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종래 적지 않은 대동법 관련 연구들은 이 법의 상업적 효과에 관심을 집중했다. 즉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대동법을 검토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전했고, 그것이 이전 시기와 대비되는 사회 변화의 중요한 측면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그런 경향은 대동법과 관계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대동법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사람들이 당시 조선의 상업을 발전시키려고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동법 자체는 국가재정과 민생 안정, 국가 운영의 관점에서 논의되고 집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상인과 관련된 내용은 여러 조건 가운데 하나로 검토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대동법을 상업의 범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대동법 실시에 따른 결과보다는 오히려 그 원인과 추진 과정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정치적으로 대동법과 같은 거대한 재정개혁을 필요로 했고, 또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요소들이 무엇이었는가에 주목했다."(24-5)
제1부 대동법의 계보
"조선 초기의 조租·용庸·조調 체제는 왕조의 지속과 함께 천천히 변했다. 가장 핵심적 현상은 정부 수입에서 전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차츰 줄고, 공물(진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난 것이다. 장기간의 변화였기에 그 현상이 금방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추세는 명백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지주들의 지속적 저항이었다. 양반이 곧 지주는 아니었지만 지주들이 속한 가장 큰 사회계층은 역시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이었다. 그들의 저항은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균등과세를 위한 장치를 갖춘 쪽에서의 정부수입이 줄고, 그렇지 못한 쪽에서의 수입이 늘어났던 것이다. 이는 정부의 수취가 전체적으로 균등과세의 원칙에서 이탈해갔던 것을 뜻한다. 바로 이것이 공물변통貢物變通, 즉 공물 수취의 방식을 개혁해야 한다는 문제제기의 배경이다. 그 목소리는 16세기 초부터 등장했지만, 그 문제가 집중적이고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42-3)
1장 관행이 변하기 시작하다
"조선 초 공물의 분정分定, 즉 각 고을에 공물을 얼마나 부과할 것인가에 관한 규정은 불확실했다. 점차 요역이 그러했듯이 공물도 역민식役民式으로 규정되어 8결 단위로 순환조발循環調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각관에 공물이 부과될 때마다 8결 단위로, 그 안에서 차례로 돌아가면서 거두어졌다." "공정한 수취라면 8결씩 나뉜 단위 토지 안에서 고르게 돌아가며 공물이 부과되어야 했다. 각관에 공물이 부과될 때마다 토지 소유자의 위세와 무관하게 8결을 단위로 하여 순서대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우선 세력 있는 측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토지는 공물의 부과 대상에서 빠졌다. 누락된 공물의 몫은 다른 사람들 소유의 전결에 더해졌다. 그뿐 아니라 공물의 부과 대상이 되는 전결 안에서조차 그 부담이 고르게 나눠지지 않았다. 권세가의 토지에는 공물 부담이 면제되거나, 적게 부과되었다. 역시 그들이 부담해야 할 공물은 8결 안의 다른 토지에 전가되었다."(46-8)
"각관에 공물의 분정이 고르게 되려면 반드시 각관의 전결 규모에 비례해야 한다. 전결 규모야말로 각관이 공물을 부담할 수 있는 능력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에서 공물을 부과할 때 각 고을 전결 규모의 상대적 차이는 별로 고려되지 않았다. 고을의 크기에 관계없이, 공물이 부과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작은 고을이 큰 고을에 비해 단위전결당 부담이 무거워지고, 윤회의 횟수도 늘어났다." "이후원은 인조 말에서 효종대(1649~1659)에 활약한 고위 재정관료였다. 그에 따르면, 인조 말년쯤에는 공물가를 '별도로 거두는 곳'이 거의 없었다. 대신, 각 고을이 1년에 바치는 전체 공물가를 〈아울러(井)〉 마련하고, 그것을 '대동'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 말은, 개별 공물을 특정한 8결에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총 공물가를 고을 전체의 전결에 분할헤서 함께 거둔다는 뜻이다. 여기서 '대동'은 이전까지의 윤회분정을 대체하는 개념이다. 대동이라는 말 자체가 공물의 수취 방식이라는 측면이 있다."(49-50)
"공물작미貢物作米, 즉 공물을 현물이 아닌 그 값에 해당하는 미·포로 바꾸어 내는 것은 이미 조선 전기의 어느 시점부터 일반화된 일이었다. 공물작미의 진정한 사회적 의미는 글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다. 그 의미는 중앙정부가 현물이 아닌 미·포를 공물 수취 수단의 최종적 형태로 인정한다는 결정을 뜻한다. 중앙정부의 이런 결정에는 중요한 함의가 있다. 이런 결정 자체가 공물 수취 과정에서 자행된 점퇴點退를 불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미 공물의 납부 방식이 현물납이 아니었기에, 점퇴는 그것의 최초 설립 취지인 공물로서 적합한가에 대한 품질 검사 과정이 아니라, 공물을 받는 측이 높은 방납가를 실현하기 위한 빌미였을 뿐이다. 점퇴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정부가 미·포를 공물 수취 수단의 최종 형태로 인정하고, 그것을 법으로 규정해야 했다. 즉 '작미作米'를 공물로 받아들이는 물품의 종류와 질이 단일화되면 점퇴의 근거 자체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55)
# 점퇴點退 : 각관이 납부한 공물에 대해 경각사가 그 품질을 검사해서 퇴자를 놓고 받지 않는 것
2장 대동법의 원형이 만들어지다
"삼도대동법三道大同法 논의는 인조 즉위 직후 시작되어, 이 법을 제안했던 이원익이 법의 폐지를 요청하면서 인조 3년 2월 7일 종결되었다. 만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다. 하지만 삼도대동법은 본격적이며 전국적인 곡물변통의 첫 경험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 길게 이어지는 대동법 논의의 진정한 출발점이었다." "인조는 대동법의 취지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그 법이 흉년에 제대로 작동하여 효과를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바로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조익이다." "조익은 대동법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실시 가능한 정책임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당시 경작지의 평균 곡물 생산량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대동법을 실시해도 전결에 부과되는 전조田租·대동미大同米·삼수미三手米의 총액은 소출의 1/10에 미치지 못했다. 이것은 대동법이 백성들의 담세 능력 범위 안에 있음을 뜻했다. 또 그는 각종 반론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서 하나하나 반박했다."(63, 73-4)
# 대동법에 반대하는 주장에 대한 조익의 반론
1. 일시에 결당 8두를 거두면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 여러 번 거두면 그때마다 발생하는 부대비용 때문에 결과적으로 더 많은 양을 내야 한다.
2. 부자들은 내야 할 쌀이 많아서 일시에 내기 어렵다. → 가난하고 일손 없는 사람들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3. 방납의 폐단은 오래된 것이어서 갑자기 꺾을 수 없다. → 궁핍한 백성들과 국가재정을 고려하면 호세가와 방납자들의 사욕을 제어하는 것이 마땅하다.
4. 쌀을 한 곳에 쌓아놓으면 화재 위험이 있다. → 쌀창고는 집들과 달리 붙어 있지 않아 오히려 화재 위험이 적으며, 진짜 걱정은 그런 축적이 없는 것이다.
5. 서울까지 쌀을 운반할 때 배가 침몰할 우려가 있다. → 기강을 세우고, 과적을 금지하고, 겨울 전에는 태안 이북의, 봄에는 태안 이남의 곡식을 운반한다.
"경대동 또는 반대동半大同이란 각 고을이 경각사에 내는 공물만 미·포로 거두고, 각관 자체의 수요는 이전의 방식대로 수취하는 것을 뜻한다. 이 당시에 경대동으로 백성들로부터 걷기로 한 양은 매해 결당 9두였다. 경대동 안은 얼핏 보면 설득력이 있었다. 흉년에 공·역가 전부를 한 번에 걷거나, 서울까지 먼 거리를 옮기는 것은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삼도대동청이 말했듯이, 민결民結에 부과되는 역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공물이었고, 현상적으로 공납의 폐단은 방납으로 나타났다. 경대동을 통해 경각사의 방납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대부분의 백성들이 혜택을 입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납 폐단을 다양한 차원의 불균등 문제로 보면, 그것의 본질은 방납으로 볼 때와는 크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 불균등의 틀로 보면 공납의 폐단은 일부 방납인들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였다. 이때 경대동은 전혀 공납 폐단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다."(89-90)
# 방납防納 : 조선 시대 상인이나 아전이 농민으로부터 대가를 받고 공물을 대신 납부해 주는 것. 관리와 결탁한 상인들은 공물을 납부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백성들이 정상적으로 납부할 수 있는 것마저 막아 가며 방납의 대가를 터무니없이 비싸게 징수하였다.
"삼도대동청이 경대동의 내용을 보완해나갔던 것과는 별도로, 경대동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사주인, 지방 큰 고을들의 호강층, 경각사의 하급 실무 담당 직원, 각관 수령 들 중에는 대동법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치명적이었던 것은 경대동의 실패로 대동법 자체에 대한 정책 신뢰성이 크게 손상되었다는 점이다." "조익이 말했듯이 대동법에 대한 지역의 여론은 지역 호강들의 세력에 달린 것이었다. 가난한 백성들과 작은 고을들은 원래의 대동법 규정대로라면 가장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대동법을 중앙에서 정한 규정대로 엄격히 집행했을 때만 가능했다. 삼도대동법이 경대동으로 혼란스럽게 진행될 때, 가난한 백성들과 작은 고을들은 오히려 기존의 납부액에 경대동 몫의 첩징이나 가징이 덧붙여진 것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들의 생각은 토호들과 큰 고을들에 의해서 가려지고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다."(97-8)
# 사주인私主人 : 중앙의 각사에 소속되어 외방 각 고을의 공리貢吏나 번상番上 군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세공물을 일시 보관하며 그것의 방납을 맡아 하던 특수 상인
"인조 원년 가을에 실시된 대동법은 시행 초기부터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게다가 법 시행과 동시에 극심한 흉년까지 겹쳤다. 흉년으로 인해 조선 조정은 중국에서 곡물을 수입해야만 했다. 극심한 흉년은 공물가의 가을 수취분인 결당 쌀 8두의 수취를 어렵게 했다. 그러자 정부는 8두 중에서 서울에서의 수요를 위한 몫으로 절반만 거두고, 각관의 수요는 종전의 관행을 따르도록 했다. 가뭄과 그로 인한 쌀값 상승 때문에 백성들에게 시혜적으로 내려진 조치였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처음부터 대동법을 혼란으로 몰아간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삼도대동법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실로 강력했다. 탐관오리, 호강품관 등이 이들 세력의 중심이었다. 인조 초 삼도대동법을 좌초시키는 데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세력은 지방의 호강품관들이었다." "대동법의 불편함에 대한 여론이 확산되고, 중앙정부의 정책적 확신이 약해지자, 삼도대동법은 인조 원년 가을부터 인조 2년 가을까지만 유지되고 단명하고 말았다."(106-7)
"그러나 정책 실패의 진정한 원인은 대동법을 추진했던 세력의 주체적 측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시기 대동법 실패의 원인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양입위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양입위출量入爲出이란 백성들로부터 미리 정해진 몫만큼만 거두고, 어떤 일이 있어도 거둔 것 안에서 지출하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하나는 이 법의 추진 주체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정책담당자들은 경대동과 대동법의 정책적 함의의 차이를 명백히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경대동으로는 양입위출을 핵심으로 하는 대동법을 성립시킬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결국 삼도대동청의 실패는 경대동의 실패였다. 이렇듯 정책담당자들이 공납 문제를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흉년에 대처하면서 정책적으로 양보해도 좋을 내용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 당시에는 사실상 대동법의 추진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108)
3장 두 가지 공물변통 방법론이 성장하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사이 10년간, 조정에서 공물변통과 대동법에 관련된 논의는 두 가지 경로로 제기되었다. 하나는 임진왜란과 그 후의 계속된 혼란으로 빚어진 양안과 공안의 손상·왜곡을 원상태로 회복시키자는 주장이다. 양안과 공안의 왜곡은 조정이 전쟁 물자를 긴급하게 마련하는 과정에서 지역별 전결의 분포를 무시하고 공물을 부과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또 하나의 경로는 정묘호란 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한층 더 높아지자, 군비 마련 방법 중 하나로 공물변통을 검토한 것이다." "병자호란에서 비록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기는 했지만, 조선은 그 후 군비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났다. 이것은 공물변통을 둘러싸고 상충했던 한쪽 힘이 사라진 것을 뜻함과 동시에 본격적인 공물변통 논의가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했다. 그에 따라 조정에서는 공물변통을 위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때 조성된 논의는 결국 효종대의 호서대동법으로 귀결된다."(113-4)
# 양안量案 : 일종의 토지대장, 공안貢案 : 공물의 세입 장부, 어공御供 : 조선시대 왕과 왕실 구성원에게 의식주 관련 물건을 바치는 일 또는 그 물건, 제향祭享 : 나라에서 지내는 각종 제사 의식
"호조 판서 김기종에 따르면, 민역民役을 고르게 하면서도 국가수입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양전量田뿐이었다. 지역별로 전품田品을 고르게 하려면, 전품이 낮게 평가된 지역의 토지 등급을 끌어올리거나, 높게 평가된 지역의 토지 등급을 낮추어야 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조정은 후자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전자의 방법은 백성들에게 더 많은 전세와 공물 부담을 지우는 것을 뜻했기에 민의 불만과 소요을 불러올 것이 불 보듯 확실했기 때문이다. 후자의 방법을 쓰면 자연히 국가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민의 저항과 국가수입 저하를 모두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기존 결수의 등급 인하에 따라 줄어드는 전결수를 양전을 통해 새로 보충하는 방법뿐이었다. 양전을 하면 신기결新起結(새로 개간된 땅)과 은결隱結(숨겨져 있는 땅)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땅으로 줄어드는 총 전결수를 그전처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인조 12년 말에서 13년 초에 걸쳐 삼남에서 양전이 실시되었다."(119)
"병자호란 이전 공물변통 논의의 두 가지 맥락은 상충했다. 하나는 백성들의 역 부담을 줄이고 균등히 하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에게서 재원을 마련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련되기 어려웠다. 병자호란 후에 조정에서 공물변통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까지는 또다시 시간이 걸렸다." "병자호란 직후 조정의 공물변통 논의에는 세 가지 입장이 있었다. 첫째는 어떠한 공물변통에도 반대하는 입장이고, 둘째는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입장이며, 셋째는 절용을 위주로 공안을 개정하자는 입장이었다. 첫째 입장은 병자호란 이후의 국내외적 불확실성에 기초한 것으로, 인조 자신의 생각이자 조정의 공식적 입장이었다. 둘째 입장은 지지자들이 꾸준히 늘면서, 인조 22년 이후에는 가장 이상적인 공물변통책으로 받아들여졌다. 셋째는 공물변통에 대한 조선의 전통적인 입장으로서, 여전히 다수 논자들의 견해를 대표했다. 군자 마련을 위한 주장은 그 급박한 필요가 사라지자, 논의 의제에서 자취를 감추었다."(136-8)
"청은 병자호란 후 조선에 세공歲貢(매년 바쳐야 하는 조공물)을 요구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정묘호란도 청이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발생한 자신들의 경제적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와의 무역이 중단되어 생필품 부족에 시달렸다. 여기에 더해 당시 만주 지역을 강타한 기근 때문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자 명나라를 대신하여 물자를 공급해줄 수 있는 대안으로써 조선이 지니는 경제적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인조 21, 22년에는 전염병으로, 23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때 사간원 헌납에 재직하던 조익의 아들 조복양이 국정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현실 상황은 미봉책이 아닌, 근본적 대책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상소를 계기로 재생청이 만들어졌고, 이 재생청의 경험이 몇 년 후 대동법 성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145-9)
"인조 23년 9월에 성립된 재생청 활동의 이론적 틀은 이이의 공물변통론이었다. 이이의 공물변통론은 재생청 성립 이전까지 수없이 등장했던 여러 공물변통론들의 원형이었다. 지방재정을 배제한 경대동의 실시, 사주인의 배제와 관에 의한 직접적 공물 운송 및 경각사 납부, 공물가 인하의 세 가지가 그 이론의 핵심이다. 그런데 재생청은 임시기관이었으므로, 그 경험을 국가정책의 수준에서 일반화시킬 것이 요청되었다. 재생청의 정책 결과가 대단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에 대한 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또 흉년으로 인해 각 고을로부터 공물 수취가 어렵게 되자, 일시적으로 호조가 각 고을 대신 경각사에 공물가를 지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 차원의 진휼 실시와 공물 운용이 서로 접근했다. 공물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었고, 진휼을 위한 기구가 선혜청 안에 흡수되어 상설화되었다. 이 모두가 대동법 실시라는 종착점에 이르는 각각의 이정표와 같은 의미를 가졌다."(167-8)
제2부 대동법의 정치
4장 효종 시대: 드디어 대동법이 성립되다
"효종 원년, 청나라 사신이 거듭해서 조선에 파견되었다. 이 때문에 산림 인사들과 김상헌을 포함한 대청 강경론자들이 조정에서 일제히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동법의 실시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 사이에는 미묘한 관계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동법에 대해서 소극적이거나 반대에 가까운 의견을 표명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청나라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대청 강경론자들의 대부분은 당시 조선에서 재정개혁보다 정치개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각론보다는 총론에, 실무보다는 원칙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국내적으로는 정치개혁을, 대외적으로는 대청 강경론의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는 그런 입장을 취했던 사람들의 개인적 삶의 경험과 학문적 경향성이 초래한 불가피한 결과였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효종 초 조선과 청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그들 중 다수가 조정을 떠나야 했던 상황은 호서대동법의 성립에 의미 있는 영향을 주었다."(180-3)
"호서대동법 성립 과정에서 김육의 역할은 이 법의 반대자들로부터 정치적으로 대동법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원두표는 이 당시 몇 남지 않은 인조반정의 정사공신靖社功臣이었다. 그런 원두표와 역시 정사공신이자 호서대동법의 실무 책임자인 이시방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이시방이 호서대동법 추진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김육의 정치적 보호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주장은 김육만 했던 것이 아니고, 조정에서의 호서대동법 논의도 그가 홀로 이끌어낸 것은 아니다. 나아가 대동법에 대한 이해에서도 김육이 가장 정통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호서대동법 실시가 결정된 후, 조정에서 그 진행을 정치적으로 보호했던 것은 김육 혼자의 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홍욱은 본래 공안개정론자였지만, 대동법을 실시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자 흔들리지 않는 대동법 지지자로 바뀌었다. 그가 충청 감사에 임명된 것도 김육이 힘쓴 결과였다."(200-5)
"효종 7년 8월, 전남 우수사가 수군을 조련하는 과정에서 큰 사고가 발생했다. 금성·영암·무장·함평·강진·부안·진도 등 고을의 전선 13척과 병선·협선 등이 침몰 또는 파손되었고, 죽은 수졸이 1,000명이 넘었다. 호남에서 연속적으로 대동법 실시를 요구하는 상소가 도달하고 큰 사고까지 겹치자, 김육은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다시 한 번 요청했다. 대동법의 원래 이름이 선혜법宣惠法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동법은 국가가 실질적으로 백성을 위로할 수 있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효종 9년 9월, 향년 79세를 일기로 사망한 김육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호남의 대동법 실시를 위해 적절한 인물을 감사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호남대동법이 중단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 이유로 김육은 서필원을 호남 감사로 임명하도록 왕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마침내 효종 9년(1658) 말에 호남 연해 27개 고을의 대동법이 마련되고, 추등秋等의 대동미로 결당 7두를 걷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217, 223-4)
5장 현종 시대: 대동법이 튼튼히 뿌리내리다
"현종대(1659~1674)는 효종대로부터 공물변통의 의제들을 넘겨받았다. 그렇다고 현종대의 논의와 대동법 실시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조정에서 호남 산군 대동법을 실시하기로 결정된 것이 두 번이나 번복되었다가 세 번째 시도에서야 성공할 수 있었다. 더구나 현종대는 즉위년부터 연속해서 큰 흉년이 이어졌고, 현종 11년(1670)과 12년에는 그 유명한 '경신대기근'을 겪었다. 그 사이에도 전염병과 우역牛疫이 끊이지 않았다. 흉년에는 각종 개혁정책이 미뤄지는 것이 조선의 관행이었다." "조정의 상황인식이나 의도와는 무관하게, 호남 산군의 대동법이 폐지되자 곧바로 방납이 되살아났다. 현종 7년 후반 전라도 암행어사 신명규는, 조정에서 전라도대동법을 폐지하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의 상황과는 반대의 소식을 전해왔다. 즉 큰 고을의 잘 사는 집들은 대동법을 혁파한 것을 편리하게 여기지만, 작은 고을의 가난한 집들은 모두 이 법을 다시 시행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235, 244)
"며칠 후 좌의정 홍명하는 호남 산군에서 당초 대동법을 혁파하기를 원했던 곳은 서너 개 고을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는 이 법의 혁파를 원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인정人情이나 점퇴는 대동법을 실시할 때는 없었는데, 지금은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조정은 호남 산군지역에서 대동법을 다시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현종 7년에 충청도와 전라도 전체에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호남 산군의 대동법 성립 과정을 살펴보면 공물변통에는 전결에 기초한 작미·작포의 방식, 즉 대동법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을 거부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현실의 폐단들이 지체 없이 되살아났다. 또 대동법과 임토작공을 어중간하게 섞는 방식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도 명백해졌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대동법이 폐지되어도, 그에 따른 폐단이 곧 나타났기 때문에 대동법 실시 요구는 끊임없이 되살아날 수밖에 없었다. 공납 문제의 제도적 해법은 대동법이 유일했던 것이다."(245-6)
# 임토작공任土作貢 : 각 고을에서 비치는 공물은 산지를 따라야 하며, 현물로 납부해야 한다는 원칙, 인정人情 :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뇌물과 수수료를 합한 개념
"경기선혜법(1608)은 선조 36년(1603)의 양전을 기초로 했다. 경기선혜법이나 그것이 기초한 양안은 이미 60년이 지난 것이어서 현종대에 이르러 정비가 불가피했다. 경기 각관의 관수는 공식적으로 크게 축소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첩징과 가징을 통해 과도하게 늘어난 상태였다." "각관의 자체 수요를 위해 백성들로부터 과외로 추가 징수한 항목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추가로 거두는 공물은 대부분 국가적으로 중요시되는 어공·진상·칙수 같은 것들이었다. 또 광해군에서 효종 때까지 경기는 특히 다른 도보다 외교·군사적 측면에서 무거운 부담을 지고 있었다.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지리적 환경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호서대동법이 성립된 직후부터 경기선혜법의 재정립을 위한 양전 요구가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종 4년 경기 양전이 완결되었고, 그 결과 정부는 효종 말에 비해서 세 배 가까운 실결을 확보했다. 이것을 기초로, 다음 해에 경기선혜법은 호서대동법의 틀에 맞춰 재정립되었다."(279-80)
"대동법이 도별로 실시됨에 따라 마지막으로 제기된 문제는 불균등한 도별 결당 공물가를 균일하게 맞추는 것이었다. 대동법의 근본 취지가 균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별 공물가 차이를 균일화하는 것은 공물변통의 긴 여정에서 마지막 작업에 해당했다. 결당 12두로 조정된 최초의 도는 경기였다. 조정에서의 논의 과정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경기에서 결당 12두로 공물가가 정해지는 과정은 비교적 순탄했다. 우선 기존보다 공물가를 더 걷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것이기 때문에 현지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또 새로 양전을 해서 종전보다 세 배 가까운 실결을 확보했기 때문에 결당 수취액을 줄여서 받아도 재정이 줄어들지 않으리라고 예측되었다." "호남 연해 각관의 공물가는 처음에 결당 13두로 정해졌지만, 현종 초반에 매년 흉년이 들었고, 중앙정부는 그때마다 공물가를 결당 2, 3두씩 줄여서 받았다. 마침내 현종 7년 봄 호남 연해 각관의 공물가는 전보다 결당 1두가 줄어든 12두로 정해졌다."(273-4)
"경신대기근(1670~1671)은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다른 지역이라고 이 재앙에서 무사했던 것은 아니지만, 특히 호서지역은 대동법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곤란을 겪었다. 그에 따라 이 지역의 결당 공물가를 올려야 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호서는 다른 곳보다 결당 공물가가 낮아, 여기서 공물가를 지급받는 경각사는 다른 경각사에서 경비를 계속 빌려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의 정책 논의 과정이나 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원칙에 비춰보면, 호서의 결당 공물가를 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어야 했다. 경기나 호남처럼 공물가를 낮추는 것도 아니고, 새로 양전을 해서 과세 대상인 실결이 증가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서의 공물가 인상은 실제로 전혀 소란스럽거나 어렵지 않게 시행되었다. 대동법 실시로 공물가가 법 실시 이전에 비해 대략 1/5~1/6 정도로 줄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대동법은 경기와 양호에 실시되고, 그 수취액까지 결당 12두로 맞춰졌다."(275-6)
제3부 대동법의 해부
6장 대동법은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대동법의 실행 규정을 담고 있는 것이 대동절목大同節目 또는 대동사목大同事目이다. 종래에는 대동미를 막연히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누거나, 서울로 올려 보내는 몫인 상납분과 지방 각관에 남겨두기로 한 몫인 각관 유치분으로 나누어 세부 항목들을 설명했다. 대동미를 선혜청이 주관하는 상납미와 영營·읍邑이 주관하는 유치미의 틀로 나누는 것은 대동미를 누가 운용하는가에 따른 분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대동미 분류 방식은 이제까지의 논지와 거리가 있다. 특히 상공과 별공의 분류 방식은 대동법의 기본 의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상공이든 별공이든, 이것은 모두 중앙의 수요를 중심으로 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류 방식에 따른다면,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각관의 수요를 이전의 현물공납제처럼 계속 국가재정체계의 밖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대동법의 큰 의의 중 하나는 각관 수요를 국가재정의 틀 안으로 통합시켰다는 점이다."(288-9)
"대동사목에 따르면, 백성들에게 걷은 대동미(포)는 크게 세 부분─중앙 경각사로 올라가는 것, 각관의 관수로 쓰이는 것, 예비비인 여미餘米─으로 나뉘어 처리된다. 여미는 불시에 일어나는 수요를 대비하는 데 쓰였다. 흉년이 들어 민에게 그 해의 대동미 납부를 면제해줄 때, 선혜청은 미리 비축한 여미로 경각사에 지급하게 했다." "17세기 중반에 적법하지는 않지만 각관에서 예비비 역할을 했던 것은 은결隱結이다. 은결이 수령의 사적 치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각관에서 공적 경비의 예비비로 쓰였던 것을 조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정부가 재정 및 민생과 직결된 문제를 계속 비공식적이고 변칙적 영역에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 당시 은결은 연이은 전쟁 때문에 줄어들었던 전결이 전후에 회복되는 과정 중 양안의 등재에서 조직적으로 이탈되어 발생했다. 이것은 중앙정부가 전정田政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대동법 실시와 더불어 각종 은결의 정리 역시 불가피했다."(293-5)
"조선시대 공물 수취에서 현물납이 언제 대부분 사라졌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 시기를 아무리 늦춰 잡아도 임진왜란 이전에 현물납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이런 환경에서는 현물납으로 인한 방납의 폐단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주인을 거치지 않고는 각관이 공물로 바칠 현물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방납 금지의 법령은 오히려 민이 부담해야 할 방납가를 인상시킬 뿐이었다. 민은 공·역가로 대개 미·포만을 납부하고, 대부분의 공물은 사주인을 통해 시장에서 구매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경각사 입장에서도 자신들에게 필요한 많은 종류의 물품들을 자체적으로 구매 조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더구나 경각사의 운영에는 많은 운영비와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부는 그것들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런 운영비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도 역시 사주인이었다. 따라서 병자호란 이후가 되면 사주인에 대한 인식은 비판의 대상에서 현실적으로 긍정할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전환되었다."(321)
"대동법은 기존 현물납의 극심한 폐단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위험의 재발을 영구히 종식시킨 법은 아니었다. 민에게서 수취하는 모든 공물과 노동력 동원이 대동법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 공물과 노동력 동원은 대동법 이전처럼 호역戶役으로 조달되었다. 또 모든 물품들이 공물주인을 통해 서울에서 마련된 것도 아니다. 일부는 여전히 각관이 직접 납부 책임을 졌다. 그에 따라 크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방납의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말하자면 대동법은 중앙정부가 늘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관리해야만 했던 법이다." "대동사목의 근본 취지는 단순히 공물 조달에 따른 폐단의 방지나 안정적인 공물 확보가 아니라, 공물의 수취를 어떻게 공정하게 민결 위에 정립시킬 것인가에 있었다." "대동법은 종래에 대가 없이 수취하던 각종 항목들을 대동미로 흡수함으로써, 이 항목들에 대한 중앙정부 차원의 관리 근거와 기준을 마련했다."(327)
7장 조선시대 경세론의 핵심을 대동법에서 보다
"17세기의 여러 변통론이 기반하고 있는 공통의 문제 틀을 제시한 것은 이이李珥였다. 17세기의 공물변통론들은 이이가 제시한 해법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들이다." "유형원은 국내외 요인들로 인한 오랫동안의 국정 혼란을 끝낼 수 있는 제도개혁의 기초를 토지에서 찾았다. 이 당시 수많은 관료와 지식인들이 작성한 시무책의 제1조를 장식했던 내용은 '군주의 바르게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유형원이 제도개혁의 기초를 토지에 둔 것은 이 시기 지식인과 관료들의 움직일 수 없는 국가 통치의 제1원리를 상대화한 것이었다. 이것은 곧 유형원이 자기가 살던 사회의 대다수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상식을 넘어, 그 사회 자체의 존립 근거를 예리하고 파악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기존의 익숙한 주류적 담론이 만들어놓은 준거 틀을 넘어선 것이었으며, 유형원이 생각하는 개혁의 대상이 단순히 제도 운영에서 발생하는 부수적 폐단들이 아닌, 제도 그 자체였음을 의미한다."(332-3)
"유형원은 공물의 부과 기준을 명확히 설명했다. 국가재정의 재건을 둘러싸고 대동법과 함께 제기된 대안들 중 하나는 호구 정비와 호패법의 실시였다. 유형원은 여기에 단호히 반대했다. 그는 인정人丁과 호구戶口를 토지의 종속변수로 생각했다." "유형원이 인정과 호로 수취제도의 기초를 삼은 것을 비판한 현실적인 이유는 당시 만연해 있는 인징과 족징 때문이었다. 인징·족징은 수많은 유망과 피역층避役層을 양산해냈으며, 이 시기 조선에서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조租·용庸·조調 제도에서도 토지가 없는 사람에게는 전조田租가 부과되지 않았다. 전조의 부과 대상이 토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과 조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 두 가지는 인정과 호에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유형원은 인징·족징을 일으킨 제도적 원인이 인정을 기초로 운영되는 부세제도 자체에 있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사회제도 자체의 뿌리에서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에 따른 해법을 추적했던 것이다."(335-7)
"현물의 작미·작포를 공식적으로 입법화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임토작공의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공물에 대한 당시의 상식적 믿음이었다." "대부분의 현물 공물들은 납부 과정에서 각 읍, 각 도, 경사京司를 거치다보니, 그 품질이 일정하게 유지되기 어려웠다. 각 단계마다 공물의 품질을 확인하는 담당 관리가 그 품질에 일부러 트집을 잡지 않는다 해도, 장기간의 이동은 공물의 품질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공물이 전달되는 각 단계마다 다음 단계의 점퇴에 대비하기 위해서 원래 부과된 양보다 훨씬 많은 공물을 준비해야 했다. 공물의 품질을 유지해야 하는 문제와 여러 단계를 계속 거쳐 상급기관으로 올라가면서 점퇴에 대비해야 하는 문제는 서로 결합하여 백성에 대한 첩징과 가징을 심화시켰다. 이것은 공물 수취를 담당하는 관리가 탐욕스럽고 부패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임토작공의 법규정 아래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제도적 문제였다."(340-1)
"공물의 작미·작포를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논거는 임토작공이 천자에 대한 제후의 봉헌奉獻이므로 시장에서 사서 바칠 수 없다는 것이다. 임토작공은 경제적 논리가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정치적 논리이며, 통치체제의 정체성과 관련되었다. 작미·작포는 단지 현실적 편의 때문에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유형원은 수취제도로서의 작미·작포 제도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구차하게 현실론에 기대지 않고 고전을 연구했다. 그는 전결세로서의 대동법이야말로 고법이며, 현재 고법이라고 불리는 임토작공은 오히려 고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유형원이 보기에, 옛날 임토작공은 천자와 제후 사이의 예를 표현한 수단일 뿐 수취제도가 아니었다. 예물에 흠이 있어도 그것을 바친 제후가 책망을 받을 뿐, 점퇴로써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임토작공은 이름만 같을 뿐, 옛날의 그것과는 전연 다른 제도이다. 즉 이미 예가 아닌 수취제도에 불과한 무거운 부세인 것이다."(342-4)
"대동법의 핵심 내용으로, 공물을 부과하는 기준이 전결화된 것과 수취수단이 미·포로 바뀐 것을 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양자를 대동법의 본질적 요소라고 볼 수는 없다. 양자는 이미 대동법이 성립되기 오래전부터 실제로 각 지방에 광범위하게 정착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대동법의 진정한 의미는 이 두 가지가 법으로 규정됨으로써 양입위출을 위한 객관적 지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거듭 말하지만 대동법의 핵심은 위의 두 가지가 법적 강제성을 띠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전결세화 및 작미·작포화는 양입위출과 연결됨으로써 대동법의 진정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양입위출의 제도적 성립이야말로 대동법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대동법 실시론자들은 민에게서 공물가를 한 번 거둔 후 다시 거두지 않는다는 수취 액수의 고정에 강조점을 두었다. 반면 공안개정론은 공물수요자들의 자발적 절약을 강조하는 것 이외에 그것을 강제할 수 있는 별도의 방법은 제시하지 못했다."(350-1)
에필로그
"종래 대동법의 변통론적 의의에 대해서는 국가재조론國家再造論에서 검토되었다. 이 학설은 17세기 전반의 변통론을 둘로 나누었다. 즉 정통 주자학과 수양론의 철학적 기반 위에서 지주의 입장을 옹호하며 부세제도 개혁을 주장하는 쪽과, 반주자학의 사상적 기반 위에서 소농적 입장을 옹호하며 토지제도 개혁을 주장하는 쪽으로 나뉘었다. 이런 구분을 통해 전자는 후자보다 보수적이며, 역사적으로도 진정한 개혁은 후자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공적 공간, 정책 논의의 장에서 제기되었던 것은 언제나 과세를 어떻게 민의 담세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실시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언제나 과제는 불합리한 과세로 인한 피역避役·유망流亡과 그로 인한 담세층 감소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였다. 사실 토지제도 개혁은 국가체제 자체가 붕괴되거나 정지된 상태에서 가능했다. 현존하는 체제 안에서 소유 문제를 둘러싼 토지제도 개혁 논의는 있을 수 없다."(398-9)
"대동법은 조선 건국 이래의 재정 원칙인 양입위출을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전통적 입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변화된 현실에서 그것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변통의 모습을 취했다. 대동법 실시론자들과 공안개정론자들이 양입위출을 이해하는 차이는 재정 차원을 넘어, 제도개혁 자체에 대한 입장으로 확장되었다. 공안개정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문제를 해석하고 행정적 엄벌주의로 대처했다. 이에 비해 대동법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관료들의 도덕적 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폐습이 빚어진 것이 '사私'에서 비롯되었어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 당시에 문제의 해결을 제도의 관점에서 시도하려는 태도는 오래도록 잊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성리학적 원리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조선 건국기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원칙이었다."(4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