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조선의 제도는 신분제인 노비제와 고공제, 조세제도, 농업경영방식과 지주제, 화폐제도이다. 이러한 제도들은 모두 생산성과 임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는 아직 소득의 개념이 생겨나기 전이어서 소득과 빈곤의 수준을 대용할 수 있는 거시적 지표로서 생산성과 임금 등 생계비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임금은 노동 생산성의 지표로서 조선 후기 생산성 하락의 원인을 찾아보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18-20세기 초 조선과 일본의 노동자 임금과 생계비를 비교하고, 이 시기 조선 백성의 빈곤 수준을 가늠해 본 것이다." "이 책은 조선 후기 생산성과 임금의 하락을 가져온 제도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선행 연구와 다른 시각을 보일 수 있다. 이 책의 연구 방법과 결과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기존 사학계의 연구 결과들을 무시할 의도는 없다. 이 책은 20세기 초 일제의 식민지침탈에 대한 원인을 제도적 측면에서 찾아보고, 반성과 성찰을 살피기 위한 것이다."(6-9)
제1부 신분제와 임금, 생계비
1장 고공제와 실질임금
"조선 후기 고공의 경제적 성격은 임금 등 대가를 받고 일하는 임금 노동자였다. 1680년 처음 제정된 고공법은 조선이 고공(雇工)이라는 신분을 새로 규정하여, 고공 문제를 신분제의 틀 안에서 관리하는 제도이다. 고공법은 신분제 틀 안에서 계약기간과 임금 등을 법으로 정하여 그 기간 동안 고공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약하였다. 노동 이동성의 제약에 대한 기준은 고용계약 기간이 1년 이상 장기적이고, 고용계약을 위반하여 도망하는 경우 사적, 공적 형벌을 통해 노동을 강제하는 규정이 있는지 여부이다. 노동 이동성의 제약은 적합한 직업이나 작업장에서 숙련도와 생산성이 더 나은 노동자의 재배치를 통한 경제 효율성을 제한하였다. 또한, 고용계약 기간의 장기화로 임금을 초기의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였다. 노동 이동성의 제약으로 노동의 체계적 분업이 불가능했으며 생산성도 점차 하락하였다. 이 장에서는 18-19세기 농업생산성과 임금의 하락 원인을 신분제에 의한 노동 이동성 제약에서 찾고자 한다."(16)
# 고공 : 형법상 노비보다 1등급 정도 상위 신분이며,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사회적 신분으로 양반, 중서인, 양인, 천민 등 누구나 고공이 될 수 있었다.
"1731년 노비제가 종천제에서 종모종양제로 변하면서 노비인구는 줄어들었고, 노비의 도망은 급증하였다. 18세기 이앙법의 확산으로 농업생산에서 3-9월 사이에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일시적 노동력이 더욱 필요해졌지만, 노비는 농한기인 10-2월까지 일하지 못하고 쉬는 날이 더 많았다. 지주들은 농업생산의 효율성을 위해 노비보다 농사철에만 집중적으로 고용이 가능한 고공을 선호하였다. 처음 우리나라 고문헌에 나타난 고공은 의식주와 임금을 받고 짧게는 3-4개월, 길게는 1-2년 주인집에서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일시적 노동자였다. 고공계약은 고공과 지주가 서로 대등한 노동관계를 전제로 계약기간과 임금을 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으며 노동하는 자를 천하게 대하는 예속적 노동관계가 일반적이었다. 고공은 경제적으로 대등한 노동관계이지만, 예속적 관계를 강조하던 신분제 사회의 규범과 맞지 않았던 이질적 계층이었다."(19-20)
# 종천제 :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노비이면, 그 소생도 노비가 되는 제도, 종모종양제 : 부친의 신분 여부와 관계없이 오직 모친의 신분을 따라서 그 소생이 신분 노비가 되는 제도
# 고공제의 변화 양상
1. 고공법(1680) : 묵시적으로 1-3년 계약 기간, 고공기간의 장기화로 노동 이동성 제약이 높아 고공의 도망 급증, 고공기간과 임금 규정 미비로 분쟁 심화
2. 고공정제(1783) : 5년 이상의 장기 계약으로 노동 이동성 제약 증가, 노비만 고공 신분으로 등재
3. 화고제(1833) : 일일 단기계약 규정(단기고공 일반화), 노동 이동성 제약 소멸, 임금 노동시장 활성화
"18-19세기 토지생산성이 하락하는 추세에서 양반지주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강제노동을 시키는 노비제보다는 보상인센티브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1680년 고공법에서 장기고공은 단순노동을 사용하는 농업생산에 투입되었는데, 단순노동의 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강제노동방식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강제노동방식에서는 노동생산성이 한계에 도달하면 고공이 더 이상 열심히 일하지 않으려 하는 파레토 안정상태(pareto-stable)에 도달한다. 강제노동방식에서 지주가 고공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강제적으로 일을 시키면 고공의 태업과 도망으로 오히려 생산성이 하락한다. 이에 따라 주인의 노동관리비용(monitoring cost)은 증가하였다. 장기고공의 생산성 하락으로 지주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강제노동보다는 보상인센티브 방식을 채택하였다. 보상인센티브에서 지주들은 장기고공보다는 이동이 자유로운 일시적 단기고공을 사용하는 일일 노동계약제(labor contract)를 택하였다."(41-2)
2장 노비제와 생산성
"1731년 노비제가 종천법에서 종모종양법(이햐 종양제)으로 전환되면서 노비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성리학의 국가지배철학으로 사회에서 신분노비에 대한 도덕적 회의가 파급되었다. 국가는 노비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국가가 노비를 직접 호적대장에 기록하여 관리하여, 국가 조세와 군역의무를 부과하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서 노비는 자기성장 노력으로 노비신분에서 벗어나려는 저항과 시도를 하였으며, 가장 온건한 저항수단이 도망이었다. 노비의 도망이 늘면서 양반지주의 감시비용이 증가했고, 노비 대신 임금노동자인 고공의 사용이 늘어났다. 도망갈 수 없어서 남아 있던 노비는 태업과 파업을 통해서 주인의 강제노동에 저항하였다. 결국, 18-19세기 노비제에서 노비의 생산성을 크게 하락하였으며, 감시비용은 반대로 증가하였다." "이 장에서는 18-19세기 조선의 생산성 하락 원인을 제도적 원인, 즉 신분제인 노비제의 변화에서 찾고자 한다."(45-6)
"임진·병자의 양란 이후 전쟁피해로 국가재정이 악화되고, 양민 감소로 재정수입도 줄어들었다. 이후 여러 차례 양천(良賤)이 호환되다가 영조 7년(1731)에 종양법(從良法)이 제정되었다. 종양법은 부친의 신분에 관계없이 모친의 신분이 노비이면 그 소생이 노비가 되는 것이다. 종양법은 노비제도가 와해되는 1894년까지 유효하였으며, 노비인구를 급격하게 감소시킨 중요한 원인이었다. 이는 정부의 도덕적 자산으로서 왕권(영조)의 정치기반을 강화하고 양반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노비제의 전환으로 노비의 국가에 대한 신공 축소, 사노비의 신공 수취 금지, 공노비 추쇄 금지, 사노비의 속량기회 증가, 노비에 대한 체형 금지, 죄인 자손에 대한 노비 연좌제 폐지, 채무노비 금지 등 정책이 발표되었다. 18세기 정조는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는 노비추쇄도감을 없앴고, 서얼 차별과 노비제 폐지를 진행하였다. 순조는 1801년 공노비를 폐지했으며, 고종이 1894년 사노비마저 해방시켜 노비제를 완전히 철폐하였다."(50-1)
"18-19세기 조선에서 흥미로운 노동형태는 유민과 빈농층 가운데 일부가 자기 자신이나 자녀를 스스로 매매(=自賣)함으로써 노비신분으로 전락하는 자매노비이다. 18세기 중반 이후 빈번하게 나타나는 자매노비는 일반노비에 비해 그 매매 숫자가 적고 나이도 어리며, 또한 아주 헐값에 거래되었다. 하지만 18세기 말부터는 전체 노비매매에서 자매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는 18세기 말 이후 신분제의 해체와 정부의 부세 수탈 강화, 부의 양극화로 인해 유민과 빈농층이 증가한 사실과 관련이 깊다." "노비매매서류에서도 자매노비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는 자매노비의 목적이 18세기 가사노동으로 시작되었다가, 19세기 중후반 노비가 사라지면서 생산노동력을 대신한 까닭으로 보인다. 자매노비의 생사노동력 역할은 자매노비의 남성 비율이 높아지고, 장년층이 많다는 점 이외에 자매노비의 가격이 급격히 높아져서 일반노비와 비슷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71-2)
"18-19세기의 중요한 점은 실질매매가격으로 추정한 노비의 생산성은 1801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하락하다가, 공노비 폐지 이후 다시 증가하는 U자 모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노비도망이 증가하면서 노비생산성도 하락하였지만 1801년 공노비 폐지 이후 노비생산성도 점차 회복하였음을 알려준다. 18-19세기 노비제는 노비이동성을 극단적으로 제약하였으며, 노비도망도 증가하였다. 노비의 감시비용과 낮은 생산성은 노비의 실질가격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노비의 도망과 생산성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보이지만, 노비생산성은 실제 임금노동자인 단기고공의 생산성보다 크게 낮았다." "실질노비가격은 일고의 실질임금보다도 32% 정도 낮았으며, 실질노비가격과 실질임금의 차이는 1801년 공노비가 폐지되는 시기 전후에 가장 컸다. 단기고공의 실질임금은 변동성을 보이고 있지만, 실질노비가격에 비해 높아서 노비도망과 노동 이동성 제약이 노비 생산성을 얼마나 하락시켰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75-8)
3장 생산성과 임금의 비교
"단기고공인 일고는 토지가 없는 무산자였으며, 가족을 중심으로 소농경영을 하였고, 병작지를 임차하여 지대를 지불하기도 했다. 이들은 매년 고리대에 의존하여 봄 춘궁기에 식량을 빌려서 가을 수확기에 고리대를 갚았다. 소작농과 고공은 농업경제에서 자기 토지가 거의 없고, 생계수준이 낮아서 고리대 이자가 높은 경우 항상 도망갈 확률이 높았다. 따라서 단기고공이나 소작농에게 식량이 부족한 춘궁기인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수확기인 가을에 현금이나 곡식으로 되돌려 받는 신용 수단인 환곡과 고리대는 신용위험을 고려해서 35-50%로 매우 높았다. 이 시기 유럽의 이자율은 10-15%였다. 경상도 대구 달성우씨가의 추수기에서 나타난 연간 고리대 이자율은 1731년 노비제가 종양제로 전환된 이후 50%로 높았으나, 1801년 공노비 폐지 이후 35%로 하락하였다. 1801년 이후 노동 이동성 개선과 일고의 사용 확대는 실질임금의 인상뿐 아니라 신용위험을 줄이는 역할을 하였으며 고리대 이자도 하락하였다."(79-80)
"양반지주는 토지생산성이 떨어지면 이앙법과 퇴비의 사용, 수리시설 개선 등 새로운 농업기술을 도입하거나, 토지 면적당 노동력 투입을 증가시켰다. 하지만 농업기술은 일정 기간 고정적이어서, 지주들은 토지 면적당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여 노동 집약도를 높이거나 노동강도를 높였다. 실제 18-19세기 경상도 칠곡과 예천에서 양반지주의 토지에서 일고와 작인의 일인당 토지 경작면적이 줄어들었다." "18-19세기 지주제에서 지대가 감소하고 지대 수취율이 하락하자 양반지주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강제노동을 시키는 노비제의 한계보다는 단기고공을 사용하는 임금 고용계약제를 택하게 된다. 1883년 화고제 이후 단기고공인 일고가 확대되었으며, 고공의 도망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일고들은 지주들에게 경제적, 신분적 예속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노동력보다 자유롭고 생산성이 높았다. 농업경영방식에 관계없이 계절적으로 농번기에 일고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82-7)
제2부 조세제도와 지가, 토지분해
4장 토지소유계층의 변동과 지가
"1590-1900년 동안 전라도·경상도 양반가의 전답매매명문(田畓賣買明文)을 살펴보면 양반층의 논과 밭에 대한 순 매입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민의 토지매도는 18세기 말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조세의 토지세화, 정액화와 더불어 지방관이 추가적인 잡세를 상민의 토지세로 떠넘기면서 토지를 보유한 상민층의 부담이 가혹하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토지세의 부담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은 상민층이 토지를 팔고 다른 양반지주의 토지에서 소작을 하거나 다른 도시지역으로 이동하여 임금노동을 하는 것이다. 상민층의 토지매도는 조세의 토지세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진 18세기 말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된 데 반해 토지매입은 1651-1690년을 정점으로 감소하여 상민층이 보유하고 있는 순 토지규모가 감소하였다. 시기별로 상민층의 토지해체 과정은 양반층의 토지집중 과정과 정반대의 행태를 나타내고 있어서 양반층의 토지집중이 상민층의 토지분해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8-12)
"1700년을 기준으로 전라도·경상도 지역 모두에서 지가 상승은 양반층의 토지소유규모 증가와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양반층의 토지 실질가치는 1700년 기준 양적인 토지소유규모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서 양반의 토지집중이 단순 토지소유규모의 집중뿐 아니라 실질자본의 집중을 나타내고 있다. 양반의 토지집중과 상민의 토지분해는 훨씬 더 심각한 부의 불평등을 가져왔다. 1691-1700년의 양반층의 토지자산의 실질가치가 토지규모보다 더 크게 상승하여 실질 토지자본의 축적이 18세기 초반에 이미 시작되었다." "양반층의 토지소유는 증가하고 상민과 노비의 토지는 분해되었다. 이는 기존 연구에서 가정하고 있는 토지의 하향분해현상이 계층별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양반층의 토지소유규모 증가는 주로 상민층의 토지매도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토지의 하향분해보다는 토지의 양극화 현상이 일반적이었다."(119-21)
5장 조세의 토지세화와 상민층의 토지분해
"전세는 전통적인 전결(토지)에 부과되는 조세이다. 1444년에 공법(貢法)을 시행하여 토지비옥도와 거리에 따라 1결당 4-20두씩 차등하여 결세를 거두었다. 하지만 지방관청에서 흉년에도 불구하고 1결당 10두의 과중한 전세를 부과해서 백성의 원성이 커졌다. 이에 따라 1635년 인조는 영정법을 발표하고, 기후조건에 관계없이 전세를 지역에 따라 1결당 4두(특정 지역은 6두)로 고정하였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토지에 대한 세금이 높아지고 토지보유비용이 크게 증가하면서 상민층이 토지를 매도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상민층과 그 가호에게 부담했던 조세수입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조세수입원도 불확실해졌다. 이에 조선정부는 이전에 상민의 호 또는 사람에 부과했던 세금을 조세수입이 확실하고 고정적인 토지에 부과하면서 조세를 토지세로 전환하였다. 양반 지주의 토지세와 잡세는 자주 소농과 작인에게 떠넘겨졌으며, 소농은 자기 토지세 증가와 더불어 지주의 토지세까지 부담하였다."(123)
"1760년(영조 36) 비총제는 그해 토지세 징수에 대해 조세대상 토지의 실결(實結)을 통해 지역별 총액을 확정하는 방법이다. 징수근거가 되는 경작지의 실결과 재해지의 재결(災結)을 결정하는 연분(年分)에 올해와 비슷한 작황을 보이는 과거 생산을 비교해서 그 작황을 조정하였다. 하지만 실제 토지세 징수액은 지난해와 유사하게 결정되었는데, 이는 재정의 수입과 지출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호조에서 각 도의 농사형편을 참고하여 이와 상당한 이전 해의 수세총액과 비교하여 그해의 각 도 감면세를 정하는 비총법(比摠法)을 채택하였다. 전세의 납기는 조선 전기의 규정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전세의 정액화를 가져왔다. 지방관은 조세징수액을 높이기 위해서 조세를 감액하기보다는 증액하거나, 고정적인 정액세를 부과하였다. 그러나 흉년으로 토지 수확량이 크게 감소한 경우에도 토지세는 일정하게 유지되면서, 조세의 정액화는 상민층에게 추가적인 준조세의 역할을 하였다."(125)
"18세기 말 조선의 사회제도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민층의 토지에 부과되는 토지세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18세기 말 대동법 이후 전세뿐 아니라, 공납과 대동미, 군역 등 모든 조세가 전결을 대상으로 부과되는 조세의 토지세화로 인해 상민층의 토지매도는 급증하였다. 이외에 특별세와 전세부가세 등을 지방관이 임의로 과세하였으나 이 또한 주로 양반보다는 상민층에 전가되었다. 결국, 18세기 말 조세의 토지세화는 상민층의 토지보유비용을 급격하게 증가시켰다. 상민층의 대규모 토지분해와 노비도망으로 세수재원이 부족해지면서 안정적인 재원마련을 위해 중앙정부는 조세재원이 불확실한 공납과 대동법에 의한 가호별 조세, 군역과 부역 등 사람별로 부과되던 조세도 모두 전결을 대상으로 토지세로 전환했다." "18세기 말 토지세 증가와 지방관의 민고와 환곡, 고리대도 상민층의 토지보유비용을 증가시켰다. 고리대와 환곡을 사용했던 농민들은 토지세와 더불어 추가적인 생계비용까지 감당해야 했다."(141)
제3부 지주제와 이윤, 고리대 이자
6장 농업경영방식과 생산이윤
"소농의 생산이윤을 추정하기 위한 자료는 18-19세기 소농의 구체적 사례를 전하고 있는 박문수와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의 문헌을 사용하였다. 이들 문헌에서 소작료는 50% 수준이었으며 소작소농은 농업생산에 필요한 비용과 결세를 부담하였다. 먼저, 15%의 전세(田稅)와 군역·환곡의 부세, 생산 종자비용은 10%였다. 또한 소농이 노동주체로서 계속 일을 하고 생계를 영위할 수 있는 생계소비량이 필요한데, 조선 후기 진휼곡 자료를 활용하여 이 시기 최저 생계비는 수확량의 10-15% 정도로 추정하였다. 식량이 부족하고 빈곤했던 소작농들은 생계를 위해 봄에 고리대를 빌려서 가을에 갚았는데 연리 50%였다. 특히 소작농들에게 고리대가 큰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은 이자에 대한 현물대납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봄 춘궁기 때 소작농에게 생계를 위한 돈을 빌려주고 가을 수확기에는 원금과 이자를 곡물로 갚게 하여 단순 이자율에서 화폐가치의 하락분까지 그들에게 전가함으로써 추가적인 생산비용이 되었다."(150-1)
"토지세인 결세(結稅)는 처음에 지주가 부담했지만, 18세기 후반 이후 점차 소작인에게 전가되었다. 토지생산량 역시 감소하면서 지주는 소작농에게 결세뿐 아니라 종자비용도 부담시켰고 소작농은 기존에 비해 수확량의 10-20%의 추가 부담이 발생하였다. 김건태(2004)는 18세기 후반 소작인의 수입은 두락당 생산량의 감소, 1인당 경지면적의 축소, 지주제 관행의 변화 등으로 인해 18세기 초반에 비해 대략 40% 감소하였다고 보았다. 흥미로운 점은 조세의 정액화로 인해 토지세인 결세가 실제 생산량보다는 과거 생산량을 기준으로 징수되었다는 점이다. 실제 생산량이 예년에 비해 줄어드는 경우 조세 부담이 실제보다 커지므로 그 생산량의 차이는 준조세로서 소농의 생산비용을 상승시켰다." "한번 채무를 지게 되면 소농의 생산이윤이 -11%로 감소되어 적자에서 벗어날 확률이 줄어들었다. 소농은 기후조건과 상관없이 농업생산으로 지속적 흑자를 유지할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152-5)
7장 병작제와 임금노동, 고리대 이자
"노비처럼 강제노동을 사용하는 지주는 직영지 경영방식을 선호하며, 단기고공을 사용하는 지주는 병작제를 선호하였다. 따라서 농업생산방식과 노동양식은 밀접한 관계를 보인다. 이는 조선 후기 소농경영방식이 자본주의 형성의 내재적 조건이라는 기존 연구 결과에 의문을 제시한다." "중요한 점은 소농경영 자체가 생산력 강화의 전제조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카무라 사토루가 지적했듯이 생산력 강화 과정에서 소농경영을 하는 농촌의 잉여 노동력을 도시가 흡수하여 자본주의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농경영의 특성을 잘못 전달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소농은 거의 적자경영이었으며, 토지가 분해되고 있었다. 농촌의 잉여노동력의 존재는 생산력 강화의 전제조건이 아니며 단지 자본의 축적과 확산에 필요한 조건일 뿐이다." "소농경영방식이 조선 후기에 최적생산방식이었다면 소농경영이 고공노동을 이용한 병작경영을 대체하여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못했다."(168-9)
# 병작제 : 경작인이 독립 소경영을 하고 지주는 농업경영에서 분리된 채 경제외적 강제를 통해 지대만을 수취하는 형태
"단기고공인 일고는 토지가 없는 무산자였으며,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주체였다. 이들은 스스로 가족을 중심으로 소농경영을 하였고, 지주의 병작지를 임차하여 지대를 지불했다. 이들은 매년 고리대에 의존하여 봄 춘궁기에 식량을 빌려서 가을 수확기에 고리대를 갚았다." "신용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농업경제인 조선에서 이자율은 농업생산을 통해 최저 생계비를 유지할 삶의 수준을 담보로 신용위험을 고려하여 높게 책정(35-50%)되었다. 18-19세기 고리대는 조선 후기 노비와 고공의 도망이 빈번해지면서 사회적 믿음과 사회적 신용자본이 붕괴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 사회적 자본으로서 신용과 금융의 기능이 축적되지 못하고 시장발전을 저해하였다." "1801년 공노비 폐지 이후 사회적 신용과 사회적 자본이 점차 형성되면서 고리대는 20-35%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1801년 이후 노동 이동성 개선과 일고의 사용 확대는 실질임금의 인상뿐 아니라 신용위험을 줄이는 역할을 하였다."(170-1)
제4부 화폐제도와 물가
8장 화폐제도와 물가, 교역조건
"조선은 1625년부터 적극적인 동전의 유통정책을 시도하였으며, 동전의 주전(鑄錢)에 대한 논의도 지속되었다. 명목화폐인 동전을 만들려는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603년(선조 36) 6월에 영의정 이덕형은 〈우리나라는 화폐로서 단지 미·포를 사용하기 때문에 농사는 병들고 국가는 가난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동전을 유통시킴으로써 응급한 국가 경비에 충당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자고 하면서 동전 사용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623년에 인조는 경기도에만 시행하던 대동법을 강원도에도 시행하였고, 1625년(인조 3) 10월 조선정부는 궁핍한 국가재정을 보완하기 위해 동전을 주조하여 유통하는 문제를 거론하였다." "최명길과 김육은 동전유통을 개성으로부터 전국적으로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김육은 효종의 신임을 토대로, 자신이 추진하여 성과를 거둔 대동법에 의한 공납의 일부를 돈으로 대신 납부하도록 하여, 대동법과 행전법(行錢法)을 결부하고자 하였다."(188-9)
"17세기 초부터 의욕적으로 추진된 조선의 화폐정책은 1656년 중단되었다가 1678년 상평통보가 주전되면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17세기 초 동전 유통정책이 계속 실패했지만, 동전 사용의 유용성을 점차 백성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시장거래에서 면포와 은화가 교환수단으로서 한계를 가지면서 명목화폐로서 동전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초기 상평통보의 유통은 서울과 인근 지역에서만 통용되었지만 동전주전의 확대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동전유통량은 18세기 초에 500만 냥을 넘었으며, 이는 당시 조선의 쌀 생산량의 80%에 가까운 130만 석 정도를 살 수 있었다. 18세기 초 국내 동광 개발이 부진하여 동전원료를 일본의 수입에 의존하였는데, 일본 동의 수입량도 급감하여 동 원료 공급난이 심각하였다. 동 수입 제약은 이 당시 전황[錢荒, 동전 부족]을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이었다. 1731년(영조 7) 전황이 극심하고 동전가치가 품귀해지자 33년 만에 조선은 동전을 다시 주조하였다."(191-2)
"동전유통으로 화폐경제가 발전하자 조선 사회의 성리학적 가치체계와 농업 중심의 생산양식, 신분제의 사회질서가 조금씩 해체되기 시작했다. 즉 화폐경제의 발전으로 농업·광업·수공업의 생산력 증진, 상민과 소농의 토지이탈, 고리대의 성행과 농촌사회의 분화, 사회적 부의 불공평한 재분배, 사회경제적 윤리로서 성리학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동전 유통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화폐 가치관이 나타났다. 이익은 동전의 기능과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국토가 좁아서 재화 운반에 큰 어려움이 없고 농민이 스스로 밭을 갈고, 길쌈하는 자급자족적 농업에서 동전유통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조선은 1727년 대동포, 군포, 노비신포를 종래 동전과 면포로 반씩 거두는 것을 모두 면포로 거두게 하였다. 또한 부상대고와 관청, 군영에서 동전의 퇴장을 금지하였다. 동전가치가 귀해지면서 부상대고들은 동전을 퇴장시켜서 고리대업을 통해 높은 이익을 취했다."(198-9)
# 부상대고富商大賈 : 많은 밑천을 가지고 대규모로 장사를 하는 상인
9장 화폐의 품위저하와 디플레이션
"13-16세기 유럽 국가들은 국왕의 법에 따라 금화와 은화 등 법정주화의 제작을 독점적으로 관리했으며 주화의 무게와 형태, 금과 은의 함유량을 법으로 규정하였다." "유럽 국가들은 왕실의 재정수입을 확충하기 위해 주화의 무게와 함유량을 줄여서 주전비용을 절감하거나, 주전이익을 높이는 주화의 품위저하(debasement)를 시도하였다." "유럽에서 주화의 품위저하로 구 주화와 신 주화가 금과 은의 무게단위로 유통되었다면, 화폐량의 변화가 없어야 하는데 실제 대규모 화폐량이 증가하였다. 이는 품위저하의 퍼즐이라고 한다. Rolnick et al.(1996)은 주화의 품위저하 퍼즐을 가져온 원인으로서 구 동전과 신 동전이 무게단위가 아닌 동일한 액면 가치(by-tale)로 유통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구 동전과 신 동전이 같은 액면 가치를 가지고 유통되는 경우 구 동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구 동전의 구매력을 보전하기 위해 새로운 동전으로 전환하며 이때 화폐량이 증가한다는 것이다."(214-5)
"Velde et al.(1999), Sargent and Smith(1997)는 구 주화와 신 주화가 동일한 액면 가치로 동시에 유통되는(즉,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경우는 사람들이 정보 비대칭성으로 인해 두 주화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구 동전의 품위저하 퍼즐은 구 주화와 신 주화가 같은 액면 가치를 가지고 동시에 유통될 수 있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론적으로 동전의 무게와 품질을 하락시키면 동일한 동전 원료를 사용해서 더욱 많은 동전을 주전할 수 있으므로 화폐량은 일반적으로 증가한다. 하지만 조선에서 동전 품위저하는 화폐량을 증가시키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초기 화폐경제의 특성인 전황과 동전의 가치 안정화 정책에 있다. 전황과 동전의 가치 안정화 정책은 구 동전과 신 동전이 같은 액면 가치를 가지고 동시에 유통되는 경제환경을 제공하였지만, 동의 수입제약, 높은 주전비용과 동전을 천시하는 성리학 지배이념으로 상평통보는 간헐적으로 주전되었으며, 전황은 지속되었다."(216)
# 조선의 주전이익률은 재료비와 연료비, 공임, 운반비 등을 고려하면 거의 0에 가까워 동전주전에 대한 적극적인 인센티브조차 없었다.
"조선 후기 전황비율은 1678-1750년 0.5-3.6% 수준에 불과하였지만, 점차 화폐공급이 증가하면서 1750-1820년 30-40%, 1820-1865년 60-80%로 증가했다." "동전이 세금으로 납부되고 다시 시장으로 환류하지 못하고 정부와 상인에 의해 퇴장되는 비중도 거의 80%에 달하고 있다. 동전의 마모와 손실률이 25% 정도라고 가정하면 동전퇴장으로 화폐유통속도는 1과 유사했거나 그보다 작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 후기 미곡과 면포 등 상품화폐의 사용비중도 크기 때문에 화폐유통속도는 낮았을 것으로 보인다. 전황의 경제적 원인은 시장거래량이 확대되는 데 반해 동전주전이 제약되는 것 때문이지만 동전의 퇴장 등 다른 요인들도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전황으로 화폐가 귀해지면서 지주나 상인층들이 부의 축적 수단으로 화폐를 퇴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다시 전황을 가속화시켰다. 이같은 전황과 디플레이션은 상민과 소농을 분해했으며, 신분제를 해체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239-40)
제5부 식민지 화폐개혁과 인플레이션, 경제궁핍
10장 식민지 화폐개혁과 인플레이션, 환율
"대원군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재정비하고 경복궁을 재건축하는 데 소요되는 거액의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악화인 당백전을 주조하였다. 1866년(고종 3) 11월부터 6개월 동안 1,600만 냥을 주조하였다. 당백전은 이전에 사용되던 상평통보에 비해 소재가치는 5-6배이지만, 액면 가치는 100배가 되는 고액전이었다. 당백전의 발행으로 거액을 일시적으로 왕실재정에 충당할 수 있었지만, 당백전은 실질가치가 액면 가치에 훨씬 못 미치는 악화(惡貨)였다." "국내 화폐시장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으로 무역결제통화로서 일본 은화를 비롯한 중국 마제은(馬蹄銀), 멕시코 은화, 러시아 루블 은화 등 여러 종류의 외국 화폐가 유입되었다. 외국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문제는 상평통보와 외국화폐의 상대적 가치, 즉 상평통보의 환율(한전비가)을 일정하게 정하지 못해서 환율도 급변했다. 조선화폐의 남발과 외국 화폐가치에 대한 혼란으로 물가 급등과 많은 사회적 문제가 나타났다."(247-8)
"1865-1910년은 근대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시기이며, 일본 주도 화폐개혁은 조선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식민화가 되기 전에 이미 화폐적으로 식민화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일본화폐의 유통이 합법화되면서 조선에서 일본화폐의 유통비중이 30%를 넘어섰고, 시장과 경제를 화폐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화폐개혁은 식민지 화폐의 단위를 변경시키거나,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거나, 또는 옛날 화폐를 환수하는 화폐정책을 말한다. 1876-1910년 사이 식민지 화폐개혁은 모두 일곱 차례로서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그 중 일본이 주도한 세 차례 화폐개혁은 1891년 신식화폐조례, 1894년 신식화폐발행장정, 1904년 화폐조례칙령, 즉 화폐정리사업이다. 1894년과 1904년의 화폐개혁은 각각 일본이 청나라, 러시아와 전쟁을 수행했던 시기였다. 일본주도 식민지 화폐개혁은 일본 불환지폐의 유통을 확대해서 청일·러일 전쟁 경비를 조선에서 조달하는 불순한 목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246-7)
# 일본 주도의 식민지 화폐개혁
1. 신식화폐조례(1891) : 일본화폐의 유통을 법적으로 허용하기 위한 조치로서, 빈번한 화폐개혁은 조선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려 조선상인과 백성들에게 손실을 안겨주었고, 반대로 화폐개혁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한 일본상인들은 가치가 오른 일본화폐를 사용하여 무역과 유통에서 큰 이익을 보았다.
2. 신식화폐발행장정(1894) : 모든 당오전과 평양전을 일문전으로 통합하고, 백동화를 대규모로 발행하였다. 또한 금 태환이 안 되는 일본 지폐의 유통을 합법화하여 청일전쟁의 비용으로 충당했다. 여기에 화폐위조에 대한 처벌규정을 제거하여 일본인들에 의한 대규모 백동화 위조와 밀수를 조장했다.
3. 화폐조례칙령1호(1901) : 명목적으로는 금 본위제도와 중앙은행의 도입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일본 제일은행을 중앙은행으로 전환하려는 것이었다. 화폐단위를 푼, 전, 냥에서 원 단위로 통일했다. 또한 일본의 금 본위제도 실시로 인해 부족한 금을 조선에서 대규모로 반출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4. 화폐정리사업(1904) : 일본 제일은행권을 법정화폐로 지정하고, 조선의 화폐발행권을 박탈했다. 이에 따라 백동화를 조세로 수취하는 조선정부와 백동화를 기반으로 어음을 발행하던 조선 객주와 상인은 커다란 손실을 입었고, 일본화폐를 사용하여 미곡을 구매한 일본상인들은 많은 무역차익을 얻었다.
"19세기 말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화폐를 유통시켰고, 한전비가는 일본상인들에게 유리하게 점차 하락하였다. 일본은 제국주의 확대와 금 본위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부의 원천으로서 금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일본의 조선 금 수입액 비중은 1904년 일본 전체 금 수입액의 41%에 달했다. 일본이 조선 금을 매입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쉬운 방법은 일본화폐의 사용과 한전비가 하락이었다. 동일한 일본화폐를 사용해서 이전보다 싸게 조선 금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은 국가적 차원에서 금 분석소의 설치, 금광 개발 등 정책적으로 조선의 금 수탈에 총력을 기울였다. 실제 조선에서 한전비가의 하락과 별도로 조선 금을 국제시세보다 30% 이상 싸게 구입하는 가격수탈을 시도하기도 했다. 국가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위해 일본은 자국 또는 식민지에 획일적인 경제제도의 개혁을 강요하였으며, 일본 주도 식민지 화폐개혁은 국가 자본축적을 위한 필수적인 화폐침략이었다."(267)
"무역의 이윤추구 과정에서 나타나는 수탈이윤은 공정한 무역과정에서 등가 교역조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상이윤을 초과하는 이윤을 말한다. 이때, 정상이윤은 같은 시기 정상 이자율인 8-10% 수준을 말한다." "일본상인의 유통과 무역이윤의 크기를 직접 추정해 보면, 일본주도 화폐개혁이 조선에 가져온 경제적 수탈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일본상인의 미곡 무역이윤율은 무역운송비(15%)를 제외하면 8.4%로서 정상이윤에 가깝다. 하지만, 일본상인의 유통이윤은 거간과 객주의 중간 수수료율 18.14%와 한전비가 하락률 -9.3%를 고려하더라도 연평균 33.15%로서 상당히 수탈적이었다. 같은 시기 조선의 대일 교역조건은 1880년 기준 50-60%에 그쳐 악화되었으며, 대일 무역은 부등가 교환이었다. 이러한 일본상인의 무역과 유통 초과이윤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은 인플레이션과 한전비가 하락 등 식민지 화폐개혁으로 인한 화폐적 요인이었다."(286-7)
"이러한 일본의 무역수탈과 식민지 화폐개혁에 반대하는 의견들은 무역의 상호이익원리를 그 근거로 들고 있다. 일본상인들이 미곡과 금 무역에서 유통이윤이 발생했지만, 조선은 일본과 무역을 통해 상호이익과 교역조건개선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즉, 교역조건의 개선효과는 조선의 미곡 생산가격은 아주 낮았지만,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이전보다 미곡가격을 높게 받을 수 있게 되며, 수출가격의 개선효과로 인해 경제이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 국가의 교역조건은 등가조건으로 교환될 때 100을 기준으로, 교역조건이 100 이상으로 개선되면 이익이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미곡의 교역조건은 1880년 대비 50-60% 수준을 보이고 있으며, 점차 개선되었지만 1905년 이후에서야 100에 근접하고 있다. 즉, 초기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과의 미곡무역에서 불리한 부등가교환이 발생하였으며, 조선의 교역조건은 개선되기보다는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294-5)
나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