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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님의 서재
  •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 유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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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01
  • : 307

머리말


"조선시대의 지배계급인 사대부계급은 '중소규모의 토지·노비 소유를 표준적인 경제적 토대로 하고, 자신들이 정치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강하게 가진 지식계급'이었다." "사대부에 대한 기존의 이해가 가진 문제점을 살펴보면, 첫째, 사대부계급의 일차적인 특성에 대한 이해이다. 즉 물질적 기반과 지식-인문학적 교양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 특성이냐 하는 문제이다. 양자는 비중상의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것이지만 굳이 하나를 선택한다면 지식-인문학적 교양이 더 중요하다고 해야 한다. 지주가 아니어도 사대부로 대접받을 수 있지만 지식-인문학적 교양이 없으면 사대부로 대접받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째,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이해이다. 사대부의 표준이 중소지주라는 것은 반드시 중소지주의 수가 가장 많다는 산술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중소지주의 이해가 대지주의 이해보다 우선적으로 관철된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부의 크기와 사회적 지위가 직결되었던 서구 중세의 영주계급과 명료히 대조된다."(7-8)


"셋째, 사대부의 시기별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이해이다. 여말선초에는 사대부가 문벌사회에서 사대부사회로 역사를 한 단계 진전시키는 진보적 역할을 연출했다면, 사대부사회 해체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가 보수·반동적 역할을 연출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조선 후기 사대부의 모습으로 조선사회의 사대부계급을 평가하고 전체 조선시대상을 묘사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넷째, 사대부와 성리학의 관계이다." "문제는 사대부계급의 성향을 비롯한 조선사회의 여러 특징을 지나치게 성리학의 일방적인 영향의 결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딱 잘라서 말한다면 성리학이 조선사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의 사대부가 조선시대 성리학의 사회적 성격을 결정하였다. 사회를 운영하는 데, 그리고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충족시키는 데 성리학을 적극 활용하였고, 마침내 조선 고유의 특징을 가진 '조선성리학'을 만들어 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제까지의 설명은 주객이 전도되었던 셈이다."(8-9)


1부 조선시대에 대한 기존의 통념과 연구의 반성


"명치유신 이래 서구 배우기에 전력을 기울였던 일본은 그 과정에서 서구중심주의사관에 빠지게 되었다. 서구중심주의사관의 수용은 일본으로 하여금 서구에 대한 열등감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들도 서구와 마찬가지로 세계사의 단계적인 발전을 밟아나갔다는 것으로 자위했고, 그 점에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예외적 존재라 주장하며 과거 문화적 선진국이었던 중국과 한국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려 하였다. 일본의 중세는 서구의 중세와 같은 '봉건사회'였다는 것이 일본사의 세계사적 발전 단계 이행론의 핵심적 논거였다. 이에 따라 한국사의 정체성론의 핵심적 논거도 한국의 '봉건사회결여론'에 두어졌으니 20세기 초 후쿠다 도쿠조는 당시의 한국사회의 수준을 일본의 고대에 해당하는 후지와라 시대─AD 894년 이후 약 3세기에 걸친─비정하기까지 하였다. 즉, 서구중심주의사관 자체가 서구가 비서구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식민사관이라 할 수 있다."(27-8)


"자기 부정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 정체성론'에 맞서 등장한 '내재적 발전론'은 고대 노예제사회·중세 봉건제(농노제)사회·근대 자본주의사회라는 '사회구성체에 입각한 서구 삼구분이 시대구분법을 한국사에 적용하여, 민족 내부의 역량으로 우리의 역사가 단계적으로 발전해 왔음을 입증하려는 노력이다." "내재적 발전론의 핵심은 조선 후기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맹아'를 입증하는 데 있다. 내재적 발전론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농업생산력의 발전이나 상공업의 발달이 제시되고, 실학은 근대 사상의 여러 요소를 담고 있는 것으로 상정되었다." "그러나 점차 치명적인 문제점도 노출되었다. 조선 후기 농민층의 양극 분해나 '경영형 부농'의 존재 입증과 같은 실증상의 문제도 제기되었지만, 설사 자본주의 맹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왜 우리는 싹만 틔운 채 자본주의를 개화시키는 데는 실패했는가 하는 의문은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32)


"1960~70년대까지의 개설서들은 조선사회의 신분제가 유례없이 엄격하고 폐쇄적임을 단호한 어조로 묘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통설은 시각뿐만 아니라 실증 면에서나 방법론 면에서도 치명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실증 면에서 신분간의 차등에 대한 설명은 사실에 반하거나 사실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주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과거나 관직을 독점한다는 양반의 특권 주장이다. 둘째, 방법 면에서 신분과 계급이나 계층 같은 집단 범주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고 모두를 같은 차원에서 다루는 결함을 갖고 있다. 계급으로 간주해야 할 양반을 신분으로 간주하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에 나타난 모든 사회적인 구분이나 차별은 곧 신분적인 구분이나 차별로 간주하게 된다. 의미가 다른 '양인'과 '양민'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다든가, '평민'이나 '상인' 대신 아주 드물게 사용되던 '상민'을 조선시대 평민의 대표적 명칭으로 내세우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50-2)


"〈소수의 지배계급이 모든 사회적 특권을 사실상 독점한다〉는 명제 자체는 지극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명제가 어느 시대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명제라는 데 있다. 고대든 중세든, 그리고 근대 이전이든 근대 이후이든 모든 시대에 적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몰역사적인 인식을 초래하는 비역사적이 명제라는 점이다. 이 명제를 도식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신라의 진골·고려의 문벌·조선의 양반의 동질성만이 부각되고 이질성은 사상捨象된다. 신라의 골품귀족과 함께 고려의 문벌은 물론 조선의 양반마저 거리낌 없이 귀족으로 지칭되고, 시대에 따른 지배계급 간의 차이나 지배계급을 교체시킨 사회적 변화, 역사발전의 흐름은 묻히고 마는 것이다." "〈민중의 지위와 생활의 실질적 향상〉으로 발전이나 개혁의 의의를 검증하려는 것도 적절한 평가 기준이라 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발전이나 개혁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세계 어느 지역의 역사에서도 그러하다."(58-9)


2부 조선시대의 신분·계급구조


"조선시대의 신분은 양인과 천인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천인에는 노비만 소속되었고 모든 비노비자非奴婢者는 양인으로 간주되었다." "양인에는 모든 비노비자가 포괄되었으므로 사대부·평민 할 것 없이 모두 양인 신분소유자였다. 통설에서 곧잘 백정白丁·무격巫覡·사당社堂·창기娼妓 등을 노비와 함께 천민 신분을 형성하는 부류로 설명했지만, 이들은 양·천 출신이 모두 섞여 있는 일종의 직업집단일 뿐 양인과 구분되는 독립된 신분 범주가 아니었다." "'사士'는 특정한 혈통이나 가문의 후예가 아니다. 사의 핵심이 되는 관원은 어디까지나 군주의 정치를 보필하기 위해 군주에 의해 인민 중에서 발탁된 자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인민은 원초적으로 대등한 위치에 서있으며, 그가 지닌 현능賢能으로 군주에게 발탁될 가능성을 지닌 자이다. 따라서 천인을 제외한 모든 인민 즉 양인에게는 자연히 동일한 신분적 자격과 권리·의무가 부여된다. (이하 '양인의 신분적 제일성齊一性'이라 지칭)"(69-70)


"천인은 본래 양인이었다가 천인으로 전락된 자로 상정되었다. 인민 중에 범죄로 말미암아 신민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 자가 천인 즉 노비였다. 조선시대에 양인이 노비가 되는 대표적인 경우는 반역에 연루된 경우이다. 반역을 저지른 반국가사범 당자는 처형되지만 가족들이 연좌되어 노비가 되는 것이다." "노비 중에는 애당초 범죄와 무관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빈곤이나 부채로 인하여 노비가 된 자들이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그들을 원칙적으로 '압량위천壓良爲賤(양인을 억눌러서 천인으로 만듦)'의 희생자로 간주하며, 현실에 존재하는 노비 중의 비범죄자의 존재는 통상 체제 정당화를 위한 논리 체계에서 배제하였다. 모든 노비는 일단 범죄자(또는 그 후예)로 간주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차별도 그것으로 정당화하였다. 노비에 관한 사항이 법전 가운데 형전에 실린 것도 그들이 죄인이라는 관념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노비는 '선량한 인민'인 '양인'과 구별되어 '천인'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71)


# 양천제론에 대한 비판적 주장 검토

1. 양천제는 노비제에 불과하다 → 양천제는 귀족과 같은 특권신분의 존재를 부인하고 노비 아닌 자를 하나로 묶어 보편적 권리·의무를 부여하는 제도이다.

2. 양천제는 국역동원체제에 불과하다 → 양천제는 의무체계가 아니라 권리체계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도 양인의 사환권(관직진출권)은 보장되었다.

3. 양천제는 조선 초기라는 과도기의 신분제에 불과하다 → 이 주장의 논거는 조선 후기 양반이 '면역의 특권'을 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반의 군역 면제를 규정한 법령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한 번도 제정된 일이 없다.

4. 평민은 명목상의 부거권(과거응시권)만 가질 뿐이었으므로 양천제는 허구적인 제도에 불과하다 → 법적 권리를 원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귀족사회)와 적어도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사회, 그래서 제한적이나마 권리의식 발휘가 가능한 사회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5. '법제적 신분'으로서의 양인·천인 이외에 양반·중인이라는 '사회적 신분'이 있었다. → 이른바 사회통념상의 '사회적 지위 내지 위신'을 가리키는 '사회적 신분'은 모호한 기준을 적용한 초시대적 구분이자, 양반을 하나의 신분으로 취급하는 기존의 통설을 답습하고 있다.


"조선시대 지배계급의 명칭으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용어인 '양반'은 여말선초를 포함한 조선시대 전체의 지배계급의 명칭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반면 사대부라는 명칭은 몇 가지 이점을 갖고 있다. 조선 전 시기를 걸쳐 일관된 의미를 표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 지배계급의 성격을 잘 담아낼 수 있는 명칭이다. 즉 그 핵심 성원인 관원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 시대 지배계급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지식인·교양인의 의미를 잘 담고 있다. 비교사적 연구를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편리한 용어이다. 중국사의 경우에도 사대부계급·사대부시대가 논의되므로 양 지역의 지배계급을 비교하는 데도 유용하다. '사대부'라는 명칭은 당대 지식인들에게도 '양반'보다 선호되었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관직이 없는 자도 '양반'이라 칭한다 하여 그 호칭을 지탄한 반면, 〈천하에 아름답고 좋은 것이 사대부라는 이름이다.〉(『택리지』. 「사민총론」)라고 말하였던 것이다."(118-9)


"조선 초기에는 16세기 이후처럼 '양반'이나 '사족'은 사대부계급의 집단적 호칭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양반'을 비롯하여 사대부·사류士流·사류士類·의관衣冠·진신搢紳 등이 거의 모두 관원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16세기가 되면 양반과 사족은 관직의 유무와 관계없이 지배계급을 범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관직을 가지지 않은 자라도 양반이나 사족으로 지칭되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고, 관원의 부녀도 아예 '사족'이라 약칭되었다. 초기에 문무관원을 가리키던 양반과 사족은 다함께 사대부계급의 사람을 범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서로 혼용할 수 있는 동의어가 되었다. 양반이라는 사회계급이 확립되어 양반과 양반 아닌 자의 구분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자 사회적 호칭 전반에 변화가 일어났다. 관직이 없는 자를 가리키는 서인은 일반 사람을 가리키거나 서얼을 가리키게 되었다. 보통 사람을 가리키는 '상인常人'도 의미가 바뀌어 양반 아닌 자를 범칭하는 용어로 종종 쓰이게 되었다."(131)


"16세기 이후에는 사대부로서의 자격을 관직의 관직의 취득 여부보다는 학식이나 덕망의 여부로 판정하려 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선도한 것은 사림파였다. 성종 대에 대두한 사림파는 재야사족, 특히 재지사족의 정서와 이해를 대변하는 성리학 근본주의자이자 보수적 개혁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대적인 정치적 물갈이를 시도하는 한편, 도덕성이나 품행을 위주로 한 평가 기준을 확립하려 애썼다. 관직의 고하나 유무 외에 도덕과 품행이라는 별도의 기준이 중시됨으로써 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대다수의 재야사족들도 자신들이 치자 계급에 속하는 자임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모든 사족이 관직을 차지할 수 없는 이상, 앞으로 무수히 배출된 관인의 자손들이 관직 없이도 자신의 존재이유와 긍지를 느끼고 살아갈 수 있는 어떤 방안을 마련해야 했는데, 사림파가 이러한 방안까지도 분명하게 제공한 셈이었다. 결국 사림파는 재야사족의 정치적 선도자이자 계급 이데올로기의 주창자였다."(132)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계급의 대표 명칭으로는 여러 동의어 가운데 '평민'이 단연 좋다. 그 다음은 '평인'이다. '상인'·'상민'은 대표 명칭으로서 각기 문제가 있다. '평민'은 문자 그대로 '보통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상인'은 평민계급의 사람을 가리켜서도 곧잘 사용되었지만 '양반'(또는 '사족')과 대조되는 일체의 사람을 통칭해서도 사용되어 상인 안에는 평민말고도 서얼에서 공사천에 이르는 일체의 비양반자가 포함될 수 있었다. '상민'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극히 드물게밖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양인'·'양민'은 평민과 동의어가 아닌 이의어라서 애당초 적합하지 않다. 양인은 본래 일체의 비노비자를 가리키는 법제적 용어로서 평민 이외의 사람들도 포함하므로 적절치 않다." "'양민'은 주로 평민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사회적 범주를 가리키는 용어라기보다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선량한 인민'임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잘 사용되는 용어여서 계급의 명칭으로는 적절하지 않다."(139-41)


"조선시대 평민 가운데에는 적극적으로 사로의 진출을 모색하는 자들이 많았으며 그중에 사환에 성공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평민의 가장 대종이 되는 사환로는 조선 전기에는 직업군사, 조선 후기에는 무과라 할 수 있다." "16세기 평민의 주된 입사로는 직업군사인 갑사·별시위였다. 갑사·별시위는 당시의 평민에게 아주 매력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었다. 과거나 이서를 통한 사환보다 손쉬웠을 뿐 아니라, 복무 후 '무예武藝' 취재를 거쳐 만호나 첨절제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호나 첨절제사는 군직軍職이 아닌 정식 무관으로서 확실한 양반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갑사·별사위와 같은 직업군사를 없애는 대신, 복무 중의 군사에게 군직을 수여하거나 무관으로 발탁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한꺼번에 많은 합격자를 뽑아 흔히 '만과萬科'라 불리었던 조선 후기의 무과에는 많은 수의 평민이 합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출신出身'이라 자처했고 조정에서는 사대부로 대우했다."(155-7)


"종래의 4신분론에서는 양반-중인-상민과 함께 최하 신분으로 천민을 내세웠다. 천민을 구성하는 집단으로는 노비와 함께 광대·사당·창기·무격 등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집단이 아니라 양·천이 모두 포함된 직업집단일 뿐이었다. 그들은 천민 '신분'이 아닐 뿐 아니라, 노비와 함께 천민이라는 '계급'을 구성하지도 않았다. 첫째, 그들은 계급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회관계를 토대로 성립한 집단도 아니고 공통의 사회적 역할도 없다. 각기 직업이나 존재 양태가 매우 이질적이어서 그들 사이에 같은 계급이라는 정체성이나 연대감이 있을 수 없었다. 둘째, 조선시대에 그들을 노비와 함께 포괄하여 다른 계급이나 부류와 대조하는 사회적 구분 자체가 없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그들의 직업을 미천하게 보기는 했지만, 그들을 노비와 같은 위치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결국 조선시대의 최하 계급은 노비로만 구성된 단일한 계급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160-1)


"노비는 사대부와 지배-피지배, 착취-피착취의 대립관계를 가지지만 보호-피보호, 부양-피부양의 의존관계도 가지고 있다. 노비계급의 주류는 사노비였다. 조선시대의 계급구조는 평민과 노비가 피지배계급을 형성한 상태에서 사대부-평민, 사대부-노비라는 두 관계가 병립하고 있는 형태이다. 평민이 국가의 기본 토대였다면 노비는 사대부의 기본 토대였고, 평민의 일부인 소작농이 사대부의 부차적 토대였다면 노비의 일부인 공노비가 국가의 부차적 토대였다." "범죄인이라는 노비 차별의 정당화 논리는 공노비에게나 해당되지 사노비에게는 거의 해당되지 않았다. 더구나 자자손손 노비의 신분을 계승하게 하는 것은 죄를 줄 때 처자는 연루시키지 않는다는 '죄인불노'의 유교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노비제를 유지하는 명분으로 노-주관계가 상하·존비라는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바탕이며(『인조실록』 4년 11월 22일) 노비제로 말미암아 조선이 예의의 나라가 되었다고 강변했다."(166-7)


# 조선시대 노비와 노예·농노와의 차이점

1. 매매 : 노비의 매매는 노예와 달리 비교적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정부는 토지보다 노비의 매매에 더 까다롭게 대처하여 공증과 증빙을 요구했다. 노비와 주인이 복종과 배려라는 상호 의리로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은 매매를 억제하는 윤리적 조건이었다.

2. 재산권 : 노비의 재산은 법으로 보호되었다. 노비는 자신의 재산을 매매·상속·증여·양도할 수 있었고, 국가로부터 그 사실을 공증받을 수 있었다. 주인이 부당하게 노비의 재산권을 침탈할 가능성이 상존했지만 노비도 주인과 법적 다툼을 벌일 수 있었다.

3. 인권 : 노비는 생명과 신체에 대한 제3자의 침해로부터 양인과 똑같이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비록 주인의 사형권私刑權이 인정되었지만, 주인에게 생사여탈권을 내맡긴 노예와 같은 처지는 아니었다. 노비는 자신의 배우자나 동거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 

4. 인격 : 노비도 다른 사회 구성원과 마찬가지로 하늘이 내린 인민('천민天民')이요, 나라의 인민('국민國民')으로 지칭되었다. 노비도 법률행위의 주체로서, 주인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고소·고발할 수 있었다. 재산 문제라면 주인과 권익을 다툴 수 있었다.


"노비는 엄연히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었다. 올랜도 패터슨이 노예상태는 자유의 부재라기보다는 '사회적 죽음'이라 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점에서도 노비는 노예와 달랐다." "조선사회의 노비는 다른 공동체원과 분리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적어도 평민과 어울려 살 수 있었다는 점도 노예와 달랐다." "조선시대의 노비는 세계사에서 노예도 농노도 아닌, 예속인의 독특한 한 유형을 보여준다. 첫째, 매매의 공인이라는 노예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물성보다 인성이 월등히 강하였다. 다음으로 같은 노비라도 자유인에 가까운 존재로부터 노예에 가까운 존재에 이르기까지 존재 양태의 편차가 아주 크다는 것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외부에서 공급되지 않고 공동체 내부에서 충당되면서도 인구 구성의 수적 비중이 크다는 점에서도 아주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조선시대 노비의 이러한 특징은 궁극적으로 두터운 층으로 이루어진 사대부계급의 존재 양태에 대응하여 이루어진 것이다."(184-5)


"단순하게 사회적 위계상의 등급으로만 본다면 전문인·서얼·향리는 그보다 상위계층인 양반과 그보다 하위계층인 평민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계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등급적 계층으로서의 사회적 이동성을 갖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누대적으로 종사하는 국가 전문직이라는 가업, 서자라는 특수한 혈통상의 조건, 향역이라는 세습적인 특수 신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전문인·서얼·향리를 '중간계층'이 아닌 '중간계급'으로 취급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사회관계를 토대로 성립한 집단도 아니고 그들 사이에 공통된 사회적 역할도 없기 때문이다. 각 집단의 속성이 너무 이질적이며 그들 사이에 동일한 계급이라는 계급 정체성이나 연대감도 없다. 더구나 그들이 한 무리로 묶여 인식된 시기는 후기라는 조선시대의 한 시기에 불과하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조선 전시기에 존재한 사대부·평민·노비계급과 나란히 하나의 계급을 구성하는 것으로 파악하기에는 시기적인 불균형이 크기 때문이다."(186-7)


"양반계급 이전에도 문지에 대한 의식은 있었고, 중간계층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부류들도 존재했다. 그러나 양반계급 성립 이전과 이후는 중간계층의 성격이나 양상이 크게 달랐다. 조선 초기에도 중앙의 이서나 직업군사는 그 사회적 위계가 표준적인 사대부와 평민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계층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특별히 중간계층으로 분류해서 인식하지 않았다." "'중인中人'이나 '중서中庶'와 같이 중간계층을 가리키는 용어는 조선 후기에 비로소 나타났다. 어느 시기에도 중간계층은 있기 마련인데 유독 조선 후기의 사람들이 중간계층에 주목하게 된 것은 후기에 와서 사회적 위계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높아진 탓이다. 그 배경으로는 대자적 계급으로서의 양반계급의 확립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문자의 우열로 반·상을 가리고 문지로 위세를 떨치는 양반계급의 행태가 노골화되자, 문지와 같은 사회적 위계를 중시하는 의식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까지 파급된 것이다."(189)


# 중간집단별 특성

1. 전문인 : 양인 내의 독립된 신분집단이었던 서얼·향리와 달리 성취적 지위였으므로 적어도 전기까지는 다양한 성분의 사람들이 진출하였다. 16세기 말부터 전문업을 가업으로 하는 가계가 형성되면서 성취적 지위에서 귀속적 지위로 변모한다.

2. 서얼 : 집단성원 사이의 지위의 분화가 매우 크다. 사족의 길을 꿈꾸거나, 문·무과에 진출하려는 상층 지향적인 이들과 상업이나 전문직, 직업군사·서리로 진출하는 현실 수용적인 이들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차별과 신분적 세습성이 완화되었다.

3. 향리 : 고려 이래로 향역을 세습해왔으며 조선에서도 정부의 특별 취급을 받았다. 한 지역에 대대로 정착해온 토착민으로서 지방 군현에서 권력과 지위가 자못 높았다. 이에 따라 수령과 지방사족·향리 사이에는 제휴와 견제의 관계가 작동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계급적 특성은 그들이 지닌 계급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회에 계급은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계급의 소속은 개개인의 능력과 성취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고, 계급 간 사회이동의 장벽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대부는 양인들 사이에 신분이 나누어져서는 안 되지만 계급은 나누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주장한 '사'와 '농·공·상'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계급적 구분일 뿐 신분적 구분과는 무관하였다. 사·농·공·상이라는 생업은 자손에게 세전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당대에 생업의 전환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엄격히 구분하면서도, 지배신분과 피지배신분을 나누거나 사회이동의 법제적 장벽을 세우려 하지 않은 것은 근대 이전의 지배계급 가운데 사대부가 보여준 중요한 계급적 특성이다." "그러나 사대부는 하자 없는 양인의 사회이동 기회만 제도적으로 열어 놓았을 뿐 실제적으로 그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의 조성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209-13)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지배하는 수단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뛰어난 혈통-가문의 위세이고, 둘째 커다란 부이며, 셋째 강력한 물리적 강제력이다." "그런데 사대부계급은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지배계급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 세 가지 요건 모두가 미약했다." "사대부에게 지배계급으로서의 기반이 미약하게 나타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지배계급에 비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수적 비중이 훨씬 큰 데서 유래한다. 사대부의 수적 비중이 높은 까닭은 항상 새로운 가문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는 유동적인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관원이 되는 데 성공한 집안은 물론 생원·진사 정도를 배출한 가문의 후예라도 당당히 사대부를 자처하는 까닭에 자칭·타칭의 사대부는 막대한 수에 이르게 된다. 사대부는 지배계급으로서의 개별적 기반이 미약한 반면 지배계급의 수는 방대한 편이어서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지배계급과는 다른 지배방식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213-5)


# 사대부계급의 지배방식

1. 간접적 지배 : 국가·군주라는 통일 권력 또는 국가의 위임을 받은 지방관을 매개로 피지배계급을 다스린다. 그렇다고 국가·군주가 무턱대고 사대부의 역성을 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법치'가 지배의 기본 방식이 된다.

2. 비물리적 지배 : 이념적으로 위민정치나 덕치를 표방한다. 학식·덕성 같은 지적·인격적 우위를 앞세우고 예절·의리 같은 덕목을 강조하여 복종과 순응을 유도한다. 과거제와 같은 공개경쟁 제도의 성공도 한 요인이었다.

3. 집단적 지배 : 15세기 후반 이후 정치의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재지사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림파가 등장한 이후에 사대부계급의 집단적 지배가 본 궤도에 올라섰다. 향촌사회의 핵심 지배기제였다.

4. 분할 지배 : 피지배계급을 공통의 이해관계나 동질감을 느끼기 어려운 양·천 두 개의 신분으로 분할·지배했다. 기본적으로 천인에게는 지배계급을 봉양하는 역할을, 양인에게는 국가를 지탱하는 역할을 나누어 맡겼다.


3부 조선시대의 의식구조: 이데올로기


"사대부들이 신봉하는 유교 이데올로기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맹자였다. 맹자에게 왕도王道란 참다운 왕이 행할 법도로서, 왕도정치란 인정仁政이요, 인정을 토대로 인민의 교화를 이루는 정치이다. 맹자가 말하는 인정이나 왕도정치란 인민의 불행을 좌시하지 않고 근본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민생의 기반을 마련하는 정치이다. 그 전제가 되는 것은 민본주의 내지 위민사상이다." "인정이란 무엇인가. 맹자는 확실한 정의를 내렸다. 〈남(의 불행)을 차마 보고만 있지 않는 마음(不忍人之心)을 가지고 남(의 불행)을 차마 보고만 있지 않는 정치(不忍人之政)를 행〉하는 것이 인정이라는 것이다. 맹자에게 차마 할 수 없다는 것은 인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것과 같은 차마 가해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불행에 빠진 인민을 팔을 걷어붙이고 구제하는 적극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군주가 된 자의 참된 임무라는 것이다. 맹자의 왕도정치론은 여기서 그 빛을 발한다."(238-9, 242)


"백가쟁명이 벌어지던 당시 '농가農家'는 천하의 정의를 세우려는 자들은 남에게 기생하여 살려 하지 말고 자신이 직접 농사에 종사하여 먹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맹자는 사회적 분업의 논리를 이용하여 농가의 주장을 반박했다. 농민이 공장工匠에게 자신이 생산한 곡식을 주고 그로부터 밥을 지어먹을 그릇이나 농사짓는 도구를 사오는 것은 농민이나 공장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농민이 정치까지 담당한다면 농사에 방해가 되고 정치인이 농사까지 지으면 정치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맹자는 농민이 안심하고 정치를 맡길 수 있는 '치인자治人者'의 자격요건을 갖춘 자를 '사士'라 상정했다. 사는 기본 생활을 보장할 만한 일정한 자산(恒産)이 없어도 오륜을 지킬 수 있는 변치 않는 마음(恒心)을 지닌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사가 정치의 주체가 되고 농과 같은 인민들은 객체가 되어, 사는 인민을 다스리고 인민은 사를 먹여 살리는 것이 천하에 통용되는 대의라는 것이다."(246-8)


"'사'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맹자의 논의는 성리학에서 그대로 수용되었다. 다만 성리학에서는 치인자에 관련한 새로운 논의가 추가되었다. 바로 '현능'이라는 치인자 자질의 형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이다. 성리학에서는 맹자의 성선설을 따르면서, 성선의 근거를 이理를 부여받은 데서 찾음으로써 인성에 대한 구체적인 형이상학적 설명을 전개했다." "이러한 설명에 내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무엇일까. 사람은 똑같이 인의예지라는 '이'(본연지성)를 받고 태어나지만 사람이 탄생할 때 맑고 깨끗한 '기'를 받았는지, 무겁고 탁한 기를 받았는지 등의 차이(기질의 성)에 따라 인의예지를 발현하는 정도에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논리는 사람들 사이에 태어날 때부터의 자질에 따라 군자와 소인, 치자와 피치자가 어느 정도 구분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덕성과 재능에서 불평등한 존재라는 논리로 현실의 계급적 구분을 어느 정도 정당화는 기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255-7)


"그러나 주의할 것은 성리학이 출생에 의한 신분을 결코 정당화하거나 절대시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질의 성'은 사람이 태어날 때 부여되는 기의 우연적인 상태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혈통에 따른 차이나 유전적인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태어날 때의 인간의 차이란 기질의 성에 비롯된 것이어서 본연의 성을 잘 발현시키면 기질의 성의 제약을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범상한 사람이라도 잘 수양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수한 기질의 성을 가져도 수양을 게을리 하면 성인이 될 수 없다. 〈성인도 배워서 이르러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성리학은 후천적인 성취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 원칙에 입각한 사대부사회에서 성리학이 유행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또한 이와 같이 치인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든 양인에게 열어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대부 지배의 정당성은 더욱 합리화되고 공고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257-8)


"세습군주제를 정당화하는 맹자의 논리는 성리학에 그대로 계승되었지만, 성리학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군신 사이의 규범이 부자 사이의 규범과 대등함을 강조하고 이를 인간 사이의 윤리라는 차원이 아니라 우주적 진리의 차원인 '천리天理'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사대부는 군주가 정치를 잘못한다거나 자신들을 잘 대해주지 않는다 하여 군주와 정면으로 대립할 수 없었다. 군주가 왕도정치를 수행하지 않아도 군주를 폐할 수 없고 간언諫言하거나 군주를 떠나는 것(去君)으로 그쳐야 한다는 기존의 자세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은 바로 자신들을 조정에 발탁할 구심점이며 피지배계급에 대한 간접적 지배의 실행자로서 군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사대부계급의 이해가 적나라하게 반영된 것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소극성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바로 군신의 의리는 천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최선의 방안은 훌륭한 군주를 만들기 위해 군주를 끊임없이 계도하는 것이었다."(258-9)


# 조선시대 사대부계급의 왕도정치론

1. 수기주의修己主義 : 선정을 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치인자의 수양이 선행되어야 한다(공자의 무위이치無爲而治).

2. 민생주의民生主義 : 민생 기반의 확충을 위한 제도·정책 마련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맹자의 유위이치有爲而治).


"조선시대 공론이 지니는 결정적인 한계는 그것이 사회전체의 여론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사대부계급의 여론을 반영했다는 점이다. 공론의 참여 범위가 재야의 사대부까지 확대되었지만, 도리어 사대부의 계급적 이해를 한층 강하게 반영할 여지를 남겼다. 이를테면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가난한 사대부들이 대량 배출된 상황에서 재야의 사대부들이 공론의 이름으로 반상의 명분을 내세우며 평민들과 다른 대접을 줄기차게 요구한 것이 그것이다. 사대부계급 내에서도 공론의 일치를 보기 어렵다는 것도 뚜렷한 한계다. 16세기 이후 성리학 근본주의 풍조가 사상계를 지배하게 되자 사대부계급은 저마다 자신이 속한 붕당의 당론을 공론이라 주장하기 십상이었다. 상대 붕당 인사에 대한 끊임없는 비난과 고발이 일어나고 정쟁이 유발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대부계급 양산의 여파로 사대부 사이의 경쟁과 반목은 심화되고 성리학 근본주의는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286-7)


4부 조선시대의 정치구조


"조선시대의 군주는 명분상·형식상 전제권을 가졌다. 이는 고려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국가조직 자체가 군주로 하여금 국가의 주요 행정기관을 직접 통할할 수 있도록 짜여 있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와 차이가 있었다. 조선의 군주는 재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정을 챙기기 용이하도록 편성되었던 것이다. 물론 군주가 모든 국가기관을 일일이 통할할 수는 없다. 자문-심의기관이나 언론-감찰기구 및 예우기관들은 그 수가 많지 않으므로 군주와 직접 연결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행정기관은 그 수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채택된 방식은 군주가 행정의 중추기관인 이·호·예·병·형·공의 6조를 직접 통할하고, 여타의 기관은 6조로 하여금 통할하도록 하는 군주-육조-속아문 방식이었다. 대부분의 중앙기관은 6조 어느 하나의 속아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승정원과 같은 비서기구가 독립하여 존재하기 되고 그 기능도 대폭 강화된 것은 크게 늘어난 군주의 과중한 업무를 돕기 위해서였다."(298-9)


"중앙집권체제의 두 번째 요소는 군주의 일원적 지방통치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시대에는 지방분권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방분권이 법제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중앙권력에 도전할 만한 지방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군현의 행정은 철저히 중앙의 지시에 따라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군주-관찰사-수령으로 이어지는 일사불란한 체계가 마련된 것이다. 도의 장관으로 파견된 관찰사는 지방세력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였다. 군사지휘관으로는 2년 임기의 전임의 병마절도사(=병사兵使)와 수군절도사(=수사水使)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민정 담당의 관찰사로 하여금 해당 도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예겸例兼하게 하여 전임의 병사·수사를 견제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문반 우위의 원칙을 살렸다. 도 아래의 부·대도호부·주·도호부·군·현에는 5년 임기의 수령이 파견되어 민정과 군정을 함께 담당했다."(301-2)


"6조를 중심으로 국가업무가 수행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의 일이었다. 첫째, 고려의 6부는 상서성에 소속되어 있었던 반면, 조선의 6조는 다른 기관에 부속되지 않는 독립 기관이었다. 둘째, 고려시대에는 6부의 장관인 상서尙書가 정3품으로 재상 축에 끼지 못했으나, 조선시대 6조의 판서는 재상에 해당하는 정2품으로 승격되어 있었다. 셋째, 고려시대의 중앙행정기관들이 6부와 비교적 독립적으로 운영된 데 반해, 조선시대에는 모든 중앙행정기관들이 6조의 속아문으로 규정되고 6조의 직접적인 통할을 받았던 것 등이다." "각조를 살펴보면, 이조는 문반의 인사와 공훈자에 대한 예우가 주 업무였고, 호조는 호구관리와 재정·세무를 관장하였다. 예조는 외교·의례 및 시험·교육을 담당하였고, 병조는 무반의 인사와 국방·경비 업무를, 형조는 사법과 노비 업무를, 그리고 공조는 공역工役이나 물자의 생산·관리를 맡았다. 6조는 그 휘하에 각조의 업무와 연계되거나 특화 업무를 취급하는 속아문들을 두고 통할하였다."(320-1)


"비행정기관은 행정기관에 비해 숫자가 아주 적지만 위상이나 기능은 자못 컸다. 재상으로 구성된 조선시대 최고의 기관인 의정부는 기본적으로 심의·자문기관에 해당한다." "대간으로 불리는 사헌부·사간원이 바로 언론-검찰기관이었다. 사헌부는 백관의 규찰을 담당하는 반면 사간원은 군주에 대한 간쟁을 맡도록 되어있다." "대간과 함께 삼사三司로 칭해졌던 홍문관은 본래 학문 진흥과 인재 양성을 위해 세워진 집현전의 후신으로서 경연經筵을 주관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삼고 있었다. 홍문관이 언론기관이 된 것은 경연이 단순히 군신이 경사를 함께 공부하는 곳에 그치지 않고 시정을 논하는 장소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군주에 대한 보고·건의·청원 등은 원칙적으로 모두 승정원을 경유하게 되어 있었다. 승정원은 이를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선별하는 권능까지 행사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승정원은 군주의 자문에 응하고 중요한 사안에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했다."(322-3)


"천명의 수임자라는 조선 군주의 위상에는 한 가지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다. 조선의 군주는 중국의 황제로부터 분봉分封을 받은 제후諸候라는 또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책봉冊封체제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비단 관료들만이 아니라 때로는 군주 역시 사대관계 즉 중국의 황제와 조선의 군주 사이의 책봉체제를 중국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단순한 외교상의 양보를 넘어서, 군신상호관계로서 성의를 다해서 그 의리를 지켜야 할 것으로 주장하기 일쑤였다." "책봉과 천명 사이의 괴리를 메울 방도가 하나 있었다. 바로 조선은 중국의 '번국藩國' 즉 울타리 나라라는 논리였다. 울타리는 집안과 집밖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집안임을 강조할 수도 있고 집밖임을 강조할 수도 있다. 중국과의 문화적 동질성을 주장할 때는 조선은 중국과 같은 천하의 영역에 소속되고, 핏줄을 논할 때는 중국과 다른 외국이 된다. 조선의 군주는 조선 역내에서는 천명을 받은 유일한 주권자였다."(335-7)


"국교인 성리학은 군주의 자의적 국정운영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억제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군주의 결정에 대한 반대나 관원 탄핵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위민·민본정치의 배치 여부였다. 군주를 위해서 인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군주가 존재한다는 민본 이념은 관념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정운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군주도 국교에 충실하고 국익을 추구하며 국법을 따라야 한다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군주와 국가의 구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인민은 존귀하고 사직은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는 맹자 식의 사고는 조선시대 위정자들에게 철저히 각인되어 있었다." "제한군주적인 면모를 거론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법치주의 원칙에 따른 법의 운용이다. 군주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제어하는 근본적인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법치주의를 소박하게 〈미리 제정된 법에 의거하여 국가가 통치한다는 원칙〉이라 규정한다면 조선시대의 법치주의 원칙은 확고부동했다고 할 수 있다."(340-1)


5부 조선시대의 경제구조


"조선사회의 소유제는 기본적으로 오늘날처럼 사유재산제를 기초로 하고 있었다. 왕토사상이 하나의 이념으로 존재했고 실제의 토지정책에도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왕토사상은 군주의 토지소유권이나 토지국유제와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왕토사상의 존재 의의는 어디까지나 토지 공공성의 강조에 있었다." "토지국유론자들도 조선시대에 토지가 매매되고 상속되고 있었던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늘 아래 모두 왕의 토지가 아닌 것이 없다〉라는 관념적 표방이 당시의 국법이었던 것으로 상정하고, 현실에서 나타난 매매·상속의 사유 행태는 법을 벗어난 불법적인 행위로 간주하였다. 왕토사상이 토지국유제와 직접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해명되어 있다. 왕토나 공전으로 지칭된 땅의 상당수는 엄연히 사유지로 존재했다. 자유롭게 매매·상속되고 있었고 공증제도까지 운용하며 국가가 법으로 보장하고 있었으니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382-3)


"그렇다면 왕토사상의 존재 의의는 무엇일까. 왕토사상은 군주나 위정자가 지향하는 이념이 아니라, 개혁사상가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활용 도구였다. 농민에게 토지를 고루 나누어 주고자 할 때 국가의 모든 토지가 왕토임을 내세움으로써 사유지 타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정전제를 중시하는 민생주의 왕도정치론은 왕도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추구하지 않는 이상, 개혁사상가는 토지개혁의 주체를 군주 또는 국가에 설정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군주를 개혁의 주체로 설정하고 군주의 권력을 빌어서야 토지개혁을 정당화하고 그 실현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될 사항은 소유권과 공공성은 반드시 배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유권의 보호 그 자체도 공공성을 가질 수 있다. 농지에 대한 사유권 보호는 일차적으로 지주인 지배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자작 농민의 토지소유권도 보호하기 때문이다."(386-7)


"왕토사상이 내포한 토지의 공공성은 특히 비농지 정책에서 명료히 드러난다. 농지에는 사유권을 철저히 보장한 반면 비농지는 개인의 사유를 허락하지 않고 만인에게 개방하여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비농지란 농지 외에 자연의 자원을 채취하거나 농림수산물을 산출할 수 있는 모든 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산림천택山林川澤'이라 통칭되었다. 여기에는 산지·황무지·개펄 등 토지만이 아니라 내·못·강·해안까지도 포괄되었다. 국가는 산림천택에 대한 사유권을 일체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산림천택은 굳이 소유자를 따지자면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직접 사용하는 곳 외에는 원칙적으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된 공간이었으므로 국가의 소유지라기보다는 무주지 또는 국가가 관리·처분권을 갖고 있는 토지라고 말할 수 있다." "산림천택의 사적 이용을 허락하는 경우는 농지로 개간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비농지는 개간한 사람에게 국가가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그 소유권을 내주었다."(392-3)


"조선시대에 국가가 자유로운 산림천택 이용권을 억제한 대표적인 부문은 광물 채취의 경우였다. 종래 민간의 광물 채취 금지는 국가의 광업 독점경영과 상공업의 억압책과 관련되었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유의할 점이 있다. 하나는 다른 자연물의 채취처럼 광물 역시 몇몇 종류를 빼고는 원칙적으로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다고 보이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광물 채취의 금지가 상공업의 억압책과 직접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적인 채굴을 막고 국가가 독점적으로 이용하려 한 대표적 광물은 금·은·옥과 같은 보물이었다." "같은 광물이라도 철이나 구리의 경우는 보물과 달랐다. 정도전은 금·은·주옥과 달리 철이나 구리는 생활용구나 농기구로 쓰인다는 점을 강조하여 철 생산지에서 민정을 동원해서 철을 생산하면서도 민간의 제련에 과세하지 않았던 고려의 정책을 지지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도 철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하되 민간의 제련에 대해서는 수세하였다."(396-7)


"토지소유권의 일정한 제한, 즉 간혹 농지의 소유권을 실질적 이용과 결부시키는 조선시대의 관행을 사회적 미발달과 연결시키는 사고방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인식은 다분히 서구중심적 선입견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농지에 대한 소유권 정책은 〈정당한 소유라면 적극적으로 보호한다〉로 간추릴 수 있다. '정당한 소유'란 무엇인가. 농지 취득의 적법성이 전제 조건이 된다. 매매나 상속, 그리고 무주지의 개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소유를 위한 소유, 공공성에 위배되는 소유가 아닐 것이 요구되었다. 소유의 목적에 합당한 소유 즉 이용을 위한 소유가 그것이다. 이용은 반드시 직접 경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대부는 수기치인에 전념하기 위해 경작에는 타인의 노동력을 비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소유 자체를 위해 소유하는 것을 넘어서 이용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농지에 대한 접근을 방해하여 '진지리'를 구현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았다."(405-6)


# 진지리盡地利 : 땅이 제공하는 이익을 모두 거두자는 정책 목표


"조선시대의 재정 운영 원칙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다. 조선시대 국가재정 운영의 대원칙은 절검의 원칙과 고정의 원칙이다. 절약과 검소에 최대 역점을 두는 것이다. '손상익하損上益下'와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사납다(苛政猛於虎)'의 정신에서 온다. 왕도정치를 부르짖는 정부가 과중한 수취로 민생을 파탄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중한 수취를 막기 위해서 관원들은 군주의 절검을 부단히 강조했다. 군주 스스로도 자신의 사유재산을 포기하거나 공납물을 감축하는 등 솔선수범을 보여주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절검의 원칙은 재정을 고정불변하게 유지하자는 두 번째 원칙으로 이어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가 늘 재정 부족을 느끼는 것이 항례이다. 재정을 고정시키는 것은 바로 수취나 소비를 억제하여 절검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수취할 양을 고정시켜 놓고 수입의 한도 내에서만 지출한다는 '양입위출量入爲出'의 원칙은 바로 재정 고정의 원칙에서 파생된 원칙이다."(412-3)


# 손상익하損上益下 : 윗사람에게 해를 끼쳐서 나온 것으로 아랫사람에게 이롭게 함


# 부세의 종류(조租·용庸·조調)

1. 조세 : 농지에 부과되는 세금(조租 또는 전조田租), 수조권收租權자가 경작자에게 받은 '조' 중의 일부를 내는 세금(세稅 또는 전세田稅)을 합친 것

2. 공납 : 지역 단위로 왕에게 봉헌하는 토산물(공물), 각 도의 지방관들(관찰사와 병·수사)이 개인 자격으로 왕에게 봉헌하는 물품인 진상을 합친 것

3. 요역 : 관아·성곽 구축과 도로 건설 같은 공공시설 축조, 관원들을 영접하고 환송하는 '영송迎送'과 뒷바라지하는 '지대支待'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

4. 잡세 : 농업 이외의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부세


6부 종합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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