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장 문제의 제기
"'(식민지) 개발론' 연구 역시 일제의 조선에 대한 침략이나 수탈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이른바 '수탈론'과는 달리 개발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개발론'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이 공업화에 성공하여 '중진국' 내지 선진 자본주의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생긴 것이다. 즉 한국의 성공적 공업화의 '역사적 배경' 혹은 공업화의 '경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생긴 것이었다. 일제시대에 조선사회가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해가는 초석이 놓여졌고, 그것이 해방 후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의 역사적 기원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성장사학에서 이러한 개발적 입장이 가장 확실히 나타난다." "그러나 정작 한국사의 입장에서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러한 개발이 조선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된 연구가 없다. 이 책은 민족문제야말로 식민지 조선경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개발론'과 생각을 달리 한다."(23-6)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기간 동안 조선은 급속한 개발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개발의 이득은 조선인들에게 거의 귀속되지 않았고, 조선인들의 경제적 처지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고, 또 개선될 전망도 없었으며,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그것에 의한 민족차별이 구조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다. 민족별 소득 불평등은 다시 소유관계의 불평등을 악화할 것이고, 이것은 소득 분배관계를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즉 민족별 경제적 격차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고, 식민지체제가 존속하는 한 확대재생산 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한편 이러한 극단적이고 구조적인 민족별 경제적 불평등은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사이에 발생하게 되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차별'을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해방과 더불어 이 개발의 유산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바로 그 의미에서 일제시대의 개발은 조선인에게 있어서 '개발 없는 개발(development without development)'이었다."(28, 34)
제2장 농업개발
"1910년대 조선의 농업은 구한말 시대에 도달했던 농업상태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1910년대의 조선의 농업을 검토해보면, 조선왕조 말기의 농업상태를 짐작해볼 수 있는데, 이 시기가 왕조 붕괴기로 국가적 차원에서는 농업개발을 위한 노력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지면적, 관개시설, 품종개량 등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국가가 공권력을 회복하고 본격적으로 개발에 나서게 된다면, 조선의 농업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급속히 발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던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8세기까지 이루어진 조선의 농업발달이나 해방 후 한국의 농업발달이 그것을 입증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제시대에도 1920년대의 산미증식(갱신)계획에 의한 관개시설의 확충과 1920년대 후반 이후의 비료투입의 증가 및 1930년대의 다수확품종의 도입 등에 의해 미곡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56)
"일제 시대의 농업개발은 상당한 정도의 농업생산량 증산을 이루었다. 미곡의 경우에는 52.3%, 밭작물의 경우에는 31.2%가 각각 증산된 것으로 계산되었다. 이러한 증산은 경지면적 혹은 재배면적의 확대, 우량품종의 보급, 관개시설의 확충, 비료투입의 증대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시대 식민지적 농업개발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일제시대 농업개발의 또 하나의 측면은 식민화의 과정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일제시대의 농업개발의 중심축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농업개발 과정에서 보다 비옥한 토지를 점점 더 많이 집적해갔다. 일본인 수중으로 토지가 점점 더 많이 집적·집중됨으로써, 조선에서 생산된 농산물 중에서 일본인이 차지하게 되는 몫도 크게 늘어났다. 농업개발 과정이 진행되면서 민족별로 농업소득의 분배상태는 더욱 불평등해져 갔기 때문에 외형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조선 농민들의 경제적 처지는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79-80)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은 1910~15년간 및 1928~35년간에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증가했지만, 1916~28년간 및 1935~42년간에는 변화가 매우 완만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중 1910~15년간의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의 급증은 동양척식(주)의 회사소유지의 확대에 의한 바가 크다." "1928~35년간의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의 1910~15년간의 급증과는 원인을 달리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시기는 대공황의 시기였다." "요컨대 1920년대 말 이후의 공황 과정에서 농가의 경제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현금흐름이 원활하지 못하고 차입금 상환압박이 컸던 일부 지주들이 경쟁적으로 토지를 방매함으로써 이 시기에는 대규모로 토지소유권 이동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경제적 곤란 때문에 토지를 염가로 방매할 때 자금력이 좋은 일부 일본인들이 그 토지를 대량으로, 또 염가로 사들임으로써 1928~35년 간에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이 급증했던 것이다."(85-90)
"191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에 걸쳐 소작농 호수가 급증하고 자소작농 호수가 급감하는 것이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난다. 즉, 자작농 호수는 50만 호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자소작농 호수는 100만 호 정도에서 70만 호 정도로 크게 줄어들고, 반면 소작농 호수는 100만 호 정도에서 150만 호 정도로 크게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1920년대 말과 30년대 초에 격심하였다. 그리하여 농민분해가 일단락되는 1930년대 초가 되면 자소작농 호수는 소작농 호수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1915~32년간의 불과 17년 만에 자소작농 호수는 31% 감소하고 소작농 호수는 64% 증가해, 전체 농가의 53%가 소작농이 되어버리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격렬한 농민 분해가 있었던 것이다. 산미증식(갱신)계획으로 대표되는 일제시대의 농업개발 정책은 농업생산의 증가와 동시에 수많은 조선 농민이 토지를 상실하고 궁박 상태에 놓이게 만든 또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106-7)
"1942년의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조선에서 일본인 농가 호수와 농업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0.17% 및 0.19%로 극소수였다. 이 극소수의 일본인들이 조선 전체 논 면적의 16.9%와 조선 전체 밭 면적의 4.6%를 소유함으로써, 민족별로 극심한 소유관계의 불평등을 나타내게 되었다. 농업에서 가장 기본적인 생산수단인 경지의 극단적인 불평등한 소유관계, 그리고 소작제도라는 생산관계에 의한 농업경영, 이 두 가지가 바로 식민지적 농업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남한의 미곡 생산량 혹은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본격적으로 증가하는 시기는 해방 이후 특히 1950년대 후반기에서 1970년대 후반기 사이의 20여 년간이었다. 농업혁명이라고 할 만한 놀라운 성장이 공업의 본격적 발전에 선행하면서 이루어졌고, 그 결과 1970년대가 되면 숙명처럼 여겨지던 '보릿고개'가 사라지게 된다. 일제시대의 미곡 생산량의 일시적인 증가는 마치 찻잔 속의 폭풍과 같은 것이었고, 적극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126-8)
제3장 공업개발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직후 채택한 산업정책은 조선을 순수 농업지대로 묶어두려는 것이었다. 회사령(1911~20년)으로 조선에서 근대적 대공업이 발흥하는 것을 억제하려고 한 것이나, 해외 유학과 고등기술교육을 규제함으로써 조선인의 기술발전을 억압하려 한 것에서 병탄초기의 정책의도가 여실히 나타난다. 그러나 1916년경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호황기가 도래하면서 조선의 공업발전을 억제하려는 조선총독부의 규제는 한결 느슨해지는 한편, 기업설립 활동을 활발해졌다. 그 결과 회사령은 공식적으로는 1920년에 철폐되지만 1916년경부터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그 후 1920년대 말까지는 조선총독부가 공업발달을 저지하는 정책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뚜렷이 공업개발을 중시하는 산업정책을 세웠던 것도 아니다. 이 시기의 산업정책은 산미증식(갱신)계획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부문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1920년대의 조선의 공업은 주로 영세중소자본의 속출을 특징으로 하게 된다."(132-3)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이후 조선의 대표적인 재벌로 성장하는 일본질소비료(日窒)의 조선 진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곧이어 일질 이외의 일본대자본의 조선 진출도 상당히 활발해진다. 미쓰이(三井) 계통의 남북면업(南北綿業)·군시제사(郡是製絲)·동양제사·소야전시멘트, 미쓰비시(三菱) 계통의 조선중공업, 니치멘(日本棉花) 계통의 조선면화·전남도시제사, 카네보(鍾紡) 계통의 종연방적(鍾淵紡績), 카타쿠라(片倉) 계통의 편창제사, 동척(東拓) 계통의 조선연탄, 아사노(淺野) 계통의 천야시멘트스레트 등의 14개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때 진출한 대자본의 대부분이 1930년대에도 조선공업발달을 주도해가는 자본계통이 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일본대자본의 조선진출은 1930년대에 들어 한층 가속화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이 보다 적극적인 공업 육성정책(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으로 바뀌어갔기 때문이다."(133-4)
"일제시대 산업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단순히 제2차 산업이 발달한 것만이 아니고 제2차 산업 내부에서는 경공업을 제치고 중화학공업이 더욱 급속히 발전함으로써 공업구조가 한층 고도화되었다는 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1940년에 조선이 도달한 중화학공업의 비중 51.6%는 전간기에 선진 주요 공업국이 도달했던 수준에 조금도 뒤쳐지지 않는 높은 수준이었다." "1930년대에 조선의 공업구도가 급속도로 중화학공업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은 조선의 자원, 특히 전력 자원에 대한 재인식과 관련이 있다." "일본질소비료(주)는 부전강에 댐을 건설하여 20만kW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고, 거기에서 생산된 전력을 이용하는 유안공장을 함경남도 흥남에 설립했다. 전기를 이용해서 공중 질소를 고정하고, 물을 전기분해하여 수소와 산소를 얻고, 질소와 수소를 합성하여 암모니아를 얻어 유안을 생산하는 암모니아합성법(전해법)에서 전기는 무엇보다 중요한 에너지이자 동시에 공업 원료이기도 했다."(153-6)
"일제 말 조선에 투하된 공업회사자본은 모두 일본인 회사자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2년에 대한 동양경제신보사의 추계에 의하면 조선인 공업회사 자산은 5%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95%는 일본인 공업회사의 것이었다. 1942~45년에 이르는 기간에 조선인 공업회사 자산의 비율은 더 증가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기간의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을 염두에 둔다면 그 비율은 더욱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해방 당시의 조선의 공업회사 자산은 거의 대부분 일본인 공업회사 자산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해방 당시 조선의 5,300개 일본인 회사 중에서 0.4%에 해당하는 23개의 일본인 대공업회사의 자산이 조선 전체 일본인 회사 자산의 43.1%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조선전력과 일본질소비료, 압록강수력발전, 일본제철 등의 4개의 회사 자산만으로도 조선 전체 일본인 회사 자산의 1/4을 조금 넘는 25.6%나 되고 있다."(177, 180)
"일본인 근대적 대공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체 공장수의 1%도 되지 않는 62개의 공장에서 전체 공장생산액의 29%를 생산하고 있었다. 둘째, 이들 업종은 대체로 독과점적인 시장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 노동자 1인당 생산액이 다른 업종에 비해 월등한, 자본집약적 생산기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넷째, 공장당 노동자수가 평균 422명으로 그 밖의 공장의 35명에 비해 월등히 많다." "토착공업과는 판이한 이런 특징들 때문에, 생산과정은 대체로 자기완결적이었고, 따라서 일부 원료조달 부문(예컨대 정어리 기름 등)과 일부 제품 가공업(예컨대 시멘트 벽돌이나 기와 등)을 제외하면 조선 내의 다른 자본, 특히 조선인 자본과는 거의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었다. 1930년대에는 바로 이들 업종의 생산액이 비약적으로 증대함으로써 조선의 공업생산액이 급증하고 공업구조가 고도화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들 일본인 대공업과 조선인 공업 사이에는 직접적 연관관계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188-90)
"조선에서 공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1930년대 이후이지만, 그 전조는 이미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이 때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군수공업 육성은커녕 공업 육성의 의도조차 뚜렷하지 않던 시기였다. 즉 조선의 공업화는 군수공업이라는 동기에 의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의 공업화를 군수공업화와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 역시 매우 잘못된 것이다. 중일전쟁 이후의 공업화는 군수공업화이기 때문이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모든 자원이 전쟁이라는 목적에 합치하도록 통제된다는 가장 큰 특징이 있고, 따라서 군수공업육성이 가장 중요한 산업정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일전쟁 이전의 공업화에서 군수공업 육성이라는 계기를 강조하는 것이 무리이듯이, 중일전쟁 이후의 공업화에서 군수공업육성이라는 계기를 떼어놓고 생각한다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군수공업화를 논외로 하고는 공업화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종래의 군수공업화 강조론은 타당하다."(205-6)
"1943년 10월에 공포된 '군수회사법'에 따라, 조선에서는 제1차 및 제2차 두 번에 걸쳐 100개 회사가 군수회사로 지정되었는데, 그 중 조선인 회사는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과 백낙승의 일본무연탄제철 둘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 회사였다." "회사수는 100개사로 얼마 되지 않지만, 이들 군수회사로 지정된 회사의 자산이 일본인 회사 자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1.9%나 되고 있다." "조선의 공업은 일제 말기로 다가갈수록 군수공업화의 성격이 짙어지고, 1944년 단계가 되면 조선의 광공업은 완전히 군수공업화의 체제로 재편성된다. 생산이 전체적으로 괴멸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생산역량을 군수품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비군수품 생산부문은 노동력, 원료와 자재, 자금 등에서 심한 제한을 받았고, 평화산업 관련 기업은 통폐합되거나 강제로 정비되었다. 이렇게 획득된 생산역량은 군수회사에 집중되었는데, 조선에서 이 군수회사라는 것은 거의 완전히 일본인 자본에 의한 것이었다."(236-7)
제4장 근대교육과 기술의 발전
"조선의 근대적 교육은 갑오개혁(1894) 이후 사범학교, 중학교, 외국어학교, 의학교, 농상공학교, 소학교 등의 관공립학교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05년경의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나타난 애국계몽운동에 의해 근대적 교육은 또 한번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근대교육운동은 민족교육의 맥락에서 이루어졌고, '자주독립', '문명개화', '내수외학', '아는 것이 힘이다' 등의 슬로건 아래 추진되었다. 각지에 학회, 교육회 등이 조직되는 한편, 학교건설·운영운동, 민중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 이에 따라 병탄 직전인 1910년 3월에는 2,146개소의 보통학교에 10만 명을 상회하는 조선인 학생들이 제적하게 된다. 이 숫자는 해방 당시의 조선인 학생수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숫자이지만, 5년 남짓한 사이에 근대교육기관의 수가 이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는 것은 조선인이 주체적으로 근대교육을 확대해나갈 태세가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241-2)
"그러나 일제 말기의 민족별 학력구조를 살펴보면,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현저한 격차가 존재한다. 1944년 5월의 인구조사 결과보고를 보면, 일본인의 73%는 소학교 초등과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다. 불취학자는 27% 정도 되지만, 불취학자 16만 명 중에서 14만 명은 11세 이하이기 때문에 실제 불취학자의 비율은 2.9%에 불과하다. 여기에 소학교 초등과 중퇴자 1.3%를 더해도 4.2%에 불과하다." "반면 조선인의 경우에는 학력 수준이 매우 낮다. 불취학률이 86%에 달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11세 이하를 제외하더라도 불취학률은 54%에 이른다. 한편 일본인의 경우와는 달리 소학교 초등과 졸업 이후의 비율이 현저히 낮아지기 때문에 상급학교로의 진학은 거의 중단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일본인은 전체 조선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6%에 불과했지만, 소학교 고등과 졸업 이상의 학력 소지자수는 조선인보다 많았다. 중학교, 전문학교 및 대학교 졸업자수는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다."(250-1)
"1930년대 후반 조선인 기능자 양성은 급박한 전시체제로 어쩔 수 없이 종래의 방침에서 일시적으로 후퇴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질적으로 그렇게 높은 수준에 있지 않았다. 1946년 11월, 남한에는 약 9천 명의 숙련노무자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학력은, 소학졸이 거의 7할에 육박하고 중학졸 이상은 3할 남짓하기 때문에, 결코 높다고 하기 어렵다. 한편 이 숙련노무자수를 1943년의 조선인 기능자수 40만 명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격차가 있다. 1943년의 경우는 남북한을 합한 숫자인 반면 1946년은 남한만의 숫자이고, 해방직후의 산업생산이 크게 위축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양자간의 이 엄청난 격차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결국 1943년의 기능자 속에는 1946년의 숙련노동자 범주에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낮은 기능수준의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즉 일제 말기 조선인 노동자의 질적 성장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한계를 갖는 성장이었다."(263-4)
제5장 불평등과 차별
"조선의 1인당 미곡소비량이 감소경향을 가지면서 또 상당히 불안정하게 변해간 반면에 일본의 1인당 미곡소비량은 적어도 1940년까지는 1.1석을 오르내리는 상당히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조선의 1인당 미곡소비량의 불안정과 일본의 1인당 미곡소비량의 안정이 무역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키무라 미츠히코는 미곡, 보리 및 대두의 소비에서 얻어지는 조선의 1인당 일일 섭취 칼로리를 계산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칼로리 섭취량은 1918년이 정점이고 그 뒤로 계속 감소하여 1936년에 최저점에 도달한다. 그 뒤 다시 약간 증가하지만, 1918년의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키무라의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시대에 1인당 곡물소비량은 결코 증가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일제시대는 아직 엥겔계수가 매우 높은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1인당 곡물소비량의 동향은 조선인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거나 혹은 1인당 소득이 증가했다는 주장을 하기 어렵게 해준다."(275-7)
"현재의 한국과 같이 독립된 경우에 있어서는 국내총생산이든 국민총생산(GDP)이든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일제시대와 같은 식민지경제의 경우에는 국내총생산에 대한 추계로부터는 조선인의 경제상태에 대한 신뢰할만한 정보를 얻기 어렵다. 예컨대 차명수의 추계에서처럼 1912~37년간의 국내총생산이 연평균 4.1%로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조선인들의 소득, 소비, 투자 등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끄집어낼 수 없다. 기껏해야 1인당 소비라든가 1인당 투자와 같은 평균적인 개념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민족별로 소득에 현저한 격차가 존재한다면, 이런 평균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키무라의 계산과 같이 만약 일본인들의 평균 소득이 조선인의 10배라고 가정한다면, 1940년의 경우 조선에 거주하던 70만 명의 일본인들의 소비능력은 조선인 700만 명의 소비능력과 비슷할 것이다. 결국 평균적 개념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다."(279-80)
"일제시대의 조선인 노동자 중 일부 숙련노동자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불숙련노동자의 임금수준은 생존수준 임금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임금수준이 일제 말기까지 변함 없이 지속되었다. 전체 노동자수의 15% 정도 되는 숙련노동자만 생존수준 이상의 임금을 받았던 것으로 된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도시하층민, 노동자 등의 생활수준을 검토해보았을 때 그들 대중의 경제적 처지가 생존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제시대에 조선경제가 고도성장했고 또 공업화를 통해 공업제품의 조선 내 소비가 급증했다는 거시적 제지표와 합치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에 1인당 소비에 개선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만약 그런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조선인 경제에서는 아직 근대적 경제성장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근대적 경제성장이란 인구증가가 계속되는 조건 하에서 1인당 생산량이 지속적 성장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291-3)
"학력에 의한 차별은 오늘날의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광범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당시의 일본에서도 널리 통용되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에만 독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의 이 학력에 의한 차별의 본질은 학력주의로 위장된 민족차별이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 내의 인구 중에서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었지만,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조선 내에서는 초대 총독 이래 조선인에게 고등교육을 시키지 않으려는 방침이 관철됨으로써 고등교육기관의 확충이 지지부진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과 일본인이 공학하는 학교의 경우에는 민족별 쿼터제를 도입하여 조선인의 입학기회를 원천적으로 제한했다." "따라서 굳이 민족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조선 내의 여러 직장에서 학력을 기준으로 직원이나 사원을 모집하게 되면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309)
제6장 연속과 단절─개발의 유산
"해방 당시 조선에는 일본의 해외자산 총액 218.8억 달러의 24%에 해당하는 52.5억 달러가 소재하고 있었고, 그중 남한에는 총액의 10.5%에 해당하는 22.8억 달러가 소재하고 있었다. 북위 38도선 이남의 남한지역에 남겨졌던 일본인 자산은 만주나 '기타 중국(북, 중, 남 중국)'은 물론이고 북한지역보다 훨씬 적은 것이었다." "일본인 기업자산의 북한지역 편중은 공업자산에서 한층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공업을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으로 양분하여 비교해보았을 때, 경공업부문에서는 남한지역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중화학공업부문에서는 북한지역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해방과 그것에 수반된 남북분단을 전제로 한다면, 해방 후의 한국경제를 일제시대와 연속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단절적인 측면이 더 강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이유의 하나를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해방 후 한국경제가 다시 가난한 농업국으로 바뀐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318-21)
"남한지역에 남겨진 물적 유산도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해방 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첫째, 해방 후 남한은 식민지적 분업구조의 붕괴에 따라 생산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그 결과 해방 직후에는 약간 남아 있던 비축 원자재가 소진되어가면서 원료부족으로 휴업상태에 빠지거나, 심각한 조업단축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둘째, 전시체제 기간 동안 생산시설은 각종 통제에 의해 군수산업과 관련 있는 산업부문이 여러 가지 정책적 보호와 지원에 의해 비대해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 물적 유산은 군수산업부문에서 평화산업부문으로의 구조전환을 통해 비로소 남한 경제의 부흥이나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셋째, 이들 물적 유산 중에는 일제 말기에 부품확보가 어려워 조악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거나 이미 노후화되어 해방 시점에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것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결합되어 해방 직후에는 많은 생산시설이 그냥 녹슬어가게 되었다."(322-5)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해방 직후 남한에 남겨졌던 물적 유산은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다시 그 50.5%가 파괴되었다." "일본인 물적유산의 한국전쟁 이후의 잔존가치는 조선전체 일본인 부동산자산의 4.9%, 조선전체 일본인 공업부문 부동산자산의 10.6%, 남한에 남겨진 공업부문 부동산자산의 39%에 각각 해당하는 것이었다. 일제시대의 공업화과정에서 형성된 일본인 공업자산과 한국전쟁 이후에 남겨진 일본인 공업자산의 크기는 이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는 한국전쟁 이후 본격화되어, 1960년까지 약 30억 달러가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1960년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일제시대의 물적 유산은 미국의 대한 원조액의 약 1/7 정도에 불과한 미미한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요컨대 물적 유산이라는 측면에서만 한정하여 평가한다면, 해방 후 남한지역에 남겨진 일본인 공업자산이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되는 한국의 공업화에서 한 역할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다."(327-9, 334)
종 장 개발 없는 개발
"이 책은 실증이 가능한 것만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각종 제도적 개혁 같은 것은 논의하지 않았다. 물론 일제시대에 도입된 각종 근대적 제도들이 해방 후 한국사회의 형성에 적지 않게 기여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의 많은 부정적 측면을 수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평가하기 어렵다. 수량화하여 다루기 어려운 것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남북분단과 민족갈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일제시대에 활약했던 많은 조선인 기업가들은 정부와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해방 후의 잣대로 평가하면 친일파 혹은 예속자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철도가 깔리고 도로가 뚫리고, 전화와 전기가 들어오고, 많은 공장과 저수지가 생겼으며 또 학교가 들어서고 도시가 발전한 것만 보고 일제시대를 문명화의 시대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제시대는 더 없는 야만의 시대였던 것이다."(3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