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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님의 서재
  • 물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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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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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문명 탄생의 필수 자원


"물은 가장 보편적인 용해제이다. 물은 다른 분자를 포화, 용해, 융합할 수 있어 핵심적인 화학반응의 촉매작용을 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가장 중요한 변화 요인이다. 작물과 나무 끝부분, 인간의 혈관 등에서 중력을 거슬러 영양분과 미네랄이라는 생명력을 위로 올리는 것도 물이다. 초기 생명체의 진화를 도와서 산소가 풍부한 지구의 대기 환경을 창조한 것도 물의 힘이었다. 얼면 밀도가 낮아지고 부피가 팽창하는 물의 이례적인 성질은 암석을 쪼개서 지질학적 변화를 일으키며, 호수나 강의 표면을 얼음층으로 덮어 격리함으로써 그 아래의 수중 생물들을 보호하는 기능도 한다. 온도가 오르는 동안 엄청난 양의 열을 흡수하는 예외적인 능력은 계절적인 표면 온도 상승을 완화하며, 그 결과 지구가 금성처럼 항상 수증기 넘치는 온실이 되거나 화성처럼 얼어붙은 사막이 되지 않게 해 준다. 물의 움직임은 지구의 피부층에 해당하는 지표면의 비옥한 토양층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재분배한다."(19-20)


"정말로 중요한 물의 특징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자체 재생산이 가능한 핵심 자원이라는 점이다. 증발한 물은 염분이 제거되어 정화된 형태로 비가 되어 지구 전역에 내린다. 지구의 지속적인 물 순환 시스템 덕분에 자연적인 생태계가 회복되고 문명이 지속될 수 있다." "건조하거나 습하다는 기본 조건, 계절적인 강수량과 그에 대한 예측 가능성 패턴, 강물 흐름의 특징과 운항 가능한 거리 등은 사람이 거주하는 세계 모든 지역의 핵심 요소들이다. 대양의 조류에 의한 열 분산 효과 혹은 대기 중의 온난한 증기층이 제공하는 열 보존 효과 때문에 지구는 적도부터 냉대까지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곳이 되었다." "변화하는 물 조건의 도전에 사회가 당대의 기술과 조직을 동원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곧 역사를 결정짓는 핵심 동력이다. 주도적인 문명이란 자연적인 물의 방해를 이겨내고, 이 필수불가결한 자원에 숨겨진 이익을 얻어 그것을 지렛대로 사용하는 데 성공한 문명이다."(20-1, 25)


"초기의 관개농업 문명들은 모두 범람을 일으키고 토사를 운반하는 큰 강 주변의 반건조 지역에서 발전했는데, 대개 강우 농경을 하기에는 비가 너무 적게 오는 곳이었다. 최초로 문명이 발전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산지의 농부들이 페르시아 만 입구 근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있는 수메르 지방의 돌 없고 진흙땅인 범람원이나 늪지로 이주했다. 비가 적게 오고 치명적인 수인성 질병들이 창궐하는 험악한 말라리아 지방인 데다가 극심한 홍수와 가뭄이 맹위를 떨치는 곳으로 농부들이 이주해 가는 현상은 우리의 직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이 강들에는 모든 결점을 보상하고도 남는 두 가지 탁월한 자산이 있다. 하나는 연중 계속 대량으로 흘러오는 안정적인 물 공급이고, 다른 하나는 범람과 함께 경지로 밀려와서 쌓이는 충적토이다. 관개시설을 건설하고 유지만 잘한다면 안정적인 물 공급과 충적토는 강우에 의존하는 산지의 농업에 비해 몇 배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는 조건이 된다."(31-2)


"농업이 부의 근원이던 시대 전체를 통해, 물이 풍부하고 관개를 하는 국가들과 물이 부족하고 인구가 희박하며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규모가 작은 강우 의존형 국가들 사이에 인류 문명을 가르는 핵심 구분선이 그어진다. 또 다른 두 가지 구분선 역시 물 사용과 관련이 있다. 하나는 고대 관개 제국들의 주변 지역에서 해상 활동을 하는 문명들이 서서히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곳들은 국내의 농업 생산성이 낮아서 주로 이웃 국가들과 교역을 통해 소득을 얻었다. 해상 교역은 물의 부력을 이용한 빠르고 값싼 항해 가능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잔잔하고 닫힌 바다인 지중해에서는 그 조건에 맞게 돛과 노로 동력을 얻는 화물선이 등장한 후 이것이 점차 발전을 거듭해서 기원전 2000년 대에는 엄청난 역사적 힘이 되었다." "다른 물 관련 구분선은 '야만인'과의 구분이다. 이는 원시적인 수렵채집인들의 후손인 유목민들과 점차 확대되는 문명화된 농경 거주민들 사이의 실존적 충돌이라 할 만하다."(34-5)


"나일 강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집트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한다. 그러나 나일 강의 혜택은 파라오의 통제를 넘어서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 곧 강의 연례적인 홍수에 좌우되었다. 지나친 홍수는 모든 마을을 물에 잠기게 하고 경지를 쓸어가 버렸다. 수면이 낮아지는 해는 그보다 훨씬 더 나빠서, 물과 토사가 부족해 기근과 절망의 카오스를 가져왔다. 이집트의 장구한 역사 내내 왕조의 흥망성쇠는 놀라울 정도로 나일 강 범람의 순화고 일치했다. 범람이 적절하게 이루어진 시기에는 잉여 식량이 생기고 나일 강 유역의 상이집트와 늪지 삼각주 지역의 하이집트가 통합되었으며, 급수시설의 팽창, 이집트 문명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전과 기념물, 그리고 왕조의 회복이 가능했다. 이에 비해 저수위가 계속되면 결핍과 분열,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되면 파라오 왕국은 강 유역과 삼각주 지역으로 분열되었으며, 종종 군벌들이 지배하고 도적떼의 위협을 받는 서로 경쟁하는 구역들로 갈라졌다."(40-1)


"나일 강과 달리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의 특징은 강의 범람과 후퇴가 예측하기 힘들며 흔히 아주 격렬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농업 주기와 맞지 않아 문제였다. 물이 가장 필요한 시기는 파종과 경작을 하는 가을인데, 이때 수위가 가장 낮았다. 늦봄에는 천둥번개와 함께 쏟아져 내리는 강한 비 때문에 갑자기 물이 불어나 거의 다 자란 작물들을 망칠 위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핵심은 거대한 수리사업을 통해 쌍둥이 강을 일 년 내내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데 있었다. 큰 저수 댐에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작물이 자라는 기간에 방류하고, 경작용 고랑을 만든 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고지대로 물을 길어 올렸으며,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튼튼한 방재 둑을 설치했다." "간단히 말해 이집트는 자연적인 물 자원을 제공하는 나일 강이 준 선물이었지만 메소포타미아는 정교한 물 공학과 의도적인 사회 조직을 통해 자연을 거슬러 가며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문명이었다."(54-5)


"집약적인 관개농업은 시간이 지나면서 환경에 부작용을 미쳐 지속가능성을 무너뜨린다. 우선 지하수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토양이 물에 잠기고 동시에 모세관 현상 때문에 치명적인 염분기가 작물 뿌리에 달라붙는다. 덥고 메마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일어나는 증발 현상으로 인해 한때 비옥했던 지표면에 눈에 보일 정도로 완연하게 소금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수확은 점차 감소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기원전 18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한 석판에는 〈검은 땅이 하얗게 변했다〉라고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농업 위기를 심화시킨 두 번째 인공적인 환경 악화 요소는 숲의 남벌이다. 주변의 지중해 연안 지역을 포함하여 세계 어느 곳에서나 그렇듯이 현재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메소포타미아 지역도 한때는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숲을 개간하면 그 지역은 더 메마르고 덜 비옥해진다. 이 때문에 강수량도 줄어들고 토양이 빗물을 머금는 능력도 떨어지는 것이다."(60-1)


"모든 면에서 인더스 문명은 고전적인 수리사회였다. 중앙집중화와 재분배 성격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내부에 밀과 보리를 저장하는 거대한 곡물 창고의 존재에서 짐작할 수 있다. 발굴된 유해에서 발견된 풍토병 말라리아의 흔적은 이 병을 옮기는 모기의 존재를 증언해 준다. 관개용 수로의 고인 물에서 번식하는 모기는 수리사회라면 어느 곳이든 존재한다. 우기에 물을 보관하였다가 건기에 방류하는 것은 몬순 지역 거주지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700년경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졌다. 대개 북서쪽에서 흰 피부와 옅은 색 머리카락을 지닌 인도유럽 어족 아리안 계 기마민족이 침입해 와서 붕괴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이들은 게르만 족, 켈트 족 혹은 고대 그리스 민족의 사촌뻘로서, 그 후손들이 나중에 갠지스 강과 인더스 강에서 베다 힌두문명을 건설한다. 그러나 아리안 족이 침입해 왔을 때 인더스 문명은 이미 심각한 쇠퇴를 겪고 있었다. 그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 취약한 수리환경이다."(72-4)


"진정 위대한 지중해 해양문명으로 우뚝 선 세력은 일찍이 조심스럽게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데 그쳤던 이집트 인이 아니라 바다에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는 크레타 섬의 미노아 인들이었다. 260킬로미터에 걸친 이 날렵한 섬의 가장 중요한 자연적인 자산은 다름 아닌 전략적 위치로서, 레반트, 소아시아, 이집트라는 수익성 좋은 시장과 서지중해의 원재료 공급지들을 중개하는 곳이었다. 미노아 인들이 특히 청동기 시대에 큰 이익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청동 재료들을 쉽게 크레타에 집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부를 이용해서 미노아 인들은 화려한 다층 궁전('미노스' 왕의 궁전)과 큰 도시들을 건설했으며 예술에 전념했다. 특히 성채의 시대였음에도 그들의 최대 도시인 크노소스만은 성벽을 두르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것은 미노아의 해군이 얼마나 우월한지 말해 줄 뿐 아니라, 범선의 시대 내내 공해(公海)가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을 보여 주는 역사상 최초의 증거들이다."(84-5)


"살라미스 해전 이후 아테네는 동지중해의 해군 및 해상 교역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해양문화에서는 대의제적 자유시장 민주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모델이 더욱 발전했다. 관개사업과 대지 중심의 수리국가 민중들로서는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정책 지시와 중과세에 따르는 일 외에는 실제적으로 다른 경제적 대안이 거의 없었던 데 비해, 사적인 해양상인들은 저렴한 세금을 내고 양질의 서비스를 받으며 안전이 확보된 항구에서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역사상 많은 중요한 해양무역 국가들이 대개 중요한 대의제 시장 민주주의 국가들이며, 이들이 모두 아테네에서 탄생한 정치경제의 계보를 따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테네의 흥기와 함께, 상품과 인력을 동원하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들 사이에 문명의 거대한 이원적 긴장이 결합되었다. 하나는 권위적인 정부의 지시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가격이라는 기준과 사적 이윤의 동기로서, 이 두 가지는 21세기까지 여러 형태로 우위를 다퉜다."(93-4)


"로마는 지중해 전역을 지배한 첫 번째 세력이다. 지중해 중앙에 위치한 로마는 지중해 서쪽의 자연 자원과 지중해 동쪽 선진 문명의 역동적인 시장 및 노하우, 양쪽 모두에서 부를 얻을 수 있는 전략적인 위치에 있었다. 로마는 물론 육군으로 유명하지만 진정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기원전 3세기에 서부 지중해의 해로들을 장악한 이후이다. 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1년) 당시 한니발이 위험을 무릅쓰고 육로로 이탈리아에 침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로마의 해상 우위 때문이었다. 로마는 실제적이고 잘 조직된 대규모 토목 기술과 군사력을 결합함으로써 문명사회로서의 독특한 천재성을 드러냈다. 특히 물을 잘 다스리고 이용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수리 기술을 통해 로마는 해군을 위한 조선업과 항해 기반시설을, 육군을 위한 제국 도로를, 그리고 거대한 메트로폴리스라는 새로운 문명 요소를 창안하는 데 필수적인 대규모 수로와 수리체계를 완수했다."(99, 103)


"중국의 물의 역사에서 결정적 전환점이 되는 사건은 7세기 초에 대운하가 완성된 일이다. 대운하가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수리적인 단층선을 연결했기 때문이다. 남북 사이에 존재하는 물과 토양 사이의 불일치는 반복되는 기술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였다. 대운하는 중국 북부의 고질적인 물 부족 사태를 해결하여 지극히 풍부한 양질의 토양에 신선한 물을 공급해서 식량생산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이끌었고, 동시에 남부에서는 상대적으로 지력이 약한 데 비해 물이 과도하게 많은 반대 성격의 문제를 해결했다. 나일 강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한 것처럼, 운하는 중국 광대한 지역의 다양한 생산 자원들을 통제하는 강력한 중앙 정부와 자체 군사방어 능력을 갖춘 민족국가를 통합했다. 대운하는 중국이 중세에 세계에서 가장 조숙한 문명이 되는 데 공헌했을 뿐 아니라, 15세기에 중국이 세계에 등을 돌리는 운명적인 결정을 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서서히 쇠퇴하도록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125-6)


"명이 1403년에 베이징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을 때 대운하 전체의 준설, 보수, 확대 사업은 국가의 최대 관심사였다. 북쪽 변경 지역에 식량과 군수품을 운반하는 통로인 대운하는 이 나라 전체 방어 체계의 근간이 되었다. 기존의 해상 수송 체계는 해적들과 자연적인 해상 위험 요소들 때문에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그렇지만 베이징 너머까지 확대된 대륙 운하를 통해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대혁신이 필요했다. 원대의 기술자들은 이 문제로 좌절하곤 했는데, 건기에도 고산지대의 최고점에 달하도록 충분한 물을 대서 연중 운항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대형 화물선은 우기가 돌아올 때까지 통상 6개월은 묶여 있었다. 이 문제는 1411년 천급갑문을 건설하면서 해결되었다. 새로운 갑문은 섞여서 흐르는 두 강물을 나누었으며, 관리인들은 15개의 갑문 체계를 이용해서 계절별로 물 흐름을 조정했다. 천급갑문이 건설되면서 이제 대운하는 단번에 믿을 수 있는 사계절 내륙 수송로가 되었다."(154-5)


"새 대운하의 완성은 중국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서 나머지 세계와 단절하게 된 정책적 전환의 계기였다. 더구나 대운하는 더 자족적이고 통제적인 수리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성함으로써 명의 중앙집권화된 권위를 높여주었다. 황제와 그 주변의 보수적인 신유교 관료들은 지주 계급과 결탁하여 아직 잔존한 상인층을 힘으로 억눌렀다. 바로 이 계층이 활기찬 송대 황금기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었다. 이 점에서 중국은 당시 유럽과 대조를 보인다. 유럽은 전체를 통합하는 내륙 수상 수송 체계가 없고 그 대신 해상 수송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더 작은 국가 단위가 만들어졌고, 이런 체제가 완성되면서 통제받지 않은 교역과 자유시장 기업들이 확대되었다." "중국의 해상 수송로는 불필요하게 중복되어 곧 폐쇄되었다. 1419년부터 모든 원양항해용 선박 건조가 중단되었다. 1433년 이후 정화의 원정을 중단하고 중국 내부의 자원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 것은 내향적 정책 결정의 또 다른 단계일 뿐이었다."(155-6-5)


"이슬람권의 핵심 지역은 지중해와 인도양이라는 두 해상 변경으로 둘러싸인 사막이었다. 이 지역에는 운항이 가능한 강이라든지 중국의 대운하 같은 수로가 없어서 희귀한 수자원 사이에 메마른 공지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으므로, 이슬람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적 중심지들을 통합하고 중앙집권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이슬람은 물에 취약한 문명이 되었다. 이 문명은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수리조건의 변화에 극도로 취약했다. 이슬람 문명에서 풍요의 시기는 잠깐이었고, '충만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 세기 동안 아라비아 인들은 물 부족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 사용하는 생활 방식에 묶여 있었다. 그러면서도 덥고 메마른 사막과 바다로 막힌 변경이라는 장애를 오히려 상업 교역로의 준독점으로 바꾼 아랍의 천재성 덕분에 동과 서 사이의 장거리 이동로와 경유지를 통제하는 위대한 문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는 동시에 12세기 이후의 급속한 쇠퇴의 원인 역시 설명해 준다."(160)


"이슬람권 사람들이 구세계 문명권의 여러 교차로 근처의 영토를 정복해서 상업 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것은 결국 농업용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 조건 때문에 식량생산이 제한되고 그에 따라 유지 가능한 인구가 정해졌다. 평온한 시대에도 이슬람은 3000만~5000만 명의 인구만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 인구는 그 세 배이고 세계 인구는 열 배였다. 그 결과 이슬람은 항시적으로 인력이 부족했고 따라서 종교적 개종이나 정복을 통해 팽창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의 종교적 보편주의, 그리고 아랍 지도자들이 늘 비아랍 개종자들을 수용하는 것 역시 이런 인구 부족에서 기인한다. 피정복민, 용병, 심지어 수많은 노예들까지 이 사회 내로 흡수되는 데 그토록 관대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또한 물 부족 문제로 물이 나는 지역에 이슬람 인구가 고도로 집중되었다. 그래서 바그다드, 카이로, 코르도바처럼 예외적으로 큰 인구 과밀 도시들이 생겨났다."(167-8)


"이슬람 문명의 또 다른 물 관련 약점은 작은 강들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슬람의 '유량 부족'은 단순히 빠르고 안전하고 광범위한 내부 수송 네트워크의 발전을 저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세에 중요한 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던 수력의 이용 또한 막았다. 무슬림의 수리공학이 유럽보다 더 발전해 있었으면서도 물레방아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물살이 빠른 강이 원래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이 수많은 작은 강들의 수력과 수송 잠재력을 활용해 초기 산업을 발전시킴으로써 역사적 상승기를 타는 동안 이슬람 시대의 스페인은 물레방아를 단지 곡물 제분과 양수에만 사용했다." "되돌아 보건대 첫 번째 치명적인 실패는 718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지중해를 이슬람의 호수로 만들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유럽의 해양국가들이 해상력을 건설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지중해 무역에서 점차 축출되어 중요한 부의 원천에서 배제되자 이슬람 문명은 사막 자원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185)


2부 물과 유럽의 번영


"카리브 해에서 흘러오는 따뜻한 멕시코 만류 덕택에 북유럽은 아(亞)북극에 해당하는 위도에도 불구하고 거의 연중 농사가 가능한 온대 기후를 유지했다. 이 지역은 물을 비롯한 천연자원이 많고, 강수량이 풍부했으며, 끝없이 긴 톱니모양의 해안선과 함께 운송과 무역에 적합한 좋은 자연 항구들이 많았다. 또한 지중해 지역의 강들에 비해 훨씬 먼 곳까지 이르는 북유럽의 강들은 대부분 북쪽으로 흘렀으며, 길고 항행이 가능하여 광대한 교통 네트워크의 잠재적인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로마 시대 내내 북유럽 지역은 농업 확대에 있어 극복하기 어려운 물 관련 장애물에 직면해 있었다. 강수량이 지나치게 많았고, 무거운 진흙질의 토양은 자연적으로는 배수가 잘 되지 않았다. 평평하고 종종 침수되는 북유럽의 평지 대부분은 빽빽한 삼림과 늪지였다. 지중해 지역과 중동의 가볍고 건조한 토양에 사용했던 경작 기술들(특히 황소가 끄는, 나무로 된 얕고 단순한 쟁기)은 북부 지역의 토양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200)


"북유럽의 경제적 각성을 자극한 농업혁명의 중요한 돌파구는 바퀴 달린 몰드보드 중쟁기와 함께 찾아왔다. 4~8마리의 황소가 끄는 몰드보드 쟁기에는 크고 굴곡진 철제 날 또는 철판이 덮인 목재 날이 달려 있었다. 이 판은 깊은 고랑을 파내는 동시에 높은 진흙 두둑을 만들어서, 넓은 공간에 걸쳐 진흙질 땅의 생산성을 높였다." "몰드보드 쟁기 덕분에 질척거리는 토지의 제약에서 벗어남으로써 얻어진 농업 발전과 인구 팽창은 곧 지역 내의 수자원 개발을 활성화해 경제 팽창을 더욱 자극했다. 1000년 이후, 유럽 내륙의 긴 강들과 북부 해안에는 종종 중무장한 상선들이 활기차게 왕래했다. 이 상선들은 곡물과 목재, 금속, 밀랍, 모피 같은 원재료, 그리고 나중에는 염장 청어 같은 상품을 싣고 부상하는 자유 상업 도시들과 계절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교역 시장들을 오갔다. 북부 해역에서 활동하는 이런 초기 상인들 중 많은 이들은 긴 배를 타고 노략질을 일삼았던 노르만 족의 후손들이었다."(202-4)


"기원전 1세기에 있었던 물레방아의 발명은 문명사의 분수령 중 하나로 기록된다. 주로 경지 관개용 물을 끌어 올리려는 목적으로 동물의 힘으로 움직이던 고대의 노리아(물동이들의 연쇄)가 물레방아의 오래된 사촌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륜의 물갈퀴 판이 설치된 물레방아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 속에 들어 있는 물의 에너지를 생산적인 작업을 하기 위한 에너지로 자동으로 전환시켰다. 말하자면 물레방아는 역사상 최초의 기계식 엔진이었다." "11세기 이후 물레방아는 기계 전동장치, 플라이 휠, 캠축, 컨베이어 벨트, 도르래, 이동장치 그리고 피스톤 등의 실험을 자극했고, 이는 산업 생산의 핵심적인 노하우를 개발하는 발단이 되었다." "물레방아는 또한 중세 유럽에서 철을 용해하는 용광로는 개발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철이 동시대에 확산된 화약과 결합하여 대포와 화기를 만들어 내자 유럽의 함선과 군인들은 향상된 무기로 무장했고, 이것은 대항해 시대의 정복 원정을 이끌었다."(208-10, 214)


"유럽 내부의 권력 중심지는 16세기 중에 지중해에서 대서양 북서쪽의 해상 열강들로 이동했다. 유럽의 해양 팽창 세력이 지구의 대양을 빠르게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보충적인 역할을 했던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물의 혁신이 일어났다. 배에서 마실 물을 신선하게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지만, 장거리 원양 항해에서는 가장 힘든 문제였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선상에서 신선한 물을 장기간 보존할 방도는 없었다. 미지의 해안에 상륙할 때 탐험가들은 가장 먼저 물 공급지를 찾아내야 했다. 그 시대에는 문명 지역의 항구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언제나 신선한 물을 얻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때는 변색된 물, 소금물, 세균 투성이의 물, 그리고 오염된 물을 마시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알코올로 살균한 맥주나 포도주, 또는 뜨겁게 끓인 물로 수분 섭취를 제한했다. 그러던 중 15세기에 물을 장기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물통을 개선하면서 선원들의 상황은 어느 정도 나아졌다."(243)


"장거리 항해와 대포의 시대에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때까지는 공해의 자연적 힘을 동원하는 해상 강국의 이점은 월등한 육군에 대항해 힘의 우위를 회복하는 세 번째 축으로 작동하는 정도였으나, 이제 그 장점이 더욱 발전해서 작고 민주적인 해상 국가들이 글로벌 지배를 둘러싼 충돌에서 오히려 우세를 점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섬나라 영국이 대륙의 경쟁국 네덜란드를 능가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육상 침공에 대항해 견고한 방비를 갖추어야 하는 추가 부담을 아예 지지 않고, 모든 자원을 해군력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데 있었다. 이것은 네덜란드가 쇠퇴한 최종 근인(近因)이기도 했는데, 흥미롭게도 고대 페니키아 인들이 이웃의 대륙 제국이었던 메소포타미아에 의해 몰락한 까닭과 유사하다. 항해 시대를 통틀어 무적함대와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영국을 침공하려던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까지 1세기 동안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았다."(262-3)


"물은 지구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질 가운데 온도 범위에 따라 액체, 고체, 기체의 모든 상태로 존재하는 유일한 물질이지만, 지금까지 각 문명은 주로 액체 상태의 물을 이용해 왔다. 물을 가열해 가스 상태가 된 증기의 팽창력에 대해서는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17세기 말에 가서야 런던에서 물리학자 로버트 보일과 함께 일했던 프랑스 출신 물리학자 드니 파팽이 기압에 대해 새로운 과학 지식에 따라 실용적 증기 압력 밥솥을 발명했고, 최초의 증기기관들의 이론적 기초가 될 일부 기본 설계들에 대한 개념적인 사항들을 적어 놓았다. 1698년 영국의 군사 엔지니어인 토머스 세이버리는 비록 매우 불안정하고 폭발하기 쉬웠지만, 처음으로 콘월 주석 광산에서 물을 제거하는 데 쓰이는 증기펌프를 설치했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처음 사용되자마자 17미터 높이의 물이 채워져 있던 수직 갱도에서 물을 비워 냈다. 동시에 와트의 증기기관은 용광로에 바람을 불어넣는 송풍기에도 이용되었다."(272-3)


"용광로를 가열하는 송풍기에 증기력이 이용되면서, 저렴한 고품질 주철의 대량 생산이 촉진되었고, 주철은 곧 산업시대의 가장 중요한 건축자재가 되었다. 그때까지는 한정된 양의 단조 철이 공급되어 주로 영국 해군의 대포와 다른 주요 장비 제조에만 쓰였다. 증기력과 철이 만들어 낸 역동적인 시너지 효과는 자체 강화되는 경제 팽창의 선순환을 일으켰으며, 산업혁명의 두 번째 국면을 이끈 핵심 기술 클러스터가 되었다. 증기력은 더 많은 철을 주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더 많은 철은 증기력이 활용될 수 있는 튼튼한 장비들과 응용물들을 생산해 냈다. …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초기에 증기기관을 이용한 중요한 사례 중 하나는 전통적인 물레방아의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물을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증기력으로 물을 끌어 올려서 물 흐름을 보충해 거대한 철제 바퀴를 돌리자 물레방아의 힘은 엄청나게 증대되었다." "수력과 증기력은 나란히 성장을 계속했다. 증기력이 수력을 앞지른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였다."(281-3)


"사람들은 증기력 덕분에 이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멀리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1830년에서 1920년까지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5500만 명에서 7000만 명의 유럽인들이 이주했던 것은 이러한 발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이 이주한 결과 미국의 서부 팽창을 제한하던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 현상이 줄어들고, 동시에 유럽에서는 1848년의 사건같이 혁명적 분란의 위협을 가하는 유럽 내 실업인구의 과잉이 완화되었다." "이전의 수상 운송 혁신들과 마찬가지로,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증기력 역시 세계의 지정학적인 균형을 재조정했다. 증기력은 지구상의 모든 사회를 잠재적인 원료 공급지이자 동시에 빠르게 성장하는 유럽 산업을 위한 잠재적 시장으로 만들었다. 식민지 위성국들과 그들의 유럽 식민모국들 사이에는 종속적인 상호관계가 형성되었다." "새롭게 태어난 세계의 경제적 질서에서 제조업을 장악한 서구의 '중심부'는 더 지배적이고 부유해졌다."(286-9)


"수력발전은 그 자체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혁명을 만들어 냈다. 전기는 송전이 용이했고, 수력발전소가 위치한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와 공장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었다. 증기력에 필요했던 석탄은 부족했지만 산악 지역에 수량이 풍부한, 즉 '백색 석탄'이 많은 국가들은 갑작스럽게 에너지 자원을 얻어서 산업시대에 돌입할 수 있었다. 산악지형인 이탈리아가 극적인 사례이다." "수력 전기의 확산은 유럽과 미국을 넘어 전세계로 산업혁명이 퍼져 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수력발전소에 적합한 물 공급지가 부족해지고 증기 터빈이 개선됨에 따라, 화석 연료나 핵연료를 사용하는 대형 화력 발전소에서 더 많은 전기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소들은 물을 증기 터빈에 사용했을 뿐 아니라 냉각제로도 사용했다. 석유를 사용하는 내연기관의 중요한 혁신 과정에서도 물은 중요한 냉각제로 쓰였다." "20세기의 특출한 산업 팽창에 힘을 공급하는 핵심 과정에서 물과 에너지는 상호 공생적으로 연결된 파트너였다."(305-7)


3부 물과 현대 산업 사회의 형성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물은 역사적으로 항상 칼의 양날과 같은 의미를 띠고 있었다. 먼저 사람은 생존을 위해 매일 2~3.5리터의 물을 마셔야 한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을 만드는 데 수 리터, 그리고 최소한의 위생을 유지하는 데에도 40~75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오염된 물을 마시거나 병균이 서식하고 있는 고인 물에 노출되면 질병 감염, 수명 단축, 각종 신체적 고통의 주요 원인이 된다. 모든 시대를 망라해 가장 강력한 수인성 질병은 이질과 일반적인 설사 증상이었다. 인류 문명이 수렵, 채취 단계에서 관개농업 단계로 넘어가면서, 인간은 말라리아, 황열병, 뎅기열 등을 옮기는 모기, 주혈흡충, 기니 벌레 등이 살고 있는 관개수로의 고인 물 웅덩이에 노출되는 일이 잦아졌다.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확산되는 치명적인 수인성 질병들의 위험을 증대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콜레라와 장티푸스라는 유행병이다."(314)


"대항해 시대 이후 처음으로 차와 커피, 초콜릿이 각각 중국, 이슬람권, 멕시코에서 유럽으로 도입되었을 당시 이 식품들은 의학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마도 그것들을 뜨거운 상태로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다른 형태의 무균 음료인 곡물 증류주가 대중화되었다. 그리스 인과 로마 인은 고대부터 초기 형태의 증류주를 제작했고, 유럽에서는 9세기 이후로 증류기를 사용했다. 근대에 들어서 증류주는 의학적 효과 때문에 의사나 약사들이 권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2세기가 지난 후 증류주가 대중화되자 공공장소에서 술에 취한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오염 가능성이 있는 물을 정화하려 할 때, 더 나은 방법이 없는 경우에는 임시 민간요법에 따라 식초 몇 방울을 물에 넣기도 했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 역시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건조한 지중해 연안 주민들 사이에서 애용되는 방법이었다. 깨끗한 물을 안전하게 섭취하는 일반적인 방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바로 맥주였다."(315-6)


"19세기 중반 위생의 위기는 산업화된 시장경제 고유의 딜레마를 드러내는 초기적 현상이었다. 이 체제는, 지속가능한 생태계가 지속적인 생산 증가의 필요조건이라고 할지라도, 원치 않는 성장의 부산물로 오염된 자연 생태계를 건강한 균형 상태로 되돌려 놓을 자동적이고 내재적인 장치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영국에서 위생 개혁을 이끌어낸 최후의 기폭제가 된 사건은 바로 1858년에 발생한 템스 강의 '대악취'였다." "위생 관념이 등장하고 세균 이론을 수용하게 되자, 영국인들은 이제 런던에 깨끗한 물을 풍부하게 공급하기 위해 추가 조치들을 취했다. 주요 원칙은 가능한 한 가장 깨끗한 곳에서 물을 끌어와야 하고 그 물을 제대로 정화해야 하며 공급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오염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하수 처리 시설도 개선되었다." "위생혁명은 깨끗한 물의 공급량을 엄청나게 증가시킴으로써 현대 산업 도시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325-30)


"영국 정부의 정책은 식민지인들을 애팔래치아 산맥 동쪽에 묶어 두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의 해상 제국과 보다 긴밀하게 연결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지도자들은, 유혹적인 미시시피 강 유역의 농지와 산맥 너머의 서로 교차하며 흐르는 가항(可航) 하천들이 자신들만의 풍족한 서부 제국을 만들어 줄 핵심 열쇠임을 알아차렸다." "미시시피 강은 간선 하천인 동시에 범람 하천이며 관개가 가능한 하천이었다. 이 강의 가항성으로 인해 자연적인 내륙 수로 교통망이 가능해졌고, 그 덕분에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한 지역에 걸쳐 띄엄띄엄 분포해 있는 국민들을 곧바로 통합할 수 있었다. 육로였다면 그런 일은 실제 불가능했을 것이다. '빅머디(Big Muddy, 미시시피 강의 별칭)'는 특히 서쪽에서 흘러드는 지류 덕분에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은 양의 진흙을 운반한다. 그리고 수차례 범람하면서 중서부의 농지에 두툼하고 비옥한 잔여물을 남긴다."(341-3)


"전기는 저장과 장거리 전송이 모두 용이한 유일한 에너지이다. 그리하여 전기는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을 변화시켰다. 도시는 밝아졌고 가정에는 세탁기, 전화, 라디오가 설치되었다. 냉장 보관 덕분에 음식을 오래 저장하고 먼 곳까지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모든 종류의 제품에 소형 전기 엔진이 장착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산업 분야도 등장했다. 예를 들어 알루미늄은 풍부한 양의 전기만 있다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원석에서 추출하고 정제할 수 있는 재료이다.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 같은 수력 전기가 풍부한 나라들은 중요한 알루미늄 생산국이 되었다. 그리고 싼값에 알루미늄을 확보하면 항공기, 선박, 자동차 등을 생산하는 데 유리해진다. 강철, 석유, 내연기관과 더불어 전기는 증기와 철의 시대를 대체한, 2차 대량 생산 산업혁명의 역동적 토대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도약을 위해서는 전력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수력터빈이 그 중요한 사례다."(356-7)


"수력발전은 새로운 산업 시대에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선도적인 위치에 오르는 데 일조했다. 미국 역사에서 수력발전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건조한 서부의 프론티어에 묻혀 있던 부를 끌어내는 데 기여한 핵심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리 호수와 온타리오 호수 사이에 위치한 나이아가라 폭포는 낙차가 크고 연중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기 때문에 수력발전에 적합하지만, 미국 내에 이러한 환경을 가진 곳은 몇 군데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기 전환기 즈음 여러 가지 산업 기술들을 조합하여 인공적인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콘크리트 댐이 그것이다. 미국 남서부 콜로라도 강에 만들어진 후버 댐은 이런 면에서 선구적이다. 1936년에 완성된 이 거대한 다목적 댐은 홍수를 통제하고 관개용수를 공급했으며, 10만 마력급 프랜시스 터빈을 통해 막대한 수력 전기를 생산해 냈다. 후버 댐과 그것을 모델로 삼아 이후에 만들어진 거대 댐들은 미국 극서부 지방 개발을 위한 핵심 기반 시설이 되었다."(357-8)


"서부 하천에서 기선 사업이 호황을 맞은 것은 한편으로 오랫동안 넘어설 수 없었던 장애물, 즉 애팔래치아 산맥을 가로지르는 물길이 없는 상황을 극복했기에 가능했다. 그런 길을 확보할 수 없다면 서부의 하천들은 동부의 활기찬 산업 지대와 농경지 그리고 시장에서 동떨어진 채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부는 여전히 대부분의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고 해안을 따라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서부에서 보면 사실상 애팔래치아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을 무대로 하는 증기선의 시대가 개막되면서 미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미시시피 유역에 묻혀 있는 부의 원천들을 끌어내며 또한 전통적인 남북으로의 팽창 대신 서부로의 확장을 추동할 수 있는 엄청난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1825년 10월 완공된 이리 운하는 경이로운 업적이었다. 총길이 585킬로미터의 운하는 수문 83개, 송수교 18개를 포함하고 있었고, 이곳을 오르내리는 화물선은 약 50톤 정도의 물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360-5)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이 증기와 철의 시대에 영제국이 지니고 있던 패권을 명시적으로 보여 주었듯이, 1914년 파나마 운하의 개통은 기술에 기댄 대량 생산 시대에 선두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미국에게 유리하도록 세계의 역학 구도가 재조정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파나마 지협 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되었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과 동아시아 지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긴밀하게 통합된 세계 규모의 네트워크로 연결했다." "두 개의 대양을 잇는 빠르고 저렴한 수로는 미국에게 광범위한 해양 환경의 이점을 온전히 선사했다. 미국은 막다른 길이었던 카리브 해를 대륙을 가로지르는 수송의 지름길로 변화시켰고, 이를 통해 극서부 지역에 묻혀 있는 광물과 농업 자원을 미시시피 유역, 오대호, 동부 해안의 번창한 산업 및 시장과 연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운하를 통해 대서양과 태평양의 해군력을 하나로 통합해 외해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379-80)


"파나마 운하는 미국 해양 역사의 세 단계 중 첫 번째 시기에서 두 번째 시기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미 해군이 자국의 국경과 물길을 방어하고 자유 무역을 보호하며 해상무역상들의 시장 접근성을 확보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적당한 기회를 노려 대륙 내에서 팽창을 도모하던 긴 시대는 이제 끝났다. 파나마 운하 완공 이후 미 해군은 미국이 군사적인 면에서나 상업적인 면에서 전 세계에 걸쳐 팽창하는 한편, 미국의 국력이 밖으로 뻗어 나가 유럽과 아시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중재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독일 잠수함들이 영국의 해상 장악과 항구 봉쇄를 무너뜨리려고 분투하던 중 미국을 비롯한 공식적 중립 국가의 상선과 여객선을 침몰시키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공언했듯이, 미국은 세계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 2차 세계대전부터 시작되는 세 번째 시기 내내, 막강한 미 해군은 자유세계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전 세계 바다와 전략적으로 중요한 항로를 순찰하고 다녔다."(402-3)


"전후 초기 거대 댐 건설의 시대 동안 수백 개의 댐들이 미국 전역에 세워졌다. 미국 역사를 통틀어 약 7만 5000개의 댐이 만들어졌다. 조지 워싱턴의 대통령 재임 기간이 끝나고 약 200년 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하루에 하나 꼴로 댐이 들어선 셈이다. 6600개에 달하는 높이 15미터 이상의 거대 댐은 모두 다목적 용도로 지어졌고, 후버 댐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극서부 건조 지역의 농업은 시작하자마자, 세계 역사상 최고의 관개농업 지대 가운데 하나로 발전했다. 1978년을 기준으로 17개의 서부 주에는 18만 제곱킬로미터의 관개 농지가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는 전 세계 관개 농지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전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건강하며, 최초로 완전한 전기화를 이루고, 최고의 산업 생산력을 달성했으며, 가장 높은 수준의 도시화를 경험한 일등 국가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이 앞장서서 물 사용의 혁신적인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434-5)


"20세기 말부터 댐의 시대가 허락한 전세계적인 물의 풍요는 한계에 도달했고, 그 정점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대형 하천들은 더 이상 바다에 제때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는 바다에 닿더라도 삼각주와 해양 생태계에 상당히 줄어든 양의 유량과 퇴적물을 운반해 주었다. 장기간 계속된 집중적인 관개농업과 염류 축적, 침수, 토사 침식으로 황폐해진 토양에 부적합한 배수 시설이 설치된 결과 발생한 유해한 부작용은 어디에서나 점점 더 분명하게 나타났다. 관개 농지는 세계적으로 식량 대량 증산을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기존의 농토는 새로운 농토가 개발되는 것과 같은 속도로 쓸모없게 되어 버렸고 그 결과 역사적인 관개 농지의 순 증가 추세도 끝이 났다.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지표수가 바닥을 드러내자, 점점 더 많은 지역에서 자연적인 물의 순환이 메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지하수를 끌어다 관개용수로 사용했다. 세계 농업의 약 10퍼센트는 결국에는 지속 불가능한 것이다."(457)


4부 결핍의 시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의 총량 가운데 0.001퍼센트에 해당하는 한정된 물이 증발산과 강수 작용으로 대기를 통해 끊임없이 순환하는데, 이 현상이 역사가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존재한 모든 문명들을 지탱해 왔다. 인간은 실질적으로 이 재생가능한 물 공급량의 최대 3분의 1까지만 이용하며, 다른 3분의 2는 강이나 지하로 급속히 사라져 지표면과 지하수의 생태계를 충전하고 궁극적으로는 바다로 되돌아간다." "가장 다루기 힘든 수리 환경은 아주 건조하거나 습한 환경이 아니라, 계절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물의 양이 크게 변하거나 홍수 같은 예측할 수 없는 물난리, 산사태, 가뭄 등 급작스럽고 극단적인 이상 기후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환경이다. 계졀적 변화는 수자원공학의 복잡성과 비용을 증가시키고, 그로 인한 예측불가능성은 꼭 필요한 급수시설의 건설마저도 어렵게 할 만큼 개발을 좌절시킨다. 역사상 가장 가난한 사회들이 종종 가장 다루기 힘든 수리 환경에 처한 사회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470-1)


"아스완 댐은 나일 강의 흐름을 완벽히 통제한다는 지난 5000년 동안 계속된 이집트 지도자들의 꿈을 실현시켰으며, 주기적으로 극단적인 가뭄과 홍수를 몰고왔던 강에 대한 끔찍한 외상으로부터 이집트 인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아스완 댐은 그 엄청난 위력에도 불구하고 나일 강의 또 다른 역사적 특징을 바꿀 수는 없었다. 즉 이집트 사회의 행복은 나일 강 분지의 물을 엄청난 비율로 소비하는 데 달려 있지만, 나일 강은 거의 전적으로 이집트 국경 밖에서 발원한다는 것이다. 수단과 더 상류에 있는 적도 동아프리카의 대호수 평원의 국가들이 백나일 강의 수원을 이룬다. 에티오피아 고원지대는 단연 이집트로 흘러들어 가는 물의 최대 공급지로, 청나일 강과 앗바라 강 그리고 소바트 강은 도합 85퍼센의 물을 공급하며, 매년 6월 아스완 댐에 도달하는 모든 토사를 실어 보낸다. 역사적으로 곤궁한 에티오피아와 백나일 강 주변국들은 계속되는 빈곤을 막기 위해 이제 더 많은 양의 나일 강물을 사용하고 있다."(484-6)


"상류 국가들, 특히 에티오피아에 의해 나일 강 물 공급이 중단될지 모른다는 거의 편집증적인 두려움은 수 세기 동안 이집트 인들의 정신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종종 과열되곤 했다. 베르디는 오페라 「아이다」에서 비극적인 연인을 통해 이 불안감을 표현했다. 베르디의 이야기는 1875년과 1876년에 이집트 군이 몇 차례 에티오피아 영토에 대한 제국주의적 공격을 가한 끝에 6만 명의 에티오피아 군에 의해 전멸한 유혈사건에서 부분적으로 끌어온 것이다. 아스완 댐을 성공적으로 건설하고 이집트 인들은 역설적으로 국가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가중되었는데, 그러한 성취가 이웃한 상류의 빈국들을 자극해서 댐을 건설하여 나일 강의 물을 더 많이 이용하고자 하는 의욕을 고취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다수의 다른 나라들이 수에즈 운하와 아랍-이스라엘 전쟁이라는 시각으로 이집트의 정책을 바라보는 데 반해, 이집트 지도자들은 명확히 자국의 최우선적인 국가 안보 목표인 물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486)


"3차 중동전쟁(1967)의 충격적인 결과는 중동의 지정학을 바꾸어 놓았다. 이스라엘의 영토는 갑자기 네 배로 늘어났다. 똑같이 중요하지만 세간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과 주변국들 사이의 수리적 힘의 균형이 결정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전쟁 전,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수계의 10퍼센트 미만을 통제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유역의 지배적인 물 통제국가가 되었다. 서안에서 가장 큰 대수층을 포함하는 이 지하수층은 녹지대 부근의 산등성이를 따라 남북으로 흐르다가 이스라엘과 지중해를 향해 서쪽으로 향하는데, 이곳에서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 아래 주로 존재한다. 2000년대 초, 요르단 강 서안의 대수층은 이스라엘 물 공급지의 3분의 1을 담당했다. 1981년 병합되었으며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기도 한 골란 고원은 이스라엘 물 사용량의 3분의 1을 공급하는 갈릴리 해의 재생가능한 수원지를 확보해 주었다."(506)


"이스라엘은 갑작스럽게 얻은 풍부한 물을 경제성장과 근대화의 활력소로 활용했다. 1982년에는 요르단 강 서안의 물 공급을 '전국수로망'에 통합했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물을 국내의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즉 요르단 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인들이 새로 우물을 파거나 기존의 우물을 더 깊이 파는 것 그리고 물을 관개에 이용하는 것을 가혹하게 제한함으로써, 그들에게 공급되는 물의 양을 불균형적으로 줄였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지역은 전 세계적으로 물을 둘러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차이가 가장 극면하게 벌어진 곳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인들은 그들과 나란히 거주하는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사용하는 물의 양의 4분의 1밖에 사용할 수 없다. 요르단 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관개농지는 전체 경작지의 4분의 1에서 20분의 1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물 기근과 아랍의 물이 도둑맞고 있다는 분노는 1987년에 일어난 반이스라엘 운동(제1차 인티파다)을 크게 악화시켰다."(506-7)


"지난 천 년간 인도인의 삶은 단 수 개월 동안 연간 강우량과 유거수의 80퍼센트에 집중되는 폭우성 몬순 기후 때문에 생겨나는 예측할 수 없는 풍년과 흉년의 주기 사이에서 매년 심하게 요동쳤다. 너무 늦게 찾아오는 적은 양의 몬순은 끔찍한 기근을 낳고, 반면 일찍 시작되는 대규모 몬순은 엄청난 홍수와 산사태를 일으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많은 이재민을 양산한다. 이와 달리 적절한 때에 불어오는 적당한 규모의 몬순은 작물에 물을 공급하고 강과 지하수를 충전하며 소박한 풍요를 가져온다. 오늘날까지도 인도 경제에서 몬순의 시작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21세기에 들어서 인도는 관개용수의 절반 이상을 지하수에 의존하고 있다. 세계 어느 국가도 그렇게 많은 양의 지하수를 뽑아내지 않는다. 일부 추산에 따르면 인도는 자연적으로 충전되는 속도보다 두 배나 빠르게 지하수를 끌어다 쓴다고 한다. 고갈되고 있는 지하수로 재배한 식량은 지속가능하지 못한 거품과 다를 바 없다."(529-31)


"파키스탄의 물 부족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인더스 강은 다시 한 번 인도와의 충돌을 유발할 수 있는 잠재적인 원천으로 부상하고 있다. 전후 인더스 강이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과 힌두교 국가인 인도를 나누는 국경선으로 책정되었지만, 이는 인더스 강 유역이 하나의 유기적인 수리적 통일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조치였다. 이는 유럽의 식민 통치를 겪은 국제 수역권의 공통된 문제이다. 즉각적으로 강의 지류의 통제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발했다. 1948년 양국은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다." "1960년 세계은행이 주도하여 인더스강수자원협정을 이끌어냈지만, 이 조약은 양측이 6개의 인더스 강 지류들 가운데 각각 3개의 지류들에 대해서 특권적 권리를 갖는다는 최소한의 타협이었다. 1999년에는 다시 양국이 전쟁 발발 직전 상태에까지 이르렀고 카슈미르에서 폭력사태가 계속되었다. 조약은 반세기 동안 유지되었지만 인더스 강은 여전히 언제든 점화될 수 있는 분쟁의 도화선으로 남아 있다."(537)


"임박한 중국의 물 부족 위기는 훨씬 빨리 시작될 수도 있다. 황허 강 유역 토목 사업의 예기치 못한 부작용으로 북중국의 미세환경이 심각하게 건조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 회복되는 하천유량의 상실(댐과 관개수로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광범위한 습지 배수, 산림 벌채, 농지조성을 위한 초지 개간, 1990년대부터 시작된 노천탄광 급증, 그리고 탐욕스러운 지하수 채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토양 침식위기가 일어났다. 이것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로 물과 관련된 가장 심각한 21세기 환경문제들이다. 티베트 고원의 황허 강 발원지를 둘러싸고 있던 호수의 절반과 초지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심각한 산림 벌채가 이루어진 황허 강 중류에서는 비옥한 고원 황토의 70퍼센트가 침식되어 버렸다. 사막화가 북중국을 잠식하고 있다. 북중국을 포위하는 사막의 모래는 옛 야만족 유목민들을 대신해 만리장성 주변에서 최대의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546)


"콜로라도 강 유량의 두 배반~세 배이고 리비아 지하대수로 유량의 스물다섯 배에 달하는 남북대수로 공사가 성공한다면, 물 부족 위기로 인한 당면한 위협을 극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 위기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양쯔 강 자체가 이미 초과 이용되고 있으며, 중국의 급격한 현대화에 장기간 보조를 맞출 수 있을 만큼 북으로 보낼 충분한 잉여 수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지구 온난화가 중국 전체의 물 공급 문제에 대한 환경상의 히로시마 원자폭탄으로 등장했다. 주요 강들의 발원지인 티베트 고원의 빙하는 히말라야 산지에서 급격히 녹아내리고 있다. 만약 빙하가 사라져서 중국의 수리 시설들이 완전히 새롭고 극단적인 계절적 기후 유형에 잘 들어맞지 않게 된다면, 중국의 모든 대규모 댐과 수로들이 하룻밤 사이에 역사적 헛수고로 전락할 수 있다. 중국이 대규모 댐과 수로공사의 성공에 거는 기대 수준을 놓고 볼 때, 많은 것이 걸려 있음을 알 수 있다."(558-9)


# 부족을 기회로, 새로운 물 정책

1. 하수와 폐수를 대규모로 집중 처리·정화하고, 자연 여과작용을 한 번 더 거친 후 상수원에 재공급한다.

2. 해수담수화 기술의 효율성을 높인다(열담수화 공정 → 역삼투압법 → 에너지 회복 및 삼투막 기술).

3. 수원지 상류 근처의 숲과 토양 오염을 개선해서 더 많은 물을 보존하고 오염물질도 더 많이 여과한다.

4. 상하수도 요금 인상, 물 절약형 화장실 변기 공급 등을 통해 도시의 일인당 물 사용량을 크게 낮춘다.

5. 산업용수의 재활용 비중을 확대하고 절수 공정을 도입한다. 농업용수의 가격을 올리고 미세관개농업 같은 첨단 기술을 적용한다.

6. 물 정책은 식량 부족, 에너지 부족, 그리고 기후변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 내·국가 간 정치적 타협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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