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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님의 서재
  • 1945년 해방 직후사
  • 정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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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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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한국 현대사에서 반탁운동을 주도한 것은 귀국한 임시정부 계열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미군정 초기(1945년 9월~12월)에 진정한 의미의 반탁운동을 주도한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한민당 계열이었다. 이들은 루스벨트가 1943년 이래 국제적으로 합의하고, 국내적으로 공식화한 대한정책(다자간 국제 신탁통치)을 무산시키는 한편, 그 대안으로 미군정 예하의 과도정부 형태를 출범시키려 했다. 이는 미국 자료에는 정무위원회, 전한국국민집행부, 통합고문회의로 표현되었고, 한국 현실정치에서는 독촉중협으로 구체화되었다. 즉 정무위원회 계획의 현실정치 구현이 독촉중협의 건설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운명을 좌우한 실질적인 동력과 모멘텀은 1945년 말 반탁운동이 아니라 미군정 초기 미군정 주도의 반탁운동이었다는 점이 이 책의 주요한 결론에 해당한다." "각 시대는 그 시대의 주인공들에 의해 운명과 경로가 결정된다. 해방직후사 역시 우리가 개입할 수 없는 곳에서 중대한 결정이 이뤄진 것이다."(23-4)


1장 폭풍: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총독부의 종전 대책과 이중권력의 창출


"여운형에게 일제의 패망은 수년 전부터 예견된 대사변이었고, 기다리고 준비했던 해방의 순간이었다." "여운형은 1943년 8월 10일 조선민족해방연맹이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고, 1년간의 준비 끝에 1944년 8월 조선건국동맹을 발족시켰다. 건국동맹은 두 가지 특징을 지녔는데, 하나는 명칭이고, 다른 하나는 조직 활동이었다." "건국동맹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일제 패망 뒤 건국을 준비하는 작업이었다. 건국동맹은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 그 이후에 다가올 건국이라는 민족적·시대적 과제를 고민하고 준비했다. 국내에서 이러한 정세관을 갖고 전국적 규모로 투쟁하고 건국을 준비한 곳은 건국동맹뿐이었다.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이라는 대사변을 맞이하기 위한 대책과 준비가 있었으므로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가 바로 조직되고 운영될 수 있었다. 즉 건준은 누군가의 선물이나 우연으로 급조된 것이 아니라 주체들의 선구적 정세관과 투쟁의 결과 해방과 동시에 발족한 기구였다."(39-40)


"해방 이후 여운형과 건준이 주도하는 정국이 확연해지고, 총독부를 매개로 한 치안유지회 참가가 무산되자, 송진우 등 한민당 계열은 여운형을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라고 무고하기 시작했다. 송진우 측은 여운형과 건준이 향유하고 있던 해방정국의 권력을 자신들이 차지할 수도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송진우 측은 해방 직후 여운형의 반복적인 협력 및 합작 제안도 거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해방정국에 임했다. 해방 후 한민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은 여운형이 〈친일정권 수립을 음모한 공산주의자〉라고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이었고, 그 중심인물은 바로 송진우와 총독부의 사전교섭설을 가장 크게 선전한 김준연이었다." "해방 후 한민당의 세가지 길은 여운형을 친일파이자 공산주의라고 공격하는 것, 자신들이 중경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미군정의 신뢰를 얻어 고위 관직을 차지하는 것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53-4)


"여운형과 건국동맹 측의 입장은 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 협력을 요청받았지만, 주체적 입장에서 타협한 후 정권 수립 및 건국 준비의 길로 나아갔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건준이 해방 공간에서 기여한 최대의 공로는 한국인이 해방을 절감할 수 있는 집회·결사·언론의 자유, 해방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보장했다는 것이다. 즉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서 정치범 2만여 명이 풀려나 거리를 활보하며, 수많은 한국인이 이 대열에 합류해 '조선 해방 만세'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 행진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찰이나 헌병이 제지하거나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한국인에게 진정한 해방의 날은 8월 16일이었다. 여운형과 건준의 공로는 한국인이 일제의 패망이 한국의 해방임을 실감할 수 있는 직관적 광경을 만들고, 한국인들의 정치·경제·사회적 요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마련한 데 있었다. 그것이 바로 해방의 공간이었다."(55)


# 여운형과 총독부가 협의한 5개 사항

1. 정치범 및 경제범을 석방한다.

2. 서울의 3개월치 식량을 확보한다.

3. 건준의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간섭하지 않는다.

4. 학생 훈련 및 청년 조직을 허용한다.

5. 각 사업장의 노동자 협력을 허용한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건준이 네 세력으로 구성되었다고 회고했는데 공산당원인 극좌파, 비공산주의적인 좌익, 즉 온건한 사회주의자들, 안재홍·이규갑 등의 우익, 여운형을 무조건 지지하는 장권·송규환 등이었다. 송남헌은 건준이 여운형의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세력, 안재홍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 세력, 이영·최익한·정백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장안파 공산주의 세력, 박헌영·이강국·최용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재건파 공산주의 세력이 연합한 정치단체였다고 보았다. 즉, 제2차 건준은 여운형 중심의 비공산주의적 좌파 혹은 사회주의적·좌파적 원로 세력(건국동맹), 장안파 및 재건파 공산주의 세력, 안재홍과 한민당 중심의 우익 세력의 결합이었다. 크게 보면 세 가지 세력이고, 공산주의 세력을 장안파와 재건파로 나누고, 우익 세력을 안재홍 등 중도우파 세력과 한민당 등 우파 세력으로 구분하면 다섯 가지 세력이 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여운형 개인의 추종자들이 포함된 것이다."(107)


# 건준 발족 직후(8.18~25) 벌어진 상황

1. 건준이 실질적인 행정권 이양의 주체로 부상하자 총독부 측은 교섭을 빙자한 공작을 펼쳐, 건준에 대한 개입과 개편, 방해와 폐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했다.

2. 송진우 등 우익 측은 유지들을 동원한 수적 우세를 통해 건준의 실권을 차지하려는 의도를 드러냈으며, 이는 건준을 무력화하려 했던 총독부와 이해가 일치했다.

3. 엘리트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재건파 조선공산당원들은 해방 후 학생, 근로 대중의 큰 지지를 받았으며, 우익 계열의 건준 잠식을 방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 이 와중에 여운형은 테러를 당해 와병 중이었다.


"해방 후 중망(衆望)을 모으던 건준은 왜 방향을 갑자기 전환해서 인민공화국을 급조(9월 6일 창건)하게 되었을까? 첫째, 미군 진주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공을 창립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여운형 등 건준 지도부는 (인공을 창립하면서) 미군 진주에 대비해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1번으로 인민위원에 지명했으며, 인공 조직을 구성할 때도 이승만을 주석에 선임했다." "즉 인공의 창립은 해방 직후 건준 및 좌파세력이 갖고 있던 정국의 주도권을 연장하는 동시에 〈연합군과 절충할 만한 인민 총의의 집결체〉를 조직함으로써 미군과 갈등 없이 정권을 인수받고, 정식 정부 수립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안으로 구상되었다. 부정확한 정보가 범람하는 상황 속에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취한 확실한 선례를 따라서 남한에 진주할 미군에게 인민위원회·인민공화국을 인정받고자 한 시도였다. 해방 직후의 상황에서 생각해봄직한 방안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너무 낙관적이고 주관적인 정세관에 입각한 판단이었다."(155-6)


"둘째, 우익의 중경임시정부 절대 지지에 맞대응하기 위한 방안이었을 가능성이다. 건준은 해방 직후부터 중경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내세우는 한민당 계열 및 안재홍과 대립하고 있었다. 건준 장악에 실패하자 우익의 대부분은 9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환영회를 조직했으며, 인공 창립 이후에는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중경임시정부 지지를 전면에 내세워 정당성을 확보한 후 한국민주당을 결성했다. 이런 맥락에서 인공의 급조는 우익의 임정 봉대(奉戴)노선을 부정하고, 정부에는 정부로 맞서기 위한 노선이었다. 특히 여운형 자신은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운동의 주역이자 임시정부 창립 구성원(1927년 상해에서 체포됨)이었지만, 명실상부하지 않은 임시정부 형태보다는 독립운동가 정당 형태를 주장한 바 있다." "여운형은 임시정부, 연안독립동맹, 김일성 빨치산 그룹 등 다양한 해외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접촉면을 확보함으로써 현실적 접근을 강조한 것이다."(156-7)


"셋째 이유는 건준 자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자연사적 자기발전 과정이란 건준 주체 측의 설명이었다. 1946년 『조선해방연보』는 건준이 갖고 있던 민족통일전선으로서의 자기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인공을 창립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건준의 지도부가 지닌 유약성, 투쟁적 전진성의 미흡으로 정견과 행동이 통일되지 못했기에, 〈인민에게 주권을 두는 인민정부 수립을 위한 비상방법으로 임시인민대표대회를 건준의 지정·추천으로 소집하여 중앙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중앙인민위원회는 본질상 건준을 계승한 것이므로 건준의 역사적 사명은 그 종언을 고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즉 좌익계에서는 인공의 수립이 민족통일전선의 자기강화 과정이었다고 설명한 것이다." "인공의 수립으로 건준 내부에서 갈등하며 길항하던 좌우익의 정권 수립 방략이 대외적으로 폭발하며 중경임시정부 지지 진영과 인공 진영이라는 진영 대결, 정부 대결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158-9, 163)


"9월 14일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부서 책임자가 결정되었다. 여운형은 인민의 지도자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조직적 결정은 재건파 조선공산당의 수중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20개의 정부 직위는 주석, 부주석, 국무총리, 14부, 3국으로 구성되었는데, 임시정부 인사 5명(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원봉, 신익희), 한민당 인사 2명(김병로, 김성수), 재북 인사 1명(조만식) 등은 모두 본인의 동의를 받지 않은 선임이었으며, 이름만 걸고 대리자가 직을 대신하는 방식이었다. 당사자들은 명의를 도용당하고 실권을 빼앗기는 모양새였다. 이미 인민위원, 후보, 고문 등의 발표에서도 동일한 방식이 적용되었고,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인공을 주도한 재건파 조선공산당 측은 무모하게 일을 밀어붙였다. 결국 건준이 인공으로 재편된 후, 인공은 거의 사면초가였다. 창립 직후부터 인공은 미군정과 우익은 물론, 공산주의자들과 북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고 거부당했다."(164-7)


"이로써 인민공화국은 물론 이를 주도한 재건파는 남한 정계에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우익 인사들의 명의를 도용했다는 즉각적 항의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으며, 모든 정파가 인공 수립 자체를 공박하며 비판했다. 해방 공간에서 건준이 가졌던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입장은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입장으로 역전되었다. 인공 측은 미군정에 승인을 요청하고 '국' 자 삭제 요청을 거부하는 한편, 귀국한 이승만 등을 찾아가 주석에 취임해줄 것을 애원하는 처지가 되었다. 미군정의 승인을 받아야 정통성과 합법성을 획득할 수 있고, 누군가가 취임해야 명실상부해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다. 인공 스스로 권위와 정통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승인과 협력이 있어야 성립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1945년 12월 12일 하지는 인공과 인민위원회 해체를 명령하는 공식 지령을 내렸다. 미군정은 하지의 지령에 따라 부여, 유성, 옥구, 남원 등지에서 인민위원회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173-5)


"12월 12일에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민족통일전선의 진전과 임시정부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는데 임시정부가 인공의 간부직을 거부한 것을 지적하면서 임시정부를 왕가적·전제적·군주적이라고 비난하는 한편 좌우가 반반씩 세력균형을 이루어 합작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조선인민당 역시 이 시점에서 인공과 임시정부를 동시에 해체·합작하여 좌우연립정권으로 과도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1945년 말에 이르러 인공은 최초의 목표였던 민족통일전선으로서 임시혁명정권이라는 스스로의 규정과는 다른 지점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인공의 전신인 건준에 대해서도 한민당 등 우익 진영의 부정적인 평가와 비난이 고조되었다. 김종범·김동운은 당시 여항(閭巷)의 설을 인용해 건준이 지방은 물론 재경 선배 및 동지들과의 제휴·협동을 기피하여 통일전선에 일대 지장을 초래하고 수많은 당파의 족생(族生)과 난립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177-8)


2장 미군의 남한 진주와 알려지지 않은 막후의 영향력: 일본군·통역·윌리엄스의 역할


"남한은 태평양전구에서 진정한 의미의 군정이 실시된 유일한 지역이자, 사전 준비 없어 점령한 지역이었다. 구체적인 정책지침을 확보하지 못한 24군단과 10군의 G-2는 8월 내내 류큐에서 생포한 한국인 전쟁포로 700여명에 대해 강력한 심문을 진행했지만, 서울-인천-부산에 대한 지리적 정보와 한국 정치 문제에 대한 '질 낮은 정보'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1945년 8월 19일 태평양전구사령부가 하달한 「작전명령 4호의 부록 8」이었다." "합법적 주권 정부가 있던 일본과 식민권력이 붕괴한 한국의 상황은 전적으로 달랐지만, 고위급 정책은 두 지역을 동일하게 취급했다. 이미 기능이 정지되었고, 건준과 인공이 총독부 권력을 대체하고 있던 상황에서 총독부 관리의 유입은 한국인들이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첫 번째 조치가 식민권력의 유지와 온존이라고 공표한 것은 주한미군에 가해진 최초의 신뢰 타격이었다."(201-4)


# 「작전명령 4호의 부록 8」

1. 군정이 모든 사태를 장악하거나 한국인으로의 대체가 확보될 때까지 일본 정부기구와 관리는 필요할 때까지 이용될 것.

2. 개인의 권리와 재산에 대한 문제는 국제법 원칙을 준수할 것.

3. 모든 한국인은 명백히 그들이 적국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민으로 취급할 것.

4. 카이로선언에 기초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인들은 완전 독립하게 될 것.


"최초에 한반도 점령 임무를 맡은 것은 미 10군이었는데, 8월 11일 갑작스레 하지 주장 예하의 24군단으로 변경되었다. 24군단과 조선 주둔 일본군 17방면군은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적어도 40회 이상의 메시지를 계속 주고받았다. 이 메시지 교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일본군 17방면군이 제공한 정보는 남한에 상륙하는 하지에게 현지 상황에 대한 생생한 초기 정보를 제공했고, 그가 한국·한국인·한국 상황을 바라보는 최초의 시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때 일본군이 제공하는 정보는 크게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첫째, 소련군의 38선 이남 점령 가능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둘째, 소련의 지시를 받은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폭도들에 의한 유혈 사태·무질서·폭동·파업 등의 혼란 상황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7방면군이 강조한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폭도〉는 총독부가 소련군 진주를 전제로 여운형·안재홍과 타협한 결과 만들어진 건준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06-7, 210)


"오다 야스마는 영어에 능통하고, 선교사의 추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17방면군의 공식 통역이었으므로, 미24군단 수뇌부와 접촉면이 넓었고, 초기 몇 달 동안 신뢰를 받으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다 야스마는 『주한미군사』에 열다섯 차례나 인용된 유일한 일본인이다. 미24군단은 오다 야스마를 통해 많은 통역사를 확보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의 통역으로 이묘묵을 추천한 일이었다." "오다 야스마가 연희전문학교 이사로 재임하던 시기, 이묘묵은 1934년 연희전문 교수가 되었고, 이후 학감과 도서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1941년 이후 연희전문학교 학감·학교장으로 이사회에 관계했다. 이묘묵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속되어 사상전향을 한 후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에 나섰다. 이묘묵의 친일행적은 연희전문학교 동료 교수인 갈홍기와 함께 1938년 미나미 지로 총독을 면담하는 사진이 『경성일보』에 실릴 정도로 유명했다."(213-6)


"미군은 9월 8일 제물포에 상륙했고, 9월 9일 일본군 항복식이 개최되었다. 상륙 사흘째인 9월 10일 오후 5시 30분 연합군 기자단 환영회가 명월관에서 개최되었다." "하지 중장을 비롯한 24군단 고위 장교들과 군사실 요원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묘묵은 『코리아 타임스』 편집장 자격으로 참석해서 〈여운형은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로, 조선총독부의 돈을 먹고 친일정부를 수립했다〉는 그 유명한 악의적 연설을 했다." "명월관 연설 이후 이묘묵은 하지 중장의 개인 통역이자 '비서실장'이 되었으며, 미군정기의 대표적인 문고리 권력이 되었다." "『코리아 타임스』는 한민당, 연희전문학교, 기독교계 인사들이 미군정의 요직으로 등용되는 출발점이었다." "이들을 필두로 미군정을 통한 일제 권력의 불하가 시작되었다. 누군가에게는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과 같은 권력 획득의 순간이었으나, 해방 한국을 기대했던 한국인의 희망과 염원이 근저에서부터 붕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218-21)


"해군 군의관이었던 조지 윌리엄스는 1907년 4월 7일 인천에서 태어나 (감리교 선교사인) 부친 프랭크 윌리엄스를 따라 충남 공주 등에서 15년 동안 거주한 적이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 주둔 미군과 동행한 후, 하지의 개인 고문으로 3개월간 일하면서 윌리엄스가 한국 현대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 상황과 구조는 미군 진주 이후 한국 현대사가 당면한 총체적 모순과 위기를 설명하는 열쇠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하지가 '정치고문'으로 배치된 그에게 부여한 임무는 세 가지였다. 첫째,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하지의 자문에 응하는 것, 둘째, 하지를 대신해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미군정이 하는 일을 전달하는 것, 셋째, 미군정 고위직에 적합한 한국인을 수배하는 것 등이었다." "하가(Kai Yin Allison Haga)는 윌리엄스에 의해 초기 미군정이 한국 내 기독교 그룹, 교육받은 엘리트, 선교사 사회의 의견과 필요에 경도되었으며, 한국의 우익, 특히 기독교 엘리트들이 미군정을 지배하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했다."(227-31)


"윌리엄스는 진주 직후 한국 정치를 한민당과 인공의 대립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한민당이 보수적이고, 평화를 애호하며, 미국이 한국 정부를 건립하는 데 협력하길 원하는 사람들이라고 칭찬하면서 그들의 당 강령의 첫 항에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준 미국에 감사를 표현하는 항목이 있다고 밝혔다." "윌리엄스가 해방 직후 한국의 정치 상황을 독해하는 기본적인 문맥은 한민당의 주장을 그대로 복제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친일 문제에 대해 매우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한국인은 충분히 친일적이며 충분히 친생존적이어서 그만큼 전쟁 노력에 협력해야만 했다〉고 발언했다. 그의 발언은 해방 직후 악질 친일파들이 주장하던 국민공범론, 식민지 환경론 등과 동일한 것이다. 조병옥이 친일경찰을 두둔하며 입에 달고 살았던 친일(pro-Jap)이 아니라 목구멍이 포도청(pro-Job)이었다는 주장과 동일한 것이다."(234-7)


3장 미군정의 총독부·인공·임시정부 정책과 권력의 불하


"미군정 진주 이후 가장 중요했던 양지의 정치적 결정은 총독부 관리 유임과 해임, 인민공화국 부정과 해체, 임시정부 지지 및 주요 인사 입국의 추진이었다. 보다 중요했으나 알려지지 않은 음지의 정치적 결정은 주요 직책에 대한 정실 인사(권력 불하)였다." "미군정 초기의 가장 중요한 인선의 통로는 고문회의의 조직이었다. 고문회의라는 조직 형태는 한민당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1945년 9월 22일 〈명망과 식견을 구비한 인사로써 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행정과 인사에 자문케 할 것〉을 건의했고, 이것이 수용되었다." "고문회의는 일제 시기 어용기관이었던 중추원의 재판이었는데, 좌파는 인민공화국의 약화를 우려했고, 우파는 임시정부의 약화를 우려했다. 한국인들의 열광적 환호도 없었다. 고문회의는 조직되자마자 실패임이 분명히 드러났고, 미군정도 이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문회의 방식은 미군정 초기 권력으로 향하는 중심적인 통로가 되었다."(318-20)


"『주한미군사』의 설명에 따르면 194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약 7만 5,000명의 한국인 관리들이 임명되었는데, 이전 직을 유임시키거나 신규 임용한 것으로 대부분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1945년 말까지 이뤄진 7만 5,000명의 신속한 임명은 친일 관리만으로도 충원될 수 없는 규모였는데, 적절한 자격시험이나 배경이 검토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구잡이 충원과 추천이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최소한 5만 명 내외가 어느 날 갑자기 관리로 임용되었으며, 어떠한 자격심사나 배경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중앙과 지방에서 이뤄진 유일한 절차는 고문회의 및 각 부서별 고문회의의 추천과 투표를 통한 결정 과정이었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고위 공직과 하위 공직을 막론하고 친일파 출신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행정 경험이 있는 총독부 출신 친일관리와 행정 경험이 없는 그 밖의 친일파와 무자격자들이 공직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유일한 자격 요건은 한민당의 추천과 미군정의 승인 절차 뿐이었다."(325-6)


"특히 미군정은 (질서 유지 명목으로) 공권력의 핵심인 경찰 및 내부행정 인력을 급속하게 수직적으로 강화했다." "일제하의 경찰이 억압적인 국가 물리력으로 잔인하고 효율적이고 조직적이었다는 게 중론인데, 미군정하에서는 1946년에 2배, 1948년에 3.4배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부에 쏟아진 '경찰국가'라는 비난은 공정하지 못한 측면이 있는데, 이승만 정부가 새로 만든 정책이라기보다는 미군정으로부터 비롯된 유산이자 관성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경찰 간부 중 친일파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는데, 1946년 말 경위급 이상 간부 1,157명 중 82퍼센트인 949명이 총독부 경찰 출신이었다. 1948년에 이르면 경찰 관련 3만여 명을 제외한 관리 수는 14만 9,549명으로 폭증했다. 친일 관료들은 일제 식민정책에 봉사한 경력 때문에 친일파 처단과 식민지 잔재 청산에 반대하는 공동의 이해로 통합되었고, 해방정국의 혁명적 요구에 맞섰다."(326-8)


"미군정기 한민당, 기독교 계열, 서북·흥사단 계열은 동일한 지향을 가진 집단을 다양한 측면에서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는 것일 뿐 내용적으로는 동일성을 유지했다. 일제시대 기호와 서북의 대결, 이승만과 안창호의 대립, 동지회와 흥사단의 대립, 흥업구락부와 동우회의 대결 구도는 유명했는데, 미군정이 들어서자 상황이 달라졌다. 서북·흥사단·동우회의 지도자 안창호가 사망한 이후 서북 계열은 지도자를 상실한 상황이었고, (노년의 외로운 우익 지도자로 그려진) 이승만은 귀국 후 국내 지지 기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양자는 대결보다는 협력을 선택했고 인공·여운형·좌파에 반대하고 친미·반공 노선을 추구하며, 미군정의 권력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지도자 안창호를 잃은 서북·흥사단 계열은 미군정기 이승만을 구심점이자 정치적 지도자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서북·흥사단 계열은 미군정기 권력을 추구하면서, 사실상 이승만 중심의 한국 정치구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347-8)


"나아가 한민당의 핵심 인물이자 한국 우파의 중심인물인 김성수, 송진우 등은 1910년대 이래 이승만과의 관계에서 일종의 수직 관계를 형성했으며, 이는 해방 후에도 동일하게 작동했다." "한민당과 흥사단 계열은 연로한 이승만이 곧 종이호랑이나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서 권력이 자신들에게 이양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들은 이승만을 '국부'로 추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권력을 포장하고 대표하는 일종의 정치적 대리인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즘의 총아였던 이승만은 자신을 뒷방 노인네 취급하려 했던 한민당과 서북·흥사단 계열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았고, 대통령이 되자마자 이들을 배척했다. 이런 측면에서 미군정기 행정권력을 향유했던 한민당과 흥사단 계열은 이승만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원치 않는 야당으로 배척되었다. 이들은 권력의지라는 측면에서 이승만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348)


4장 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반탁운동과 그 귀결


"정치적 경험이나 판단 능력이 부재했던 하지는 〈좋은 교육을 받은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라 미군정 통제하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과도정부를 수립한다면 모든 한국인이 격렬히 반대하는 신탁통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45년 10월 이래 주한미군사령부 정책문서들은 이 구상을 '전한국국민집행부' 혹은 '정무위원회' 등으로 호명했으며, 그 실체는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약칭 독촉중협)였다." "그러나 남한의 좌익과 중도파를 이승만 아래로 끌어들이고, 귀국하는 임시정부까지 여기에 통합시킨다는 정치공학적 구상은 주체들의 정치적 욕망과 이질적 지향을 고려한다면 실현 가능성이 없는 유치한 공상 수준이었다. 또한 이를 전시 회담에서 각국 수뇌부가 이룬 국제적 합의를 파기하고 대안으로 제시하기에는 설득력이 전혀 없는 사무관급의 탁상공론이었다. 나아가 이 구상은 강경하고 공격적인 반소·반공 노선에 입각한 발상이었기에 국제회담에 내놓을 수도 없었다."(355-7)


"역사의 진실은 아이러니한데, 임시정부가 귀국한 직후 미군정이 심혈을 기울였던 정무위원회(=독촉중협)는 실패로 귀결되었고, 하지의 일급 참모 송진우는 암살되었으며, 반탁운동 과정에서 임시정부 세력은 미군정을 접수하기 위한 '쿠데타'를 시도했다. 하지 등 미군 수뇌부는 한민당을 신뢰하면서, 비현실적인 임시정부 지지·귀국·활용 정책을 추진했는데, 막상 귀국한 임시정부는 미군정의 기대를 저버렸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이 운용하는 장기판의 말이 되기보다는 독자적 행보를 선택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의 지지 기반이 아니라 가장 뼈아픈 배신의 비수가 되었으며, 몇 개월 동안 미국 정부의 공식 대한정책을 부정하고 대안으로 구상했던 정무위원회는 실패했다. 모스크바회담에서 합의된 한국에 대한 결정은 원래 예상했던 신탁통치 계획이라기보다는 '임시 정부 수립' 후 '신탁통치'라는 복잡한 함수로 구성되어 있었고, 하지는 반탁을 고무하다가 미군정 자체를 전복시킬 뻔했다."(378)


"태평양전쟁기 이승만은 한국에서 이미 잊힌 존재였다. 그가 명성을 떨친 것은 사반세기 전인 1919년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시기였다." "3·1운동기에 독립운동을 열렬히 지지했던 재미 한인들은 이미 노령이 되었으며, 새로 태어난 2세들은 한국의 독립운동이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었고, 새로 등장한 재미 한인사회의 지도부는 사업적 성공을 바탕으로 한 실용적·합리적 인물들이었다. 직업적 독립운동가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1943~44년 이승만 중심의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논쟁은 이러한 시대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중경에서 임시정부 내 한독당과 민혁당의 대결, 워싱턴에서 이승만과 한길수, 이승만과 재미한족연합회의 대립은 태평양전쟁기 미 국무부와 전쟁부의 한국 문제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국은 오랜 식민지였던 탓에 자치 능력이 없는 데다 중경과 워싱턴의 독립운동 진영이 분열되어 있는 것도 분명했기 때문에 한국 독립이나 임시정부 승인은 불가능하다는 게 그들의 인식이었다."(380-1)


"이승만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해 백악관, 국무부, 전쟁부, 국회의원 등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쓰고 청원을 벌였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이미 1차 세계대전 때 사용했던 것처럼,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면서 자신의 개인적 명성을 추구한 방식이었다. 미 행정부를 향한 이승만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미 군부와 공작기관인 COI와 OSS는 이승만을 주목했다." "1941~42년 시점에 OSS가 김구-이승만 간의 무선연락을 중개하자,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미 군부 및 공작기관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미국 내 위상이 높다고 과대평가했다. 이는 1943~44년 재미 한인사회에서 이승만의 독단적인 외교 행태를 비판하며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논쟁이 벌어졌을 때 김구와 임시정부가 국민회 등 재미한족연합회의 의견을 배척하고 이승만을 재미 한인사회의 중심인물로 여기는 계기가 되었다. 미 군부 및 공작기관들은 해방 후 이승만의 조기 귀국에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했다."(381-2)


"이승만의 귀국 과정, 귀국 직후 '민족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확립하고 독촉중협을 중심으로 정치적 지지 기반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하지의 태도와 후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1945년 11월 독촉중협 조직, 1946년 2월 민주의원 조직, 1946년 중반 이승만의 남선순행, 1946년 11월 이승만의 도미 외교는 모두 하지 등 미군정 수뇌의 전폭적인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승만의 명성, 독촉중협·독촉국민회·민주의원 등의 조직, 정치자금의 조성 및 운용 등에서 미군정의 도움이 미치지 않은 게 없었다. 특히 미군정은 대한경제보국회의 불법정치자금을 이승만에게 제공했으며, 도미 외교자금의 불법적 강제모금과 불법적 환전 및 사용을 묵인했다." "1946년 말 이승만이 도미 외교 과정에서 하지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 후에야 양자의 관계는 파열되었고, 하지는 배신의 쓴맛을 보았다. 이승만은 자신이 미군정의 탄압과 반대에 맞서 싸운 반공의 십자군인 것처럼 선전했지만,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9386-7)


"(미군정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이승만은 눈가림으로라도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독촉중협을 결성해야 한다며 나라의 운명이 우리 손에 있지 않고 외국의 손에 있으니,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신탁 문제를 방어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과 송진우 등은 모스크바회담에서 미국 주도의 한반도 신탁통치 계획이 상정되고 결정될 것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이에 반대하는 미군정 계획의 적극적인 실행자이자 협력자였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임시정부의 참여 여부였다.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조직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독촉중협에 흡수한다는 계산이었다. 즉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내세우며 시작한 독촉중협이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진 순간, 이승만은 군정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며, 민의 대표기관인 독촉중협에 임시정부 인사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하고 임시정부는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01)


"모스크바회담에서 신탁통치안이 논의되고 결정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이승만과 한민당 두 세력은 모스크바회담의 결정문이 공개되기 직전에 일련의 반탁 성명과 소련 일국 신탁통치 주장을 펼쳤다." "12월 27일 한민당 기관지인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 반면 소련은 소련1국에 의한 단독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1면에 보도했다. 모스크바 공동성명서가 한국 시각으로 12월 28일에 워싱턴, 런던, 모스크바에서 발표되기 만 하루 전에 나온 이 보도에는 인명과 지명을 제외하고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도 12월 29일 오후에야 워싱턴과 도쿄를 거쳐 서울에 도착한 모스크바 결정서 원문을 볼 수 있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보다 이틀 앞서 모스크바 결정서를 볼 수 있는 한국인은 없었다. 허위, 왜곡, 날조로 점철된 이 기사는 곧 한반도를 (아이러니하게도,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이 주도하는) 반탁운동의 거센 소용돌이로 이끌었다."(406-7)


남은 말: 1946년 5월의 대분기


"1946년 5월은 미군정기 한국 현대사를 재편하는 중요한 대분기였다. 정치적으로 이 시점에서 미군정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 여운형에 대한 회유와 공작, 김규식에 대한 점증하는 신임과 좌우합작운동 지지 등을 분명히 드러냈다. 정판사 위폐사건을 필두로 조선공산당 지도자인 이강국, 이관술,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정판사가 입주한 조선공산당 본부는 몰수되었으며, 조선공산당의 기관지 『해방일보』는 정간되었다. 1945년 진주 직후 상황을 살피고 현상 유지에 집중하던 때와 달리 진심이 담긴 미군정의 총공세였고, 조선공산당에 대한 적대감과 분쇄 의지를 명백하게 표출한 상황이었다." "미군정은 중도파 여운형을 박헌영 및 조선공산당과 분리시키기 위한 정치공작도 병행했다. 1945년 하반기 이래 이미 정치적 난관에 처했던 여운형은 38선을 넘어 평양의 김일성, 김두봉과 소련군 사령부를 방문함으로써 돌파구를 열고자 했다. 좌우합작·남북연합 노선의 출발이었다."(412-3)


"한편 이승만-한민당-미군정의 기축적 동맹은 탄탄하게 유지되었다. 이승만은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 한민당이 중심이 된 경찰, 행정관료, 우익 청년단체 등의 열광적 지지를 받으며 남한을 순행했다." "이승만이 남한 각 지역을 방문하는, 소위 남선순행에 발맞춰 우익 청년단은 좌익 정당과 사회단체를 폭력적으로 공격했고, 경찰의 방관 속에 지방 사회에서 좌우 세력 균형은 역전되었다. 이승만의 남선순행 전후에 벌어진 이러한 전국적 현상을 통해 대중은 미군정과 경찰·공권력이 누구를 지지하는지, 누그를 배격하고 있는지를 직관적이고 물리적으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여세를 몰아 이승만은 1946년 6월 남한의 최대 우파 대중조직이던 독촉국민회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1946년 초반 반탁운동으로 고조되었던 김구와 임시정부 계열에 대한 지지를 떠올려본다면 믿기 힘든 승리였다. 김구는 자신이 이승만 다음의 제2인자임을 인정함으로써, 우익 진영의 서열이 분명하게 정리되었다."(413-4)


"1946년 말이 되자 모든 것이 명징해졌다. 미군정하의 행정권력은 한민당의 수중에 들어갔고, 정치적 지배력은 이승만이 행사하고 있었다." "38선 이북에서는 1946년 2월 이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민주개혁을 앞세우면서 실질적인 단독정부로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1946년 말에 이르러 남한은 대혼란, 북한은 대건설의 현장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거울처럼 상대방을 비추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남북에서 각각 자국에게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한반도에는 좌우, 남북, 미소라는 세 층위의 갈등과 압력이 중층적으로 쌓이고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누가, 무슨 일을 벌일지는 예견할 수 없었지만,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누구에게는 이제 끝이 보이려는 참이었고, 누구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혼돈 그 자체였고, 누구에게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행위 주체들에 따라 시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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