적 무지'에 의존하는 불법 비즈니스에는 알코올, 마약, 위조품 같은 금지 물품, 물품의 운송(밀수)과 판매(암시장)뿐 아니라 성매매, 청부살인 같은 불법 행위도 포함된다." "여기서 무지한 자는 세관/과세 공무원, 경찰이다. 실제로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정부 고위직을 포함해 많지만, 정확히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지 아는 이들은 적다. 어떤 경우에든 무지 자체는 아니더라도 위장된 무지는 유지되어야 한다." "1958~1962년 대기근이 발생한 중국에서는 비공식 배급 시스템이 생겨나거나 훨씬 중요해졌다. 당원들은 끝도 없이 교활한 방법으로 국가를 속였고, 물물 교환과 위조 허가증 사용을 포함한 병행 경제parallel economy가 발전했다. 생산자 집단에서 배급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노동자 수를 부풀림에 따라 '죽은 영혼의 거래'도 일어났다. 이러한 시스템은 회색, 비공식, 병행(평행) 대안, 그림자 경제로 다양하게 알려져 있다."(200-2)


11장 정치의 무지 


"독재자가 국민들의 무지를 조장한다면 민주주의 세력은 불안해지게 된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문명화된 국가가 무지하면서도 자유로운 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경제학자 앤서니 다운스는 자신이 수백만 유권자 중 한 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굳이 정보를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합리적 무지'라는 새로운 용어로 설명했다. 하지만 2016년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한 수많은 유권자의 무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용어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린다 알코프는 그들의 무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들의 무지는) 지식 부족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공동의 노력, 의식적인 선택, 일련의 선택에 따른 결과이다. 특정 뉴스 기사나 뉴스 소스를 회피하고, 특정 대학 과정을 멀리하며,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그날 뉴스에 대한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예다.〉"(215-8)


"18세기 후반 독일어권 대학에 행정학이 개설되었다. 당시에 국가에 대한 지식을 독일어로 '통계학Statistik'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영단어 '통계학Statistics'이 유래했다. 이 같은 단어의 의미 변화는 정부가 공장과 학교, 빈곤과 위생을 조사하는 데 점점 관심이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생산된 수많은 정보는 19세기부터 막대 그래프, 그래프, 원형 차트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조사는 무지에 대한 지식의 승리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모든 승리가 그렇듯 이 과정에서 얻은 것만큼 잃은 것도 많았다. 정보가 지나치게 많아 다 소화하기 불가능해진 것이다." "심지어 국가 차원의 조사와 지도 작성처럼 지식의 추가가 분명한 행위도 오히려 무지를 조장할 수 있다. 특히 제임스 스콧이 '빈약한 단순화'라고 표현한 지도와 통계표를 현실로 받아들이면 때로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지도와 통계는 현실을 단순화하거나 전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함으로써, 다양하고 복잡한 현실에 무지하게 만든다."(234-5)


12장 놀라움과 재앙 


"역사적으로 위험 징후를 무시하다가 자연재해를 입은 사례는 너무도 많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이어 발생한 뉴올리언스 홍수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재난 연구에서 연방재난관리청FEMA의 대응 실패가 드러났다. 관리청은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임시 거처로 이동식 주택과 텐트를 제공했지만, 호텔에 수용하는 것은 꺼렸다. 의료 시스템은 재난에 대비하지 못했다. 허리케인이 매년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탓에 대비 부실 문제가 늘 비난의 도마 위에 올랐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대부분인 빈곤층은 가진 게 적고 홍수에 더 취약한 저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이른바 무지의 사회적 분배를 드러냈다. 도시 취약 지대에 사는 빈곤층은 홍수가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안전하고 비싼 지역에 거주하는 공무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안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안전까지 위협해 가며 현장 지식을 무시했다."(247-8)


13장 비밀과 거짓말 


"대부분의 국가에서 소문과 구두 소통은 당연히 신문보다 신뢰도가 낮은 것으로 간주되지만, 소련에서는 오랫동안 그 반대였다. 또한 소련의 지도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거나(교회 등) 대중에게 숨기고자 하는 것(강제 수용소 등)들을 누락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었다.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던 새로운 과학 도시 나우코그라드도 지도에서 누락되었는데, 이 중 일부는 시베리아에 위치해 있었으며 강제 수용소 죄수들에 의해 건설됐다. 핵물리학자이자 반체제 인사인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1968년 소련 내부에서 쓴 글에 따르면, 소련은 여행이나 정보 교환의 자유 없이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사하로프와 같은 반체제 인사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은 해외에서 출판한 책이나 비밀리에 직접 손으로 만든 출판물인 사미즈다트samizdat(러시아어 '스스로'와 '출판'의 합성어)를 통해 정보를 유포하는 것이 전부였다."(270)


"정부가 대중을 무지하게 만드는 가장 극적인 사례는 대형 재난을 은폐하는 것이다. 1943년 벵골 대기근 당시 정부는 '기근'이라는 용어 사용을 금지했다. 또 다른 악명 높은 사례는 1932~1933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대기근인 홀로도모르Holodomor 사건으로, 당시와 이후 소련 정부의 입장은 기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1989년 6월 4일 사건'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알려진 천안문 사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규제해 6월 4일에는 인터넷에서 '오늘' 또는 '그해' 등 민감한 단어를 사용하는 게 금지되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성인일 때 목격하고 이제 노인이 된 사람들은 개인적인 견해와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무지를 가장한 정권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은 알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지식을 지우려고 노력한다. 프로이트식으로 표현한다면, 공식적인 억압은 비공식적인 진실 억제에 의해 강화된다."(273, 276)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는 단어조차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된 경우가 많다. 탈진실 시대에 관한 책은 2004년에 출판되었지만, 이 단어는 그보다 12년 전인 199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스핀 닥터spin doctor'(주로 정치인이나 공인들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대중의 인식을 조작하기 위해 고용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라는 문구는 1940년대 〈뉴욕타임스〉에서 사용되었다. 가짜 뉴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프랑스어 '포스 누벨fausses nouvelles'은 영어의 '페이크 뉴스'와 같은 전통적인 표현이다. 또 하나의 전통적인 용어는 '카나르canard'(허위 보도 또는 유언비어를 뜻한다)로, 이는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가 당시 파리의 언론계를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사용했다. 노련한 기자가 신참 기자에게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독자들에게 뉴스를 팔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를 우리는 카나르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미디어는 고의적인 허위 정보뿐만 아니라 무지 또는 부주의의 결과인 오보도 퍼뜨린다."(298-9)


14장 불확실한 미래 


"불확실성은 미래에 대한 무지로 설명할 수 있다. 비즈니스, 정치, 전쟁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중요한 결정들은 미래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일에 근거해 내려졌다. 문제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예상과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결과는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물론 과거의 트렌드를 바탕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추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때의 추정은 우리가 항상 하는 행동을 체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해 트렌드가 항상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나심 탈레브가 '블랙 스완'이라고 이름 붙인 대공황이나 베를린 장벽 붕괴와 같이 극단적인 충격을 주는 사건이 가끔 발생한다. 스튜어트 파이어스타인이 말했듯이 예측에서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예측이 얼마나 자주 틀리는가이다. 실제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확신할 수 없다는 것뿐이므로, 우리는 예상치 못한 것을 예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302, 308-9)


"한 세기 전 미국의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는 측정이 가능한 리스크와 측정이 불가능한 불확실성을 구분했다. 나이트는 경제 행위자들의 '실질적 전지전능'을 가정하는 것을 비판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의 요소를 강조했다. 몇 년 후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불확실하며, 20년 후의 구리 가격과 이자율, 새로운 발명품의 구식화 등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문제들에 예측 가능한 확률을 도출할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 우리는 그저 모를 뿐이다〉라고 했다. 불확실성과 무지와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대한 비슷한 강조는 요제프 슘페터나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변화를 무시하는가 하면 경제 행위자들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행동한다고 가정한 것을 비판했는데, 이는 완전경쟁(수많은 수요자와 공급자가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똑같은 품질의 상품을 주어진 가격으로 자유롭게 사고파는 상태)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전제이기 때문이다."(312)


15장 과거에 대한 무지 


"역사가들이 여전히 편향bias이라고 부르는 개념은 관점의 문제로 되돌아가게 한다. 이는 1920년대 사회학자 칼 만하임과 198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논의한 것처럼, 적어도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철학자 라 모트 르 베이예는 만약 우리가 카르타고의 관점에서 기록된 자료만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포에니 전쟁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물었다. 카이사르가 아닌 베르킨게토릭스가 자신의 회고록을 썼다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베이예는 역사가의 작업을 요리사에 비유해 '역사는 부엌의 음식처럼 취급된다. ··· 모든 국가, 종교, 종파가 동일한 날것의 사실을 취하고 ··· 자기 입맛에 따라 양념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베이예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역사서를 읽은 것은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 국가와 집단에서 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가 특정 역사가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편견prejudice 때문이었다."(321)


"장기적으로 볼 때 근본적인 의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택적 무지'의 발견, 특히 역사가 대부분 엘리트에 의해, 엘리트를 위해, 엘리트에 관한 내용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1820년대에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예멜리안 푸가초프가 이끈 농민 반란의 역사를 연구할 때,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푸시킨에게 〈푸가초프 같은 자에게는 역사가 없다〉고 말했다." "1960년대에 에드워드 톰슨과 에릭 홉스봄이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주제로 쓴 책들은(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홉스봄의 《원초적 반란자들》) 지도자들보다는 피지배층인 일반 대중의 삶과 고통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도 중점을 두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노동계급 남성들로 시작되었지만, 거기에는 곧 여성의 역사도 포함되게 되었다. 새로운 지식은 과거의 무지를 더욱 확실히 깨닫도록 해주었다. 노동 계급, 농민, 여성에 대한 무지뿐 아니라 최근에는 환경에 대한 무지로까지 인식이 확장되었다."(323-5)


맺으며_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무지


"이 책은 수세기에 걸쳐 새로운 지식의 부상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무지의 부상을 수반했다고 주장한다. 인류는 집단으로 볼  때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개인으로 본다면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이 알지 못한다." "요컨대 우리는 지식과 무지를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으로 생각해야 하며, 일반 지식이나 통념이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리엄 솔로몬이 말했듯이 '새로운 지식은 새로운 무지를 가능케 한다.' C. S. 루이스의 말을 빌린다면 〈모든 새로운 학습으로 그에 따른 새로운 무지를 위한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어느 개인, 문화, 시대의 무지를 언급하기 전에 항상 두 번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모두 무지하다. 다만 무지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문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은 필요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지식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335,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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