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위대한 청나라'와 '문명의 계승자' 사이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고두叩頭의 예를 행함으로써 병자호란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다.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에게 왕이 머리를 조아렸다는 사실에 조선의 선비들은 분노했다. 패전의 상처는 강요된 조형물로도 남았다. '삼전도비'로 더 많이 알려진 '대청황제공덕비'가 그것이다. 앞면은 만주문과 몽골문, 뒷면은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 조선의 잘못과 청나라의 시혜 등에 관한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다. 글을 지은 사람은 이경석(1595~1671)이다." "이경석의 손자인 이하성은 1703년(숙종 29)에 올린 상소에서 비석의 제작 경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주상께서 타이르시기를, '이는 바로 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린 일이다. 뒷날 자강自强하는 일은 오직 내 몫이다. 다만 마땅히 문자文字는 그들 뜻에 힘써 맞추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신의 조부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군주의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여겨 은인하며 명령을 받들었습니다.〉"(33-4)
"청나라 입장에서 보면 이 비석은 만몽한을 아우르는 제국의 상징물이자, 청나라가 조선에 시혜를 베풀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강희제는 서양 선교사들을 동원해 중국 전역을 천문측량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지도를 편찬하게 했다. 그것이 바로 〈황여전람도〉다. 이 지도는 옹정제와 건륭제 때 계속 수정되었다. 이 도엽 중에는 조선 전도도 들어 있다. 청나라가 조선을 직접 정복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조선 전도에서 비각이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강희제 때 편찬된 판본에는 한강가에 만주어로 버이bei라는 지명이 적혀 있다. (삼전도비를 가리키는) 비碑를 뜻하는 한어의 음가를 만주어로 음차한 것이다. 옹정제와 건륭제 때의 판본에는 한강가에 (삼전도 비각을 기리키는) 비정碑亭이 보인다." "비석을 본 조선 지식인들에게 남은 것은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18세기에 만들어진 20리 방안 군현지도집에서도, 김정호의 지도집에서도 비각의 존재가 선명하다."(63-5)
"1666년(현종 7), 노년의 김수홍(1601~1681)은 마지막 남은 소망 하나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예론을 주장하는 것이 예치가 구현된 세상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라면, 지도를 펴내는 것은 과거에 예치가 구현된 땅과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김수홍의 입장에서 보면, 그 땅과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현실에서 그런 땅, 그런 역사를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론과 지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라는 지도의 제목은 김수홍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지도를 통해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를 말해준다. '천하'는 당시의 세계, '고금'은 옛날과 오늘날, 즉 역사를 뜻한다. '대총편람'은 '망라하여 살펴보겠다'는 뜻이다. 김수홍은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와 그 역사를 한 장의 도면에 그리려 했다." "그는 단순히 중원대륙과 그 주변을 공간적인 차원에서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중원대륙의 역사 가운데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었다."(66-70)
"김수홍은 〈천하고금대총편람도〉와 〈조선팔도고금총란도〉에서 고금의 지명과 그 땅에서 나온 인물을 기록했다. 그런데 이 두 지도 어디에서도 청나라의 존재감을 읽어낼 수 없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의 '고금'古今은 역사적 인물과 당대의 인물을 뜻하지만, 적어도 '今'은 명대를 넘어 청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에서 중원대륙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강조된 곳은 조선이다." "28수가 비치는 땅은 중원대륙이고 그 중원대륙에 중화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문화적 원형질이 내재되어 있다면, 조선이 소중화 혹은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중원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28수의 기미 분야에 해당하는 유주幽州가 조선의 역사적 영토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가장 강력한 연결고리가 된다. 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생각하는 조선 지식인이라면 이제 기미 분야의 조선을 소중화 혹은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로 설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80-2)
# 28수 : 적도 부근의 28개의 별자리
2부 지리와 풍토론은 어떻게 중화관을 형성했는가
"원 간섭기의 고려 지식인들은 몽골을 중국 혹은 중화라고 부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몽골이 중원대륙을 지배하고 유교문화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명나라가 대륙의 주인이 되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여말선초 유학자 집단을 대표하는 정몽주조차 중국 혹은 중화를 말할 때 형세와 명분을 두루 고려했음을 감안한다면, 당시 관료들이 대부분 형세론적 화이관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다만 정몽주가 천명을 빌려 중화를 설명하는 방식은 기억할 가치가 있다." "정몽주의 논리에 따르면, 원나라가 '스스로 파천을 자초한 의롭지 못한 나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형세 때문은 아니다. 더 이상 중원대륙의 패자가 아니기 때문에 중화가 아닌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중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파천을 자초했다는 의미다. 중화는 천명을 받은 의로운 자의 몫인 것이다. 정몽주에게 천명과 명분은 결코 형세를 치장하는 도구만은 아니었다."(93-6)
"그렇다면 고려는 화이의 틀로 설명할 수 있는가. 고려시대의 다원적 천하관은 다음 두 가지를 논거로 삼고 있다. 하나는 소천하 단위별로 풍토와 기질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고대의 강역을 역사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문화적 자주성과 유구한 역사에 대한 인식이 다원적 천하관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주목할 점은 다원적 천하론자들이 자국을 소천하로 설정하는 과정에서 지덕地德, 즉 지기地氣의 작용을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고려시대의 자주적 유신, 나아가 다원적 천하관의 소유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풍토와 기질의 차이, 역사 계승의식 등을 물려받았다. 그들은 고려시대의 자주적 유신 혹은 다원적 천하관의 소유자로부터 풍토와 기질의 차이, 유구한 역사에 대한 자부심, 지덕의 작용을 긍정하는 정서를 이어받는 한편, 모화주의자 또는 화이론적 천하관의 소유자로부터 명분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의 중요성을 배웠다."(99-100)
"조선은 해외海外의 나라인가 아닌가. 한글 창제 당시 거론된 논점이다. 정인지(1396~1478)는 풍토風土가 다른 문자(漢字)를 빌려 조선의 소리를 표현할 것이 아니라 자기 소리를 표현하는 문자, 풍토에 맞는 문자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중화의 예악과 문물을 추구하는 나라지만, '외국'外國의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문자를 가지는 것이 맞다는 주장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훈민정음은 '외국'의 소리로 '외국'의 글자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창제된 것이다." "정인지의 풍토부동론은 조선이 '외국'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정인지가 말하는 '외국'은 '중국에 대한 외국'이다. '외국'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을 '외'外로 만드는 중심으로서 중국이 전제된다. 풍토의 차이로 인해 다른 어떤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조선이 '이적'이 아니라 '외국'인 한, 그 선택은 중국과 외국을 아우르는 보편문화의 테두리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124-6)
"홍대용(1731~1783)은 '화'와 '이'의 구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공자가 바다를 건너와 구이九夷의 땅에서 살았다면 화제華制를 써서 오랑캐의 습속을 변화시켜 주나라의 도를 역외域外에서 일으켰으리니, 내외의 구분과 존양의 뜻이 스스로 마땅히 역외춘추에 있었으리라.〉 공자가 구이에 와서 살았다면 역외춘추가 내內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은 〈인간의 노력에 따라 누구나 중화가 될 수 있다〉는 말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주장이다. 그러나 그 안에도 전제가 있다. 내와 외는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분되어 있다. 구이의 땅을 역외라고 말하는 것은 중원대륙을 구역九域 혹은 구주九州의 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는 이미 이런 구분법을 인정한 것이다. 역외의 인간은 다만 역외에서 춘추를 구현할 수 있을 뿐이다. 거꾸로 말하면, 춘추가 구현된 그 땅이 여전히 역외인 한 역외를 구역 혹은 구주의 땅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지리적 중화관과 풍토부동론의 흔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164)
"풍토부동론은 조선이 '해외의 나라' 혹은 '방외의 별국'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 지리적 위치 때문에 풍토가 중국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이 해외의 나라라는 사실을 늘 그런 방식으로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조선이 '해외의 나라'임에도 소중화인 것은 그 풍토가 중국과 동일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하영(1741~1812)은 중화를 '동일한 풍토와 규모의 차이'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이 소중화라고 불린 것은 기본적으로 예악과 문물이 중화를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예악과 문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산천의 풍기 또한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대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론계 지식인 이종휘(1731~1797)의 눈에 비친 조선은 예악과 문물이라는 역사문화적 전통을 계승한 나라이며, 명청 교체 후 중화문화를 유일하게 계승하고 있는 나라다. 공자가 말한 동주東周, 맹자가 말한 선국善國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그런 나라이다."(167-72)
3부 조선은 왜 만주 지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임고타林古打는 만주어 '닝구타'ningguta를 음차한 것인데, 조선 후기 사람들이 늘 만주족의 발상지로 기억했던 영고탑과 음가가 같다." "효종 대는 영고탑 회귀설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점이며, 조선이 유일한 중화로 자신을 분식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영고탑 회귀설은 寧古塔 혹은 寧固塔이 임고타를 대신해서 닝구타의 지명으로 굳어지는 시점에서 조선의 중화주의적 사고가 청나라의 운명적 멸망을 전망하는 쪽으로 이어지면서 탄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청나라가 북경에서 영고탑으로 이동할 때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조선의 서북 지역과 만주 일대의 지리에 대한 판단이 중요해진다. 조선 지식인들은 심양-길림(울라)을 거쳐 영고탑까지 가는 길이 험하고 먼 우회로인 반면, 조선의 서북 지방을 경유하는 길은 훨씬 완만한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렇게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만일 지리적 형세가 실제로 그렇다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197-9)
"남구만은 청나라가 영고탑으로 돌아간다 해도 만주를 경유하는 쪽이 조선의 서북 지대를 경유하는 쪽보다 험하지도 않고 가까울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만주 지리서를 확보하고 싶어했다." "마침내 1697년(숙종 23)에 입수한 성경지에는 『대명통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지리 정보가 담겨 있었다." "숙종도 성경지를 보고 백두산 남쪽 자락과 관련된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구만은 청나라가 성경(심양)에서 영고탑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지리적 여건상 조선을 경유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몽골이 변수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까지 논증하지는 못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이이명도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조선 지식인들이 청나라의 운명적인 몰락을 예견하는 한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다. 결국 성경지의 지리 지식이 보급되었지만 영고탑 회귀설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위력을 발휘했다."(200-5)
"다양한 만주 지리서가 도입되면서 영고탑 회귀설은 차츰 약화되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늘 '오랑캐에게는 100년의 운세가 없다'고 말해왔고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지만, 이미 그 '오랑캐' 나라는 100년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이 논리는 19세기까지도 완전히 불식되지 않았다." "1860년 서양 세력에 의해 북경이 함락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조선에서는 서양의 침략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과정에서조차 영고탑 회귀설의 흔적이 보인다는 점이다. 1861년 훈련천총 윤섭이 방어책을 올렸다. 청나라가 서양 세력에 의해 중원에서 밀려난다면 반드시 요양遼陽 방면으로 동진東進하여 조선을 침략하리라는 주장이었다." "조선이 중화문화의 유일한 담지자라고 생각하는 한, 청나라는 아무리 번성한 문물을 가지고 있어도 본질적으로 늘 타자일 수밖에 없었다. 영고탑 회귀설이 1860년대까지 그 그림자를 드리웠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220-1)
4부 변경과 역사적 고토는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청나라 때 편찬된 만주 지도와 지리서들은 조선이 당면한 정치적 이슈를 해결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런데 학술적인 관점에서 볼 경우 다른 문제들이 있었다. 이 문헌들에서 소개된 정보들은 조선이 백두산과 북만주에 대해서 알고 있던 지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만부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성경지의 기록을 비교하면서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제외하고는 백두산에서 흘러나가는 물줄기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이만부에 따르면 압록강과 두만강은 국경이어서 조선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데 비해 그 위쪽은 전문傳聞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청나라의 기록과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정계 이후 조선 지식인들은 백두산과 그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여러 고지도 중에는 토문강과 두만강의 수원을 별개로 보거나 분계강을 설정한 것이 적지 않다."(267, 272-3, 285-6)
"이익은 단군과 기자에 의해 이어져오던 정통이 기준箕準에 의해 삼한三韓으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삼한정통론은 안정복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만일 삼한정통론을 승인한다면, 요하 일대 혹은 북만주 일대에서 자국 고대사의 흔적이 발견된다고 해서 그 중요성이 모두 똑같지는 않다. 그것이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이라면 중화와 정통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고구려나 부여나 발해라면 사정이 다르다. 요동과 북만주에서 아무리 넓은 영토를 차지했더라도 이 나라들은 정통이 아니다." "송시열은 고토故土가 어디까지인지, 나아가 고토를 회복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왜일까. 청나라에서 1684년(숙종 10)에 처음 간행된 성경지는 송시열이 죽던 1689년(숙종 15)까지 조선에 수입되지 않았다. 만주 지리서를 본 적이 없는 송시열에게 고토의 영역을 자기 시대의 위치값으로 고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300)
"고토에 관한 이슈는 백두산 정계定界 문제로 이어진다. 이익은 정계 때 두만강 이북 700리에 있는 선춘령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두만강의 원류만을 찾으려 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토문강의 원류를 찾아서 경계를 따진다면 선춘령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 조선의 영역이 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 당시 당국자의 잘못이 크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고토론자의 면모다. 그러나 그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그다음부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것을 갑자기 찾으려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데다, 방수防守의 부담이 장래에 큰 걱정거리가 되리니, 반드시 영토를 넓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지금 사대事大하여 도움이 되는 데다가 변방의 근심이 사라졌으니, 그 땅을 얻으려 하다가 도리어 문제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익의 제자였던 안정복 역시 정계 문제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왕자王者의 다스림은 덕에 힘쓰는 것이다. 땅에 힘쓰는 것이 아니다.〉"(301-3)
"이종휘(1731~1797)는 이익이나 안정복처럼 고토 회복에 무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신채호가 높이 평가할 정도로 적극적인 고토 회복론자였다." "이종휘의 논설 「취요심」은 그가 고토를 어떤 맥락에서 보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를 준다. 이종휘가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고토는 요심, 즉 요동 지역이다." "이종휘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이 요동을 오랫동안 치지도외置之度外해온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요동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단순히 그곳이 고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천하에 변란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이 땅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요심을 취하지 않으면 양계兩界를 보존할 수 없고, 양계를 보존할 수 없다면 '동국'東國 또한 그에 따라 이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종휘에게 고토는 조선이 이적으로 변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데 필요한 장소다. 이종휘의 고토 회복론이 재래의 화이론에 기반한 것이라는 평가는 그런 점에서 옳다."(305, 309)
"이종휘에게 고토 회복은 오랑캐로부터 중화문명 국가 조선의 문화를 지키기 위한 행위다. 이 점에서 고토를 말하면서도 덕치德治를 강조한 이익이나 안정복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고토 회복을 영토 확장의 문제로만 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분계강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분계강을 주장하는 모든 논자들은 분계강을 자국 고대사의 중심무대로 보지는 않았다. 그들은 분계강이 변경 혹은 국경이 되어야 한다고만 말했다. 분계강이야말로 순수하게 영토적인 아젠다였다." "1884년 지견룡이 올린 상소에 따르면, 국경을 넓히는 일은 자강을 위해 필요한 일이며, 자강은 내수를 위한 전략이다. 국경을 넓히는 일이야말로 곧 내수를 위한 선결 과제가 된다. 지견룡의 논리는 '외양外攘을 위해서 내수해야 하고 내수를 위해서는 군주의 공구수성恐懼修省이 가장 중요하다'는 시대적 논법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세계 각국이 대소를 따지지 않고 교섭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323)
5부 중국 밖의 세계와 지리적 시야의 확대
"조선이 처음부터 유구(오늘날의 오키나와)를 중화문화 국가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유구가 재상의 자제들을 명나라에 보내 공부하게 한 사실은 이미 조선 초기에도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유구의 문화는 일본적이거나 비유교적이며, 심지어 야만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조선 초기의 소중화 의식은 당시의 조공책봉 관계와 모순되지 않았다. 그러나 명청 교체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의식 속에서 청나라와의 조공책봉 관계는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굴레였을 뿐이다. 버거운 현실일 뿐 지향해야 할 세계는 아니었다. 그런 청나라와 조선이 세계를 보는 방식이 같은 수는 없는 일이다. 청나라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조공책봉 관계에 기초해 세계를 이해하려 한 반면, 조선은 중화문화적 정체성을 기준으로 세계를 보려 했다. 유구라는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도 그런 차이가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조선 지식인들은 유구 문화 자체가 얼마나 중화적인가에 더 관심을 쏟았다."(351-2)
"이덕무가 하이도(오늘날의 훗카이도)에 주목한 것은 일본이 하이도를 경유해 조선을 침략할지 모른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오래전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이도를 통해 조선을 치려 했다고 말해왔으며,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이런 견해를 듣게 되었다. 이덕무는 경험적으로 볼 때 이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고 판단했다. 유사 이래 왜구는 규슈와 쓰시마 일대로 들어와 조선의 서남해안을 노략질했으나 동해안은 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덕무에 따르면 일본의 지형이 사람'인'人 자 혹은 들 '입'入 자와 같아서 조선의 동해와 남해 두 바다를 마주하고 있지만, 동해 쪽은 파도가 높고 바람이 많아서 군사적인 근심거리는 없었다 한다. 그러나 이덕무는 표류인의 진술을 통해서 하이도가 지금의 연해주와 매우 가까우며, 조선의 함경도와도 멀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생각보다 지리적으로 가까워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361)
"1402년 조선에서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하 강리도)는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등 구대륙 전체를 망라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확대된 세계 안에는 여전히 지리적 중화관이 내재되어 있다. 단순히 중원대륙의 크기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중원대륙의 서쪽 전체가 극도로 왜곡된 현상 역시 지리적 중화관이 작동한 결과이다. 〈강리도〉는 새로 알게 된 넓은 세계와 전통적인 중화세계관이 모두 표현된 도면이었다." "〈강리도〉가 '넓은 세계'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그림이자 통치의 정당성과 이념을 보여주는 자료로 여겨졌지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지도에는 한자의 의미가 통하지 않는 번역 지명이 무수하게 등장했다. 이 번역 지명들 중 대부분은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 나아가 그 안에서 설명되는 '천하'와 어울리지 않는 점이 있었다. 번역 지명이 주었을 거부감이 희석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문異聞을 넓힌다'는 정서였다."(379, 399)
"이문은 신기한 이야기나 믿기 힘든 이야기이며, 또 사실관계를 확정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나라 안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이거나, 명 중심 국제질서의 안팎에 있는 나라들에서 전해진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때로 그것은 현실의 조공책봉 체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곳에 관한 이야기, 혹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문은 조선에서 신뢰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유교적 합리주의자라고 해야 할 조선 지식인들로서는 사실관계를 확정할 수 없는 어떤 논의도 공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성리학적 세계관이나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공인되거나 혹은 이단으로 판명되지 않는 한, 어떤 종류의 이문이라도 그 존재 의의가 부정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보다 넓은 영역을 보여주는 〈강리도〉가 제작된 점, 그 사본들이 16세기까지도 계속 복제된 점은 모두 '이문을 넓힌다'는 말의 정당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399-401)
6부 세계의 인식과 지리적 중화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한역 서구식 세계지도는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중에는 '서양'(대서양과 소서양)도 들어 있었다. 정화의 항해를 계기로 중국의 조공권에 편입된 수많은 인도양 국가들을 '서양'으로 부르던 중국인들은 당연히 마테오 리치가 말하는 서양이 그 일부인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테오 리치가 말하는 '유럽으로서의 서양'은 사실상 중국인들이 말해왔던 인도양 국가로서의 서양과 달랐으며,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새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사이四夷 관념을 버리지 않는 한 중국인들은 마테오 리치의 서양을 어떤 식으로든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청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유럽으로서의 서양은 새로운 이역, 인도양 국가로서의 서양은 전통적인 이역이었을 뿐이다. 『대청일통지』는 사이四夷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이역, 즉 유럽으로서의 서양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이역과 전통적인 이역과의 구분선은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416-8)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말한 서양은 구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서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단어였다. 그가 말한 불랑기국이 오늘날의 포르투갈에 해당한다고 해서 이수광이 '유럽을 말하려 했다'고 본다면 그것은 난센스다. 이수광이 말하려 한 것은 유럽 국가 포르투갈이 아니라 타이의 서남쪽 바다에 있는 해양국가 포르투갈이다. 영결리국과 남번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지봉유설』에서 언급한 외국 가운데 구라파국을 제외한 그 어느 나라도 유럽 국가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수광이 유럽을 어설프게 알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유럽으로 표상되는 '넓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자기 나름의 스토리 구조 안에 담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를 이미 알고 있는 땅에서 시작되는 몇 갈래의 '땅끝'으로 설명했다. 철전鐵甸에서 이어지는 '북쪽 땅끝', 회회국에서 시작되어 불랑기국을 거쳐 영결리국에 이르는 '서쪽 땅끝', 그리고 확대된 서역 끝자락으로서의 구라파국 등이 그런 것들이다."(449-50)
"그렇다면 이수광의 세계관이 보통의 유학자들과 같았다고 보아도 좋은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이수광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은 세계를 결코 중국과 조선 중심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화문화를 '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이나 '소중화'인 조선만이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점에서 그런 면모가 엿보인다. 그는 전통적인 지리 관념을 변형하고 재해석해서 세계를 설명하려 했다." "〈이 북황의 바깥으로 어찌 또 『삼재도회』에 적혀 있는 세계와 같은 곳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가 '세계'世界라는 말을 구사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당시 '세계'라는 단어는 십방十方을 의미하는 불교적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삼재도회』에 실려 있는 도면 가운데 규모 면에서 거기에 해당하는 것은 서구식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식 세계지도를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적 규모와는 다른 어떤 세계의 존재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었던 것이다."(451-2)
"조선 사회에서 서구식 세계지도가 보급되기 시작한 17세기는 신선설神仙說이 대두했다가 쇠퇴하는 시기였으며, 명청 교체에 따라 중화관념이 변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노장사상 혹은 신선설은 이미 16세기부터 주목받았다." "17세기 초에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양생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이수광은 유학자이면서도 무위자연과 자기절제를 강조하는 도교의 양생설에 심취해 있었으며, 노자와 장자의 글도 편견 없이 평가했다. 그러나 개방적 학풍의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신선설은 곧 강화되어가던 중화주의에 묻혀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사회에서 중화와 이적,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문제가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이수광의 노장적 취향은 이단 학문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조식(1501~1572)과 서경덕(1489~1546)의 문하생들은 입지가 약화되어 독자적인 그룹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양생설이나 도교적 취향은 학문적으로 더 이상 용인되기 어려웠다."(473)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지식인들이 추연이나 육합을 거론하거나, 땅과 바다의 관계에 대한 『중용』과 『주자어류』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구식 세계지도 때문이었다. 서구식 세계지도를 전통적인 직방세계의 바깥, 혹은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세계를 묘사할 수 있는 동양 고대의 모델을 통해서 이해하려 한 그들은 그 세계상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을 신선적·도교적 문헌에서 발견했다. 서구식 세계지도는 신선설이 쇠퇴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도교 계통의 문헌이 다시 주목받는 근거가 되었다." "'바다 밖에 땅이 있다'는 세계 구성을 인정하는 것은 결국 서구식 세계지도의 세계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동시에 성현이 말한 진실을 재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서구식 세계지도가 보급되면서 도교적 문헌이 재발견되고 바다 밖에 땅이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상황은 매우 독특하고 흥미로운 도면으로도 표현되었다. 사람들은 이 도면을 '천하도'天下圖라고 불렀다."(473-4)
# 추연 : 전체 세계는 아홉 개의 주로 나뉘어 있고, 각 주는 비해라는 바다가 둘러싸고 있다고 주장한 전국시대 음양가의 사상가, 육합 : 십이간지를 배합한 방위 개념으로도 사용되지만, 일반적으로 상하와 사방을 의미하는 용어
7부 중화세계관이 그린 마지막 궤적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소중화로서 혹은 '조선 중화'로서 자신을 설명하려고 할 때 그 출발점은 늘 기자였다. 물론 '공자가 구이의 땅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논어』의 기록도 자주 인용된다. 송시열은 공자가 동방을 문명의 땅이나 살 만한 곳으로 여겼다고 보았다." "제후국 조선이 가진 문화의 전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공자보다 오래된 인물, 그리고 제후로서 조선을 문명화한 인물이 필요했다. 기자는 그렇게 '재발견'되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명청 교체 후 조선이 간직한 중화문화는 공자의 문화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기자의 문화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1910년 연해주에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했던 유인석이 여전히 기자를 중시했던 것은 그가 중화문화의 보편성을 첫 번째 가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유신석의 사례에 비추어본다면, 1910년대 연길 이주자 사회의 유학 지식인들이 기자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중화문화의 계승자로 간주하지 않았음을 뜻한다."(522-3)
"공교孔敎가 공자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인 한 당연히 유교문화권 안에서는 공유될 수 있는 자산이다. 그러나 김정규에게는 공자가 '화'華와 '한'韓에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화와 한이 엄연히 별개라는 사실은 더 중요했다." "조선의 유학 지식인들은 예외 없이 중화세계의 보편적 가치를 굳게 믿었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추구한 것은 중화세계의 재건이었다. 김정규의 스승인 유인석도, 그리고 심양에서 동북삼성공교회를 설립한 이승희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김정규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교지회를 통해 이주자 사회의 유학 지식인들을 결집시키고 그 아이들에게 '조국'을 잊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보편적 가치인 공자의 가르침은 그에게는 '조국'이라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을 뿐이다. 신학문은 제대로 된 손가락 역할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아야 하며, 그 손가락이 제대로 된 손가락인지도 살펴야 한다. 김정규의 인식은 그런 것이었다."(539-43)
"조선과 기자를 지우려 했던 김정규, 조국 정신에 입각해 귀화를 반대하던 김정규, 신학문에 대해 투쟁하던 김정규, 그리고 공자로 조국을 가리키던 김정규. 이는 그와 문제의식을 같이 했던 1910년대 연길 이주자 사회의 유학 지식인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던 차에 이주자 사회에도 3·1운동의 기운이 꿈틀거리면서, 연길과 연해주를 아우르는 독립군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면 전환의 기회를 맞은 김정규는 이주자 사회의 유학 지식인들을 결집하여 의군義軍을 편성하고, 연해주 의병 세력과 제휴하여 의군부 결성을 추진했다." "그에게 '의'란 '충후예의한 민족'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에게 '소중화'란 제후국의 표상이 아니라 '의를 간직한 민족'의 아이콘일 뿐이다. 대성중학교의 설립을 주도한 김정규는 단 한 번도 '대한국'의 백성이 아닌 적이 없었다. 공자를 들어 조국을 가리키는 것. 김정규에게 공자와 대종교, 나아가 중화와 중화세계는 그런 의미였다."(543-5)
"조선을 현실의 중화로 여기면서도 중원대륙에 중화국가가 들어서기를 기대하는 정서는 송시열에서 이항로까지, 다시 이항로에서 최익현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그러나 최익현이나 유인석은 송시열과 전혀 다른 정치적·문화적 환경에 있었다. 그들은 일본의 침략과 서세동점이라는 새로운 위기 상황에서 조선과 중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구현해야 했다." "최익현에게 당시의 세계는 두 개의 패러다임이 충돌하는 현장이다. 개화하고 경쟁하려는 야만의 패러다임과 개화하지 않고 중화 질서를 지키려는 문명의 패러다임이 그것이다. 그 갈림길에서 공법 질서를 버리고 중화 질서를 택한 것은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중화 질서를 택하지 않는 일본을 규탄하기 위해 그가 구사한 논리가 흥미롭다. 아무리 개화하고 경쟁하는 공법 체제라 하더라도 일본이 그 질서 안에서나마 생존하길 바란다면 (중화 질서의 이론적 근거인) 신의와 도라는 보편적인 원칙을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다."(563-5)
"최익현은 오랜 시간 적대적 타자였던 청나라를 어떻게 전략적 제휴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누구보다 깊이 생각한 사람은 유인석이었다. 유인석이 청나라를 전략적 제휴의 대상으로 본 것은 동양과 서양의 대결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중화세계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금수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이적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상황 논리다." "'자주독립'할 수 있게 된 상황이라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능력이 있는데도 '중국'을 섬긴다면 사람들의 의혹을 풀기 어렵지 않겠는가.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이 질문에는 서구 국가 시스템과 공법 체제라는 틀이 전제되어 있다. 결국 문제는 '자주독립'할 것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서구 국가 시스템과 공법 체제하의 세계 질서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중화세계 재건의 당위성을 믿는 유인석은 '자주독립'이라는 용어가 전제하는 그 틀 자체를 거부했다."(566-8)
"유인석에게 세계란 중화를 본질로 삼는 가치적인 질서이며, 동시에 위계적인 질서여야 한다." "유인석은 궁극적으로 일본의 반성을 전제로 동아시아 문명권을 건설하려 했다. 표면적으로는 왜양일체론을 견지했던 최익현이 일본의 반성을 전제로 동아시아 삼국의 연대를 희망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사람 모두 동아시아 문명권과 서양이 대립하는 전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문명의 주체에 대한 아이디어가 같지 않다. 유인석은 청나라에 대해서는 전략적 제휴의 대상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확장된 화동華東의 일원이 될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중화문화를 보존해온 조선, 중원대륙에 들어설 가상의 중화국가, 반성과 성찰이 전제된 일본이 이루게 될 '확장된 화동'이야말로 '유교적 동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화는 조선왕조를 앞뒤로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라고 해도 좋다. 유인석의 '유교적 동양'은 그 중화론이 그려낸 궤적의 끝자락을 장식했다."(568, 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