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과거제도 성립 전까지 중국은 귀족주의의 전성시대로 불리며 지방의 유력 귀족들이 뿌리를 내리고 세력을 떨쳤기 때문에 아무리 제왕 권력이라 하더라도 섣불리 그들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지방의 주州를 단위로 하여 그곳에 이른바 귀족 연합 정권이라 할 만한 지방정부를 형성했다." "귀족들의 이와 같은 오만 방자한 태도를 참지 못한 천자가 수나라 문제文帝(재위 581~604)였다. 그는 지방정부에 대한 귀족의 세습적인 우선권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으며, 지방관아의 고급 관리는 모두 중앙정부에서 임명하여 파견하는 식으로 제도를 고쳤다. 그러자면 중앙정부가 항상 다수의 관리 예비군을 장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관리 유자격자를 배출하기 위해서 과거제를 수립한 것이다." "중국의 관리 등용 시험에는 여러 종류의 과목이 있었으므로 '과목에 따른 선거', 그것을 줄여 '과거'라는 단어가 당 대唐代에 성립했다. 송 대宋代에 이르러 과목이 진사 하나로 좁혀졌으나 여전히 과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13-4)
시험 공부
"학문은 가급적 일찍 시작하는 편이 좋다는 게 상식이었다. 그래서 남자아이에게는 다섯 살 무렵부터 슬슬 가정교육을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나이를 따질 때 태어나면 바로 한 살로 치기 때문에 다섯 살은 겨우 만 세 살 남짓에 해당한다. 아이의 가정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은 주로 어머니였는데, 혹여 다른 누가 됐든 여유가 생기는 사람이 맡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일찌감치 환경에 따른 격차가 나타났다. 이때 글자를 익히고 천자문과 『몽구』를 배운다." "여덟 살(만 여섯 살)이 정식으로 학문을 시작하는 나이로 인식되어 이때부터 이른바 초등교육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는 돈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만 서당, 보통 여학閭學·사학社學·학관學館 등으로 불리는 곳에 아이를 입학시켰다. 가장 중요한 학과목은 사서로, 대부분 그 가운데 『논어』부터 시작한다. 공부 방식은 책을 펼친 다음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암기시켰다. 암기가 학문의 거의 전부이다."(22-4)
# 『몽구蒙求』 : 당 나라 때 이한이 지은 아동용 교재. 중국 역대의 뛰어난 인물과 행적을 4자 1구로 하여 두 구를 합쳐서 여덟 자 한 문장으로 운을 붙인 형식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는 고전 교육을 웬만큼 마치는 게 보통인데, 그렇다면 대체 그 사이에 어느 정도 분량의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 학문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사서오경으로서 책 본문의 글자 수를 세어보면 다음과 같다. 사서 가운데 『대학』과 『중용』은 『예기』와 중복되기 때문에 뺐지만 전부 합해 43만여 자에 달하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숫자다. 보통 이 경전들의 본문은 암송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 하니, 엄청난 양이다. 하루에 200자씩 외운다면 딱 6년쯤 걸린다. 일단 암송이 끝나면 그 몇 배에 이르는 주석을 읽고, 본문의 일부가 시험문제로 나왔을 때를 대비하여 해답 작성법을 배운다. 그 외에도 반드시 읽어 두어야만 하는 경전, 역사서, 문학서들이 있다. 문학서는 단순히 읽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고, 그것을 교본 삼아 스스로 시나 문장을 짓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진지하게 이런 공부를 하고자 한다면 머리가 웬만큼 좋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도중에 질려버릴 것이다."(26-8)
현시(縣試) : 학교시(學校試) 1
"학교시는 본래의 의미로 따지면 과거 안에는 들어가지 않는 시험이지만, 명 대부터 과거에 앞서 치르는 예비시험의 성격으로 새롭게 추가되었다. 명 대부터 과거를 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국립학교의 학생, 즉 생원生員이어야 한다는 자격 요건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응시자는 먼저 국립학교의 입학시험부터 치러야 했다. 이 입학시험이 바로 학교시다." "학교시는 3단계로 나눠져 있는데, 첫 번째 단계가 현에서 치러진 현시縣試, 두 번째 단계가 부에서 치러진 부시府試, 세 번째 단계가 본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원시院試다. 동시에 응시하는 수험생은 연령에 상관없이 모두 동생童生이라 불렀다. 응시 자격에는 다소 제한이 있었다. 즉 부계 조상 3대 안에 천한 직업, 이를테면 창관娼館·기루妓樓 등의 경영에 종사한 적이 없어야만 한다. 그 밖의 부분에서는 농農·공工·상商을 따지지 않았다. 또 조부가 사士, 즉 관리라 하더라도 수험생에게 별다른 특전은 없었다. 요컨대 모두에게 사민평등의 기회를 주었다."(30-2)
"현시는 예비시험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목적은 과다한 수험생을 어느 정도 떨어뜨려서 입학 정원에 가까운 숫자까지 추려내는 데 있다. 극히 대체적인 표준으로 말하자면 현시에서는 입학 정원의 약 4배가량을 선발해 놓고, 다음 부시에서 그 숫자의 절반으로 추린 다음, 마지막 원시에서 또다시 절반으로 추려 입학 정원 숫자에 딱 맞아떨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정원의 10배 이상이 몰리는 곳이 있는가 하면, 거의 무시험에 가까운 곳조차 생겨났다. 각 현학縣學의 입학 정원은 그 지방의 문화 수준과 인구수를 감안해서 정했는데, 많은 곳은 25명이고, 3~4명인 학교도 있었다. 문화적으로 앞선 지역에서는 응시자 숫자가 많은 데다 학력 수준이 높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던 반면, 시골에서는 비교적 입학 자체는 쉬웠다. 하지만 이후 계속해서 어려운 시험을 앞두고 있으므로 연속되는 시험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처음부터 어려운 경쟁을 이겨낸 사람만이 도중에 낙오를 면할 수 있다."(44-5)
부시(府試) : 학교시 2
"부시는 부의 장관인 지부知府가 책임자로서 현시에 합격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치르는 시험이며, 이 시험을 통해 대략 절반 정도가 떨어진다. 사실 앞선 현시는 이 부시에 맞춰 일정이 조정되며 그에 따라 모든 현에서 같은 날 일제히 치러진다. 이는 현시의 날짜를 서로 다르게 할 경우 본적지를 위조하여 한 사람이 이중으로 시험을 치르는 부정행위를 할 수 있기에 그런 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다. 부성府城, 즉 부의 관청이 설치된 곳은 상당히 번화한 대도시로, 그곳에는 시험을 위해 시원試院이라 불리는 대규모 상설 건물이 들어서 있다. 현시에 합격한 동생은 각 현에서 증명서를 받아 들고 이곳 부성으로 속속 모여든다." "부시는 현시 합격자에 대한 재심사의 의미가 강하다. 바꾸어 말하면 다음의 원시院試에 응시하기에 충분한 학력이 있는지를 더욱 꼼꼼하게 확인하기 위함이다. 시험문제는 공통적으로 똑같이 출제하지 않고 각 현에 따라 다른 문제를 내기도 했으며, 따라서 합격자도 각 현별로 정했다."(46-7)
원시(院試) : 학교시 3
"청 대 중국 본토의 각 성에는 최고 행정관인 총독總督과 순무巡撫가 파견되었는데, 그 외에 학정이 고위 관리로서 임명되었다. 학정이란 제독학정提督學政의 약칭이며, 이는 교육행정장관이라는 의미다. 학정의 관위는 통상적으로 총독이나 순무보다 낮지만 그 임명을 받은 사람은 결코 총독이나 순무 아래에 속하지 않고, 그들과 대등한 권한을 가졌다. 학정은 3년 임기로 천자가 직접 각 성에 부임시킨 관리로서, 총독이나 순무가 천자의 직속 관리이듯이 학정도 천자 직속이기 때문이다." "원시는 부내의 학교에 입학하여 생원이 되기 위한 최종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성적 결과에 따라 입학 여부가 결정된다. 한 사람의 학정이 하나의 성 안에 보통 10여 개에 이르는 부를 순시하면서 실시하는 시험이므로 날짜를 정확하게 정할 수 없다. 그래서 학정 쪽에서 계획을 세워 미리 부에 도착할 날짜를 알려주면 부에서는 그에 따라 원시를 준비하고, 그에 맞춰 부시를, 부시에 맞춰 현시 날짜를 정하는 것이다."(48-50)
세시(歲試) : 학교시 4
"본래 학교에 오랫동안 재학하여 몇 차례 학력 시험을 치르면 그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학교에서 나와 곧바로 관리가 되는 길도 열려 있었다. 과거는 그런 학교에서 양성된 인재를 등요하기 위해 특별한 시험을 치러 관리의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였다. 그리고 그 시험관은 임시로 임명된 위원이 맡았다. 그러나 후세에 이 두 가지가 혼합되면서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를 치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고 또한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학교의 생원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저 과거의 전 단계로서 학교에 들어가는 입학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변해갔다. 게다가 그 희망자가 많았기 때문에 입학시험이 점점 어려워지자 그것은 마치 과거의 예비시험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원래의 제도는 제도로서 그대로 계속 유지되었다. 학교의 교육적 입장에서 실시하는 세시歲試라는 학력 시험이 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학교시의 본체라 할 만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학력 시험에 지나지 않은 탓에 점점 무시되기에 이르렀다."(60-1)
"생원은 더 이상 동생童生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사이다. 아직 관리는 아니지만 관리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생원이 되었다고 해서 과거 시험에 쉽사리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유한 집안이라면 과거에서 낙방해도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공부를 계속해 나갈 수 있겠지만, 중류 가정은 그렇게 언제까지나 빈둥거리는 생활이 경제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다행히 생원쯤 되면 꼭 관리가 아니더라도 관리와 유사한 부업을 가질 수 있다. 바로 관리의 사설 비서인 막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원은 연줄을 찾아 가능하면 앞으로 출세할 것 같은 위세 있는 행정장관 밑에서 막우로 일하려 했다. 수당은 장관의 쌈짓돈에서 나오기 때문에 고액 연봉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다가 이 부업이 본업으로 굳어지면서 더 이상 과거를 볼 의지를 상실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처럼 과거에 대한 희망을 버린 사람을 일컬어 '진취進取를 포기했다'라고 한다."(67-9)
과시(科試) : 과거시(科擧試) 1
"송 대宋代 이후 과거는 3단계의 형식을 취했는데, 우선 지방에서 향시鄕試(해시解試)를 실시하여 그 합격자를 중앙에 보내고, 중앙정부에서는 회시會試(공거貢擧)를 실시한 다음, 이어서 천자가 직접 주관하는 전시殿試에서 최종적으로 합격자를 결정하는 것이 표면상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후대로 오면서 점점 이 3단계의 본시험에 딸린 소시험이 추가되어 청 대에 이르면 엄청나게 복잡한 시험이 되어버렸다. 먼저 첫 번째 향시의 예비시험이라는 의미를 지닌 과시科試가 있다." "과시는 향시를 보려는 생원만을 대상으로 하여, 과연 그들이 향시에 응시할 만한 충분한 학력을 갖추었는지를 시험하고, 동시에 그 응시 숫자를 제한하려는 목적으로 실시한다. 그런데 생원 쪽에서는 세시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여겨 경원시하지만 과시는 응시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곤란해질 수 있으므로 장려나 강제를 하지 않는데도 오히려 서로 앞다투어 시험을 보고자 몰려들었다. 참으로 이해타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70-1)
향시(鄕試) : 과거시 2
"향시는 각 성의 성도省都에 성내省內 거자擧子들을 모아 실시한다. 향시는 시험 날짜가 정해져 있으므로 전국에서 동시에 치러지는데, 시험관은 중앙에서 파견되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그들이 시험 날짜에 제때 도착하지 못해도 문제지만, 너무 빨리 도착해도 그들에게 청탁을 시도하려는 사람이 생길지 모른다. 이런 이유로 중앙에서는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두 사람의 고관考官을 출발시킨다." "시험장은 공원貢院이라고 하며 각 성의 성도에 상설 건물이 있다. 과시 때까지는 수험생들이 대청, 곧 건물 안의 넓은 마루에 늘어놓은 책상 앞에 앉아서 시험을 쳤다. 그러나 공원은 딱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독방인 호사號舍가 벌집처럼 수천, 수만 개가 모인 곳이다." "거자들이 전부 각자 자신의 호사에 자리를 잡으면 총감독관인 감림관은 대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봉인한다. 이때 이후로는 무슨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시험이 끝날 때까지 대문은 열리지 않는다."(74-7, 89)
"거자가 제출한 답안은 검은 붓글씨로 적혀 있기 때문에 묵권墨券이라 불린다. 시험장에서 거자가 사용하는 먹은 반드시 검은색으로 정해져 있으며 그 이외의 색은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답안지는 그대로 심사원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필적 등으로 판단해 특정 인물을 알아낸 뒤 그를 합격시키고 유리하게 채점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안을 전부 일일이 옮겨 적은 뒤 그 옮겨 적은 것을 심사원에게 보내는 것이다." "교정이 끝나면 두 개를 합쳐 보관 담당에게 보내며, 보관 담당관은 그 가운데 원본인 묵권을 따로 보관하고 필사본인 주권만 심사원인 고관에게 보낸다." "문장도 내용도 매우 훌륭함을 의미하는 '필의정잠' 등으로 채점된 답안에는 추천을 뜻하는 '천薦'이라는 글자를 기록하여 정·부고관에게 보낸다. 정고관과 부고관, 즉 주임과 부주임인 고관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추천을 받은 천권薦券만 공동으로 채점한다. 정·부고관 두 사람은 반드시 검은색 붓만을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103-4)
"사제 관계란 예전에는 직접 학문을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과거가 유행하고부터 오로지 시험관만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으로 변하였다. 반면에, 학문을 손수 가르쳐준 선생은 단순히 수업을 해주는 스승이라고 해서 그다지 중시하지 않게 되었다. 수업을 해주는 스승에게는 꼬박꼬박 수업료를 납부하기 때문에 이미 금전으로 거래가 끝났다고 보는, 지극히 냉정한 구분 방식이다. 그러나 시험관은 누구를 합격시키든 자유이지만 특별히 자신의 재능과 학문을 알아주어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뽑아주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특히 지기知己의 은혜를 느끼는 것이다. 시험관은 그저 한 번 답안을 심사해주었을 뿐이지만, 평생 은혜를 잊지 않고 서로 도와가며 관료 사회의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가자고 맹세하는 것이다. 이는 천자 쪽에서 보면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경향, 즉 당파를 만드는 한 요인이 되기 때문에 몇 번이고 금지령을 내렸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112)
거인복시(擧人覆試) : 과거시 3
"향시가 치러진 이듬해 3월에는 전국의 거인들을 북경으로 모아 회시會試를 치른다. 장소는 북경의 공원貢院으로, 이곳은 전년도의 신입 거인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합격했던 거인들도 운집하여 그 수가 1만 몇 천 명에 이르므로 미처 다 수용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청 대에는 회시 직전에 거인복시라는 또 한 번의 시험을 마련하여 지원자를 떨궈내고 여기서 합격한 사람에게만 회시를 볼 수 있도록 했다. 날짜는 회시 한 달 전인 2월 15일로 정해져 있다." "시험 당일, 출제는 사서 1문제, 시 짓기 1문제로 정해져 있다. 시험은 그날 안에 종료되지만, 열권대신은 4일 동안 답안을 심사하도록 명 받는다. 열권대신이 성적을 5등급으로 나누어 명부를 작성한 뒤 천자에게 바치면, 천자는 그것을 다른 조사관에게 교부한다. 조사관은 이 답안과 거인이 향시 때 작성했던 답안을 비교하여 필적이 동일한지를 조사하고, 이와 동시에 열권대신의 채점이 타당한지도 함께 심의하여 의견이 일치하면 성적을 발표한다."(126-7)
회시(會試) : 과거시 4
"회시는 향시가 치러진 이듬해, 즉 축丑, 진辰, 미未, 술戌 해의 춘삼월에 북경 공원에서 전국의 거인들 가운데 거인복시에 합격한 이들을 모아서 치르는 대규모 시험이다. 회시는 공거貢擧라고도 칭하는데, 역사적으로 봐도 이 시험이야말로 과거의 본체를 이루는 것이다. 앞선 향시는 이른바 예비시험이고, 다음에 치러지는 전시殿試는 재시험의 의미밖에 없다. 당 대唐代에는 이 시험에 합격하면 곧바로 진사進士가 되었다." "어쨌든 다행히 회시에 합격하면 이제는 다음 번 전시에도 합격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시에서는 원칙적으로 낙제자를 배출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회시의 답안지는 모두 천자가 별도로 임명한 재조사관인 복감대신覆勘大臣에게 전달된다. 한편 회시 합격자는 예부에 가서 자필 이력서를 제출하는데, 재조사관은 답안지와 이력서를 대조하여 필적이 동일한지를 확인한다. 이상이 없으면 그 내용을 천자에게 보고하며, 이때서야 비로소 회시 성적이 최종적으로 결정된다."(129, 138)
회시복시(會試覆試) : 과거시 5
"청 대 초기까지는 회시에 합격한 사람이 곧바로 전시를 볼 수 있었으나 18세기 건륭 시대(1736~1795)에 들어 또 하나의 작은 시험이 이 사이에 추가되었다. 이를 회시복시會試覆試라고 한다. 이 시험의 취지는, 전시는 천자가 직접 실시하는 중요한 시험인 데다 낙제를 배출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전시에 앞서 회시의 복시, 즉 재시험을 실시하여 사실상 전시의 예비시험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시험을 치르는 목적은 첫째, 수험자가 전시를 보기에 충분한 학력을 갖추었는지를 확인하고, 둘째, 전시는 궁궐 안에서 치러지므로 이 시험을 미리 같은 장소에서 실시하여 수험자로 하여금 시험장 분위기를 익히도록 함으로써 본시험 때 실수하지 않도록 훈련시키며, 그리고 셋째, 전시에 대리 시험을 치르는 등의 부정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다시 한번 본인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회시복시 때 상당수의 합격자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수험자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한순간이라도 방심할 수 없다."(141, 145)
전시(殿試) : 과거시 6
"송 대宋代 이후 천자의 독재 권력은 급속히 강화되었다. 당대의 공거는 예부라는 부서에서 실시했고 천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공거를 통해 어찌 됐든 시험관과 시험 합격자 사이에 스승과 제자라는 사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그것이 결국 우두머리와 하수인 같은 관계로 발전했다. 그 결과 정치가 전체의 이익보다는 이런 집단의 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폐해가 발생했으며, 나아가 이른바 붕당 싸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단 이 같은 사적인 당파 결합이 이루어지면 천자의 권력으로도 도저히 해결하지 못하는 사태로까지 치달아버린다. 그래서 송의 초대 천자인 태조(재위 960~976)는 공거 뒤에 또 한 차례의 시험을 추가했다. 태조는 스스로 시험관이 되어 시험을 실시하였으며, 은혜를 베푸는 형식으로 합격자들을 모두 자신의 제자로 삼고 직접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관료의 대단결을 꾀하려 했다. 이 시험이 전시의 기원으로, 역대 천자들에게 대대로 이어져 청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147-8)
"천자의 결정으로 가장 우수한 10명의 성적 순위가 정해지면 그 이튿날에 이를 포함하여 전체 수험자의 성적 발표가 이루어졌다." "제1갑의 세 명 가운데 1등은 장원壯元, 2등은 방안榜眼, 3등은 탐화探花라고 부른다. 이 세 사람은 천자로부터 진사급제進士及第라는 학위를 받으므로 대단한 명예로 여긴다. 특히 장원은 인생에서 최대 최고의 영광을 얻은 것으로, 장원급제자는 소설 주인공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제1갑의 세 명만은 순천부윤順天府尹(부윤은 오늘날 시장에 해당하는 정3품의 벼슬이며, 순천은 북경을 가리킨다)과 동행하여 의종들을 따라 부府로 가서 급제 축하연에 참가한다. 이 축하연에서는 장원이 주빈이므로 남향 상석에 앉고 방안이 그 왼쪽, 탐화가 오른쪽에 앉는다. 순천부윤은 손님을 대접하는 주인의 역할을 맡아 말석에 앉아서 대접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일개 서생에 불과하던 무명의 청년이 이제는 완전히 딴판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166, 169-71)
조고(朝考) : 과거시의 연장선
"전시와 회시 중에 회시 성적이 그나마 믿을 만하다고는 하지만, 천자가 몸소 주관하는 전시 성적을 무시하고 회시 성적을 끄집어내 그것으로써 새로운 진사들의 임관 표준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청조의 옹정제는 전시를 치른 뒤에 다시 또 하나의 시험을 추가했다. 마치 지붕 위에 또 지붕을 얹는 격이지만, 이를 통해 다소나마 전시의 불합리한 점을 시정하고자 했다. 이에 전시의 재시험 같은 형태로 조고朝考라는 시험이 실시된다." "한림원은 문재가 뛰어난 사람들의 보고寶庫라 일컬어졌으며 유능한 인재들을 모아 공부나 실무 수습 과정을 거치게 한 다음 필요할 때마다 중앙관청이나 지방 요직에 임명하여 실제 정치를 맡겼기 때문에, 이른바 고급 관료 예비군이 모여 있는 기관이었다." "조고는 이른바 한림원에 잔류시킬 사람을 정하는 시험이며, 그런 까닭에 한림원 관리가 책임자가 되어 실시한다. 조고는 일종의 취직 시험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낙제자를 탈락시키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199-200)
무과거(武科擧) : 과거의 별과(別科)
"문과거文科擧와 별도로 무과거, 줄여서 무과武科 혹은 무거武擧라는 시험이 존재했다. 하지만 정부나 세간에서 무과거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낮았고, 그 합격자에 대한 예우나 합격한 뒤의 대우도 거의 주목할 만한 점이 없는 수준이었다." "무진사들은 그 성적에 따라 각각 무직武職에 임명되지만, 세간에서도 또 군대 내에서도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정치와 달리 시험에 운 좋게 급제를 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전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문진사는 이래저래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 가운데 유명한 정치가나 학자가 다수 배출되었지만, 무진사로서 실제로 전공을 세운 사람은 거의 없다. 군대에서 세력을 장악하는 길은 누가 뭐래도 병졸부터 시작하여 갖은 고초를 겪고 실전에서 공을 세워 장군에 오르는 것이다. 결국 무진사는 후방 내지의 평온한 장소에서 부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정년까지 평범하고 무사하게 지내면 되는 자리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조금도 떠받들어주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202, 209)
제과(制科) : 과거보다도 수준이 높은 시험제도
"과거는 밑에서부터 한 단계씩 정해진 순서에 따라 수많은 시험을 통과해 나가야 하는 제도로서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수준이 높아진다고 한다. 그러나 출제 범위나 채점 방식이 대체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때는 매우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 오히려 떨어질 위험성도 있다. 또 그런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일수록 과거와 같은 시험제도를 경멸하여 보이콧할 수도 있다. 이 같은 과거의 약점은 예전부터 지적되었다. 이 때문에 역대 정부는 과거와 병행하되 일반적 과거 시험의 그물로는 건져낼 수 없는 대어를 다른 시험을 통해 얻고자 시도했다. 그것이 제과制科, 즉 천자의 조칙(詔)을 통해 부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시험이다." "그 중에서도 박학홍사博學鴻詞, 즉 뛰어난 대학자를 구하는 제과는 청조 초기에 가끔 시행되었다." "청조로서는 딱히 청조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은, 중립적 입장의 노학자들을 끌어들여 아군으로 만드는 것이 중국을 통치하는 데 가장 효과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210-2)
맺음말 : 과거에 대한 평가
"역사상 나타난 모든 제도에는 영고성쇠가 있으며, 이는 개인의 생애와도 다를 바 없다. 맨 처음에는 정부 측에 필요한 인원은 많은데 인물이 부족했다. 그래서 과거를 활성화하여 진사를 다수 채용했으나, 그러는 사이에 이번에는 진사의 수가 너무 늘어나서 할당해주어야 할 관직의 수가 모자랐다. 그렇다고 진사 합격자의 수를 줄일 수도 없었으므로 기존에 하던 대로 진사를 배출했다. 결국 이로 인해 진사들의 취직난이 발생함으로써 과거가 오히려 정부에 무거운 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정부 측에서도 과거제도에 대해 재검토를 할 수밖에 없었다. 북송 중기 신종(재위 1067~1085) 시대에 왕안석이 재상이 되었을 무렵이 바로 그 시기에 해당한다. 왕안석은 관리를 채용할 때 그저 시험을 실시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더 훌륭한 인재를 양성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근본적인 교육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새롭게 학교 건설에 나섰다."(224-5)
"북송이 망한 뒤에도 이 학교제도는 거의 그대로 남송에 계승되었다. 그리하여 그 졸업생은 과거 출신자와 동일한 자격으로 관직의 길에 오를 수 있었다. 왕안석은 궁극적으로 과거를 폐지하고 대학 졸업생만으로 관리를 채용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비록 이 이상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과거제도 이외에 학교제도를 병행해서 실시했다는 사실은 송 대 사회의 선진성을 보여준다. 이같이 학교제도가 모처럼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과거제도를 대체하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보다 경제적인 사정이 작용했을 것이다. 교육은 원래 돈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송 대에 접어들면 태학은 규모 면에서 북송에 비해 훨씬 축소되었다. 정부는 대개 교육처럼 바로 눈앞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일에는 돈을 들이려 하지 않는 법이다. 이후 학교제도는 오히려 과거제도 속에 흡수되어 학교시는 과거의 예비시험으로 이용되는 실정이었다. 그 결과 실제로는 학교가 없어지고 과거만으로 환원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25-6)
"명·청 시대에도 과거제도가 그 나름의 효과를 발휘했던 적은 있다. 그것은 모두 개국 초기였다. 그런데 건륭 이후의 시대가 되면 조정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의 관료 예비군을 떠안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더 이상의 사람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단지 당시까지의 관례에 따라 과거를 실시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시험을 시행하면, 응시하러 오는 거자들은 모두 사탕에 모여드는 개미처럼 관직을 얻기 위해 서로 다투는 무리(엽관자獵官者)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수험자 쪽에서도 평화로운 시기가 오래 지속됨에 따라 일반적으로 학력도 높아져서 성적이 평준화되었기 때문에 시험관 쪽이 우수한 인재를 취사선택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시험을 시행하는 쪽에서는 어떻게 인재를 발탁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다수를 떨어뜨릴까에 대한 방법을 더 많이 생각했고, 그리하여 여러 가지 번잡한 형식을 만들어냄에 따라 결국에는 과거의 진정한 정신을 잊어버리고 말았다."(2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