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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님의 서재
  • 중국필패
  • 야성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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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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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EAST 공식이란


"동질성homogeneity과 이질성heterogeneity은 규모scale와 범위scope라고도 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독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규모와 범위 사이의 갈등을 해결한다. 독재는 강압, 정보 통제, 이념적 세뇌, 가치관 주입을 통해 범위의 확장을 억압한다. 민주주의는 범위를 보존하지만 모든 사안에 대해서 그렇지는 않다. 민주주의는 선거의 신성함, 권리, 법치주의와 같은 몇 가지에 대해서만 사상과 가치와 국가의 행동이 일치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규모와 범위를 적절히 맞추려면 단순한 균형 조정 이상을 필요로 하며, 몇 가지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 완벽한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반면 독재는 규모와 범위를 정반대의 가치로 취급한다. 중국의 전제 정치는 전 세계의 그 어떤 전제정치보다 가장 급격하게 범위를 확장시키면서 규모를 확장해 왔다. 한 점으로의 수렴, 순응, 획일성의 절대적인 강조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더욱 심해지기는 했으나 중국의 역사와 전통에도 깊이 내재해 있다."(31-2)


"이 책의 핵심은 중국의 독재가 깊숙이 뿌리내리며 확고하게 지속해온 토대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효과적인 독재 실행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인상적인 다른 독재 국가들의 규모와 범위의 비율과 비교해도 중국의 독재 체제는 규모 추구 면에서 압도적이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앞두고 서방 연구자들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국민의 단 8퍼센트만이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보내는 것을 지지했다. 중국이라면 대규모 군사 작전 직전에 서방 연구자들이 이와 유사한 조사를 방해 받지 않고 실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다른 사례도 있다. 러시아에서는 비록 심한 검열이 있긴 해도 구글 운영이 가능하다. 중국에서는 아예 금지되었다. 푸틴이 그토록 많은 비판자를 독살한 것은 공개적으로 푸틴에게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비판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푸틴의 비자유민주주의 아래에서는 가장 자유주의적이었던 중국 독재 시절보다 더 많은 범위 조건이 존재한다."(42-4)


1부 시험Examination


1장 규모 확장 수단으로서의 과거 제도


"오늘날의 중국은 수나라의 통일 프로젝트의 유산이자 수혜자이다. 수나라는 587년 중국의 인식적 혁명과 정치적 변혁에 착수했는데, 바로 이 시기에 과거 제도의 원형이 확립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 제도는 조정 관료의 관문을 귀족계층이 장악하게 했던 채용 제도를 대체했다. 과거 제도는 후보자 추천, 평가, 최종 선발에 이르는 전 과정을 완전하게 통제했다. 이 획기적인 개혁의 명칭은 '자료 제출 및 자기 추천'이었는데, 좀 이상하게 들리기는 해도 새로운 프로세스의 본질을 잘 담아냈다. 지원자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료를 가지고 왔고, 더는 다른 이의 추천에 의존하지 않았다. 자격 제한이 있었지만 해당 조건만 제외하면 이론적으로는 모든 중국 남성이 조정 관료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조치가 즉각적으로 완벽하게 시행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 하나의 행위가 가져온 변혁적 잠재력에 필적할 다른 사례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별로 없다."(83-4)


"수 문제는 조정의 채용을 지명에서 지원으로 전환했으나 그 자격에 많은 제한을 두었다. 이러한 제한 중 일부는 법적인 제한이었고, 일부는 현실적인 제한이었다. 법적인 측면을 보면 수나라는 상인은 관료가 되지 못하도록 제한했는데, 황제가 된 무측천(재위 690~705)은 이를 부분적으로 해제해 주었다. 당나라에서 부활한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제한은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요건이었다. 무측천은 이 제한도 없앴다. 더 큰 변화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일어났다. 과거 제도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대부분의 관료 후보자는 도읍과 그 인근 지역, 그리고 엘리트 귀족 가문에서 뽑혔다. 엘리트들의 반발과 저항을 경험한 무측천은 이들의 독점 체제를 깨뜨렸다. 그는 그 자리에 있는 현명한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할 일을 했는데, 바로 외부인과 정치 신인을 영입하여 기존 권력층을 희석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도읍을 귀족들의 거점인 장안에서 평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낙양으로 옮기기까지 했다."(88-9)


"과거 제도는 북송(960~1127)에서 고유한 체계를 갖추고 발전하였다. 총 세 단계에 걸친 시험 절차, 3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대회 일정, 준비 과정, 익명화 등이 그것이다. 초창기에는 시험이 부정기적으로 실시되었고 때로는 아예 열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당나라(618~907) 대에는 관료 채용의 여러 경로 중 하나에 불과했던 과거 시험이 송나라 대에 이르러서는 다른 채용 경로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원나라(1270~1368)에 들어서 과거 제도는 역풍을 맞았다. 과거는 비정기적으로 개최되었고, 과거 시험 출신자의 채용 역시 하위 직급으로 제한되었다. 하지만 원나라의 통치자들은 한 가지 중대한 변화를 도입했다. 성리학을 과거 시험의 커리큘럼으로 채택한 것이다. 주희가 각색한 성리학은 텍스트가 매우 빡빡하고, 지극히 보수적이며, 명료하고 단호한 서술이 특징이었다. 과거 시험 응시자들은 더는 자유롭게 사서오경을 해석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미리 설정된 언어와 지침을 따라야만 했다."(69-70)


"명나라(1368~1644)의 건국 황제인 주원장은 기득권에 대한 반감이 심했고 너무 많은 관료들을 죽였기 때문에 부족한 인력을 보충할 인적 자본 이동의 파이프라인을 빠르게 확장해야 했다." "주원장도 무측천의 고민거리였던 지리적 불균형에 똑같이 직면했다. 주원장의 통치 기간에 남북 간의 정치적, 경제적, 지적 분열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대한 주원장의 해결책은 과거 제도를 세세한 수준까지 직접 관리하는 것이었다. 1371년, 주원장은 120명의 과거 급제자들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두 차례의 과거 시험을 중단시켰다. 그 후 과거 시험에 출제되는 원문을 검열했고, 《맹자》의 260개 장 중 85개 장이 불쾌하다며 시험 범위에서 제외했다." "더 나아가 그는 남쪽 출신 응시자에게 전체 합격자의 55퍼센트를 할당하는 영구 상한선을 제도화했다. 이 할당제는 1427년 과거 시험에서 처음 공표되어 정치와 능력주의의 융합을 공식화했다. 이러한 지역 할당제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91-3)


"어떠한 인적 시스템이든 그 확장은 보편적인 인간의 능력과 잠재력의 확장을 함께 필요로 한다. 과거 시험은 창의성을 파괴한다는 조롱을 받기도 하지만, 중국인의 문해력을 높였다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두 효과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확장을 위해서는 표준화가 필요하다. 다른 방법은 없다. 하지만 표준화가 전반적인 획일화를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표준화는 목표한 차원에서는 획일화를 일으키지만 다른 차원에서는 다양성을 초래하기도 한다. 과거 시험은 어떤 차원에서는 평민 응시자가 이전보다 많아지는 등 범위가 넓어졌지만, 유교 경전 통달과 유교 이념 고수라는 차원에서는 다양성이 감소했다. 이것이 바로 통치자들이 원하고 중요시했던 차원의 동질성이었다. 과거 시험은 제국 관료제의 접근성을 높이고, 채용을 무지막지하게 치열하게 만들었으며, 의도적으로 설계하고 구축한 지표에 따라 획일화된 관료들을 뽑았다. 그 효과는 놀랍고도 의미심장했다."(98)


2장 중국의 조직화─그리고 중국공산당


# 두 가지 기업(경제) 이론

1. U자형 기업 : 기능적 전문화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단일 형태Unitary-form 기업. 규모의 경제를 통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2. M자형 기업 : 다기능Multi-functional 역할을 하는 브랜드나 지역별 지점으로 나뉜 기업. 여러 개의 미니 U자형 기업으로 구성된다.


"중국의 M자형 경제는 지방에 권한을 부여하는 동시에 제한하는 'M자형 조직' 구조 아래에서 작동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M자형 조직이 지방 정부에 권한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중앙부처를 제약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지방 지도자들이 중앙부처의 장관급 동료들보다 먼저 중국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평가 지표로 GDP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점이다. GDP 지표는 지방 자치를 높이는 동시에 자치의 실행에 대해서는 일정한 제약을 가한다. 중국 공무원들은 여전히 상명하달식 독재 체제에서 하급 공무원이지만, 이 특정 영역에서만은 어느 정도 행동과 결정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효과는 GDP가 지표인 동시에 정책 목표가 되면서 중앙 지도자들이 계급 투쟁, 대중 선동, 인격 숭배 등 중국공산당이 관습적으로 추구해 온 끔찍한 대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중국 정치는 훨씬 온건해졌다."(114-5)


"나는 1장에서 과거 중국 제국이 고도로 형식화된 과거 시험의 성과에 따라 확장되었다고 가정했었다. 그렇다면 그 과거 시험 성적에 상응하는 현대의 능력주의적 성과 지표는 무엇일까? 바로 GDP다." "M자형 시스템에서는 각 지역이 '이익 센터'가 되며, 중앙의 인사 관리 담당자는 두 부처의 철강과 밀 생산량을 비교하는 것보다 상하이와 충칭의 GDP를 더 쉽게 비교할 수 있다. 올바른 가정(예: 시장 기반 거래)하에서는 이익을 내는 단위가 이익을 내지 못하는 단위보다 훨씬 더 전체에 유리한 조직이다. M자형 조직은 조직 계층을 따라 피라미드의 맨 아래쪽까지 비교가능성 문제의 해결책을 강제한다. M자형 조직은 부문별로 또다시 계층화되어 있는 재귀적 구조임을 명심하자. 사과와 오렌지의 상대적 가치에 대한 해결은 M자형 조직의 하위 계층에서 이루어지므로 중앙의 결정권자는 이 비교가능성 문제를 해결하는 부담을 덜 수 있다. 대신 중앙 정부는 전략과 개발 같은 더 큰 목표에 집중할 수 있다."(122-3)


"조직경제학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직접 감시와 통제가 문제가 되는 상황에는 인센티브 조정이 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추론을 중국공산당 시스템에 적용해보자. 중국학자들은 중국공산당 체제의 관료를 두 가지 유형, 즉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로 구분한다. 지역 관료는 제너럴리스트이다. 이들은 산업, 농업, 교육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한다. 반면 중앙부처 관료들은 한 분야에서 전담 업무를 수행하는 스페셜리스트이다. 예를 들어 전자부 장관은 전자 산업을, 외교부 장관은 중국과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담당한다. 물론 모두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사실이다. 중앙부처 공무원과 지방 공무원 모두 조직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의미에서는 '대리인'이다. 이들은 중국공산당 총서기, 정치국 상무위원, 국무원 총리 등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일하는 고용된 관리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대리인이기 때문에 조직경제학에서 경고하는 대래인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129-30)


"베이징 공무원들에게 산은 그렇게 높지 않고 황제는 바로 눈앞에 있다. 이들은 스페셜리스트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감독 비용이 낮고, 지시를 내리거나 업무 성과를 평가하고 중요 업무에서 실패했을 때 직급을 강등하는 등 직접 통제가 가능하다. 또한, 여러 부문에 걸쳐 있는 것보다 단일 부문 내에서 비상 상황을 구체화하는 것이 더 쉽다. 이는 중앙부처 공직자 중 고위직에 오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지방 공무원들은 제너럴리스트이며, 인센티브 조정 측면에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자신이 황제로부터 산 넘고 물 건너 멀리 떨어진 지방의 고위 공무원이라고 상상해 보라. 중앙 정부의 이익 대신 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활동을 하고 싶은 유혹이 강할 것이다. 그러나 중앙으로 승진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기대와 중앙 의사결정권자와 가까운 사람들─즉 베이징에서 일하는 중앙부처 공무원들─이 항상 기회를 낚아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당신을 일탈에 빠지지 않게 한다."(130)


"또 다른 인센티브 조정 도구인 스톡옵션의 기본 개념, 즉 대리인을 주인으로 전환한다는 개념은 중국공산당에도 적용할 수 있다. 현재 24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정치국에는 두 개의 등급이 있다. 일곱 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중국 정치 체제의 정점에 있으며, 기업 경영 구조에서 이사회와 같은 역할을 한다.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매일매일의 국가 운영에 대한 책임을 지며 모든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나머지 후보위원은 의사결정권자라기보다는 다음 기수 상무위원회 위원의 후보군 역할을 한다." "후보위원이라는 직책은 지방 관료들에게 부분적이나마 정치적 '주인'의 지위를 부여하고, 상무위원의 정책과 이들의 선호가 부합하도록 조정하지만, 상임위원과 같은 수준의 의사 결정권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나와 많은 다른 학자들이 발견한 바와 같이, 부분적이나마 주인의 지위를 가진 지방 관료들은 투기적 투자 활동을 억제하라는 중앙 정부의 정책 명령을 가장 잘 준수한다."(131-2)


2부 독재Autocracy


3장 사회 없는 국가


"왕조 시대 중국의 관료제는 사회가 막 태동하여 힘겹게 헤쳐나가야 하는 연약한 시기에 생겨났다. 과거 제도의 확장은 사회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확립했다. 이 지배는 행정적이고 관념적인 지배였다. 역사가들은 왕조 시대 중국의 강력한 신사紳士 계급은 종종 국가의 긴 팔이 닿지 않는 곳에서 활동했고 일부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정부의 요구를 조작하고 제도를 이용했다고 지적한다. 모두 사실이지만, 특히 국가를 대신하여 한 가지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름 아닌 세금 징수이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를 대신하는 존재였지 국가를 제약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일부 황실 신하들이 제도를 악용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사회가 아닌 국가가 정한 조건에 따라 가능했다. 완벽에 가까운 설계, 시민사회의 부재, 뿌리 깊은 가치와 규범들 덕분에 전제 정치 체제는 중국에 깊게 뿌리 내렸다. 이것은 과거 제도가 지닌 사회를 질식시키는 능력 때문에 가능했다."(149-50)


"부르주아 계급은 중국 사회의 또 다른 공백이다. 상인들은 사회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했는데, 이는 상업이 활발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송나라에서는 활기찬 시장경제가 나타났다. 국가와 상인은 공생관계였고, 국가는 상인을 억압하는 대신 그들이 내는 세금으로 이득을 얻었다. 명나라와 청나라는 상공업 발전의 천국이었을 것이다. 명나라와 청나라는 대외 무역을 금지해 국내 시장을 보호했고, 상공업자에 대한 통제도 완화했다. 목수, 석공, 직공, 도공들은 돈을 주고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 세금은 현물이 아닌 화폐로 납부했고, 덕분에 농민들은 쌀이 아니 환금성 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양날의 칼이기도 했다. 상인들의 일신은 국가의 자비와 선의에 좌우되었으며, 오늘은 보호하되 내일은 내칠 수도 있었다. 수직적 자본주의는 수 세대에 걸친 독재자들이 선호해 온 것처럼 상호 간에 대등한 자본주의가 아닌 종속적 자본주의였다."(159-61)


"표준화된 시험은 정답과 가치 정렬을 위해 권위에 의존하고 숭앙하는 정신적 습관을 만들고, 교육학자들이 복잡하고 이질적인 사회를 성공적으로 헤쳐나가는 데 필수적인 정신적 특성이라고 분류하는 것들을 평가절하한다. 여기에는 비판적 사고(의견의 독립성, 논리와 추론에 대한 신뢰), 다양성 인정(우리 주변의 세계가 이질적이라는 인식), 공감(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능력)이 포함된다. 과거 제도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가치를 모조리 부정한다." "또 다른 특징이 있다. 과거 제도는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전제 정치가 아닌, 전제 군주에 의해 인격화된 체제를 향한 경외심을 심어주었다. 사상적 경의는 사고 체계로서 유교의 권위가 아닌, 유학자 성현들을 향했다. 이 틀에서 나쁜 통치는 좋은 통치자를 통해 바로잡을 수 있다. 좋은 통치자는 좋은 통치의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며, 전제적 통치를 가능하게 하거나 제한하는 제도 자체는 방정식에서 제외된다. 오직 통치자만이 주목을 받는다."(184-5)


"과거제도는 집단행동을 징벌하고 그 규범은 민주주의를 향한 중국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가치를 중요시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민주화는 집단행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투표는 호불호를 조정하고 협업 행위를 결집하는 도구이다. 반면 과거 제도는 개인의 주체성이 아닌 극도의 개인주의를 표방했다. 수험생들은 치열한 제로섬 토너먼트에서 죽도록 경쟁했고 협력하면 가혹한 불이익을 받았다. 수험생들은 국가가 정한 조건에 따라 외롭고, 잔인하며, 인간을 거의 원자 단위로 부수는 경쟁에 몰두했다. 그 지경으로 개인화된 사회는 더는 사회라 부를 수 없다." "사실 중국공산당은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다만 그 정치 참여가 공산당이 정해놓은, 조직화가 불가능한 고립 공간 안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시민들은 설문 조사, 온라인 포털, 청원 등을 통해 중국공산당에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독재와 폭압은 개인주의에 전혀 불리하지 않다."(191-2)


4장 권위주의적 평균으로의 회귀


"1980년대 중국의 공식적인 국가 구조는 중국 역사상 그 어떤 시기와도 달랐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1980년대 내내 중국공산당 수장(중앙위원회 총서기), 국가 원수(국가 주석), 군 통수권자(중앙군사위원회 주석)가 모두 다른 사람이었다. 1993년 이후로는 한 사람이 이 세 직책을 독점하게 된다. 그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일련의 역학 관계를 도미노처럼 촉발한 천안문 사태 때문이다." "1980년대 중국을 특징짓는 놀라운 수준의 권력 분산, 이념적 다양성, 눈부신 경제 성과는 1989년 6월 4일 천안문 항쟁 이후 새로운 지도부가 들어서자마자 이러한 업적들을 가능하게 했던 정치 개혁을 전부 뒤집으면서 끝장났다. 혁명 원로들은 천안문 이후 당 지도부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권력 중심을 희생시키면서 중국공산당 총서기라는 단 하나의 직책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러한 누적 투자의 수혜자가 바로 시진핑이다. 역설적으로 천안문은 미래의 독재자를 위한 길을 열어준 것이다."(195-7)


"천안문 이후 중국 지도부에 대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들 중 압도적 다수가 중국에서 가장 개혁이 뒤처진 지역인 상하이 출신이라는 점이다." "상하이의 신통찮은 성적표에도 불구하고, 1989년부터 2002년까지 상하이방은 전면에 나서 중국을 통치했고, 2002년부터 2012년까지는 후방에서 중국 정치를 주물렀다. 시진핑은 정치적으로는 상하이방을 표적으로 삼았지만, 경제 모델은 상하이의 고전적인 국가주의 모델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상하이의 테크노크라트들이야말로 천안문 사태의 수혜자였다. 이념적 이유이든 정치적 편의의 이유이든, 이들은 전국적인 시위의 원인이 된 1980년대의 접근법을 거부함으로써 승자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상하이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와 기업 간의 긴밀한 유대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민간 부문의 발전을 촉진하는 이른바 '정신 자본주의'이다. 중국에서 가장 자발적이고 가장 대등한 자본주의 유형인 농촌 기업가 정신은 주변부로 내몰렸다."(218-20)


# 상하이방의 주요 인물 : 장쩌민(1989년 중국공산당 총서기 취임), 주룽지(1998~2002년 중국 총리 역임), 황쥐(2002~2007년 중국 총리 역임), 쩡칭훙(2003~2008년 국가 부주석 역임), 왕후닝(현재 당내 서열 4위)


"중국 정부는 1981년 초부터 민간 기업가를 중국공산당에 영입하는 것을 허가했는데, 이는 유인책이 아니라 정책 변화와 안정의 신호였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기업가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90년대 정신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당 가입이 귀중한 자원과 사업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통로였다. 민간 기업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천안문 이후 중국 지도부의 정책 전환이 가져온 장기적 영향 중 하나는 지대 추구와 조직적 부패의 증가였다. 부정부패 척결은 1989년 학생 시위의 구호이기도 했다. 시위대가 정부 관리와 그 가족의 자산을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요구하자, 자오쯔양과 다른 개혁파 지도자들은 이를 조용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로 인해 다른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을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천안문 사태는 부패가 정치적으로 안전하다는 선명한 메시지였다. 정치 개혁, 당의 투명성, 초기 시민사회 등 부패를 억제할 수 있었던 세력들은 천안문을 분기점으로 모두 후퇴했다."(224-5)


"상하이의 테크노크라트들은 도시 계획, 기술, 세계화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한 손으로는 농촌 기업가 정신을 찍어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도시 부동산 시장을 자유화했다. 외국인 직접 투자의 문이 열렸고, 월스트리트와 우호적인 동맹을 맺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차이나 신드롬'의 중국 쪽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뒤집어 말하면 미국의 메인스트리트(제조업)는 무너졌고 월스트리트(금융업)의 주머니는 두둑해졌다. 상하이 테크노크라트들이 주도한 개혁은 중국의 성장과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지만, 중국 정치 시스템의 도덕성과 질적 수준은 처참하게 망가졌다." "정실 자본주의는 지대 수탈의 거래 비용을 낮춘다. 천안문 이후 중국 정실 자본주의의 양과 질은 모두 돌연변이 수준의 변화를 겪었다. 원자바오 전 총리의 재산은 27억 달러로 추정되며, 부패 혐의로 몰락한 저우융캉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의 가족과 측근들은 당국에 압수당한 재산만 무려 145억 달러에 달한다."(225-7)


"천안문 사태 이후 원로들이 장쩌민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권력 기반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일단 선택한 후에는 바로 그 권력 기반 부재가 장쩌민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막아야 했고, 따라서 장쩌민의 권위와 자격을 강화하기 위해 조치해야 했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장쩌민의 앞에서 길을 비켜주는 것이었다." "1989년 11월, 덩샤오핑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사임하고 장쩌민에게 군 통수권을 넘겨주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때에는 물러나기를 거부했던 자리였다. 혁명 원로들은 또한 장쩌민이 중국 지도부의 '핵심'이 되어야 하며 권력을 그에게 집중한다는 데 동의했다. 1992년 당 중앙고문위원회가 폐지되었다. 이로써 원로들이 국정의 최전선 관리에 개입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사라졌다. 이어진 조치는 1993년 양상쿤을 주석직에서 밀어내고 장쩌민을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이었다. 1982년 이후 처음으로 한 사람이 당과 국가를 모두 이끌게 되었다."(235-6)


3부 안정Stability


5장 무엇이 중국의 전제 정치를 안정적으로 만드는가?


"중국의 황제들은 어떻게 오랜 시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황제보다 한 단계 아래, 즉 조정의 고위 관료들의 특성이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 밀란 스볼릭은 권위주의 정권의 안정성은 정치 엘리트의 동의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독재자가 정치 엘리트로부터 명시적 또는 암묵적 협력을 확보할 수 있다면 권력은 훨씬 안전해진다(로마 황제들은 이 부분에서 처참하게 실패했다)." "역사학자들은 한나라 이후 황제와 관료(특히 최고위 관료인 재상) 간의 관계를 '공생'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공생관계는 상호 의무와 의존에 기반한 충성을 의미하며, 황제는 관료와 협력하여 통치했다. 자발적 퇴임은 공생의 한 형태로, 인센티브를 개선하고 중국공산당의 M자형 경제 체제 아래 있던 지역 관리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재상들의 신뢰와 노력을 끌어냈다. 황제들은 재상이 충성을 다하면 그 대가로 안전한 퇴임의 옵션을 제공했다. 그 결과 거버넌스와 행정의 질이 향상되었고 안정이 이어졌다."(260-2)


"부富는 수많은 정치 체제와 사회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부를 가진 자에게 유리하도록 정치적, 사회적 제도가 만들어지고 부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로 이어지는 현상이 자주 목격된다. 중국에서는 아니다. 중국에서는 정치가 부를 통제하지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 황실의 조정 시스템은 매우 이례적이었고, 오늘날 중국공산당 체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마 마윈도 동의할 것이다. 중국은 부를 배척하지 않는다. 고대부터 중국은 활발한 상업 발전과 광범위한 정실 자본주의 시기를 경험했다. 그리고 황실 관료제의 하위직에서는 부유층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을 찾을 수 없었다. 차별은 권력의 최상위 계층에서 부를 배제하기 위해서만 발생했다. 교수 채용 면접 같은 방식의 전시殿試는 경제적 특권층을 길들이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렇게 포용과 배제를 신중하게 조정함으로써 부유층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들이 내부에서 체제를 파괴할 가능성을 억제할 수 있었다."(274-5)


"중국 왕조 시스템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명나라의 복사판으로 변신하면서 267년간 지속되었으나, 청나라는 과거 제도의 위상이 무너지면서 함께 붕괴하기 시작했다. 청은 과거 제도를 계승하여 능력주의와 정치적 통제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지만, 청 황실은 언제나 과거 제도를 양면적으로 보았다. 청나라 후기로 갈수록 황제들은 과거 제도를 더욱 낮춰 보았는데 여기에는 과거 시험이 만주족이 아닌 한족에게 월등하게 유리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청나라 황제들의 행동은 그들 자신의 정치적 수명을 단축했다. 유일한 신분 상승 통로가 좁아지면서 사회적 이동성이 축소되었다. 분노가 넓고 깊게 퍼져나갔다. 비록 과거 급제 가능성이 확륙적으로 낮다고는 해도, 과거 시험을 통해 영웅적으로 입신양명한 평민들의 일화는 '대중의 아편'으로 기능해 왔다. 더는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게 되자 신화는 처참히 파괴되었고 좌절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283-5)


6장 털록의 저주


"1990년대 초, 중국을 주시하던 많은 이들이 천안문 사태로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덩샤오핑의 건강 악화와 함께 더욱 힘을 얻었다. 많은 이들이 중국의 정치적 안정은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같은 강력한 존재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 "중국공산당 시스템에는 당이 실패해도 그 충격을 흡수하는 강력한 안정 기반이 존재한다. 이러한 안정 기반은 중국인의 규범, 즉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중국인의 정신과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규범 중 하나는 '명제命題적 정당성axiomatic legitimacy'으로 설명할 수 있는 중국인들의 확고한 믿음이다. 명제적 정당성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를 사전 부여하며, 국가의 행위와는 별개로 분리된 경우가 많다. 명제적 정당성은 국가를 강력하게 보호하고 다양한 충격을 견딜 수 있게 한다."(292-3)


"중국의 반부패 캠페인을 예로 들어보자. 광범위한 반부패 캠페인의 한 가지 잠재적 단점은 중국공산당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재자는 그물에 걸린 관리들의 '충격과 공포'에 가까운 세부 사항들을 공개하여 반부패 캠페인의 이점을 보여주고 그 엄중함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비리가 드러나면 대중은 특정 관리가 아닌 시스템 전체의 부패가 선을 넘지 않았나 의심할 수 있다." "'시스템'을 '서로 연결된 계약들의 집합', 즉 인센티브와 규칙과 제약의 집합과 배열이 아닌, '사람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 덕분에 중국공산당은 생존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개념에서 시스템을 바꾼다는 것은 산수 계산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반부패 캠페인을 벌여서 10만 명의 부패 공무원이 숙청되면, 국가는 전체 명단에서 10만 명을 뺀 만큼 더 깨끗해진다. 100만 명의 공무원이 숙청되면 국가는 100만 명 만큼 더 깨끗해진다. 이는 (늪에서 대규모로 물을 빼낼 수 있는) 스트롱맨의 통치를 뒷받침한다."(297-9)


"털록의 저주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승계 과정에서 핵심 인물의 유인과 관련된다. 다른 하나는 정보, 더 정확하게는 후계자의 성격, 성향, 능력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의 부족과 관련된다." "후계자가 결정된 사람의 유인을 생각해 보자. 후계자는 〈자신이 빨리 독재자가 될수록 좋으며, 현직 독재자의 수명 단축이 본인의 즉위를 앞당길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된다〉고 판단한다. 독재자는 후계자의 이러한 생각을 잘 알고 있기에 필사적으로 위협을 걱정하게 된다. 후계자는 현직 독재자가 이러한 동기를 자신에게 뒤집어씌울지 의심하게 되므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여기서 안전한 방법은 무관심한 척하며 지켜보는 눈들이 안심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략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다. 후계자로 내정된 후보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퍼질 수도 있다. 독재 정권이 후계자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찍어낸다는 것은 털록이 지적한 두 번째 고질적인 문제이다."(315-6)


# 털록의 저주 : 독재 정권은 (선거 같은) 제도화된 승계 제도가 없기 때문에 부패하기 쉽고 혼란으로 퇴보하기 쉽다. 이러한 선천적 결함이 독재 체제의 본질에 내재해 있다는 의미에서 저자가 붙인 이름이다.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대표적인 승계 실패로는 류샤오치, 린뱌오, 후야오방(그리고 자오쯔양)의 사례가 있다.


"중국공산당 정치의 한 가지 특징이 황태자 문제를 증폭시킨다. 바로 지나치게 긴 후계자 양성 과정이다. 중국의 이선 지도 체제는 마오쩌둥이 사망(1976년)하기 약 20년 전인 1956년에 만들어졌다. 덩샤오핑 역시 사망(1997년)하기 거의 20년 전인 1980년대 초부터 승계 기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임신 기간이 길면 문제가 발생할 시간이 차고 넘친다. '레임덕'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도 한 가지 위험이다. 독재 체제에서는 레임덕의 조건이 명시되어 있지도, 법제화되어 있지도 않다. 현직 독재자가 레임덕에 들어갈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할 뿐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대기 기간을 최대한 길게 가져가면서 야심만만한 후계자 후보의 인내심을 시험할 유인이 너무나 많다. 이 역학 관계에는 또 다른 반전이 있다. 종종 황제와 황태자의 나이 차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용상에서 불과 몇 발짝 떨어져 있음에도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능력이 쇠약해진 뒤에야 앉을 수 있는 황태자의 머릿속을 상상해 보라."(322-3)


"털록은, 권위주의 정권은 승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 필연적으로 수명이 짧고 권력자 한 사람에 의해 통치가 좌우되며 정치적 혼돈으로 쉽게 부패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은 이 예측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중국공산당은 연이어 권력 승계에 실패했지만 체제 위기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중국이 털록의 저주를 억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길들인 데에는 네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첫째,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라는 두 거물의 카리스마와 기타 특이한 요인들이 후계 갈등의 여파를 억눌렀다. 둘째, 중국 군부가 후계 갈등의 주요 선동자가 아니었다. 셋째, 1980년대에 중국 정치가 온건 정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승계 관련 이해관계가 줄어들었다. 넷째, 덩샤오핑의 개혁으로 후계자 승계를 위한 규칙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시진핑 체제에서는 이러한 조건 중 일부가 상당히 약화되었다. 털록의 저주가 앞으로 중국 정치에 검은 구름을 드리울 수 있다."(326-7)


4부 기술Technology


7장 니덤 문제의 재구성


"1969년 출간한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조지프 니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왜 중국은 초기 기술 우위를 활용하지 못하고 독자적인 산업혁명을 시작하지 못했을까? 그는 길고 화려한 경력에 걸쳐 수많은 설명─중국에 과학적 사고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추정부터 봉건적 관료주의, 상업의 낙후에 이르기까지─을 제시했다. 니덤은 1430년대 이후 외국 지식의 흡수를 막은 관료주의적 통제를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가 수집한 데이터에서 주목할 만한 발견은 중국의 기술 발전이 단절된 시점이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명나라 때가 아니라 훨씬 이전 6세기였다는 사실이다. 해금 정책이 중국의 쇠퇴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나 쇠퇴를 촉발한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물론 명나라의 지배계급은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700여 년 전에 시작된 추세에 가속도가 붙어 탄생한 엉망진창이었다. 17세기 또는 18세기까지 중국은 산업화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343-4)


"니덤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많은 연구자가 종종 놓치고 잊어버리는 질문, 즉 중국이 애초에 어떻게 기술 분야에서 초기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까로 돌아가 보자. 니덤 문제는 분석의 축을 중국의 실패에 놓는다. 고대 중국의 엄청난 업적들은 종종 중국의 기술 우위가 후대 왕조에서 완전히 무너졌다는 부정을 통해 긍정된다." "중국의 쇠퇴를 반과학적이고 보수적인 유교 윤리 탓으로 돌리는 설명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유교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거두었던 고대 중국의 업적들은 해명할 수 있을까? 중국인의 타고난 창의력을 전제로 하는 설명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 방향은 정반대이다. 후대 중국의 쇠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창의성의 결과가 다양한 이유는 창의성을 허용하고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이 초기에 기술을 선도할 수 있었던 데에는 국가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어쩌면 독점적으로 작용했다고 추측한다."(345-8)


"더글러스 노스에 따르면 〈현대 기술의 잠재력 실현은 국가와 함께는 불가능하지만, 국가 없이도 불가능하다.〉 이는 전근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왕조 시대 중국은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기술을 지원했다. 대규모로 의학 및 농업 지식을 편찬하여 보급하고 기술 표준을 제정하였다. 또한 발명가들에게 금전적 보상과 승진이라는 직접 보상을 제공했다." "국가의 직접 지원은 중국의 초기 기술 우위를 설명할 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사후 지원은 종이나 지진계 같은 영향력이 큰 몇 가지 발명품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대량 발명은 설명할 수 없다." "고대 중국에서 발명의 씨앗을 뿌리는 데에는 국가의 간접 역할이 훨씬 더 중요했다. 중국 황실은 정부 기구에 상을 내렸고, 그 규모도 컸다. 한 가지 방법은 정부가 발명가들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가의 사전 지원 기능은 고대 문명들 가운데 가장 독특하며, 중국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진정한 원천이었다."(348-9)


"그러나 왕조 시대 중국의 기술 발전은 누적되지 못했다. 중국 발명가들은 앞선 시대의 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했다. 이전의 발명이 이후 발명의 밑거름이 되지 못했고, 개별적인 창의성의 분출이 결합해 창의력과 독창성의 다음 물결로 이어지지 못했다." "중국에서 비非축적 패턴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발명은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과학도, 상업적 발전과 시장경제도, (특허와 같은) 지식 창출과 보호의 제도화도 없는 진공 상태 말이다." "중국의 발명성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 정점을 찍었다. 일반적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왕조를 꼽으라면 당나라와 송나라다. 하지만 당나라와 송나라의 영광은 발명의 규모보다는 두 왕조의 중요성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당과 송은 위진남북조 시대나 그 이전의 전국 시대와 비교하면 보잘것없다. 당과 송은 나름대로 혁신적인 시대였을지 모르지만, 그 영광은 이전 시대가 남긴 잔영에 불과했다."(362-4)


"17세기는 지적, 정치적으로 억압적이었던 명나라의 종말과 서구의 과학 혁명이 맞물린 시기였기 때문에 니덤에게 편리한 타이밍이었을 수 있다. 니덤에게 과거 제도는 일부라도 과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면 과학과 양립할 수 있는 제도였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과거 제도가 후대 왕조들과 비교해 좀 더 유연하고 개방적인 형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상 당나라와 송나라는 이미 발명 곡선의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당나라와 송나라 사람들은 후대의 원, 명, 청 왕조보다 더 창의적이었지만 위진남북조 시대, 전국 시대에 비교하면 뒤처졌다. 데이터를 보다 직관적으로 해석하자면 중국은 과거 제도가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창의적이었다.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과거 시험 커리큘럼의 규모 확장과 제한적 범위는 추가적인 연쇄 효과를 낳았지만, 중국 기술 쇠퇴의 초기 촉발 요인은 과거 제도의 확립과 규모 확장에 수반된 광범위한 정치적, 인식적 변화로 인해 발생했다."(369-70)


"유럽에서는 정치적 분열, 민주주의, 시민사회, 시장경제가 과학 기술과 함께 발전하였고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며 선순환 구조를 끌어냈다. 왕조 시대 중국은 기술 격차의 반대편에서 경합성 효과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중국의 기술은 스스로 반전된 것이다." "조엘 모키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유럽과 중국의 진정한 차이점은, 중국에서는 통치자의 선호가 매우 중요했으나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럽에도 혁신과 무역을 싫어하는 통치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대륙 전체를 통제하지는 못했다. 통치자의 선호에 따라 경제의 무게 중심은 움직일 수도 있지만, 경제성장과 기술 혁신은 여전히 자금을 조달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6세기 이후 중국은 이러한 조건을 잃었다. 명나라의 해군력에 기반한 팍스 시니카를 상상하는 대신 〈중국이 6세기 이후에도 경합성 조건을 유지했다면 중국의 기술은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더 생산적인 접근 방식이다."(380-1)


# 경합성contestability : 어떤 대상에 대한 도전 또는 대체 가능함을 의미한다. 경제학에서는 낮은 비용으로 특정 산업이나 시장에 자유로운 진입과 퇴장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8장 정부 공화국


"〈기본적인 법치주의와 아주 원시적인 사상의 자유도 없는 독재 국가가 어떻게 그토록 많은 성취를 얻을 수 있었을까?〉" "개혁주의 중국공산당이 만들어낸 숨겨진 범위 조건들 중 하나는 바로 내가 〈학문적 세계화〉라고 부르는 연구 및 교육 분야의 국제 협력이다. 다른 범위 조건은 능력 있는 중국 기업가들이 중국공산당의 직접적인 감독을 벗어나 시장 기반 금융에 접근하고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홍콩은 이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니 했었다." "시진핑 치하에서 중국공산당의 이단적 모델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중국의 반서방 외교 정책 기조로 인해 서방과의 교육 및 기술 협력은 점점 더 압박을 받고 있으며, 홍콩의 자치권은 말살당하고 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많은 서방 연구자들이 열을 올렸던 논리, 즉 중국의 막강한 우위는 중국의 규모에서 온다는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다. 중국의 역사와 미래는 이 명제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393-8)


"내가 중국 시스템을 '정부 공화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중국에는 정부와 관련된 자금 지원의 이점은 있지만, 과학 공화국의 기본 요소라 할 수 있는 탐구의 자유와 협업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 대학은 정부의 엄격한 통제와 감독을 받으며, 정부가 운영에도 아주 세밀하게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 엄밀하게 말해서 모든 중국 대학은 관료제의 일부이다. 각 대학은 재정부나 외교부처럼 행정상의 위계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당서기가 대학 총장보다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교육부가 박사 과정 학생을 지도할 자격이 있는 교수진을 정하고 대학의 학위 수여 요건을 결정한다. 심지어 커리큘럼 개발에도 교육부의 검토와 승인이 요구된다. 국가는 정말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하나하나 관리하고 개입한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교육부는 모든 정치경제학 수업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가르칠 것을 의무화했을 뿐 아니라 어떤 중국어 판본을 써야 하는지까지 명시하고 있다고 한다."(416-8)


"정부 공화국의 거대함 그 자체 덕분에 많은 연구 프로젝트가 자금 지원을 받았고 양量의 혁명이 일어났다. 단편적인 인센티브 프로그램에서 교수의 보수와 논문의 수는 정비례한다. 이 보상 제도의 본래 의도는 관료인 심사자의 결정을 객관적인 지표에 묶어 재량권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단순한 갯수 판단은 학술지에 대한 명시적인 존중이자 동료 심사에 대한 암묵적인 존중이다. 중국의 교육 개혁가들은 관료 권력을 일부나마 제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 방식을 구상했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중국의 지식 생산은 질이 아닌 양에 압도적으로 치우쳐 있다고 나타났다. 이 기간 중국 과학자들은 206만 건의 논문을 발표하여 미국(380만 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논문의 평균 인용횟수는 9.4회로 미국 과학자들이 발표한 논문의 17.47회에 비해 훨씬 낮았다. 분석에 포함된 10개 국가 중 중국은 평균 인용횟수에서 꼴찌였다."(421-2)


"정부 공화국은 규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에 더해 해외와의 협력은 중국 과학과 기술의 핵심적인 원동력이다. 학계의 국제 협력은 작동 중인 비교우위의 한 버전이다. 중국은 범위보다는 규모에서 상대적으로 우수하다. 기본적인 경제 논리를 따른다면 중국은 규모 확장에 특화하면서 글로벌 시장을 통해 범위 조건과도 거리를 좁혀나갈 것이다. 그러나 자본과 노동 같은 자질적 요소와 달리 중국 학계의 범위 조건은 정책 입안자들의 세심하게 의도된 결정에서 기인한다." "중국 공산당은 과학과 기술이라는 '다르게 생각하기'의 특정한 결과물은 원하지만, 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은 혐오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의 대학은 당의 통제 수단이다. 대학은 중국의 중요한 인구 집단의 사상과 행동의 자유를 통제하고 억압한다. 바로 청년층이다. 대학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는 순간 중국공산당의 즉각적인 결함, 즉 부정적인 외부효과가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423-4)


5부 EAST 모델의 미래


9장 시진핑의 공산당


"시진핑은 기존 체제에 두 가지 관점에서 큰 충격을 가했다. 첫 번째로, 천안문 사태 이후 당 지도자들이 일부 분야(농촌 금융)에서는 퇴보했지만 다른 분야(민영화와 세계화)에서는 개혁을 이루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시진핑은 외교 정책부터 국내 정치, 소셜 미디어, 경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전면적인 변화를 도입했으며, 그 방향성은 일관적으로 강경주의 일색이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의 지도자들은 정치적 범위 조건을 약화했지만 경제 및 사회적 범위 조건은 그 지평을 넓혀나갔다. 시진핑 체제에서는 그 어떤 범위 조건도 남지 않았다. 두 번때는 시진핑의 행동 속도이다. 중국은 대체로 점진적이고 누적되는 접근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알려져 있다. 시진핑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반부패 캠페인은 수백만 명의 공무원을 끌어내렸고, 부동산, 게임, 사교육 서비스, 핀테크에 대한 동시다발로 대규모 단속을 실시해 실물 경제에서 수조 달러의 부와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증발시켰다."(444)


"시진핑의 반부패 캠페인은 이제 10년째에 들어서고 있다. 더는 캠페인이 아니라 '영구 혁명permanent revolution'과 같이 중국공산당이 만들어 낸 모순적인 개념 중 하나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부패의 정치적 도구화는 자기 영속적인 역학을 만들어 낸다. 정치적 경쟁자를 표적으로 삼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 경쟁을 촉발하고 따라서 반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부패가 만연하므로 시진핑의 미래 경쟁자는 자신의 정치적 동맹자들을 부패 혐의로 고발하여 우위를 점할지도 모른다. 시진핑의 전임자들이 반부패 캠페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시행할 때에는 마치 외과 수술과도 같이 정확하게 특정 부위만 도려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적 동기에 의한 반부패 드라이브는 숙청과 재숙청의 끊임없는 순환의 함정을 파고, 이번 숙청은 다음 숙청을 위한 씨앗을 뿌린다. 이러한 불안정한 환경에서는 가만히 있으면 도전을 받고, 가만히 있지 않아도 도전을 불러일으킨다."(451-3)


"중국은 빠르게 인격 통치로 빠져들고 있다. 수잔 셔크가 주목한 현상은 주요 관리들에게 개인적으로 충성 서약을 요구한 마오쩌둥 시대 관행의 부활과 중앙위원회가 차기 지도자들을 추천하는 비공식 '투표'의 폐지다." "인격 통치의 철칙은 일관성과 무작위성 없이는 규모의 확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에는 비뚤어진 유인이 넘쳐나며, 부하직원은 시민은 물론 자신의 상사를 대할 때에도 불투명하게 행동할 동기가 다분하다. 그리하여 제임스 스콧이 '가독성 문제legibility problem'라고 이름 붙인 현상이 발생한다. 시스템은 아부하는 자들을 선호하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이중화법, 전략적 게임, 계산된 신호들을 용인한다. 정보의 노이즈 비율이 올라간다. 린뱌오처럼 개인 일기장에서는 지도자(여기에서는 마오쩌둥)를 경멸하나 공개적으로는 그를 열렬히 찬양하는 이들이 더 많아진다.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말하는 후야오방은 줄어든다. 시스템의 질이 나빠진다."(454-6)


"절대적 소득 증가는 정치적 안정에 매우 중요하다. 경기 침체 상황에서 가계 부문을 달래는─그리하여 가계가 여전히 정치적으로 고분고분하게끔 관리하는─유일한 방법은 가계 부문에 유리한 소득 변화를 설계하는 것이다. 절대적 소득 증가라는 카드는 더는 사용할 수 없다. 감세라는 선택지도 있지만, 중국 정부는 자신들의 소득이라면 놀라울 정도로 양보가 없다. 그렇다면 이 시나리오에서 취약해지는 것은 자본가들이다. 시진핑이 중국 자본가들에게 수모를 주고 대규모 기부금을 받아내서 3차 소득 재분배를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 이른바 '공동부유共同富裕'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약탈적 전술이다." "첨단 기술 기업들이 약속한 대규모 기부금은 기업가 개인의 재산이 아닌 회사 자금, 즉 투자자의 돈으로 출연하는 것이다. 당연히 기부금 발표 이후 이들 기업의 주가는 하락했고, 이는 첨단 기술 부문의 해고로 이어져 전문 노동력의 소득 지위에 악영향을 미쳤다."(485-6)


10장 EAST 모델을 깨고 나오기?


"중국공산당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은 잊어버리는 게 좋다. '만리방화벽'을 우회하는 VPN을 통해 정치 관련 정보를 검색할 수 있어도, 중국 젊은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전 세계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기꺼이 기술을 받아들이고, 기술의 태생적 자유주의 편향성에도 당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신 조지 오웰의 세상을 더 잘 구현하기 위해 맞춤형 감시 기술을 활용한다. 디지털 독재 앞에 KGB와 슈타지는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다. 기술이 모든 사람을 위한 평평한 세상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독재자들을 위한 평평한 세상은 만들어냈다." "기술 자체는 사회나 정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기술은 정치의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정치적 상황을 교란하기보다는 강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독재 정권은 경제와 기술의 힘에 맞서 정치를 지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정치적 변화를 틀어막는 데에 대체로 성공했다."(504-6)


"중국인과 서구 사이에는 깊은 가치관의 골이 존재한다. 중국인은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을 옹호하는 권리'라는 공리주의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서방에서 권리란, 정치적 반체제 인사 등 권리를 박탈당한 소수가 받는 침해로부터의 보호를 말한다. 이러한 권리 개념은 중국인들에게는 널리 공감을 얻을 수 없다. 인종적으로 동질적인 사회와 융합을 중시하는 정치 문화에서는 인구의 하위 집단이 고유한 불변적 특성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중국인과 관여하는 한 가지 방법은 민주주의에 대한 성과 기반 논리에 호소하는 것이다. 성과 기반 논리는 중국공산당이 주로 사용하는 논리이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실과 증거에 기반한 민주주의 담론을 이끌어내야 한다. 경제성장에 있어 민주주의가 독재 국가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우월하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독재 국가가 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 역시 없다."(523-5)


"중국식 시스템은 분명히 효율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 시스템은 하나의 패키지로 고려해야 한다." "동아시아의 성공을 독재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아 남한, 대만, 싱가포르의 독재 정권과 GDP 성장을 연결 짓는 주장도 있다. 선택 편향을 제거하고 보면, 동아시아 독재 정권들의 성공 사례 뒤에는 각각 또 다른 동아시아 독재 정권의 실패 사례가 있다. 대만은 풍요로워졌지만, 마오쩌둥의 중국은 그렇지 못했다. 남한은 빠르게 발전했지만, 북한은 허우적거렸다. 싱가포르의 강력한 1인 통치는 성공했지만, 자유방임주의였던 홍콩도 마찬가지였다. 1989년 이후 새로운 독재 체제가 도입된 중국이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리버럴했던 1980년대의 중국이 훨씬 더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동아시아의 경험을 종합해 볼 때 독재의 우월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남한과 같이 독재의 수위가 낮은 정권이 북한과 같은 극단적인 독재 정권보다 나은 성과를 거두었다."(529-31)


"1990년대에 등장한 '아시아적 가치' 학파의 핵심 주장은 법치, 민주주의, 언론의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서구 시스템이 유교 이념에 뿌리를 둔 국가에는 적합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에는 결함이 있다. 서구적 가치에는 '유전적'인 요소가 없다." "우리가 타인이 발명한 아이디어를 사용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 조상들이 만들어 낸 가치 중 일부가 끔찍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에서 전족을 옹호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이디어의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아이디어가 옳은지 그른지, 그리고 이익을 가져오는지이다." "이때 우리에게는 자기 의견을 말할 자유, 비판하고 비판받을 자유, 토론할 자유, 즉 완전한 민주주의는 아니더라도 '토론 민주주의'라는 자유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아시아의 가치를 긍정하기 위해 서구의 가치 중 일부, 즉 의사 표현의 자유와 토론을 긍정해야 한며, 그러한 가치들을 거부한다면 유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5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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