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순수한 의미에서의 이타적 동기의 발로에는 의식이 관여하므로 이는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이기적 동기와 달리 우리의 뇌리에 남는다. 그리고 마음 이론을 통해 우리는 타인들의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에 대해 분명히 이타적인 동기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일단 좋게 보이는 행동에 대해 순수한 동기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인데, 이는 그만큼 본인의 마음속에 있는 이타성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이 낭만주의적 환상 정도로 끝난다면 다행이다. 매우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자연적, 생물학적 개체로서 우리 인간이 지닌 본연의 이기성에 대한 냉철한 성찰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이기적 유전자만으로 인간의 문화와 그 안에서 인간이 체득하고 드러내는 이타적인 모습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고, 모든 것이 유전자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인 유전자로 인해 발생하는 이기적인 행위까지 부정하거나 간과할 수는 없다."(14-5)
1장 가정: 사랑이라는 자기 기만
"1859년,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주어진 환경에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자연선택 이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유전학에 대한 지식이 없던 당시에는 그 이론만으로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행위를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1964년에 발표된 윌리엄 해밀턴의 포괄 적합도inclusive fitness 이론은 이 문제를 유전학과 수학으로 풀어낸 것이었다. '포괄 적합도'란 개체 자신의 적합도뿐 아니라 그 개체가 유전자를 공유하는 혈연들의 적합도를 그 유전학적 근친도만큼의 비율로 포함해 합한 것을 말한다. 즉, 자기 자신을 1이라고 할 때 자식이나 형제들의 경우 각각 2분의 1로 계산한 적합도의 총합이 포괄 적합도이며, 모든 개체는 이렇게 계산되는 양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이 이론의 요지다. 전설적인 진화생물학자 존 홀데인이 〈형제 1명을 위해서는 죽을 수 없지만 2명 이상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고, 사촌이면 8명 이상이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이를 수학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26-7)
"그런데 해밀턴의 이론을 조금 더 주의해 살펴보면, 엄밀하게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간의 유성생식은 유전학적으로 다른 남녀가 만나 이루어지므로, 부모와 자식 간의 근친도는 0.5에 불과하다." "이러한 부모-자식 갈등은 자식이 태어나기 전부터 표출된다. 임신 중의 태아는 산모로부터 최대한의 영양분을 받으려고 한다. 태아도 당연히 포도당을 필요로 하는데, 이때 태아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포도당을 빼앗아 오기 위해 어머니의 인슐리 작용을 방해하는 물질을 분비한다. 흥미롭게도, 인슐린과 닮은 형태의 'IGF2'라고 불리는 이 단백질은 '유전체 각인'이라는 기작에 의해 오직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염색체에서만 만들어진다." "산모는 이에 대항해 인슐린을 더 많이 분비해 자신의 세포들로 포도당을 유입시키려고 하고, 태아는 IGF2와 같은 물질을 더 분비해 어머니의 인슐린을 방해하려는 줄다리기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바로 임신성 당뇨다."(29-30)
"우리 몸을 구성하는 체세포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온 유전자를 한 쌍씩 가지고 있지만, 정자나 난자와 같은 생식세포를 만들 때는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수정이 이루어졌을 때 한 쌍이라는 정상적인 개수를 유지할 수 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유전자 재조합이 일어난다." "이것이 엄청난 진화적 이점인 이유는 이를 통해 여러 상황 속에서 하나의 후손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MHC는 우리 몸에 침투한 병원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항원들과 결합해 그것들을 면역세포들에게 제시함으로써,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사람은 저마다 다른 MHC 변이를 가지고 있다. 그 변이의 형태에 따라 보다 잘 결합할 수 있는 항원의 종류, 즉 더 잘 대응할 수 있는 병원균의 종류가 다른 것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MHC라는 유전자의 변이에 따라 짝짓기 상대나 배우자를 선택한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겠지만, 이는 MHC가 페로몬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35-7)
# MHC : 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
"한편 《네이처 유전학》에 발표된 실험에서 한 가지 놀라운 점이 발견되었는데, 상대의 MHC로부터 근친도를 판별할 때 자신이 가진 MHC 가운데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변이를 기준으로 알아낸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경우에는 자신과 살고 있는 어머니가 일반적으로 자신을 실제로 낳아준 생물학적 어머니일 테니, 어머니의 그 익숙한 체취가 감지되면 상대가 근친임을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의 경우에는 함께 살고 있는 아버지가 자신의 유전학적 아버지일 가능성이 적다. 유전학적으로 더 우수한 수컷의 아기를 낳아 양육에 더 헌신적인 수컷으로 하여금 키우도록 하는 것은 사람을 비롯한 많은 동물 암컷들이 가지고 있는 번식 전략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아버지의 경우에는 함께 살고 있는 아버지의 체취에 대한 후각적 기준 대신 유전학적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MHC 유전자를 기준으로 상대가 근친관계인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아주 냉정하고 교묘한 진화적 계산이다."(38)
"유전자는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신경전달물질이나 페로몬과 같은 화학물질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짝짓기를 하도록 충동할 뿐 아니라, 심지어 유전적 조성에 따라 상대를 선별적으로 선택하게끔 유도한다. 다시 말해, 진화적 관점에서 결혼이란 자기 유전자의 50퍼센트를 후손에게 남기고 최대한 잘 살아남게 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상대와 맺는, 욕망에 이끌린 거래다. 자연선택의 관심 대상은 유전자의 성공적인 번식이지 개체의 행복한 삶은 아니다." "인간과 동물의 짝짓기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비극은 유전자적 관점에서 한쪽에게 이익이 되는 전략이 다른 한쪽의 이익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자식이 생존하는 데 부모 중 어느 한쪽의 기여가 필수적이라면, 아비와 어미 중 누가 먼저 양육의 책임을 저버리고 더 많은 자손을 만들고자 다른 상대를 찾아 나설지를 두고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많은 종의 경우에는 수컷이 아예 떠나버리거나 최소한의 투자로 여러 살림을 꾸린다."(40-1)
"그러나 출산과 양육의 '책임'을 떠안은 만큼 암컷은 '권리'라는 무기로 대항할 수 있다. 자연 세계에서 암컷에게 주어진 권리는 바로 짝짓기 선택권이다. 수컷은 때때로 생존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경쟁적으로 암컷에게 절박한 구애를 한다. 이때 어느 수컷을 선택할 것인지는 암컷의 몫이다. 번식에 대한 권한을 가진 암컷이 수동적인 경우는 거의 없고, 암컷의 선호도가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사실상 번식 활동은 암컷에 의해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암컷은 유전학적으로 더 우수한 수컷의 아기를 낳아 양육에 보다 헌신적인 수컷을 속이고 그 수컷이 키우도록 하는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어머니에 비해 아버지에게는 함께 살고 있는 자식들이 자신의 친자식이라는 보장이 없다." "이에 따른 진화적인 본능은 현대인들에게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평균적으로 친조부모에 비해 외조부모가 손주들에게 더 많은 돈을 쓰는데, 특히 외할머니가 그러했다."(41-3)
"어쨌거나 유성생식은 다수의 다양한 자손을 낳아 번식 가능성을 높이기에 적합한 짝짓기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아이들의 생존 가능성이 극적으로 높아지고 극소수의 아이만 낳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유성생식은 득보다는 실이 많은, 여러 종류의 갈등과 불행을 초래하는 나쁜 번식 방법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포괄 적합도를 최대화하고자 하는 부모들의 양육 본능은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했던 원시시대와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많은 부모들이 다른 집 아이들보다 뒤처지지 않도록 한두 명의 자녀에게 무제한적인 투자를 하도록 만든다. 결국 부모의 양육 본능이란 유전자가 자신의 번식 성공을 위해 부모라는 아바타를 조종하는 강력한 동력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문명화된 인간 집단에서 성행하는 유전자들은 부모의 사랑이라는 얼굴을 한 채로 자녀들에게 교육이라는 군비경쟁의 채찍질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45)
2장 사회: 혐오로 가장된 두려움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능력 중 하나는 위험을 재빨리 알아채고 그에 대처하는 것이다. 이때는 복잡하고 정교한 이성적 판단이 아닌 단순한 감정적 대응이 훨씬 유리하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여기서 생겨난 정서적 기제가 혐오라고 본다." "문제는 다른 인간을 대상으로 안전 최우선의 전략으로서 혐오 기제가 사용될 때 그 상대에게 전가되는 비용이 때로는 너무나 크다는 데 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가 근거 없이 과잉 발휘되는 과정에서 선량한 상대의 인격 내지는 생명까지도 무차별적으로 해칠 수 있는 것이다. 혐오는 광범위한 감정으로서 오염이나 불결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고, 물건이나 동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 동일하게 취급한다. 즉, 사람을 향한 혐오와 물체나 동물에 대한 혐오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반응이 일어날 때 사람 간의 상호작용에 관여하는 뇌 영역은 마치 우리가 물건을 대하고 있다는 듯이 비활성화 상태로 남아 있다."(57, 60-1)
"혐오는 특정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불특정 다수로 이루어진 집단이나 부류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확장되는데, 이는 모든 것을 분류해서 받아들이려는 사고 체계 때문이다."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차별적 태도를 정량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으로는 '암묵적 연합검사'가 있다. 이 검사에서는 좋아하는 대상과 긍정적인 단어가 연합되고 싫어하는 대상과 부정적인 단어가 연합되는 정도가 자판을 누르는 반응속도에 의해 측정된다. 안종차별과 관련된 암묵적 연합검사 결과를 보면, 평소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의식적으로 가지지 않던 참가자들조차 아프리카인과 부정적인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결부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더구나 이 실험은 타 인종에 대한 노출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여러 인종에 대한 경험이 많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이런 편견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실험에 임하더라도 결과에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61-2)
"이렇게 인종에 대한 차별이 엄연히 인간의 의식 안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사회과학에서는 인종이라는 것이 생물학적 근거가 없는 사회적 개념일 뿐이라는 믿음이 마치 정설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 시발점이자 이를 직접 뒷받침하는 거의 유일한 연구 결과가 1972년 리처드 르윈틴이 발표한 논문인데, 그 내용인즉슨 7개의 인종에 대해 17개의 유전자 변이를 분석한 결과 인종 내에서의 차이가 85퍼센트를 설명하며 인종 간의 차이는 15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박으로 지적된 바와 같이, 인종 간의 차이는 개개의 독립적인 변이를 통해서가 아니라 여러 변이가 이루는 연관 관계의 구조를 통해서 드러날 수 있다. 이 논리는 DNA 분석 기술의 발전에 따라 실제 관측 데이터로도 입증되었다." "세계적인 유전학자 데이비드 라이크의 말처럼, 비록 선한 의도라고 할지라도 인종 간의 생물학적 차이를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과학적 발견이 인종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될 근거만 제공해 줄 뿐이다."(62-3)
"이와 유사한 예가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페미니스트이자 저명한 인류학자인 세라 블래퍼 허디는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에서 인류 역사에 모계사회가 지배적인 시기가 있었다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믿음이 인류학과 고고학의 증거들로 뒷받침되지 않는 환상일 뿐이라고 냉정하게 폭로한다. 여성 우월적인 모계사회는 현재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현대사회에서도 생물학은 여전히 여성의 편이 아니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 신경과학》에서 발표된 연구에서는, 임신 중에 사회적 인지를 담당하는 뇌 부위의 크기가 줄어드는데 이러한 뇌 구조의 변화가 출산 2년 뒤까지도 지속된다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는 뇌세포 연결망의 가지치기를 거치며 어머니의 뇌가 아이의 양육에만 특화되도록 바뀌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결국 생물학적 진화는 직업인으로서의 현대 여성들의 능력을 신체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인지 기능과 사회성의 측면에서 훼손시킴으로써 차등적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다."(63-4)
"편도체는 공포와 불안의 감정을 주관하는 뇌 기관이다. 인간의 뇌에 자리 잡은 편도체는 피와 전쟁으로 얼룩진 역사에서 생존 투쟁을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편도체가 만들어 내는 혐오라는 감정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물체를 모두 동일한 생물학적 과정으로 처리한다. 이러한 비인격적 혐오가 고정관념과 편견을 통해 사회적 낙인으로 확장되고, 특히 다른 인종이나 집단에 대한 공격성으로 발휘될 때, 독일 나치나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것과 같은 전쟁과 야만적인 학살이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공격성에 대응해 살아남기 위해 편도체와 교감신경을 활성화해야 했으므로, 이것은 다시금 혐오를 강화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편도체에서 보낸 자극에 우리 몸의 모든 부위가 신경학적으로 서로 교감하며 함께 반응한다는 의미로 이름 지어진 교감신경이지만, 한 인간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생리학적인 교감이 다른 인간과의 정서적인 교감을 가로막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69)
3장 경제: 자본주의 세상의 번식 경쟁
"'신고전파' 경제학의 심각한 오류는 경제학적 경쟁이 아닌 생물학적 경쟁이라는 변수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한계효용 이론에서는 생산자 혹은 공급자 간에 이루어지는 완전경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생물학적 개체들은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다. 이들의 기본적인 속성은 생산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자원의 소비에 있다. 간혹 식물을 생산자로 비유하기도 하지만, 식물은 스스로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것 외에는 어떠한 부가적인 가치도 만들어 내지 않으므로 경제학적 생산자로 볼 수 없다. 단지 동물에게 강제로 소비당하는 것뿐이다. 또한 한계효용 이론에서는 소비자가 주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의사결정 단위로서 자신의 한계효용이 0에 이르면 소비를 멈추는 합리적이고도 독립적인 개인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생물학적 소비자들은 결코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무한한 번식 욕구와 경쟁 심리를 지닌 비합리적인 사회적 개체들이다."(82-3)
"로버트 프랭크는 『경쟁의 종말The Darwin Economy』에서 〈지금부터 100년 뒤에 경제학자들에게 경제학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어보면 대다수가 찰스 다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신고전학파의 자유시장 신봉자들은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에게 경제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개념을 도용해 각 개인이 자신의 이득을 자유롭게 추구할 때 사회 전체에도 최선의 결과가 주어지는 균형 상태에 도달한다고 주장하지만, 다윈의 진화론적 체계에서는 생물학적 소비자들의 '한계limit가 없는 한계marginal 효용'으로 인해 종 전체가 다 함께 몰락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프레드 허쉬가 정의한 지위재positional goods, 즉 (주로 생존이라는 목적을 갖는 물질재material goods와는 달리) 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얻게 되는, 혹은 그렇다고 믿어지는 사회적 지위가 더 중요한 재화가 바로 이 같은 값비싼 과시의 군비경쟁의 대상이라고 프랭크 교수는 지적한다."(90-1)
"생존이란 번식 시점까지 살아 있느냐 살아 있지 못하느냐, 즉 0과 1의 이분 체계인 반면, 번식은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좋은 다다익선 체계이며 주변의 경쟁자들에 비해 수치적으로 더 많이 낳는지가 중요한 비교우위 체계다." "이와 같이 번식을 위한 경쟁은 필연적으로 자원 획득 경쟁으로 이어진다. 생태학에서는 생물들 간에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을 크게 간섭 경쟁과 착취 경쟁으로 분류한다. 간섭 경쟁이란 다른 개체들이 자신의 영역에 침입하거나 서식지 내의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며 자원을 '독점'하는 경우다. 많은 조류들이 자신의 둥지 주변을 물리적으로 방어해 다른 새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것이 간섭 경쟁의 대표적인 예다. 반면 착취 경쟁은 이러한 직접적인 상호작용은 없지만 일부 개체들이 제한된 자원을 '선점'함으로써 다른 개체들이 자원을 이용할 기회를 간접적으로 빼앗을 때 일어난다. 기본적으로 자연의 자원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착취 경쟁은 자연 곳곳에서 일어난다."(84, 93)
"'값비싼 신호'란 생존에 불리한 조건에서도 살아남을 만큼 건강하다는 것을 광고하는 과시 행동을 가리킨다. 과거에는 없었으나 현대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값비싼 신호 중 하나는 학력이다. 학력은 특히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많은 현대인들이 얻고자 하는 대표적인 지위재 중 하나다. 그래도 고등교육만큼은 사회에서 실질적인 가치의 생산에 기여하지 않을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스위스 패러독스'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산업화된 스위스의 대학 진학률이 다른 잘사는 나라들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현상을 일컫는데, 이는 교육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얼마나 낮은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장하준 교수는 이것이 고등교육의 주된 목표가 생산성과 관련된 지식과 기술의 전수보다는 고용 시장에서 피교육자들의 순위를 매기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고등교육을 받고 높은 연봉을 받는 고급 인력들이 그만큼의 가치의 생산보다는 착취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101-2)
"생물학적 개체들이 만들어 내는 경제학의 세계는 신고전학파의 이론과는 상반되거나(한계효용의 비체감), 아예 설명되지 않는다(가치 착취 현상). 그럼에도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1870년대 이후로 주류 경제학의 기초가 된 것은 사실 그것이 수학을 도입하며 자연과학의 엄밀함을 흉내냄으로써 얻은 권위에 기인한다." "지금의 자본주의 세상을 보면, 경제 현상이 자연과학의 원리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문제는 생물학적 경제 주체들이 따르는 자연의 원리가 앨프리드 마셜의 수학이 아니라 윌리엄 해밀턴의 수학이라는 점이다. 마셜의 수학은 시장경제가 자연스럽게 우리를 균형으로 이끈다고 주장했으나, 해밀턴의 수학을 따르는 경제는 우리를 극단적인 불균형으로 이끈다. 배불러 터지는 극소수와 불만족스러운 대다수로 양분화된 지금이 세상이 도래한 것은, 자유시장 신봉자들이 주장하듯이 경제가 온갖 제도로 인해 자연적으로 돌아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자연적으로 잘 돌아가서다."(112-3)
4장 정치: 자연스러운 보수, 부자연스러운 진보
"2011년 연구에서 자기공명영상MRI을 이용해 90명의 뇌 구조를 살펴본 결과, 진보적 성향이 강할수록 전측대상피질의 회색질 부피가 큰 반면 보수적 성향이 강할수록 편도체의 회색질 부피가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2013년 연구에서는 위험이 동반된 의사결정 과제를 수행하는 82명의 뇌를 기능성 MRI로 검사한 결과 보수 성향의 참가자들이 편도체를 더 많이 사용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공포와 혐오는 기본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편도체는 이 두 반응을 모두 주관한다." "2018년 연구에서는 총 93명의 뇌 MRI 분석을 통해 편도체의 크기가 클수록,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현 상태status quo를 합리화하는, 즉 기성 체제가 정당하거나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사회운동이나 시위에도 잘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실험 참가자가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는지 불리한 위치에 있는지와 상관없이 일관적으로 나타났다."(121-2)
"최근 뇌신경과학에서는 확장된 편도체가 주목을 받고 있다. '확장된 편도체'란 편도체의 중심핵에서 분계선조침대핵까지 이어진 여러 뇌 부위를 통틀어 일컫는데, 이 부위는 특히 정상적인 불안과 공포만이 아니라 병적인 반응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그동안의 많은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며 세로토닌이 보수적 성향의 기저에 있을 것으로 추측한 바 있다. 즉, 세로토닌 수치가 높은 사람들은 사회적 규범을 따르고 위험을 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며, 이론적이고 복잡한 것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것을 선호하며, 질서와 권위를 중시하고 종교적 성향이 강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러 동물실험 결과, 세로토닌은 특히 사회적 위계질서와 높은 연관성을 보였다. 반대로 피셔는 진보 성향을 만들어 내는 신경전달물질로는 도파민을 지목했다. 도파민은 보상 회로를 주관하는 신경전달물질로서, 도파민의 분비가 높을 때 동물들은 새로운 것을 탐색하는 행동을 보인다."(124-5)
"교감신경은 생존에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작동하므로, 교감신경이 민감한 사람은 스트레스는 받을지언정 위험한 환경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다." "세로토닌 활성이 실제로 번식에서 유리했다면 세로토닌을 강화하는 변이가 집단유전학 분석에서 양의 방향의 선택압을 보여야 한다. 실제로 신경전달물질 유전자들을 집단유전학으로 분석한 결과, 세로토닌 전달체인 5-HTT가 여러 연구에서 일관성 있게 양의 선택을 받은 대표적인 유전자 중 하나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높은 세로토닌 활성이 진화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집단유전학으로 입증된 것이다." "한편 도파민 수용체에 있는 7R 변이는 인간의 진화 역사에서 최근에 발생했는데, 새로운 것을 탐색하는 성향의 장점과 위험성의 공존으로 인해 균형 선택을 받아온 것으로 보인다. 정치 성향과 유전자 변이 간의 상관관계를 조사해보니, 실제로 도파민 수용체의 7R 변이를 지닐 경우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 밝혀졌다."(127-8)
# 균형 선택balancing selection : 어떤 유전자 변이가 유리한 상황에서는 점점 많아지다가 상황이 바뀌면 반대로 줄어들기도 하면서 특정한 빈도를 유지하는 양상을 가리킨다.
"문명과 문화가 생물학적 진화에 미치는 영향은 현대 유전학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저개발 국가와 선진국 사이에서 잘 드러난다. 즉, 진화적 적합도를 측정하는 지표인 생애 번식 성공률이 저개발 국가들에서는 주로 전염병이나 영양 결핍으로 인한 어린아이들의 사망률에 의해 좌우되는 데 반해, 선진국에서는 자녀를 얼마나 낳는지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즉 전염병이나 영양 결핍에 취약해서 사라졌어야 할 다른 변이들과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성향의 변인들은 문명의 발달 덕분에 자연선택에 역행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앞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이 더 진보하고 생존과 번식에 대한 진화적 압력에서 인간이 더 자유로워지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렇게 이기적 유전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인간이 때로는 자연적인 본성의 윤리적 부당함에 대해 깨닫고, 그 깨달음은 사회에 전파하고, 그것을 사회 안에서 구현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점이다."(143-4)
5장 의학: 아프고 늙고 죽어야만 하는 이유
"유전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기적'이다. 첫째는 개체들 간의 문제로서, 유전자가 자신을 실어 나르는 개체로 하여금 다른 개체들을 따돌리고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겪는 인간들의 경쟁과 갈등으로 인한 비극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는 개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로서, 유전자가 개체의 행복과 안녕과는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번식에만 유리하게끔 작동한다는 점이다. 질병과 노화 그리고 죽음, 즉 인간의 육체가 겪는 모든 생물학적 고통이 바로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 변이들이 목적 없이 우연히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기성은 유전자의 본래적 속성이 아니며, 다만 우연히 생겨난 이기적인 변이들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진짜 문제는 '유전자는 왜 이기적인가'라기보다는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 변이들이 왜 생겨났는가'라고 볼 수 있다."(149-50)
"이에 대한 답으로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들을 참고할 수 있다. 이 연구들에 따르면, 자연 세계에는 일부 DNA 복구 유전자가 고장 난 탓에 많은 변이를 발생시키며 번식해 가는 개체군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생명에 적대적이며 요동치는 환경에 적응하는 데 특히 상당한 이점을 가진다. 이는 의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병원균들이 항생제와 같은 의약품에 대한 내성을 이러한 방식으로 발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이 탄생한 35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모든 생명체는 가혹하고 불안정한 환경에서 살아왔다. 이러한 환경에서, 부족한 자원을 DNA 교정과 복구에 크게 투자하면서 자신과 유전학적으로 동일한 자손을 만들며 천천히 번식하는 개체군은 끝까지 대를 이어갈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반대로, 에너지와 자원을 DNA 복제와 세포 분열, 즉 번식에 집중함으로써 유전학적으로 저마다 다른 다양한 자손을 빠른 속도로 만들어 낸 전략은 성공했을 것이다."(154-5)
"이와 같이 집단이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의 소멸과 다른 변이의 탄생을 맞바꾸는 유전자들의 '희생'이 필요하다. 이런 방식으로 다양한 변이들이 많이 생겨나야 혹독하고도 변동하는 환경에서 집단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유전자가 스스로 선택한 이타적인 결정이 아니라, 환경의 압력에 의해 강제된 유전자들의 희생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돌연변이는 유전자의 의도에 반해 무작위적으로 발생하고, 또한 다양성의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방치된 것이기 때문이다(이는 3장에서 언급한 집단선택설, 즉 집단을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변이들이 많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유리하다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다양성을 보존하는 것은 생태계 유지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다양성 그 자체가 선하거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생물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연이 얼마나 생명체에게 적대적인 환경인지를 말해주는 방증이다."(155-6)
"영국 뉴캐슬대학교 톰 커크우드 교수가 《네이처》 논문에서 지적했듯이, 자연 세계에서는 추위, 굶주림, 감염, 포식자와 같은 환경적 위험 요소로 인해 기대 수명이 워낙 낮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수명을 유지하기 위한 불필요한 메커니즘은 진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최근 《네이처 생태학과 진화》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정자 형성 과정에서 생기는 돌연변이를 복구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즉, 자연적인 기대 수명을 벗어나면 더 이상 DNA 복구 기능이 활발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나이에 따라 감소되는 DNA 복구 기능의 문제가 체세포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노화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일회용 체세포' 이론에 따르면, 제한된 자원과 에너지는 그나마 생식세포의 유지에 사용되고, 번식으로 이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일회용일 뿐인 체소포들은 더더욱 관리를 받지 못한다." "체세포에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노화를 통해 죽음을 초래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로가 바로 암이다."(162-3)
"면역학적 측면에서 일어나는 노화 역시 자연환경의 문제로 귀결된다. 노화에 관한 면역학적 이론에 따르면, 면역체계가 점차 자기 자신과 외래 물질을 구별하는 능력을 잃어감에 따라 개체 자신의 정상적인 세포들을 공격하고 파괴하는데, 이것이 노화의 원인 중 하나다. 즉 병원균과 싸우기 위해 활성화된 면역세포들이 피아 식별 능력을 잃고 그 부작용으로 자신의 숙주세포들을 공격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의학에서 이야기하는 자가면역질환의 발단이다." "면역계의 노화 문제는 또 있다. 우리 몸에는 흉선 혹은 가슴샘이라는 조직이 있는데,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면역세포의 하나인 T세포가 양성되는 곳이다." "어린 시절 활발하게 작동하던 가슴샘 조직은 나이가 들수록 크기가 줄어들고 기능도 위축된다. 따라서 가슴샘이 기능하지 않으면 추가적인 T 세포 양성 업이 사실상 그때까지 훈련된 T 세포들만을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령자들은 감염 질환에 훨씬 취약해진다."(167-9)
6장 종교: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다
"사회진화론은 '자연주의적 오류'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용어를 만든 조지 에드워드 무어는 자연적 속성과 윤리적 속성이 별개라는 차원에서 자연주의적 오류를 정의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보통 그가 정의한 것과는 약간 다른 의미, 즉 어떤 사실로부터 부당하게 당위를 이끌어 내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 쓰인다. 데이비드 흄이 그런 오류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는 그렇다/존재한다is 또는 그렇지 않다/존재하지 않는다is not 등의 사실 명제로부터 그래야 한다/마땅하다ought 또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땅하지 않다ought not 등의 가치 명제를 도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인종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한 가지 예가 된다. 리처드 르윈틴이 취한 방식, 즉 인종차별에 대한 대응으로써 아예 인종을 생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자연에 인종은 존재하지 않으므로(사실 명제), 우리도 인종을 구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가치 명제)'는 논리에 기대는 것이다."(208-9)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사실과 당위를 구별하고 자연주의적 오류를 극복해야 함을 명확하게 인지한 대표적인 이가 바로 토머스 헉슬리다. 그는 진화론에 반대하는 이들과의 격한 논쟁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윈의 이론을 널리 알리고 발전시키고자 하면서도, 자연에는 도덕적 목적이 없으며 도덕은 철저히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보적이며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헉슬리는 제도적으로 사회를 개선하고 올바른 윤리를 확립해야 함을 설파했고, 실제로도 정치 제도의 개선, 과학 교육의 발전 등을 위해 사회 여러 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자연이 그러하므로 우리도 그래야 한다'가 아니라, '자연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발 더 나아가 '자연이 그러하므로 오히려 우리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연은 우리의 모범이 아니라 반면교사다. 즉, 자연에는 인종 간의 차이와 그로 인한 차별이 존재하므로 오히려 우리는 인종에 따른 차별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209)
"경제학적 공정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소위 '초대교회'라고 불리는, 초창기 기독교가 추구한 경제 공동체의 모습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사도행전」 2:44-45)〉"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고린도전서」 12:21-23)〉 생물학적 개체들이 모인 집단이 마치 하나의 유기적인 몸, 즉 개체처럼 움직인다면 이들은 집단으로서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몸의 일부, 즉 몇몇 약한 개체가 손상되거나 실패하면 몸 전체, 즉 집단의 적합도는 약화되고, 반대로 취약한 개체들을 돌보면 집단의 적합도는 향상된다. 상당히 생물학적인 비유다."(224-5)
"바울의 이러한 공동체주의는 이방인 포교라는 목적 뿐만 아니라 인종, 신분, 성별의 차이를 포용하는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2장에서 인종, 신분, 성별 따위를 넘어서는 사랑의 정반대 개념, 즉 혐오의 진화적 기원이 생존을 위해 작동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고린도전서」 13장과 함께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장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일서 4장에는 이와 관련한 상당히 심오한 묘사가 담겨 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물론 그 맥락은 다르겠지만, 인간의 진화와 심리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 없이 기록된 성서에서 사랑의 반대편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미움이나 증오가 아닌 두려움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성서는 특별히 사회적 낙인의 대상을 상징하는 과부, 고아, 나그네에 대한 보호와 배려를 이곳저곳에서 강조한다."(226-7)
"결국 성서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 성서는 자연을 신으로 섬기던 인간들을 불러내 예수를 모범으로 삼아 스스로 신이 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적 본능은 여전히 종교적인 신을 만들어 내거나 추종하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사이비 교주를 따르고 숭배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어떤 이들은 이런 자들 가운데에서 〈나는 신이다〉라고 선언하며 그들을 지배한다. 이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다. 성서가 말하는 '신성'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인간으로서 예수가 보여준 것과 같은 신성을 발휘하려면, 자연에서 신성을 벗겨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서 자연성을 벗겨내고 그것에 저항해야 한다. 번식욕과 혐오를 넘어서는 사랑, 차별과 배제가 아닌 포용과 연대, 착취와 탈취가 아닌 가치의 창조와 나눔을 추구해야 한다. 자연의 속박에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이들을 해방시키고, 우리의 후손에게 더 공정하고 진보된 세상을 물려주며, 인류가 오래도록 생존하고 번성하도록 해야 한다."(238)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연의 창조주 따위는 없다. 그런데 성서에서 '종교적 도금'을 벗겨내고 나면, 우리는 그곳에서 진짜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바로 창조주다. 아담으로 대표되는 자연적 인간이 아니라,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 따르려는 신적 인간이 그들이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창세기」 1장의 선언은 예수의 형상을 본받는 이들을 통해 비로소 실현된다.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건 가상의 인물이건, 예수라는 한 인간을 통해 드러나는 정신을 따라 자연의 모든 것을 다스리며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는 창조의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창조란 태초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바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끝없이 진행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는 진화라는 과정을 거치며 이 자연 속에 우연히 던져진 우리 인간이 이 무의미한 우주에서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238-9)
나가며
"이 책에서 우리는 그 무엇보다 인간을 여러 형태로 속박하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자연이라는 것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내고 싸워야 할 자연이라는 적이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유전자가 심어놓은 본성 역시 자연의 일부다. 어쩌면 과학의 힘으로 외부의 자연과 싸우는 것보다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자기 자신과 벌이는 내적 갈등과 도덕적 투쟁이 훨씬 힘든 작업일 수 있다." "물론 각 개인의 계몽으로 충분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개인의 실천을 기대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지역, 국가, 국제사회의 구성원들의 합의와 그에 기반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고는 많은 경우 충분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잘 확립된 법과 제도는 그 자체로 효과적인 계몽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물론 그것에 이르는 길은 평탄하지 않겠지만 그 투쟁은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의 인식을 통째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