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리 오래지 않은 전통(傳統)
"조선시대 이전부터 현재까지 한국에서는 줄곧 호적을 작성해왔다. 식민지 초기 민적까지는 동거하며 경제생활을 함께 하는 자들이 '현주소'로 기재되었다. 이에 반해 현재의 호적은 혼인·출산 및 양자결연으로 맺어지는 가족이 거주·이동을 불문하고 본적(本籍)으로 기재된다. 호적의 이러한 특징은 식민지 당국에 의해 1920년대에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두 가지 모두 주민등록제도라 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의 호적과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호적은 사실 이름이 같을 뿐, 가족을 파악하는 방법은 서로 달랐다." "대한제국기의 호적은 구래의 신분제적 인민파악을 포기하는 대신에 호의 대표자를 '호주'라 명시하여 호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호주 한 사람에게 한정하였다. 나아가 식민지시기의 호적은 가족 자체를 호로 파악하면서 남성 연장자를 유일한 호주로 내세웠다. 호적상의 기재양식으로 볼 때, 가장이 권위를 갖는 '가부장제적' 틀은 근대사회로 다가갈수록 더욱 선명한 모습을 드러낸다."(16-7)
1부 호적을 찾아서
"동아시아의 전제국가는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영토의 경계 내에 왕의 신하─혹은 백성─가 아닌 자가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라는 통치이념에 기초하여 성립되었다. 천자 혹은 왕은 지배질서의 꼭대기에 서서 영역 내의 모든 토지와 인민을 왕권으로 상징되는 전제국가에 복속시켰으며, 왕의 백성은 왕의 땅을 골고루 나누어 받아 삶을 영위하는 대신에 그 은혜에 보답하여 왕에게 생산물을 바치거나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호적은 이러한 왕도사상의 통치이념에 입각하여 작성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이 관의 곡식[官穀]을 내어 백성 가구(家口_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적으로 빌려주고[賑貸], 추수 후에 관에 환납케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환곡(還穀)과 마찬가지로 조사된 호구의 규모에 따라 진휼하였음을 보여준다. 백제에도 점구부(點口部)라는 부서가 있어서 국가의 호구파악이 제도화되었음을 짐작케 한다."(27-8)
"『고려사(高麗史)』는 「식화지(食貨志)」에 호구조항을 별도로 설정하여 인종 13년(1135) 이후의 호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첫머리가 〈나이 16세에 '정'이 되어 비로소 국역에 복무하며, 60세에는 '노'가 되어 그 역을 면제받는다. 주·군 등의 지방행정관청은 매년 호구를 헤아려서 호부에 보고하는데, 징병과 요역은 호적에 기초하여 차출하는 것이 원칙이다〉로 시작된다. 징병과 노동력 차출이 호적을 작성하는 주요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한편, 「식화지」의 전제(田制)에는 전국의 토지를 '정'을 단위로 분급하는 제도가 나와 있다. 〈토지를 직역에 따라 고르게 분급하여 백성이 생계를 꾸리게 하고 국가의 재정에 사용하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직역(職役)'이란 관직과 군역을 포함하여 국가의 공공업무를 수행하는 국역을 말한다. 또한 주인이 없는 땅은 직역이 없는 자로 하여금 〈호를 세워서 국역에 충당〉 함으로써 배분되었다. 토지배분의 근거가 되는 직역이 호를 단위로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31)
"호적은 실재하는 주민을 가족관계에 기초하여 등재하는 주민등록이다. 여기에 부계와 모계의 계보를 기재하는 호적양식은 한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중국 청대의 특수관할지역 호적인 『한군팔기인정호구책』에 남성 호주 한 사람에 한해 부와 조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 이후 한국호적에 사조─호주부부의 사조(四祖), 즉 부·조·증조·외조(父·祖·曾祖·外祖)의 인적사항을 지칭한다─를 기재한 것은, 당말 이후 중국에서는 의미를 상실해 간 직역제와 노비제(奴婢制)가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이후에도 계속해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왕조는 직역에 따른 토지와 노비의 배분을 제도적으로 유지하였으며, 과거응시와 관직임용시에도 직역과 신분을 확인하였다. 양반 신분에 해당하는 자의 호적에 호주의 직역과 함께 호주부부의 '세계(世系)'를 기록하도록 하였는데, 문종 9년(1055)에는 호적에 이 세계를 등록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과거응시를 제한하기도 하였다."(34-5)
"조선 초기의 호적은 고려시대의 호적과 같이 족보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호적의 양식도 고려의 호적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지역의 호적을 책자로 묶은 호적장부 원본으로는 1606년의 『산음장적(山陰帳籍)』이 현존하는 최고(古)의 것이다." "조선 후기의 호적은, 고려시대의 양반호적이 부계나 모계의 세계를 번잡스럽게 기록한 것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주호부부에게만 사조를 기재하고 그 이상의 사조기록은 생략하였다. 조선 전기를 거치며 양반에게 주어지던 신분적인 특권이 위축되어 갔으며, 관직자는 국가의 공공업무를 수행하는 직역자의 하나로 존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양인이면 누구나 호적에 주호부부의 사조만 기재하는 것으로 일률화되었으며, 노비의 경우에는 신분적 귀속을 밝히기 위해 부모와 소유주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주호부부에게 사조를 기록하는 양식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신분제도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9-41)
"1675년에 다섯 호를 하나의 통(統)으로 묶는 「오가통사목(五家統事目)」이 반포됨으로써 이후의 호적대장에는 통호제도가 도입되었다. 다섯 호를 1통으로 묶고 통마다 통주(統主)를 두는 제도는 이미 조선 초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호적에는 그러한 통호제도가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 "1678년에 작성된 『경상도 단성현 무오식년 호적대장』부터는 통번을 주어 다섯 호를 1통으로 편제하고 통마다 통수(統首)를 두었다." "또한 단성현 호적대장에 '신호(新戶)'라 하여 새롭게 등재되는 호가 대거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호구파악이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란과 호란 양란 이후 국가통치체제를 재정비하면서 17세기 초의 호적상에 대폭 감소했던 호구수를 이전 단계의 수치로 회복시키고 나아가 그 수준을 능가하는 증가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앙정부가 지방주민을 파악한 결과 드러나는 호구수일 뿐, 현실적으로 인구가 증가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41-2)
2부 조선의 주민등록
"신등면 단계의 안동 권씨 동계공파 종택에서 특이한 형태의 '준호구(准戶口)'를 발견하였다. 준호구는 흔히 '호구단자(戶口單子)'로 통칭되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해서 양자는 다르다. 지방애서는 군현마다 행정구역내 주민들에게 호구단자를 내게 하여 우선 면리별로 모았다. 면리별로 모은 호구단자를 '호적중초(戶籍中草)'라 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다시 군현내 면리 전체를 포함하는 장부로서 '호적대장(戶籍大帳)'을 만든다. '준호구'는 주민이 호구등재상황을 확인하려 할 때, 이 호적대장에 준하여 관에서 발급하는 문서이다. 따라서 호구단자는 호적을 작성하는 첫 단계의 문서이고, 준호구는 호적작성의 결과를 증빙하는 마지막 단계의 문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호구단자를 받아 호구장부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호적대장에 기재될 결과를 이 호구단자에다가 직접 수정하여 돌려주기도 한다. 호구단자가 준호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를 구별하지 않고 그저 '호구단자'라고 통칭하기도 한다."(73)
"권두망 호의 두 가지 준호구 가운데 하나는 권두망 부부와 세 명의 자식, 권두망이 소유한 노비들을 기록한 것이다(준호구A). 다른 하나는 권두망의 둘째 아들이 권덕형의 신상만을 기록한 것이다(준호구B)." "준호구A의 호적에는 호의 대표자인 권두망과 처 이씨, 솔하 자식인 덕형과 안형, 그리고 밑으로 노비들이 등재되어 있다." "솔하 노비에게는 이름과 나이, 출생 간지를 기재하고 사조를 다 채우지는 않더라도 부모의 이름과 함께 부모의 신분을 기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종모법(從母法)'이라 하여 노비가 원칙적으로 어미의 주인에게 귀속된다. 노비에게 부모를 기재하는 것은 노비의 소유관계를 분명히 하려 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노비가 호의 일원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이다. 노비가 '호'라고 하는 '법제로서의 가족'에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등재된 점은, 조선시대 호적의 호가 근대 이후의 호나 가족과 확연히 다른 개념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75, 79-80)
"호적작성에 관한 조선시대의 법률은 대단히 엄격하였다. 일호일구(一戶一口)라도 빠진 것이 발견되면 해당 주호는 물론, 수령 이하 호적작성에 관여했던 자들을 엄중히 처벌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중앙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제시한 원칙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는 호구수의 증감이 있더라도 지역 단위로 내려오던 수치를 크게 넘나들지 않았다. 정약용(1762~1836)도 모든 호구를 파악하는 '핵법'과 지역마다 주민의 납세능력에 따라 호구수를 조절하는 '관법'이 있다고 하여, 이것을 호적작성의 이원적인 원칙으로 이해하였다. 식년(3년)마다 작성하여 중앙으로 올리는 호적에는 사실상 '관법'이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식년마다 호구조정에 따라 호적장부에 새롭게 첨가되거나 호적장부에서 빠지는 호가 생기는데, 호적장부에서 빠지는 호를 '낙호(落戶)'라고 한다. 낙호가 되는 데에도 돈을 내야 했다. 낙호로부터 거둔 재화는 호적작성과 공동납부를 운영하는 비용으로 쓰였다."(96-7)
"족보는 가계(家系) 계승에 있어 혈연적인 부자관계보다 양자를 통한 부자관계를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때의 '부(父)'는 생부(生父)가 아닌 계부(繼父), 즉 '생물학적 부'가 아닌 '사회학적 부'인 셈이다." "권두망 가계보다 범위가 넓은 권시준 계파를 살펴보면, 16~19세기에 출생한 남성이 대략 2,700여 명이며 이 가운데 계자로 기재된 자는 370여 명이다. 17세기 후반 이후로 10명에 한두 명은 계자인 셈이다." "가능한 한 가까운 혈연 안에서 양자를 취하려는 경향도 계속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계자 이외에 손자나 증손을 계손(系孫), 계증손(系曾孫)으로 세우는 경우도 생겼다. 또한 생부와 계부, 생부와 조부, 생부와 증조부의 계보를 동시에 잇는 '양가봉사(兩家奉祀)'도 나타났다. 계자를 확정하는 시기가 늦어지더라도 반드시 후계를 연결하려 하였으며, 되도록이면 가까운 혈연에서 연거푸 계자를 세우고 급기야 부나 조와 함께 숙부나 종조(從祖)의 계보까지 잇게 함으로써 후계가 단절되는 상황을 방지했다."(107, 113-5)
"족보에는 정실(正室) 배우자와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적자녀(嫡子女)를 중심으로 계보를 기록한다. 측실(側室)은 족보에 등재되지 않으며, 이들이 낳은 첩자녀(妾子女)도 족보등재에 소홀하였다. 첩자녀를 등재할 때에는 적자녀와 구별하기 위해 '서자(庶子)' 혹은 '서녀(庶女)'라 표시한 뒤 당대나 2세에 한해 등재할 뿐, 그 후의 계보는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의 족보 중에는 첩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명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후손의 계보도 대대로 등재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 계보는 이 시기에 이미 서파가 아니라 적파로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인 첩에게서 낳은 자식을 '서자녀(庶子女)'라 하고, 천인 즉 비(婢) 출신 첩에게서 낳은 자식을 '얼자녀(孼子女)'라 하며, 이들 모두를 '서얼(庶孼)'이라 통칭한다. 족보에 등재된 첩자녀는 대부분 서자녀이며, 얼자녀는 족보등재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호적에는 이 서얼자녀와 그 후손들이 기록에서 배제되지 않고 적자녀와 나란히 등재되었다."(133)
"양반들에게 혼인은 가문이라는 사회집단 간의 교류를 의미한다. 이때 여러 가지 기준을 만들어 집안마다 차등을 두었으니, 이것을 '반격(班格)'이라 한다. 혼사(婚事)는 두 가문의 격이 맞아야 했다. 하혼, 상혼이라 하여 어느 한 쪽의 격이 낮고 높음을 따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같은 양반가문의 혼인관계에서 두 가지 경향을 감지할 수 있다. 반격을 맞추기 위해 혼인처를 한정하는 경향과 반격의 조건을 조정하면서 혼인네트워크를 확대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전자는 (일정 지역 내에서) 한 집안과 중복된 혼인관계를 맺는 경향이다." "한편, 계층적 결합을 위해 혼인관계를 지역적으로 한정시키고 그 내부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반격을 맞추고자 하나, 혼기 찬 모든 자식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었다. 가문 내에 몇몇만 통혼을 하여도 곧바로 지역 주도세력들의 혼인네트워크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안동 권씨 가문도 교류관계를 지역 내외, 반격 내외로 확산시키고 있었다."(139-41)
"1750년 권덕형의 호적에는 서자가 마침내 '유학'을 직역명으로 써서 호적상으로는 적자부부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에도 얼자는 여전히 '업유'를 직역명으로 쓰고 그의 처도 여전히 '성'으로 호칭되었다. 얼자부부가 서자부부와 같이 호적기재상 적자부부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그들이 사망한 이후의 일이다. 1759년의 호적대장에는 얼자부부가 사망하고 대신 그들의 아들이 주호로서 호를 승계하고 있다. '업유'라는 직역명을 사용하던 얼자와 그의 처부, 즉 장인은 아들의 사조기록에 모두 '학생(學生)'으로 기재되었다. '학생'이란 '유학'을 직역명으로 사용하던 자가 사망하였을 때 붙이는 명칭이다." "서얼 본인과 그 처뿐만 아니라, 그 후손이나 사조의 신분표기도 한 단계 높아진 것이다. 권덕형의 서얼부부는 18세기 전반기를 거치면서 호적상으로는 적자부부와 구별되지 않는 기재양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적자의 후손들이 주도하여 작성한 족보에는 이들과 그 후손들이 끝내 등재되지 못하였다."(144-5)
# 유학(幼學) : 과거를 보기 위해 당분간 군역을 면제받은 자를 일컫는다. 그러나 과거를 보지도 않으면서 늙어 죽을 때까지 호적에 유학을 직역명으로 기재하는 자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호의 대표자를 일반적으로 '주호(主戶)'라고 불렀다. 18세기에 반포된 호적작성원칙에는 주호승계에 관해 다음과 같은 원칙이 제시되어 있다. 〈과부로서 집안일을 주관하더라도 아들이 장성하면 아들을 주호로 삼는다.〉 여기서 '과부'는 남편이 사망하여 남편 대신 호적상 주호로 등재된 여성을 말한다. 이 주호승계의 원칙에는 여성이 주호로서 존재할 수 있지만 가능하면 남성을 주호로 세우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나 이 규정에서는 남편이 사망하면 그 처가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경영하는 현실도 엿볼 수 있다. 국가는 현실을 인지하고 여성이 호적에 호의 대표자로 등재되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장성하여 호의 대표자로 호적에 등재되더라도 실제로는 그의 어머니가 집안일을 주도하였다. 호적작성원칙상의 규정과 달리 16세를 넘은 아들이 같은 호에 있어도 어머니가 계속해서 그 호의 대표자로 등재되는 현상은 이러한 사회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175-6)
3부 호적의 직역
"조선왕조는 국가 차원에서 민으로부터 두 가지 형태로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호를 단위로 인정을 징발하는 요역과 개별 인신에게 직역을 부과하는 신역이 그것이다. 그것을 아울러 국가의 역, 즉 국역(國役)이라 한다. 국역은 원칙적으로 양인에게 부과된다. 호적에 등재된 호구 자체와 개개의 직역은 모두 국역이라는 개념으로 파악되었다. 단성현의 호적에서는 향청 혹은 향교, 서원(書院)에 소속되어 그 기구의 역을 지는 자들의 명칭이 호적상의 직역으로 파악되었다. 이것은 향중의 역이 점차 호적상에 표면화되어 이중적인 역체제가 '국가의 역'으로 일원화되는 경향을 말해준다." "조선왕조의 통치체계는 중앙정부에 권력이 집중되는 관료제에 입각하면서도 자치적인 공공단체의 병존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통치체계 위에 중국에서 유래한 양천신분제와 국역제도를 얹어 놓았다. '역'에 대한 모호한 개념과 서로 다른 인식은 조선의 사회현실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193-4, 198)
"군역은 번을 서든 노역을 하든 아니면 군포를 바치든 간에 각 국가기관의 인적 재원으로 확보되었다. 그런데 중앙정부가 각 기관의 역종별 군액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한, 군역은 중앙정부가 각 국가기관에 배당한 재원이라 할 수 있다. 각 국가기관은 지방에 거주하는 양인을 자기 기관에 소속시키고 그자에게서 군역을 징수하는 권리를 중앙정부로부터 위임받은 셈이다. 그러나 각 기관들은 중앙정부로부터 인정받은 군역 역종 외의 새로운 역종을 창설하거나 역종마다 배당된 군액을 넘어서서 자체적으로 군역을 확보하였다. 국가의 각종 권력기관은 군역자 총수에서 빠져나가는 궐액을 메우기가 어려워지자 이를 극복할 방법을 강구하였다. 부병하거나 노역을 담당한 군역자가 싼값에 다른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케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는 데 급급한 소속기관들로서는 이러한 사실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국가기관 스스로가 군포의 부담을 줄여 군역자를 유인하기에 이르렀다."(208-9)
"본래 국역은 양인에게 부과되는 '양역(良役)'이 원칙이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노비가 호를 구성하고 군역을 지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 굳이 양인의 군역을 운운하는 것에서도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반추할 수 있다." "숙종 초기에 호적조사를 강화하거나 군역을 확대적용하는 조치를 취한 것은 국가기관들의 군역확보 노력에 부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자의적인 활동을 일류적으로 통제하려는 중앙정부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각 기관이 군역대상자 한사람 한사람의 부담능력을 따지는 게 아니라 군역부담을 낮추는 등의 방법을 써서 무작위로 군역자를 확보하는 상황에 대해, 중앙정부가 나서서 군역을 질 만한 가족인가를 조사하고 우선 양인으로 규정되는 자들을 군역에 충당토록 하였기 때문이다. 개개의 인민에게 양천신분과 국역이 선행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양역'정책을 거치면서 신분제가 적용되고 그 원칙이 재정립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210-2)
"각종 국가권력기관의 사모속(私募屬)은 군역의 정액작업과정에서 엄격히 금지되어 왔다. 그러나 일반 군역을 피해 자발적으로 서원에 입속하는 자들이 있었고, 서원은 이들을 안외의 원속으로 파악해 두고 수시로 관안의 액내 원속으로 확정해 받으면서 인적 재원의 총액을 유지할 수 있었다. 17세기 말부터 서원 소속의 양정에 정족수를 부여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18세기 중엽 마침내 중앙정부는 원속을 비롯한 '읍소속'에 대해 정족수를 부여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후 이들의 공식적인 수치가 증대한다. 중앙정부가 지방관청 산하 제기구의 자체적인 소속자 확보활동을 묵인하였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활동이 정규의 액수로 공식화되어 전반적으로 파악될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인적 재원에 대한 파악을 중앙집권화하는 진로임에는 틀림이 없다. 역에 대한 지방자치적 운영과 중앙집권적 통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상호 결합되어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254)
"사노(私奴)는 전쟁시에 군역자의 궐액을 메우기 위해 예비적으로 파악될 뿐이었다. 1606년의 호적장부에는 사노로서 군역을 지는 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중앙과 지방의 각종 국가기관이 사노를 기관에 소속시켜 인적 재원으로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군역자는 각종의 명칭으로 중앙기관과 지방군영, 지방관청에 소속되었다. 그들은 지역을 방위하는 병사로, 기관의 집무담당자로, 혹은 병사와 기관의 재정을 지원하는 자로 군역의 의무를 수행하였다. 이에 대해 중앙정부는 각종 국가기관들의 임의적인 군역자 액수 증설행위를 막았다." "사노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기관은 주로 지방의 군사기관이었다. 양인은 우선적으로 중앙기관의 군역자로 소속되었기 때문에 지방군은 사노로써 부족한 군액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이후 지방군을 양인으로 확보하려는 정책이 시행되어 사노에게 지방군역을 부과하는 비율이 점차 감소하기는 하였으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상당수의 사노 군역자가 존재하였다."(272)
"노비는 출생과 더불어 국가에 의해 법제적인 신분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노비에 대한 사적인 징수권이 항상 안정적으로 확보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노비에게 국역이 부과되는 등, 국가권력의 통제로 말미암아 상전들은 노비의 신공수취를 위협받았다. 여기에 사노 군역자의 군역가가 양역자의 반으로 낮게 책정되면서 노비신공의 부담도 점차 낮아졌다. 군역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이것은 사노를 군역자로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상전의 입장에서는 불안한 노비소유권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사노 군역자의 입장에서는 군역부담과 노비신공부담을 합하면 양역자의 군역부담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노비와 양인이 이렇게 동등한 부담을 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양자의 경제적 상황이 크게 차이나지 않으며, 양천신분의 구분도 모호한 상황이었음을 의미한다. 사노 군역자를 둘러싸고 국가와 상전이 타협할 수 있었던 것이 단지 군역제도상의 문제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282)
"양반이라는 계층은 지역사회의 인식에 기초하여 설정되는 것으로, 전국규모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지역의 양반이 다른 지역에서도 반드시 양반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적·법제적인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양반가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야 했다. 그것은 일방적인 권력행사나 경제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었다." "19세기 호적은 실제로 양반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 양반을 지향하는 자들이 증가한 결과를 보여준다. 호적상에 양반이 즐겨쓰는 직역명을 붙이고 그 호의 부녀에게 씨 호칭을 쓰며, 노비까지 한두 명 등재하는 호 구성이 일반화되어 갔다는 사실은 바로 양반흉내를 내는 호적기재가 정형화된 것임을 의미한다." "조선 전기에는 이런 양식이 상층계급에 한정된 호구양식이었는지 모르지만, 19세기에는 모든 인민에게 균등하게 적용될 수 있는 형식이 되어 갔다. 국가는 호적상의 직역기재를 통해 백성을 고르게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한 듯싶다."(304-5)
4부 호적의 변화와 가족
"대한제국성립 직전인 1896년 9월에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과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이 공표되어 실시되었다. 새로운 호구조사는 1897년 이후 1907년에 이르는 광무년간(光武年間) 내내 계속되었다. 따라서 호구조사규칙에 의거하여 작성된 호적표를 통칭 '광무호적(光武戶籍)'이라 한다." "호구조사규칙이나 세칙에서 표명하는 호구조사방법은, 호적표의 양식을 관에서 일률적으로 민에게 나누어주면 호마다 가족상황을 기록하여 관에 납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호를 단위로 호구표를 작성한 뒤 중간에 지역 단위의 자치적인 호구조사를 거치지 않고 민이 직접 관에 신고토록 한 것은 소위 '실호실구(實戶實口)'를 파악한다는 호구파악의 대원칙을 재천명하는 동시에 현실화하려는 방안이었다. 이전부터 지역을 단위로 내려오던 호구수에 맞추어 등재 여부를 조정하고 일정한 통호번지수에 따라 하나의 장부에다가 연이어 호를 기재하는 종래의 호적기록관례와는 다른 방법이 제시된 것이다."(331-2)
"중앙정부는 호적표 작성을 통해 호주를 분명히 하고 한 호에 등재되는 구성원을 제한하려 하였다. 거기에는 호수를 늘리려는 호구정책상의 현실적인 의도가 깔려 있었다. 당시 재정과 관련된 개혁은 지방재정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정규의 조세와 더불어 지방에서 자율적으로 징수, 소비하던 모든 재원을 토지와 호에 부과하여 결호세(結戶稅)로 통일하고, 이를 국고수입으로 삼아 중앙재무기관이 일괄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이 그것이다. 호의 규모를 일정하게 제한하여 잘게 분쇄하고 그런 호를 가능한 한 늘리면서 호에 대한 책임을 호주 한사람에게 확정지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지역내 호구 총수를 맞추기 위한 기존의 호구편제와는 달리 생활공동체로서 실제로 동거하는 가족을 하나의 호로 파악하고자 했다. 즉 호세징수와 관련하여 호수를 최대한 늘리려는 의도에 앞서 현실상의 가족과 인구를 있는 그대로 조사하려 한 것이 갑오개혁의 호구파악방안이었다."(335-6)
"1909년 통감부는 (호적을 새로 명명한 이름인) '민적(民籍)'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민적법을 발표하여 새로운 민적조사를 시행하였다." "명치유신(明治維新) 직후인 1870년만 해도 일본은 종래에 지방마다 제각기 시행해 온 '인별장(人別帳)' '종문개장(宗門改帳)'에 준하여 일본 국내의 호구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지방행정구역을 중앙집권화한 뒤인 1872년에야 비로소 전국규모의 호적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소위 '임신호적(壬申戶籍)'이다. 초기의 명치호적에는 화족(華族), 사족(士族)과 같은 족적(族籍)을 기록하였으나, 점차 모든 신분층에 일률적인 호구양식을 부여해 나갔다. 명치호적은 호구를 정기적으로 재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한번 작성한 후에는 호구의 변동사항만을 확인하는 장부였다. 호 구성원의 개별적인 변동사항이 발생할 때마다 수시로 호적을 갱신하였다. 조선의 민적은 이러한 명치호적의 양식에 준하여 작성되었다."(355-7)
"1910년대 중엽의 민적법은 전호주가 사망하였을 때에 한해서 호주가 게승되며 장남은 분가할 수 없다고 규정하게 된다. 이 규정은 호주승계 및 분가와 관련하여 식민지 당국이 잘못 인식한 조선의 관습에 근거를 두었다. 1914년 총독부 경무과 민적계에서 편찬한 『민적요람(民籍要覽)』에는 민적법상 '분가를 허락하지 않는 자'에 대한 조항에 상속과 관련된 조선의 관습이 언급되어 있다. 〈장자상속주의를 취하는 조선에서 장남은 가(家)를 상속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분가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아가 장남 이외의 자라도 〈조선에서 여호주(女戶主)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 예외적으로 인정한 것이므로 여자의 분가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성은 분가에 의한 호주권의 취득, 즉 새로운 가족을 형성할 권리를 제한받은 것이다." "결국 민적법은 조선의 관습을 인정한다는 미명하에 관습의 이름을 빌려 일본의 호적법을 식민지 조선의 인민파악에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374-6)
"일본 명치정부의 호적은 1898년 이후 본적지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명치 초기 호적법에는 호주가 호적변동사항에 대해 신고하는 것 외에 호주의 호에 대한 권리나 의무를 명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1898년에 민법이 성립함에 따라 사권(私權)으로서 호주의 권리와 의무가 분명해졌다. 이에 따르면, 호주는 가족 구성원의 입적 및 제적에 대한 권리와 거주이전에 대한 명령 및 거부권을 갖는다. 가족이 이에 따르지 않을 때에는 그에게 양육비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며, 제적시킬 수 있다. 이러한 일본 호적법의 전환과정이 그대로 조선의 민적법에 적용되어 간 것이다." "본적지주의에 근거한 호적제도는 유동적인 인구를 혈연적인 가족에 근거하여 파악함으로써 인구등재 누락을 최소화하는 인민파악방법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범죄자에 대한 파악이나 그 가족에 대한 연좌제 적용이 쉬워져 국가가 인민을 장악하기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국가주의적 혹은 식민지적인 성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376-9)
"여러 족보가 작성되던 1920년대는 이미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민에 대한 국가적 신분규정이 사라진 때이다. 그러나 동성동본의 혈연집단을 형성하려는 족보의 편찬은 전보다 더욱 활발해졌다. 당시의 출판물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족보와 개인의 문집(文集)이다. 문집은 개인의 한문학 및 성리학 수양과 동류배와의 교류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도 상층계급이 갖추어야 할 교양의 하나였다." "조선 후기의 족보는 부계 구성원의 정통성을 증빙함으로써 혼인관계의 정당성을 표명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동일 신분이 아니라면 부계 구성원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족보에는 부모의 신분적 구별에 의거하여 등재 여부가 결정되었다. 족보등재의 결정요인인 신분은 부모의 혼인관계에 기초하여 구분되었다. 말하자면, 족보는 통혼권(通婚圈)이라 하는 정당한 혼인범위 내에서 신분집단을 형성하기 위한 증빙자료였던 셈이다."(393)
에필로그 호적의 현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