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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님의 서재
  • 새롭게 쓴 한국 독립운동사 강의
  •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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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20
  • : 523

총론: 자유와 독립 그리고 평화


"독립운동의 1세대가 전통 학문을 익혀 구시대 안목에서 망국의 변을 극복하려고 했다면, 2세대는 어려서 전통 학문을 익혔으나 청년 시절 격변기를 맞아 신문명을 수용하면서 구시대와 신시대 간의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1세대의 독립운동이 전통적 의식과 방법에 의한 것이었다면, 2세대는 근대적 독립운동의 포문을 열어간 주체들이었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신민회,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군, 국외 한인사회 등의 지도자들이 대부분 2세대였다. 3세대는 어려서부터 신학문과 신사상을 접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독립운동에 접목해 그 폭과 깊이를 더했다. 3세대는 3·1운동에서 만세운동의 전위를 담당했으며, 1920년대 6·10만세운동·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이었다. 이들은 1920년대 이후 2세대와 함께 독립운동의 근간을 이루었다. 4세대는 1940년대 전시체제를 강요받던 상황에서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항일투쟁을 벌였던 학생들을 비롯해, 광복군 등 1940년대 국외 독립군에서 활동한 젊은이들이었다."(15)


"그동안 독립운동에 대한 시각은 '일제 침략에 맞서 나라를 되찾는 것'에 초점을 맞춰 투쟁사로서의 관점이 강조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독립전쟁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긴 것만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퇴치하는 평화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류의 자유를 파괴한 일제의 퇴치를 위해 독립운동이 무엇을 했는가라는 본질적 문제에 마주치게 된다." "한용운은 「조선 독립의 서」에서 인류가 추구할 최고의 가치로 '자유와 평화'를 설정하고, 이는 인류의 권리이자 의무라 정의했다." "윤봉길 의사도 자신의 의거를 단지 〈한국 독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가 멸망하는 날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전개한 것〉이라고 표명한 바 있었다. 한국의 독립은 일본과 한국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제국주의의 종말과 함께 달성할 수 있는 일로 인식한 것이다. 즉 한국의 독립운동은 반인류적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인류의 자유와 정의를 수호한 평화운동이었고 인도주의운동이었다."(24-5)


1강 일제강점기 통치의 성격과 특징


"1910년대 일제의 통치 정책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이는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물론 한말에도 토지사유권이 확립되어 토지의 자유로운 매매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사유권을 법제적으로 보장하는 증명제도가 불충분했을 뿐 아니라, 토지에 농민층의 여러 권리가 딸려 있었다. 그런데 이를 모두 무시한 채 토지사유권에서 지주의 권리만을 인정하고, 그 외의 농민의 권리를 모두 배제했다. 이로써 일제는 토지 점유를 용이하게 하는 한편, 러일전쟁 이후 많은 토지를 집적하고 있던 일제 자본의 토지 점유를 합법화했다. 일제는 조선 후기 이래 성장하고 있던 농민들의 관습상의 경작권·개간권·도지권·입회권 등은 철저히 부정하고 오로지 지주의 사유권만을 인정한 것이다. 이에 많은 농민의 토지는 국유지로 강제 편입되거나 지주의 소유지로 바뀌었다. 결국 토지조사사업은 식민지 지주제의 발전과 농민층의 분화·몰락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34-5)


"1920년대 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은 '산미증식계획'으로 대표된다. 이는 1918년 8월 일본 내에서 일어난 '쌀 소동'을 잠재워 식량과 쌀값 문제를 안정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일제가 한국을 자신들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일제는 수리시설 확충을 통한 토지개량사업과 품종개량 및 비료 사용을 통한 농사개량사업을 병행했다. 일제는 많은 자본을 토지개량사업에 투입했지만, 저리 자금의 융통, 수리조합의 설립 등이 대지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농민 대다수가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산미증산계획은 계획 자체의 부진에도 그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했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의 평균 생산량과 반출량을 1930년부터 1932년까지의 평균치와 비교하면, 생산량은 1472만 석에서 1713만 석으로 241만 석이 증가했지만, 반출량은 295만 석에서 725만 석으로 430만 석이나 증가했다. 이는 생산량 증가분보다 더 많이 반출한 것으로, 수탈 성격이 강했다."(40)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한국인의 반대와 저항을 억누르면서 한국을 인적·물적 자원의 병참기지로 만들어 전쟁에 동원하는 국가총동원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그 때문에 지하자원의 개발과 군수공업 건설 등 전 부문에 걸친 생산력 확충과 증산이 강조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는 전시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고 전쟁 비용을 확보하고자 한국인들에게 저축을 강요했다. 이렇게 회수된 자본들은 군수공업을 담당하는 일본 독점자본에 배분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인들의 희생을 강요하고자 일제는 철저히 일본인화를 꾀하는 민족말살정책, 즉 '황민화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이를 위해 대대적인 관제 운동이 실시되었다. 1938년 〈거국일치〉, 〈견인지구〉, 〈진충보국〉, 〈내선일체〉라는 4대 슬로건을 내걸고 시작된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이를 확대·개편하여 1940년대부터 실시된 '국민총력운동'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황민화 정책은 1944년부터 징병제를 실시하기로 하면서 절정에 달했다."(47-9)


# 일제의 식민 통치의 변화

1. 1910년대 : 헌병경찰통치(무단통치), 토지조사사업, '회사령'(1910년, 허가제)

2. 1920년대 : 민족분열통치, 고등경찰통치(문화통치), 산미증식계획, '회사령' 폐지(1920년), 일본 자본가 진출

3. 1930년대 : 민족말살정책, 병참기지화 정책, 국가총동원령


2강 한국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1910년대에 전개된 독립운동의 직접적인 원류는 1905년 이후 국내외에서 추진된 국권회복운동(의병운동·구국계몽운동)이었다." "의병운동은 존왕주의적 충군애국 의리에 토대를 두었고, 전통적인 유교문화와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국권 회복이란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뜻하는 것이었고, 의병운동은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통한 전통적 전제군주제 국가를 재건하려는 '복벽주의'라 할 수 있다. 구국계몽운동은 서구적인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교육과 실업의 진흥을 통한 자강이 국권 회복의 방법이라는 인식하에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리로 국권 실추의 원인을 민족 내부에서 찾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략으로 민족의 내부 역량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에 중점을 두었다. … 구국계몽운동에서 추구한 미래의 국가상은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입헌군주제였다. 다만 당시는 형식적으로는 대한제국과 황제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주권을 부정하는 공화주의 이념이 전면에 등장하지는 못했다."(52-4)


"3·1운동이 1920년대 한국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에 미친 영향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전 민족 제 계층이 참여한 거족적인 3·1운동에 청년·학생층과 농민층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3·1운동에서 민중의 등장은 공화주의 이념 정착을 가능하게 했고 1920년대 이후 '민중'의 존재와 역할이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둘째, 3·1운동은 국제 사조의 변화에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국제 정세에 대한 관심의 증가, 문화통치하에서의 제한된 자유 등은 서구신사상의 폭발적 수용을 가능하게 했다. 급진적 자유주의·무정부주의·사회주의 등이 급속히 유입되면서 신국가 건설 구상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셋째, 3·1운동은 비폭력 만세시위라는 방법을 택했다. 이러한 운동 방법은 군사적 무력에 의한 독립전쟁 이외에 새로운 운동 방법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폭압적인 진압에 의해 폭력투쟁의 방법으로 변화했다는 것은 만세시위 방법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었다."(56)


"1920년대 중반 이후 중국 내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중국의 국공합작, 국내의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영향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이 나타났다. 이는 방법론상 독립운동 조직을 정당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과 궤를 같이했다." "민족유일당운동 과정에서 민족주의운동 진영은 경쟁 관계에 있던 공산당 조직에 필적하며 중국의 국민당과 같은 정당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민족주의 운동 세력은 한국독립당·민족혁명당·한국국민재건파·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통합한국독립당 등 파벌에 따라 이합집산 했지만, 정당을 결성해 활동했다." "민족주의의 우익적 경향을 대표한 한국국민당은 물론이고, 좌익적 경향을 띠었던 민족혁명당도 삼균주의를 기본적 이념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1940년대 초 중국 내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전선체 역할을 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도 '건국강령'에서 삼균주의를 지도 이념으로 채택했다."(61-3)


# 삼균주의 : 조소앙이 체계화한 이론으로, 수직적으로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균등을, 수평적으로는 정치·경제·교육상의 균등을 의미한다. 정치적으로는 의회주의에 토대를 둔 민주공화국 건설을, 사회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정책의 실시를 통해 균등 사회의 건설을 지향했다.


"3·1운동 이후 유입된 무정부주의 사상은 유교적 의려 정신이나 민족주의적 의분과 친연성을 갖고 있었다. 무정부주의가 한국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1923년 의열단 명의로 발표된 「조선혁명선언」이다. 신채호가 작성한 이 선언문은 먼저 자치론·참정권론 등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국내 문화운동가들의 실력양성론의 타협화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그뿐만 아니라 국외 독립운동 진영의 외교독립론과 준비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일제를 타도하기 위한 민족혁명은 '민중의 폭력적 수단'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만이 방법이라 역설했다. 「조선혁명선언」에는 독립운동이 단순한 항일운동이 아니라 사회구조도 변혁하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고 명확히 규정했다. 타도 대상으로 일제의 식민 통치 외에 특권 계급, 경제적 약탈 제도, 사회적 불평등, 노예적 문화사상 등을 거론하면 독립운동이 곧 신사회 건설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64-5)


"1925년 조선노동당이 결성되면서 조직화한 사회주의운동 진영은 정치적 독립과 사회 해방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민족해방'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했다." "1930년대 전반에는 노농 소비에트 건설론이 제기되었으며, 토지혁명 과정에서 빈농 우위 원칙이 견지되면서 노동계급의 주도권이 극단적으로 강조되었다." "그러나 일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좌편향적 노선에 반대하면서 여전히 민족협동전선론적 입장을 견지하던 집단도 있었다. 여운형·배성룡 등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좌편향적 노선을 따르지 않고 민족적 현실에 적합한 운동 노선을 정립해 독자 노선을 걸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이었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 전후로 국외 사회주의운동계는 사회주의를 일부 수용하면서 발전적으로 변모했던 민족주의 세력의 국가건설론에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이에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 서로 연합하는 현상이 나타났다."(67-70)


3강 한국 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성


"1910년대는 비밀결사 투쟁의 시기였다. 잔여 의병 활동과는 별도로 망국 후 유림과 의병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의병 조직을 재정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3·1운동기에는 만세시위를 방략으로 하는 비밀결사가 등장했다. 비밀결사는 시위를 조직화·대중화하고 격렬한 항쟁을 주도하는 데 앞장섰다." "연해주에서는 이상설 등이 중심이 되어 한흥동 건설에 나섰다. 이는 독립전쟁에 대비해 독립군을 양성하여 독립전쟁론을 실현시키기 위한 독립군 기지 개척운동이었다. 특히 한인 이주 50주년을 기념해 1914년 10월 조직한 대한광복군정부는 무장투쟁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 "1917년 12월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 14인 명의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은 주권불멸설과 순종의 주권포기설을 근거로 국민주권설을 주장하며 임시정부 수립의 모체가 되었다. 이미 1910년대 해외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정부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된 사실은 임시정부의 탄생과 향후 1920년대 민주공화 정체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다."(73-5)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여럿의 임시정부가 동시다발적으로 조직된 것은 3·1운동으로 고조된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국내의 한성정부, 상하이의 임시정부가 통합을 논의해 마침내 상하이로 통합 정부를 수립한 것도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열망의 결과였다." "1920년대 독립운동계는 좌우합작과 민족전선 통합에 노력하고 결실을 이루어냈다.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 수립은 부분적이나마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한 것으로, 향후 민족유일당 결성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통합 임시정부 체제는 1921년 1월 이동휘가 떠나고, 1923년 1월 시작된 국민대표회의가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으로 결렬되면 짧은 기간으로 끝나고 말았다. 향후 독립운동의 향방을 결정짓는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면서 임시정부는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1930년 1월, 상하이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을 망라해 창당된 한국독립당이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와 옹호를 선언한 것은 소중한 성과였다."(77-8)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침공해 꼭두각시로 만주국을 수립하고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했다. 친일 만주국 수립은 우리의 독립운동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결국 만주 독립군은 망국 후 20여 년간 항일 무장투쟁의 근거지가 된 곳을 떠나 중국 관내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던 김구는 1931년 12월 임시정부의 특무 조직으로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를 주도했다. 그러나 윤봉길 의거로 말미암아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국내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황민화와 민족말살정책에 대응해 강렬한 국학민족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1930년대 전반기에 문화와 학계가 정비·발전되고, 1934년 조선학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은 주목된다. 국학민족주의는 국어학·국문학·역사학이 핵심을 이루며, 문화운동 형태로 나타났다. 이 시기의 문화운동은 일제의 민족 말살에 대항해 민족 보전을 추구한 독립운동이었다."(80-2)


"1940년대 전반기 국내외의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중국 관내의 임시정부와 화북조선독립동맹, 국내의 조선건국동맹 등 세 그룹이 지역 기반과 이념을 달리하며 독립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정착하며 비로소 정부 조직으로서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었다.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의 연합은 독립운동계에 좌우 연합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다." "1942년 화베이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조직되었다. 이 동맹은 화북조선청년연합이 조선의용대의 화베이 진출을 계기로 발전적으로 개편한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투쟁 단체이다. 조선의용군은 이 동맹의 당군으로서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아 항전했으며, 후에 중국공산혁명전쟁과 6·25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조선건국동맹은 1944년 여운형이 국내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조국 광복에 대비하기 위해 조직해 이끌고 있던 비밀결사였다. 조선건국동맹은 8·15와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했다."(83-4)


4강 한말 국권회복운동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의병운동은 지속되지 못했다. 일제의 대토벌작전에도 살아남은 의병 부대는 국외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거나 국내에서 소규모 게릴라 전투를 이어갔다. 이들을 전환기 의병이라 한다. 1910년 전후 함경도·강원도 등지의 의병진은 두만강·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북간도와 서간도, 러시아의 연해주 등지로 이동했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유인석·홍범도·이진룡 등이다. 이들은 그곳에서 활동 중인 이범윤·안중근 등과 연합했다."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단체로는, 1907년 4월경 안창호 등이 주도해 평양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대표적이다." "신민회는 점차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훗날을 기약하자는 온건파와 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만주에 광복군을 조직해 일본과 결전하자는 급진파로 갈라졌다. 안창호는 미국으로 건너가 1913년 5월 흥사단을 조직했고, 이동휘 등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마련해 독립전쟁을 일으키고자 했다."(95, 99-100)


5강 1910년대 국내 비밀결사운동


"광복회는 1915년 7월(음) 풍기광복단·독립의군부·조선국권회복단 등 계몽운동과 의병전쟁 계열의 단체와 인물들이 연합해 조직되었다." "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 등 4대 강령을 천명하고 군자금 모집, 독립군 양성, 무기 구입, 활동 거점 설치,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펼쳐나갔다. 특히 광복회는 군자금 모집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결성 초기에는 일제가 거둬들인 세금을 탈취하기 위해 우편 마차를 공격하기도 했고, 일본인 소유의 중석광을 공격해 자금을 확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구 부호 서우순을 상대로 한 '대구권총사건'이 실패하는 등 자금 모금은 원활하지 못했다. 광복회는 친일 세력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의협투쟁도 전개했다. 경북 칠곡 부호 장승원과 충청도의 친일 면장 박용화, 전라도의 서도현을 처단했다. 광복회는 1918년 1월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체포를 면한 회원들을 중심으로 1920년대 주비단과 광복단 결사대를 조직해 활동을 이어나가기도 했다."(119-20)


6강 3·1운동


"1883년 공식적으로 국기의 지위를 획득한 태극기는 각종 행사에 등장하면서 조선·대한제국의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910년 국망으로 국기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태극기가 1919년 3·1운동을 통해 애국·애족의 상징으로 다시 등장했다." "3·1운동을 거치면서 태극기는 국권 상실의 현실을 각인하고 독립의 사명을 일깨우는 상징물이 되었다. 이후 3·1운동 기념식 등 각종 기념식에 태극기가 등장했고 임시정부의 모든 행사는 태극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되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과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도 태극기가 등장했다." "「애국가」는 조선·대한제국에서 국가(國歌)로서 공식적인 지위를 획득한 바 없었다. 애국가는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져 갈 무렵, 애국창가운동의 일환으로 민간에서 널리 불리던 노래로, 「올드 랭 사인」의 선율을 그대로 사용했다. 3·1운동의 확산과 함깨 「애국가」도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민의례에서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기 시작했다."(144-5)


7강 1920년대 국내 독립운동


"1910년대 일제의 농업정책은 토지조사사업, 농사단체 조직, 품종 교체 등 주로 수탈에 적합한 식민지 농업 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정책을 바탕으로 1920년대는 수탈 농정이 한층 강화된 시기였다. 일제는 육지면장려계획, 산미증식계획, 산잠백만석증수계획을 통해 이른바 삼백(三白)의 증산에 본격 착수했다. 산미증식계획이 일본 내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라면, 면화·양잠 정책은 일제의 외화 획득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1920년대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한층 강력한 농업 지배기구가 필요했고, 그 결과 조직된 것이 '농회'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1920년 들어 노동운동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고, 1924년 4월에는 조선노농총동맹이 탄생했다. 이 단체는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1927년 9월 조선노동총동맹은 조선농민총동맹과 조선노동총동맹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는 노동자와 농민의 의식 성장에 바탕을 둔 것이다."(154-5, 159)


"사회주의사상의 확산은 계몽적 수준에 머물던 청년운동에도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사회주의사상은 식민 통치의 부당성과 모순을 사회과학적인 기준에서 깊게 성찰하도록 함으로써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혁신적 주장을 하도록 이끌었다." "1924년 4월 창립된 조선청년총동맹(청총)은 민족문제에 대해 과거와 같은 타협적 민족운동을 배척하고 '혁명적 운동'과 협동한다는 방침을 제시해, 민족운동 세력과 손잡고 대중선전운동을 전개하고자 노력했다." "1923년 2월 9일 조직된 조선학생회 역시 교양적이고 계몽적인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러한 문화운동 노선 역시 사회주의사상이 수용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학생들이 주도한 동맹휴학 과정에서 학생들은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를 요구하며, 그것을 대신할 민족교육 이념으로 '조선인 본위 교육'을 제창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민족의 해방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학생들의 단결투쟁은 독립 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162-3, 166, 169)


8강 1930~1940년대 국내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


"일제의 탄압에 의해 사실상 해체된 조선공산당은 1928년 코민테른에서 제시한 '12월 테제' 지침에 따라 당을 재건해야만 했다. '12월 테제'는 종래 공산당이 부르주아 및 지식계급을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심각한 파벌 투쟁과 연속적인 대량 검거를 초래했다고 비판하면서 종래의 분파 투쟁을 근절하고 노동자·농민(혁명적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을 기초로 당을 재조직하라는 코민테른의 지령이었다." "조선공산당 재건그룹들은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를 충실히 이행하고자 하면서도 반일적인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이나 민족주의 좌파 세력과 연대하지 못했다. 즉 재건그룹들은 계급 대 계급 전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민족개량주의와 민족주의, 친일 요소와 반일 요소의 옥석을 가리지 않고 '비혁명적'이라 판단되는 세력은 모두 민족개량주의로 매도하고 '적'으로 선포했다. 박헌영이나 이재유그룹 역시 난징의 조선민족혁명당에 대해 노농 대중에 기초를 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했다."(184-5, 188)


"일제 말기 파쇼적 총동원체제가 조선인 전체에 대한 인적·물적 수탈 강화로 치닫자, 반파쇼 저항운동이 소극적 거부에서 적극적 반대 투쟁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학생이나 사회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 조직이 가장 큰 탄압을 받았지만, 학병이나 징병·징용 등 강제 동원에 대항하는 비밀결사들이 계속 생겨났다. 저항운동의 주체나 형태도 다양해져 노동자·농민의 '국민징용령' 반대와 농민동맹운동, 신사참배 거부와 조선어학회사건 등 종교·문화 운동을 비롯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1944년 8월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은 일제 말기 국내의 최대 항일 단체였다. 일본에서 미군기의 도쿄 공습을 목격한 여운형은 미국·영국의 전쟁 준비로 일제가 급격히 패전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1년간 조선민족해방연맹을 통한 준비 작업 끝에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다. 동맹은 민족주의자부터 공산주의자에 이르는 다양한 구성원을 규합해 중앙조직을 구성하고, 각 도별 지방조직을 꾸려나갔다."(193, 196)


9강 한국 독립운동과 민족통일전선운동


"1923년 1월, 민족통일전선을 목표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상해임시정부의 지역적·인적 한계를 극복하고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을 출범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민족주의진영은 서북파와 기호파 등 지역에 따라 나뉘었고, 북경파는 반임정 자세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진영은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합에 호의적인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반임정 입장을 견지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분열했다. 창립 당시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 임시정부 고수파의 고집 역시 회의의 성공을 막는 요인 중 하나였다. 결국 1923년 6월에 종료된 국민대표회의는 목표로 했던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과 최고 기관 수립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회의를 거치면서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이 모색되었다.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데 '정부'의 형식에 대한 고민이 제기되고, 새로운 대안이 모색되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으로 '당'을 수립하자는 대안으로 의견이 모아졌다."(204)


"1920년대 중반 중국 관내와 만주 지역에서 여러 갈래로 나뉜 독립운동을 통일하려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유일당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운동은 독립운동 추진 주체로 정당을 상정했다. '정당으로써 국가를 통치한다'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이 목표였다. 좌우파가 연합해 정부가 아니라 정당을 조직하되, 민족을 대표하는 하나의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928년에 접어들면서 민족유일당운동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통일전선 결성 원칙에서 좌우가 의견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우파가 중앙집권적 독립당 결성을 추진했다면, 좌파는 노농 대중의 입장에 기초한 전투적 협동전선 혹은 혁명적 통일전선의 결성을 주창했다." "민족유일당 결성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임시정부를 운영할 조직으로 정당이 결성되었다는 성과를 남겼다. 종래 임시정부가 정부의 형태만 있을 뿐 참여 정당이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향후 운영이 체계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었다."(207-10)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다. 결성에 참여한 단체는 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 등이었다. 의열단이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한 점을 고려하면, 새롭게 창당한 민족혁명당은 좌우합작의 민족통일전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고수파를 포용하지 못했고, 좌우의 사상적 갈등이 표출될 가능성이 잔존해 있었다." "결성 직후 분열된 민족혁명당은 1941년 12월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국제사회가 임시정부를 승인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다른 요인으로는 이념의 공유가 있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은 개인이나 특정 계급에 의한 독재를 배격하는 민주공화국 건설, 정치적·경제적·교육적으로 균등한 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균등사회 실천을 목표로 삼았으므로, 민족혁명당의 지향과 공유하는 바가 많았다. 1940년대 진행된 임시정부 중심의 좌우합작은 이런 공유에 기반을 두고 진행된 것이었다."(210-4)


10강 국내외 여성 독립운동


# 여성 독립운동가들

1. 윤희순 : 초기 을미의병 당시부터 후기 정미의병 때까지 직간접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

2. 안경신 : 투탄(投彈)·자살(刺殺)·사살(射殺) 등의 무력투쟁이 효과적이라 판단하고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대한광복군총영에 가담해 활동함

3. 남자현 : 1920년대 중반 사이토 총독 암살을 계획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1933년 주만 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죽이려다 체포되어 순국함

4. 정정화 :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해 1946년 귀국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의 삶을 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하는 데 헌신함

5. 박차정 :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세운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교양 교육을 담당했고,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역임함

6. 오광심 :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 소속으로 한중 연합 항일전에 참가했고,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김정숙·지복영·조순옥·신순호·민영주 등과 함께 광복군으로 복무함


11강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만주 지역은 한국 독립운동의 인재 공급처이자 독립전쟁의 최전선이었다. 20세기 전후 의병 세력들이 역량을 펼치던 곳이며, 민족 교육기관을 설치해 이주 한인들에게 근대 교육과 민족 교육을 동시에 실시하던 지역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북간도와 서간도를 중심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각종 무관학교 성격의 민족 교육기관을 설치해 인재 배양의 요람으로 각광받았다."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과 다음 해 성립된 만주국은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지형을 바꾸어놓았다.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은 만주국의 경찰과 군대에 맞서 쌍성보·경박호·대전자령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1934년 이후에는 만주 지역에서의 활동을 접고 중국 관내로 이동했다. 이로 인해 만주 지역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공백이 생기자 사회주의 세력은 표면적으로 유격전을 내세워 저항했다.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까지 산악을 중심으로 이주 한인과의 연결을 도모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265)


12강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1918년 8월 말 한인사회당 적위군은 칼미코프의 백군에 맞서 하바롭스크를 방어하는 전투에 참가했지만, 소비에트 적군은 처참히 패했고, 한인사회당 적위군도 거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해 9월 4일 하바롭스크는 백군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그러나 1922년 10월 25일 적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면서 5년간에 걸친 내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한인들이 공로를 세웠고, 또 그만큼 많은 한인들이 희생되었다. 내전에서 보여준 한인들의 공로와 희생은 이후 연해주에서 한인들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37년 하반기부터 연해주 전 지역의 모든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키라는 명령이 모스크바로부터 내려왔다. 원동(극동) 지역에 일본 정보원이 침투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1937년 9월 초순부터 두 달 여 사이에 약 17만 2000명의 한인들이 연해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떠났다."(282-7)


13강 중국 관내 지역의 독립운동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패망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독립운동 세력들은 역량을 통일하고자 다시 임시정부로 결집했다. 먼저 1940년 5월 광복진선의 3당은 해체를 선언하고 한국독립당을 출범시켜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삼았다. 이어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그 뒤 아나키스트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1941년 1월 광복군에 편입되었고, 조선의용대도 1942년 7월 광복군의 제1지대로 편입했다. 재편된 한국광복군의 사령은 지청천, 새로 증설된 부사령직에는 김원봉이 선임되었다. 정치 세력도 임시정부로 집결했다. 1942년 10월에 열린 제34차 의정원회의에서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의 인사들이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임시의정원은 좌우연합정부 구성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여 1044년 4월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공포하고 부주석제를 신설했다. 주석에는 한국독립당의 김구, 부주석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이 선출되었다."(308-9)


"한편, 임시정부에 합류한 김원봉과 결별한 최창익 등 공산주의자 세력은 1938년경 중국공산당의 항일 근거지인 옌안으로 이동했다. 1941년 국민당 지역에서 항전하던 조선의용대원들은 만주 지역으로 이동하던 중 화베이 지역에 머물렀는데, 이곳에서는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대장정에 참가한 무정 등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혁명을 조선해방이 관건으로 인식했다. 1941년 1월 팔로군 전방 사령부의 소재지 산시성 진둥난 타이항산에서 항일 단체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해 활동했는데, 그 지도자가 무정이었다.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1942년 7월 조선의용대원 및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해 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하고, 조선의용대 출신의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삼았다. 그 뒤 김두봉은 조선의용대를 중심으로 조선의용군을 결성하고, 무정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조선의용군이 팔로군과 함께 항일전을 펼치면서 화베이 지역은 한인 공산주의자 세력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309-10)


14강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정부 27년간의 역사는 침체와 고난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이를 극복해 간 굴절의 역사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긴 시간동안 한민족을 대표하며 반일운동을 전개했다. 세계사적으로 보아 '임시정부'라는 정부 형태는 1917년 '2월혁명' 뒤의 러시아나 폴란드의 임시정부처럼 단기간에 정식 정부를 수립하고 임무를 마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임시정부는 27년이라는 유례없이 긴 시간 동안 존속했으니 그동안에 영고성쇠가 있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임시정부에 대해서 '발생 가치'와 '역할 가치'로 구분해 평가해야 한다는 선학의 주장은 건국절 시비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날 경철할 만한 선견지명으로 여겨진다. 임시정부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정부로 수립된 그 자체는 '발생 가치' 측면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며, '임시정부가 명실상부하게 독립운동의 구심점 구실을 다했는가'라는 '역할 가치'는 시기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313-4)


"1919년 4월 임시정부는 3·1운동에서 나타난 독립에 대한 전 민족의 열망과 의지가 결집해 수립되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라는 점에서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임시정부는 모두 여섯 차례의 헌법을 통해 1919년 대통령중심제, 1925년 내각책임제, 1927년 관리정부 형태, 1940년과 1944년의 절충식정부 형태 등 권력구조의 형식이 변천했다. 이렇듯 여러 정부 형태를 경험한 것은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자산이 될 수 있었다." "다만 해방이 광복으로 이어지지 못해 임시정부가 새 조국 건설과 직접 연결되지 못했고,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환국할 수 없어 외지적 종결의 역사를 안아야 했다. 그럼에도 1948년에 수립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는 임시정부의 역사적 위치를 천명함으로써 역사적 명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참조해 제정됨으로써 임시정부가 지향하던 이념을 수용했다."(330-1)


15강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에 한인들의 민족운동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으로 러시아와 중국 정부는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을 해산하고 활동을 금지했다. 대한인국민회(이하 국민회) 산하 수청지방총회는 1912년, 만주지방총회는 1914년 이후 활동이 봉쇄되었다. 시베리아지방총회는 1917년까지 활동했다." "하와이지방총회는 1915년과 1918년 두 차례에 걸친 파쟁을 겪으며 하와이 한인 사회가 분열되었다. 당시 하와이지방총회는 박용만을 중심으로 활발할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나, 1915년 이후 이승만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에 박용만 계열은 갈리히연합회를 조직하면서 하와이 한인 사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와 갈리히연합회(후일 대조선독립단으로 개편)로 양분되었다. 그 결과 미주 한인 사회는 안창호·이승만·박용만 계열로 삼분되었고, 10여 년간 해외 한인의 최고 기관으로 기능했던 국민회는 이후 북미·멕시코·쿠바 한인 사회로 범위가 축소되었다."(339-40)


"재미 한인 사회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약 100만 달러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다. 이로 인해 미주 한인 사회는 임시정부와 한국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이나 보고(寶庫)로 평가받고 있다. 임시정부 수립 직후 국민회는 특파원 파견과 지방회 조직을 이용해 '애국금'이라 불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이승만은 구미위원부 설치 직후부터 재미 한인 사회의 재정 장악을 시도했다. '애국금' 수합 업무는 국민회에서 주관했는데, 구미위원부가 독자적으로 '공채표'를 발행해 자금을 모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로 국민회와 구미위원부 간에 마찰이 일자, 임시정부는 재정 증대를 기대하여 1920년 3월 국민회의 애국금 수합 업무를 폐지하고 구미위원부에 자금 모집을 위임했다. 이 결정으로 국민회는 외교에 이어 재정권마저 구미위원부에 빼앗겨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구미위원부는 모집 재정의 18% 정도만 임시정부로 송금하고 나머지는 구미위원부 유지에 사용했다."(343-4)


16강 일본·동남아 지역의 독립운동


# 일본 내의 의열단 활동

1. 양근환 : 1921년 참정권 운동을 하기 위해 일본에 온 친일파 민원식을 처단했다.

2. 박열 : 1923년 일본 황태자 결혼식 때 투탄 의거를 준비하다가 검거되었다. 일제가 관동대지진의 와중에 그 책임을 재일 한국인에게 돌리기 위해 이를 대역(大逆)사건으로 꾸며냈다.

3. 김지섭 : 관동대지진 당시 한인 학살에 항의하는 뜻으로 일본 궁성 입구인 니주바시에 투탄 의거했으나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4. 이봉창 : 1932년 1월 8일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왕 마차 일행을 향해 투탄했으나, 위력이 적어 실패하고 말았다.


# 동남아시아 내의 독립 활동

1. 홍콩 : 박은식이 독립운동의 소식을 알릴 《향강잡지》를 발행함(1913년)

2. 싱가포르 : 홍명희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말레이시아 고무농장을 운영함(1914년)

3. 타이완 : 신채호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된 위폐를 교환하다가 체포됨(1928년)

4. 필리핀 : 여운형이 '반제국주의 연대'를 연설한 뒤 일본 영사의 항의로 억류됨(1929년), 안창호가 한인을 대규모로 이주시켜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하려고 시도함(1929년)

5. 인도네시아 : '고려독립청년당' 3명이 일본군 12명을 사살한 뒤 자결함(1944년)


17강 보론: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식민지근대화론에서 추계한 조선의 실질농업생산액은 1911~1918년간에는 34.6%나 증가한 반면, 1918~1926년간에는 2.0%로 거의 변화가 없다. 1911~1918년간은 토지조사사업 기간으로 일제가 조선의 토지 자원에 대한 조사에 주력하던 기간인 반면, 1918~1926년간은 1920년부터 시작되는 산미증식계획 기간이 포함된다. 토지조사사업 기간의 실질농업생산액 증가율이 본격적인 농업개발 기간을 포함하는 1918~1926년간의 증가율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농업생산에 투입되는 경지면적은 간척과 개간에 의해 증가할 수 있는데, 두 통계 모두 1911~1918년간보다는 1918~1926년간에 훨씬 더 많이 증가했다. 관개면적의 경우에도 그렇다. 동물질·식물질·광물질 등의 각종 비료 소비량도 1918~1926년 사이에 월등히 많이 투입되었다. 조선총독부의 농업 지원 자금 역시 다르지 않다." "1918~1926년에 비해 1911~1918년의 증가율이 더 높았던 유일한 요인은 우량품종 보급률이다."(379-80)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의 농업통계에 대해 의문을 갖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하나는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었는데, 그 기간에 경지면적에 대한 정확한 측량이 이루어졌다. 토지조사사업 이전의 경지면적은 실제보다 상당히 과소평가된 것이었는데, 이것이 정확한 실측에 의해 바로잡히면서 조선총독부의 경지면적 통계는 1918년까지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기간 동안에는 간척이나 개간에 의한 경지면적 증가는 미미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의 경지면적 증가는 모두 부정확한 측량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생긴 현상이고, 실제 경지면적이 그렇게 많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다. 이렇게 경지면적에 대한 통계가 불완전했는데, 재배된 작물의 생산량 통계가 정확할 수 있겠는가?" "식민지근대화론에서 실질농업생산이 급증했다는 기간은 조선총독부가 그 부정확성을 인정하고 스스로 수정했던 기간(~1917년까지의 통계치)과 정확히 일치한다."(383)


"식민지근대화론(주익종의 주장)에서는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의 1인당 GDP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에 1인당 소비도 크게 증가했고, 생활수준도 매우 빠르게 향상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1912~1932년 중에 실질 소비지출의 연간 증가율은 3.28%였고, 1인당 실질소비지출은 같은 기간 중 1.68배로 증가했으며, 그 연간 증가율은 1.94%였다고 한다." "육소영은 1910~2013년간의 식품수급표를 사용해 1일 1인당 칼로리·단백질·지방·무기질·비타민 등의 섭취량을 계산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조선의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1918~1952년간에는 감소 추세였고, 1953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해 1990년대 이후가 되면 거의 포화상태에 이른다." "식민지근대화론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의 소득이 증가하면서 평균 신장(키)도 증가했다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연구를 내놓고 있지만, 영양 섭취량이 감소했다면 신장이 증가했다는 주장은 더는 성립하기 어렵다."(391-2)


"식민지 조선 경제에서는 민족별로 생산수단에 현저한 격차가 존재했고, 이에 따라 소득분배 역시 민족별로 불평등했다. 이 소득분배의 민족별 불평등은 다시 민족별 생산수단의 격차를 확대하고, 다시 민족별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한층 더 악회시키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확대·재생산된다. 이것이 식민지적 경제구조이고, 이것은 식민지 체제가 지속되는 한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공업 발전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대자본에 의한 근대 기업이 비지적(飛地的)으로 설립되면서 일제강점기 조선의 공업은 더욱 이중구조화되었다. 그 성격은 일본과 조선, 그리고 조선 내에서는 남한과 북한, 민족별로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현저한 격차로 나타났다." "이러한 식민지적 경제구조하에서 조선인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점차 배제되어 소작농이나 임금노동자로 전환되어 갔는데, 민족 차별과 학력 차별로 인한 식민지적 고용 구조로 인해 임금노동자 중에서도 최저변을 형성했다."(398)


"일제강점기 조선의 개발과 근대화를 강조하는 주장들은 일반적으로 조선 전체의 변화에 주목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에는 일본으로부터 선진적인 기술과 대량의 자본이 유입되었고, 이에 따라 광공업·농림수산업·금융업과 상업 등 각종 산업이 발달했으며, 철도·도로·항만·통신 등의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확충되었고, 도시가 발달했으며, 인구가 증가했고, 소득이 증가하는 등 변화가 생겼다. 일제강점기의 통계를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에는 문제가 있다. 일제강점기가 갖는 시대적 특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시대이다. 많아야 전체 인구의 3%도 되지 않는 일본인들이 조선 내 생산수단의 주요 부분을 장악했고, 후기로 갈수록 생산수단은 일본인들에게로 더욱더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 시기였다. 일제강점기가 어떤 시대였는지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한다면 바로 이 민족문제를 제대로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된다."(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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