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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님의 서재
  • 마포주공아파트
  • 박철수
  • 22,500원 (10%1,250)
  • 2024-04-10
  • : 1,936

서문


"'조국 근대화를 지향한 국가 재건'과 '현대적인 집단 공동생활 양식을 위한 생활혁명'은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단지화 전략을 통해 생산되는 〈아파트 단지는 일반 시가지 주택지보다 공급하는 주택 수도 많고 환경 수준도 높으니 그야말로 환상적인 개발 방식〉이었다. 정부와 주택공사 관리자들은 이 효율성에 대단히 만족했을 것이다. 단지 내 도로, 공원, 놀이터 등은 단지 입주자들에게 맡겨버리고 정부는 단지 바깥의 간선도로 등 최소한의 기반시설만 준비하면 끝이었다. 마포주공아파트는 '단지화 전략을 통해 입주자들의 관리, 안전, 생활편의 등 도시의 공공기능을 사적 비용과 수단을 통해 조달하도록 함으로써 개발 비용을 사회에 부담하는 행위'의 출발점이다. 한국 아파트단지의 전범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주택 공급은 정확히 이 방식으로 반복된다. 1인당 국민소득과 국가예산이 수십 배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는 단지 내 모든 것을 입주자에게 부담시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16-7)


1 전사(前史): 프롤로그


"5·16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군부가 밀어붙인 대표적 국가 프로젝트가 마포주공아파트다. 〈군부는 자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기성 정치인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스스로 혁명이라 부른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또 2년 뒤 약속한 정권 이양을 번복하고 계속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시적인 성과를 제시할 필요가 절실했다. (···) 1961년 5월 20일부터 1963년 12월 17일까지 2년 6개월가량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군부가 완성한 프로젝트는 국립원호원, 새나라자동차 공장, 워커힐 호텔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일반 시민의 눈 바깥에 있는 것들이었다.〉 군인들은 빵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민감하게 포착했고 『사상계』의 근대화론과 경합시켜 그것을 정치적 수사로 전유했다. 이런 맥락에서 공장이나 호텔과 달리 시민들의 일상과 직접 관계하는 주거 프로젝트였던 마포주공아파트 1단계 준공은 대내외적으로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27-9)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인 1962~1966년 사이 주택투자는 국민총생산의 1.7퍼센트에 불과했고(선진국의 경우 6~8퍼센트), 전체 투자 중 공공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도 8.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토건국가로 불릴 만큼 건설산업 비중이 커진 것은 나중의 일이다. 1962년의 산업별 투자계획만 보더라도, 계획 기간 중 2차 산업으로 분류된 건설업은 정부(공공)와 민간의 투자 비중이 각각 36.6퍼센트와 63.4퍼센트였고, 3차 산업으로 분류된 주택 부문에서는 정부와 민간이 각각 16.9퍼센트와 83.1퍼센트를 차지했다. 경제개발 정책 초기부터 주택 공급은 정부의 1차적인 목표가 아니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민간 중심으로 건설산업을 육성해 주택을 공급한다는 것이 정책의 기본 방향이었다. 공공주택 보급은 처음부터 고려 사항이 아니었고, 융자를 지원해 민간 주도로 주택을 공급하고자 했다. 이는 국민이 스스로 알아서 자기 집을 마련하라는 신호였기에 이후 투기 자본이 쉽게 유입되는 길을 열어주게 된다."(37-9)


2 근대 산업시설의 태동지: 도화동 연와공장


"'도화동 연와공장'으로 불린 벽돌공장이 가동을 시작한 것은 1907년이었다. 다음 해인 1908년 서대문에 '경성감옥'이 조성됐는데, 일제의 조선 강탈 이후 그 시설도 얼마 지나지 않아 포화상태에 이르자 조선총독부는 1912년에 마포구 공덕리 105번지에 새로운 '경성감옥'을 만들고 가까운 곳에 있던 도화동 벽돌공장을 공덕리 경성감옥의 노역장으로 삼았다." "각종 교정시설은 법무부 관할이다. 일제강점기 형무소 노역장은 해방 이후 미군정청 사법부를 거쳐 대한민국 법무부로 이양됐다. 마포주공아파트가 들어서게 될 넓은 부지와 시설 일체는 해방 후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법무부 관할 자산이 됐다. 1957년까지 벽돌 공장이 운영되었으나 생산을 중단한 뒤에는 거의 버려진 채소밭이 되어 있었다. 마포교도소가 안양교도소로 통합, 이전되면서 별다른 용도 없이 법무부 관할 국유자산으로 남아 있던 것을 주택영단이 마포아파트 건설 부지로 매입하기에 이른다."(51-3)


# 대한주택영단 : 대한주택공사의 전신


"'도화정 6-1'의 소유자는 남산정 3정목에 거처를 둔 송종헌으로, 정미칠적(丁未七敵), 경술국적(庚戌國敵) 등에 이름을 올린 대표적 친일 인사 송병준의 아들이다. 일진회를 이끌며 일제의 강제병합에 앞장섰던 송병준은 일제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아 5등작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자작을 받았고 중추원 고문을 맡았는데, 1920년 백작으로 승작했다. 그의 사후 송종헌은 아버지의 백작 작위를 승계했다. 대정 9년인 1921년 8월 21일에 송종헌 소유의 '도화정 6-1'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산정 3정목 31번지에 주소를 둔 그의 아버지 송병준에게 소유권이 이전됐다. 송병준 소유가 된 도화정 6-1은 다시 몇 차례 사인 간의 소유권 이전이 있었고, 1933년 11월 25일에 국유지가 되었다. 이후 특별한 변동이 없다가 1971년 11월 19일 대한주택공사로 소유권이 변경되었다. 1972년 5월 26일에는 면적이 1만 4,121평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마포주공아파트 단지의 면적 1만 4,141평과 거의 같은 크기이다."(58)


3 국가 프로젝트의 이데올로기


"발전국가와 건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만난다. 1960년대 한국에서 미래를 현재로 호출하는 건축의 이데올로기와 발전국가의 계획은 유례없이 공명했다. 장동운의 시범아파트는 국가 주도 발전 전략을 추진하던 신생 독립국이자 후발 국가의 이데올로기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단지의 규모와 이를 채울 주거동의 높이'가 '시범'의 가늠자였다. 10층짜리 주거동 11개가 울타리를 두른 듯한 부지에 빽빽하게 들어찬 아파트단지의 모습이 실제 공급할 물량보다 더 중요했다. 아파트의 점유율이 0.77퍼센트에 불과했던 1970년에서 10년쯤 더 거슬러 올라간 1961년에 중앙집중식 난방에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아파트를 입주자들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오르고 내리는 장면은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 흐릿한 미래 풍경이었다. 어떤 면에서도 당대에 불가능해 보였던 예외, '각종 첨단 설비와 장치'는 이데올로기를 전하는 매체였다. 이는 〈근대문명의 혜택〉이었고, 체제 홍보와 대북선전의 장치였다."(69-71)


"대한주택영단 주택문제연구소 단지연구실장을 역임한 박병주는 1967년 발표한 글에서 마포의 임대아파트가 분양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금의 현실에서 임대아파트가 사라져도 괜찮은지 탄식에 가까운 질문을 던진다. 그는 마포아파트가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장점으로 '공영임대아파트'라는 사실을 꼽았다. '공영주택 건설 비용에 정부의 정책 자금이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대단위 주택지에서 (공공이) 먼저 몇 곳을 골라 집을 지은 뒤 이를 모범적 선례로 삼도록 민간을 지도하는 의미'가 '시범'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소수에 불과했다. 마포아파트 건립을 추진한 이들에게 임대냐 분양이냐는 부차적 문제였고, 이 결정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규모, 이 규모가 선사하는 새로운 도시 경관, 즉 발전과 등치되길 원한 혁명의 이미지였다."(83)


4 마포아파트의 이데올로기


"도시를 수평으로 끊임없이 확장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단독주택 보급 정책은 교통난과 공원 침탈 등의 문제를 일으키기에, 대안은 '도시의 입체화'라는 생각이 1960년대 서구와 일본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단순히 고층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도시로의 전환을 꾀했다." "대한주택공사 기술이사 홍사천은 고층화에도 난점은 있다면서 〈무작정으로 고층화된다면 미국의 도시 같은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상적인 것은 소규모 단지계획을 지양하고 대단지로 구성하듯이 도심부의 한 큰 구역을 서로 연관 있는 한 단위로 고층화시키는 '슈퍼블록 시스템'인데, 명동이면 명동 한 구역을 종합적으로 계획해 나가는 것인데, 앞날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슈퍼블록에 의한 입체도시 구현, 그리고 대규모 단지화 전략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이 슈퍼블록 중심의 입체적인 개발 계획은 이후 본격화되는 도심 재개발의 기본 방침으로 자리 잡는다."(101-6)


"또 홍사천은 다른 글에서 주거지의 이상은 지구 전체를 계획하는 것이라면서, 〈지구마다 중앙에 초등학교가 있고, 점포가 있고, 통행인과 자동차도로가 분리되어 어린이나 어른이나 모두 즐거운 '커뮤니티' 생활을 함으로써 주택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대지의 활용이나 수용 인구 면에서 마포아파트가 월등히 효율적인 계획이라는 주장이자 결론인 동시에 향후 대단지 개발 및 재개발로 아파트를 공급하는 정책을 예견하는 주장이었다." "건축가 강명구는 자신이 마포아파트 건설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혁명정부의 강력한 정책 반영으로 주택공사의 영단을 얻어 꿈에만 그리던 고층주택의 실현에 이르게 된 것'이며, 앞으로도 '한층 강력한 주택 정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한층 강력한 주택 정책'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마포아파트 설계와 건설에 참여한 경험은 기술 관료와 건축가 들의 욕망을 더 크게 부풀렸다."(106-7)


5 총력 설계 체제가 만든 3가지 주거동


"최종 채택된 Y자형 주거동은 1962년 8월 31일부터 11월 28일까지 공사가 진행됐으며, 一자형 주거동은 1964년 11월 7일 착공해 1965년 5월 12일 준공했다." "각종 준공보고서를 통해 1964년 11월 7일 착공해 1965년 5월 12일 모두 준공한 것으로 확인한 一자형 주거동은 최초 설계 과정에서 채택한 편복도형 진입 방식과는 달리 모두 계단실형으로 변경됐다. 1차 준공한 Y자형 주거동 6동을 전제조건으로 둔 상태에서 주출입구 좌우에 1동씩을 배치하고 부출입구 왼편에 1동, 그리고 Y자형 주거동 뒤쪽 여유공간을 이용해 다시 1동을 추가로 배치함으로써 10개 주거동으로 이루어진 마포아파트의 전체가 완성됐다. 처음부터 분양을 염두에 두었던 一자형 주거동은 1964년 3월 공고를 시작으로 분양에 나섰으며, 임대아파트로 구상했던 Y자형 주거동은 애초엔 임대를 했다가 1967년 8월부터 분양 전환 절차에 돌입하며 입주자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198-9)


6 USOM의 반대와 설계변경


"10층 주거동 11개로 구성한 마포주공아파트 최초 설계는 1961년 9월 마무리됐다. 최초 구상한 10층 높이의 아파트 주거동이 6층으로 변경된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이유를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대한주택공사는 미국의 반대와 함께 당시의 전력 사정과 기름 부족, 열악한 상수도 현황 등을 꼽았다. 당시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USOM(미국경제협조처)은 아파트보다 난민구호주택을 더 많이 지을 것을 강력하게 원했고, 언론에서도 전기와 유류 사정을 들어 중앙난방과 엘리베이터 설치에 대해 격렬하게 비난했다. 서울시도 마실 물이 귀한 판에 무슨 수세식 화장실이냐며 반대에 가세했다. 여기에 덧붙여 상습 침수지였던 부지의 지반이 견고하지 못해 10층이나 되는 육중한 건물이 들어서기 어렵다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있었다. 6층으로 변경되면서 중앙난방도 개별 연탄보일러로 바뀌었다. 이 반대 의견 가운데 군사 정부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일까? 미국이다."(216-9)


"1961년 11월 15일 USOM은 대한주택영단과 Y자형 주거동 6개로 이루어진 1단계 임대아파트에 대해 설계협의를 한 바 있다. 그리고 그 협의 결과를 11월 22일에 문서로 만들어 회람했다." "USOM의 검토 의견은 점잖은 외교적 형식을 취했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설계 자체가 모든 면에서 미흡하다고 평가하며 통합적 대안 마련이 우선이라면서 대한주택영단의 마포아파트 프로젝트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런 사업에 미국이 구체적인 지원을 하거나 힘을 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이상을 무리해서 실현시켜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반면, 민정이양 약속 기한을 얼마 앞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인들에게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해야 하는 사업이 마포아파트였다. 다가올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와 제6대 국회의원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혁명의 가시화를 위해 도화동 연와공장은 마포아파트단지로 변모해야만 했다."(219, 229-31)


7 임대에서 분양으로, 한국 주택 공급의 운명


"마포주공아파트가 다시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기 시작하고 국고 손실 논란까지 일며 대한주택공사가 시민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은 것은 임대아파트 450세대를 분양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이 알려진 1967년 4월이다. 대한주택공사의 계획은 1967년 8월부터 11월 30일까지 Y자형 주거동 450호 모두를 임대에서 분양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주된 이유는 대한주택공사의 자금난이었다." "임대로 입주했으나 갑자기 분양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입주자들에게 대단히 큰 경제적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마포아파트분양대책투쟁위원회'가 제출한 진정서에 담긴 '진정 취지' 3가지는 곧 임차인들의 현실적 요구였다. '임대아파트의 분양 전환에 있어 ①분양가 산정은 「공영주택법」을 따라야 하며, ②현재의 융자금은 당연하게도 증액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③분양가에서 융자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도 한꺼번에 낼 형편이 못 되니 이를 여러 차례 나눠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246-7)


"결국 대한주택공사는 관할 부처인 건설부와 협의를 거쳐 공사의 책임 아래 융자금 증액과 입주금 분납 등을 조정하라는 방침을 받아냈다." "이렇게 마련한 대책을 의결한 것은 1967년 11월 18일 개최한 제63차 이사회였다. 이사회 안건은 「마포아파트 분양 방안」 단 한 건이었다. 이사회가 해당 안건을 만장일치로 의결함으로써 마포아파트 Y자형 임대용 아파트 450호에 대한 분양 전환 논란은 일단락됐다. 마포아파트분양대책투쟁위원회 입장에서는 「공영주택법」과 「공영주택법시행령」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임대에서 분양으로 전환되면서 불거진 갈등은 결국 정부가 공급하는 주택의 법적 규정과 성격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지난 세기 한국에서 공공이 저소득층을 위한 공동주택을 공급하고 관리한 시기는 무척 짧았다. 주택은 개인이 구입해야 하는 상품이라는 인식은 굳어졌고, 이후 임대아파트는 분양 아파트단지의 틈바구니 속에서 저소득층의 남루한 집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254, 258)


8 마포주공아파트의 전방위 파급 효과


"경제개발5개년계획 제1차와 제2차의 주택 부문 정책에서 가장 달라진 점은 자본을 충당하는 방법이었다. 경제개발을 위한 공감대는 형성돼 있었지만 여전히 빈곤했고 미국의 원조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조와 차관에 의존하던 자본 동원 방식은 변화가 불가피했다. 민간 자본을 동원하기 위해 여러 제도와 정책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졌다." "1967년 3월 30일에는 「한국주택금고법」이 제정, 시행된다. 한국주택은행이 출현하는 배경이 된 이 법률의 취지는 민간 자본과 주택기금 회전 자금 등으로 주택 정책 자금을 조성하고, 이를 증대시켜 서민주택 금융으로 운용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주택 공급과 주택지 개발을 위한 자금 융자와 관리, 주택채권과 주택복권의 발행, 주택예금과 주택부금 관리 등이 「한국주택금고법」에 의해 이루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법률의 전면 개정을 통해 한국주택금고는 한국주택은행으로 재탄생했다. 1969년의 일이었다."(265-7)


"1966년 8월 3일 법률 제1922호로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이 「도시계획법」에서 분리되며 새롭게 제정됐다. 「토지구획정리사업법」 제정은 민간의 택지 수요를 충족시키고, 대도시의 경우에는 도심 재정비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곡 30만 지구, 개봉 60만 지구(1~2지구 포함), 대구 수성 주거단지와 서울 한남동 주택단지 등은 1967년 5월 「토지구획정리사업법시행령」 제정 이후 대한주택공사가 시행 주체가 되어 개발된 대표적인 대규모 주택지구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진행된 영동1지구와 그 뒤를 이은 영동2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오늘날 강남을 탄생시킨 밑거름이 된다. 1973년부터 영동-잠실지구를 대상으로 대규모 주택 건설이 추진된 것도 모두 토지구획정리사업 덕에 가능했으며, 서울 동쪽의 대단위 아파트단지 조성사업인 잠실대단위아파트지구는 대한주택공사가 꼽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의 대표적 사례였다."(290-2)


"토지구획정리사업은 토지 소유자들의 소유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구획정리를 추진하고, 사업이 완료된 뒤에 원래의 토지 소유 비율에 따라 구획 정리된 토지를 돌려주는(換地) 방식이다. 따라서 원래의 토지 소유자가 여럿이면 사업이 마무리된 뒤에도 대지가 여러 개의 소규모 필지로 나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잠실지구 개발에서는 아예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을 일부 개정해 체비지만으로도 대규모 부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잠실지구에 대단위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980년 12월 31일 제정된 「택지개발촉진법」 시행 전까지 토지구획정리사업은 택지를 정형으로 개발하거나 대단위 주택지를 조성해 대규모 단지식 아파트를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법적 수단이었다. 공장터였던 곳에서 처음 시도된 단지식 아파트의 모델이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마련된 대형 택지와 결합하면서 한국의 보편적 대단위 아파트단지 만들기의 템플릿이 되었다."(292-4)


# 체비지(替費地) : 부정형의 농지나 대지를 반듯하게 만드는 토지구획정리사업에 드는 직간접의 비용을 땅으로 부담하는 것. 부정형의 농지 100평을 반듯하게 한 뒤 75평의 농지를 되돌려받았다면 체비지는 25평이다.


9 마포에서 잠실까지: K-Housing Model 완성


"한강아파트지구와 반포를 거쳐 자족적인 단지라는 이상과 근린주구론은 잠실에서 거의 온전한 형태로 구현된다. 잠실아파트지구는 단지화 전략의 최종 목적지였다. 각 아파트단지는 도시계획도로로 둘러싸여 완벽한 공간적 완결을 추구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주택건설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이자 '주택 건설의 새로운 장을 이룩한 대역사'라 자평한 잠실주공아파트단지는 심각한 쟁점을 던진 문제적 사례가 되기도 한다. 단지화 전략의 사회적 결과인 '단지의 폐쇄성' 때문이다. 잠실지구 아파트단지 이후 가구(街區, 블록 혹은 단지)를 계획 단위로 하는 생활권계획은 강고한 원리로 자리 잡았다. 이미 이런 생각이 사업시행자들의 마음속에 각인됐던 탓인지 1975년 2월 6일 기공식 현장 무대에 크게 써 붙인 글귀는 흥미롭게도 아파트단지가 아니라 단지아파트였다. 각 블록은 공공 공간과의 접점을 잃은 채 폐쇄적 공간이 되어 인접 가로에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았고 공공 공간은 황폐화 경향을 보였다."(320, 325)


# 근린주구론(近隣住區論)

1. 규모 : (인구밀도를 고려하여) 초등학교 1개가 들어갈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

2. 경계 : 단지 외곽은 자동차 통행이 자유로운 간선도로와 면해야 한다.

3. 오픈 스페이스 : 이웃주민들과 친분을 나눌 수 있는 휴게공간을 가진다.

4. 부대시설 : 주민공동시설은 가급적 한 곳에 집중되어야 하며, 도보거리에 위치해야 한다.

5. 상가 : 근린주구와 이어지는 외부에 충분한 규모로 조성해야 한다.

6. 내부가로망 : 내부 도로는 외곽의 자동자 전용도로와 연결되어야 하며, 내부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통과 교통은 금지한다.


"또 다른 문제는 15층의 탑상형과 판상형 주거동만으로 조성한 잠실5단지가 이후 고층아파트단지의 전범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재개발이 완성된 지 오래인 1~4단지의 현재 모습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모든 주민공동시설이나 편의시설을 단지의 울타리 안에 충분히 갖춤으로써 단지화 전략은 완벽에 가깝게 실현되었다. 마포주공아파트 초기안의 10층 Y자형과 一자형은 각각 15층 탑상형과 판상형 아파트로 잠실에서 재현된다. 시범아파트로 시작한 여정은 15년여 만에 한국형 아파트단지의 전형으로 완성된다."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20세기 한국이 만들어낸 가장 독창적인 산물이자 매개체이자 상징이며, 한국 현대성의 한 척도이자 전형이라는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 이는 드물 것이다. 〈K-하우징 모델〉로 불러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1960년대 초 국가 프로젝트로서 '아파트 주택의 성패를 가릴 모형'으로 등장한 마포주공아파트는 이로써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325, 3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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