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바이킹의 시대
"바이킹은 크게 덴마크계·노르웨이계·스웨덴계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루스(어원은 '노 젓는 사람들') 혹은 바랑고이(어원은 '선서를 한 동료')라고도 불린 스웨덴계 바이킹들은 발트해를 건너 동쪽과 남쪽으로 팽창해 나가면서 광대한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 그 첫 번째 중요한 현상이 러시아 국가─키예프Kiev(키이우Kyiv)나 노브고로드Novgorod와 같은─의 형성이다." "아마도 슬라브족의 이교 신앙 중심지이자 교역 중심지였던 곳에 바이킹들이 합류해 들어오면서 그들의 충격 아래 정치·군사적 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스타라야라도가, 프스코프, 키예프 등 여러 곳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권력 중심지들이 형성되었다가 후대에 키예프 공 이고리Igor의 주도 아래 통합되고, 비잔티움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수용했다. 이처럼 국왕 체제가 만들어지고, 교회가 통치 철학과 행정 인력을 제공하는 방식의 발전이 이루어진 데에는 동부와 북부 유럽 각지에 인력, 아이디어, 문화 등을 전파한 바이킹의 영향이 컸다."(27-8)
"바이킹의 여행은 비잔티움에서 멈추지 않았다. 일부 모험심 강한 사람들은 볼가강을 타고 불가르(오늘날의 카잔)로 직행했다. 불가르에서 더 나아가면 하자르Khazar라는 유목민의 땅이 나오는데, 이곳의 수도에 해당하는 이틸Itil에서 배를 타고 카스피해를 건널 수 있다. 연구자들은 바이킹이 낙타를 이용하여 바그다드까지 가거나 혹은 비단길을 따라 인도와 중국 방향으로 갔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바이킹은 실로 엄청난 거리를 여행했다. 우리는 통상 바다를 통해 남쪽이나 서쪽으로 멀리 항해해 간 바이킹의 활동에 주목하지만, 남동쪽으로 이렇게 멀리까지 갔으리라고는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바이킹에 대한 묘사를 보면 분명 '야만족' 냄새가 물씬 나지만, 사실 그 시대에는 대부분 지역의 문화 수준이 고만고만하게 야만성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히려 바이킹의 활동 결과 많은 지역에서 국가가 형성되고 기독교를 수용하고 문화적 발전이 가능했으니, 말하자면 바이킹이 문명화의 선두에 섰던 셈이다."(30-1)
"서유럽에서 본격적인 바이킹의 시대가 열린 해를 대개는 793년으로 본다. 이 해에 잉글랜드 북동쪽의 '성스러운 섬' 린디스판에 바이킹 무리가 들이닥쳐 약탈을 자행했다." "885~887년에는 배 700척에 나눠 탄 바이킹 무리가 파리까지 들어와 2년 동안 포위 공격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프랑스 국왕으로서는 바다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외적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역량이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바이킹 집단에게 땅을 주어 신하로 만들고 이들이 다른 바이킹의 침략을 막도록 하자는 계책을 내놓았다." "(그렇게 911년, 생클레르쉬르엡트 조약의 결과로 탄생한) 노르망디는 더 이상 사나운 바이킹 전사의 땅이 아니라 세련된 프랑스 문화에 물든 귀족의 영토가 되었다. 이렇게 변신한 노르망디 귀족들은 조만간 잉글랜드로 쳐들어가 새 왕조(노르만왕조)를 개창하고, 멀리 지중해에 진출하여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지배하며 십자군운동을 주도하는 등 유럽 각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45-9)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국왕 해럴드를 살해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노르만 왕조의 강력하고 안정적인 왕권은 오히려 민중의 자유를 신장하고 의회 제도가 발전하는 기틀이 되었다. 사실 윌리엄과 신흥 지배층의 무력이 강하다 해도 소수의 충성스러운 신하만으로 전국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만 명의 기사로 어떻게 그 많은 국민을 적으로 돌려 강압적으로 통치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지방의 전통적 자유를 인정해 주고 유력자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게 낫다. 초기의 잔혹한 정복과 지배 체제 구축 과정이 일단락되자 자신감을 찾은 국왕은 관대한 통치를 펼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왕은 귀족 중에서 관리를 선임했는데, 귀족들은 그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민중들과 손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귀족과 민중이 결합하여 의회 제도를 통해 한편으로 국왕의 국정 운영에 협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국왕의 자의적 통치를 견제했다."(65)
# 노르망디 공작 기욤은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이 되었으며, '정복왕William the Conqueror(재위 1066~1987)'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2장 십자가와 왕관
"에스파냐의 중세사는 대개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으로 정리하곤 한다. 8세기 초 무슬림이 북아프리카에서 지브롤터해협을 넘어 에스파냐 땅에 들어와서는 단기간에 이베리아반도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북쪽 변두리 산악 지역에서만 작은 기독교 공국들이 간신히 존립을 유지했다. 이후 기독교 세력이 힘을 모아 오랜 기간에 걸쳐 이슬람 세력을 조금씩 밀어내면서 국토를 회복해 갔다. 그 과정에서 무슬림과 싸우는 정치 단위들이 형성되었다. 동쪽의 카탈루냐공국, 피레네산맥 서쪽의 바스크공국(후일 나바라왕국으로 성장했다가 프랑스에 합병된다), 나바라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한 아라곤, 북서쪽의 아스투리아스가 점차 확장하여 레온과 합쳐지며 형성된 카스티야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이들 사이의 이합집산 끝에 최종적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정리되고, 이 두 나라가 합쳐져 오늘날의 에스페나갸 만들어지는 한편, 남서쪽에서 독자적 단위를 이룬 포르투갈이 먼저 별개 국가로 발전했다."(92-3)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예루살렘의 예수 성묘聖廟를 되찾자며 십자군운동을 제창하면서 유럽 전역에 성전聖戰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바깥에서만 싸울 게 아니라 유럽 안에 있는 신앙의 적부터 타파해야 한다는 이념이 불타올라서 이베리아반도는 팔레스타인과 같은 전쟁터로 변모했다. 경건한 신앙이 기독교 에스파냐를 새로이 일깨웠다.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유럽 내 가장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는 12세기부터 대대적으로 전 유럽의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 재정복운동은 사실상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3세기 후반이면 알람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에스파냐 최남단의 그라나다만 빼고 거의 전역이 기독교 영토가 되었다. 잔존한 이슬람 세력을 최종적으로 축출한 때는 1492년이다. 1492년은 재정복 운동이 완수되어 무슬림을 유럽대륙에서 완전히 몰아냈고, 그 여파로 유대인도 축출했으며, 동시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해다."(94-7)
"1077년 1월, 독일 왕이자 장차 황제가 될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Canossa의 성에 찾아왔다. 그는 자신에게 파문 선고를 내린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에게 용서를 빌었고, 결국 교황은 파문을 거두어들였다." "장래 황제가 될 하인리히가 맨발로 눈밭에 서서 용서를 구할 때는 교황에게 패배한 듯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가 교황을 축출할 때는 황제가 최종 승리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교황과 황제 중 누가 더 우위인가 하는 문제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장기간의 소모적인 투쟁 끝에 양측이 타협을 모색한 것이 1122년 보름스 협약이다. 협약은 추기경과 수도원장은 교회에 의해서만 자유롭게 선출된다고 천명했으니 이 점은 황제가 양보한 것이다. 황제는 선거에 출석할 수 있으며 만일 다툼이 있으면 황제가 개입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으니 이는 교황이 양보한 것이다. 하지만 하늘 아래 누가 최고의 권한을 쥐는가 하는 문제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큰 쟁점으로 남는다."(109, 114-5)
"십자군운동에는 고향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잃을 것 없는 사람들이 군사 모험을 통해 한밑천 잡으려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 기존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최근 실증연구 결과는 정반대 사실을 말해준다. 십자군 전사들은 잃을 것이 아주 많은 부자들이었다." "기사 집안 출신이면서 클뤼니 수도원을 거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누구보다도 수도원의 이상과 기사 이데올로기 간의 갈등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었다. 기사들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갈망이 크지만, 현실적으로는 전사라는 지위 때문에 흔히 죄의 길로 들어선다. 이때 우르바누스 2세가 불안과 죄책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 세상을 등지지 않아도 될뿐더러, 칼을 내려놓는 게 아니라 오히려 칼을 휘둘러 하느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성묘를 앗아간 무슬림들을 축출하는 신의 전사milites Dei, 그리스도의 전사milites Christi가 되면 가능하다. 십자군운동은 개념적으로 전투 이전에 순례 행위였다."(131-3)
3장 권력, 사랑, 믿음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왕국들은 1,0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군주의 영적이고 종교적인 성격을 유지해 왔다. 특히 대관식은 군주의 신성성을 확보해 주는 중요한 행사다." "국왕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신령한 존재라는 의식은 멀리 켈트족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켈트족 왕은 용과 괴물이 상징하는 혼돈의 힘과 싸워 이기고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존재다. 켈트 신화에서 왕은 세상의 중심인 신성한 나무에 자리 잡고 우주의 조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며, 치유와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성격을 띠는 유럽의 군주를 '기적을 행하는 왕'이라 부른다. 기독교화가 진척되면서 이런 내용은 새로운 종교에 맞추어 변형되었다. 왕은 이제 신과 동격의 존재는 아니며 그보다는 신과 소통하는 일종의 사제와 같은 성격을 띤다. 이런 의미에서 국왕은 백성이 선출한 게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존재임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대관식에서 왕관을 쓰는 요소보다 신의 축복을 더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171-3)
"생드니 성당의 개축 사업을 주도한 사람은 쉬제르Suger 수도원장이다. 1136년 재건축이 시작되어 1144년 마침내 새로운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국왕 루이 7세와 왕비 알리에노르를 비롯하여 이 웅대한 성당을 둘러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교회를 그토록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 시대 최고의 신학자로서 금욕의 수도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정색을 하고 비판을 가했다. 수도자와 신자는 이 세상 너머 영원한 구원의 길을 보아야지 현세의 아름다움에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베르나르와 쉬제르는 대척점에 서 있다. 두 사람의 대립은 단지 믿음의 자세나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기본 질서가 어떻게 짜여야 마땅한가 하는 정치적·신학적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쉬제르가 수도원장이 된 1122년은 보름스 협약이 체결된 해이다. 보름스 협약은 이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어정쩡한 타협에 그쳤다."(193-5)
"생드니 성당 재건축은 이 문제에 대한 프랑스 왕실의 답변이다. 생드니 성당을 최대한 웅장하고 아름답게 짓는 것은 단순히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차원이 아니다. 이곳은 천상의 예루살렘을 보여주는 지상의 모형이다. 벽면의 사파이어와 루비가 영롱하게 반짝이고, 드넓은 공간에 밝은 빛이 가득 넘치는 성당은 천국의 예시다. 이곳에 들어온 신자들은 지상에 있는 동안 천국을 부분적으로 느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이 중간 경유지에 왕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수호성인인 드니의 품 안에 역대 국왕들이 함께 누워 있다. 하늘나라와 지상세계의 중개자인 성인이 국왕과 함께 모든 백성을 인도한다. 세속 권력과 무관하게 오직 교회가 독자적으로 영적 인도를 해야 한다는 베르나르의 견해에 맞서 쉬제르는 '제2의 그리스도'인 국왕이 신성한 힘을 받아 백성을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쉬제르는 고딕 성당 속에서 왕권과 교회의 새로운 동맹을 추구한 것이다."(195-6)
"노트르담Notre-Dame(성모, 영어로는 Our Lady) 대성당은 단지 파리를 위한 성당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 성당이다. 프랑스 역사의 중요 사건들이 이 성당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루이 13세(재위 1610~1643)는 결혼 후 20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만일 후계자 아들을 주신다면 프랑스를 마리아에게 바치겠다는 서원을 했다. 마침내 장래에 루이 14세가 될 아들을 얻자 '신이 주신 아이'라는 의미로 '디외도네'라 불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노트르담 대성당 중앙 제단의 성모상 오른쪽에는 왕관을 바치는 루이 13세의 상, 반대쪽에는 손을 심장에 얹어 신심을 표하는 루이 14세의 상을 세웠다. 1909년 잔 다르크를 시성諡聖했으며, 파리가 해방된 1944년 8월 26일에는 시민들이 모여 테데움Te deum(신을 찬미하는 성가)을 연주했고, 1970년에는 드골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동시에 예수의 가시관이 노트르담으로 옮겨온 19세기 이후부터는 중요한 순례 장소로 떠올랐다."(203)
4장 중세의 마음
"지난 시대에 사회 전체를 뒤흔든 위기는 대개 전쟁·기근·질병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실 그 세 가지는 내적으로 얽혀 있다. 전쟁은 농사의 기반을 파괴하여 기근을 낳고, 군대가 이동하여 전염병을 퍼뜨린다. 다른 한편 기근은 정치적 불안을 초래해 전쟁의 원인이 되는 동시에 사람들의 신체를 허약하게 만들어 병을 더 확산시키기 십상이다. 유럽 역사상 최대의 위기가 발생한 14세기 상황이 전형적이다. 이때는 백년전쟁(1337~1453), 대기근, 페스트가 함께 찾아왔다. 더욱이 선腺페스트가 병독성이 훨씬 더 강한 폐肺페스트로 변이를 일으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런 현상들 이면에 구조적인 농업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과 달리 전통 시대 농업은 지속적인 생산성 증가가 불가능했다. 인구는 늘어나는데 식량 생산이 지탱해주지 못하는 한계 상황에 이르면, 참혹한 대량 아사 사태를 피할 수 없다. 이 모든 일들이 한번에 터진 14세기에 유럽은 자칫 문명의 붕괴를 걱정할 정도로 큰 위기를 맞았다."(233-4)
"사회적 위기는 또한 정신적 위기를 동반한다. 이런 시대에 빈발하는 대표적 현상 중 하나가 종말론이다." "재앙의 시대에는 이런 교리를 기묘하고도 과격하게 해석하여 사회에 불을 지르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대개는 기성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망상에 가까운 교리에 집착하는 수도사 출신 인사들이기 십상이다. 기근에 빠진 농민이나 도시 빈민이 자신이 불행한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분출시키는 격렬한 욕구가, 모든 것을 일시에 해결해 주리라는 환상적 메시지와 만나면 때로 걷잡을 수 없는 폭력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예언자이자 하느님의 전사임을 자처하는 이 카리스마적인 인물은 순결하게 재생될 새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하찮은 질서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은 이미 세속의 도덕을 초월했으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타락 이전의 순결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오히려 성관계를 통해 처녀성을 회복시켜 준다는 야릇한 '아담 숭배' 의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234-5)
"중세인들의 생각에 세계는 악마와 혼령으로 가득한 곳이며, 사람들은 흔히 이런 존재들과 만나곤 한다." "특기할 점은 죽은 혼령 이야기가 대체로 12세기 이후 급증한다는 것이다. 이는 '연옥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지옥에 갈 정도의 대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천국으로 직행할 정도로 완벽한 삶을 산 것도 아닌 사람들(쉽게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후 영혼이 연옥으로 가서 불로써 단련 받아 죄를 지운 후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연옥의 교리다. 프랑스 역사가 자크 르 고프는 연옥의 교리가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서 12세기에 완전한 교리로 '탄생'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대부분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연옥을 거쳐 천국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연옥은 희망의 장소다." "그런데 이승에 남은 지인들이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드려주면 연옥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혼령이 산 사람에게 나타나서 기도와 미사를 부탁하는 이유다."(241-4)
"고통스러운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확인하는 제도를 신명재판이라 한다. 영어로는 'ordeal'이라 하는데 독일어 'Urteil(판결)'과 어원이 같다. 신명재판이 많이 이루어진 곳은 라인강과 루아르강 사이 지역, 다시 말해서 카롤링거왕조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니, 이교 시대 게르만족의 제도가 기독교의 외피를 두르고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신명재판에는 여러 방식이 있으며, 나름대로 정해진 절차가 있다. 원래 달군 쇠를 잡는 방식은 그 상태로 몇 걸음을 걷든지 찬송가를 한 곡 부르게 한 뒤, 붕대로 손을 싸맸다가 사흘 후에 풀어서 상처의 정도를 확인하는 것이다. 상처가 심하면 유죄, 그렇지 않으면 무죄다. 펄펄 끓는 물이 가득 찬 솥에 손을 집어넣어 동전을 집어내도록 하는 재판도 비슷하다. 피고의 손발을 묶은 다음 강이나 못에 던져 넣는 방식도 있다. 이때 피고가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무죄, 둥둥 뜨면 유죄다. 축성을 한 물은 성질이 순수해서 깨끗한 사람이 들어오면 품고 더러운 죄인이 들어오면 뱉으려 하기 때문이다."(252)
"그렇지만 능히 짐작할 수 있듯이 신명재판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 유·무죄의 기준이 너무 모호하다. 많은 경우 명확한 기준보다는 모여든 군중들의 함성에 따라 판결이 나곤 한다." "점차 신명재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신학자들은 하느님에게 기적을 강요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요구한다고 하느님이 꼭 기적을 보여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만일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다면 악마의 농간이 아니라고 누가 보장한다 말인가. 이런 이유로 12세기 파리의 신학자 피에르 르 샹트르는 신명재판이 '악마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법학자들 역시 이런 재판은 합리성이 결여되었다고 비판했다. 무고한 사람이 살인자로 몰릴 수도 있고, 죄지은 사람이 풀려날 수도 있다. 이런 배경에서 1215년 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사제들의 신명재판 참여를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명재판은 근대적 사법 체제가 자리 잡기까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255-6)
5장 근대를 향한 여정
"잉글랜드 왕권 쟁탈전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은 랭커스터 가문 출신 국왕 헨리 6세(재위 1422~1461, 1470~1471)다. 백년전쟁이 끝난 1453년, 헨리 6세의 정신병이 크게 악화해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국왕의 조카뻘 되는 요크 공작이 국왕을 보호하는 척하다가 자신이 왕위를 탐하면서 랭커스터 가문(붉은 장미)와 요크 가문(흰 장미) 간 전쟁이 시작되었다." "요크 가문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요크 공작 자신도 사망했기에 그의 아들이 에드워드 4세(재위 1461~1470, 1471~1483)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10년 후 제정신을 찾은 헨리 6세가 왕권을 되찾기 위해 도전해 왔으나 다시 패배하여 런던탑에 갇혔다가 사망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었을 때 그가 남긴 두 아들은 열두 살과 아홉 살 어린아이였다. 이 중 장남이 에드워드 5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두 달 후 런던탑에 갇혔다가 동생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왕위는 선왕의 동생 리처드가 차지했다."(283-5)
"그가 대관식을 치르고 리처드 3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 곧 국왕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사방에서 리처드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 주도자 버킹엄 공은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헨리 튜더에게 귀국하여 왕위를 물려받으라고 제안했다. 튜더 가문의 헨리는 혈통상으로 랭커스터 왕실에 제일 가까운 인물이다. 일찍이 프랑스에 피신해 있던 그는 무명의 존재였고 전투 경험도 없었으나, 프랑스의 지지를 받는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프랑스 전사들을 앞세우고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한 헨리는 보스워스 벌판에서 리처드 3세의 군과 최후 결전을 벌였다. 귀족들의 지지를 잃은 리처드는 마지막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전사했다(영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전사한 국왕이다)." "승리를 거둔 튜더는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원수 가문 간의 갈등을 봉합하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새 왕조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사에서 통상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튜더왕조의 시작이다."(285-7)
"차르 이반 4세(재위 1533~1584)의 별칭은 뇌제雷帝, Ivan the Terrible다. 벼락 치듯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위엄으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지배자라는 뜻이다." "사실 그의 통치 전반기는 광기에 찬 폭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명하고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관료제를 정비하고 서구 국가들의 신분의회에 해당하는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한 데다가 군대 조직도 훌륭하게 재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화된 행정력과 군사력을 이용하여 카잔과 아스트라한 등 몽골 세력의 마지막 보루들을 점령하여 볼가강의 접근로를 확보했다. 이는 유라시아대륙 전체 역사에서 실로 중요한 의미를 띤다. 아시아 내륙의 유목민족이 밀고 들어오는 도상의 핵심 지점들을 장악하여 그들을 통제하고, 더 나아가서 러시아가 오히려 유목민족 지역 심층부로 세력을 확대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이제 이 나라는 모스크바공국이 아니라 러시아라고 불리면 주변 지역들을 정복하면서 본격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311-2)
"그러나 통치 후반기에 이반은 광기 어린 잔혹한 전제군주로 바뀌어 갔다. 사랑하던 황후 아나스타샤의 죽음, 그리고 자신이 위중한 병에 걸려 죽음 직전까지 갔을 때 신하들이 보인 불충의 자세 등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것 같다. 많은 측근들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했다. 차르는 갈수록 종잡을 수 없는 행테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강력한 기구가 '오프리치니키'라는 러시아 최초의 비밀경찰 조직이다." "이반의 희생자 중에는 친아들도 포함되어 있다. 임신한 며느리의 옷이 단정하지 않다고 꾸짖고 있는데 아들이 끼어들자 쇠몽둥이로 쳐서 죽였다. 제일 든든한 후계자를 스스로 없애버린 것이다. 1584년 이반은 54세에 갑자기 사망했다. 그 역시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병약하거나 천치 상태인 아들들이 차르 지위를 물려받았으나 오래 못 가 류리크왕조는 단절되고, 1613년 로마노프왕조가 들어섰다. 로마노프시대는 20세기 러시아혁명 시기까지 300년 넘게 지속된다."(312-7)
"피렌체는 여러 장점이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밀, 올리브, 포도주를 제공하는 풍요로운 주변 농촌을 들 수 있다." "상업과 공업, 은행업은 더 중요한 요소다. 직물업을 통해 점차 큰돈을 벌고, 전 유럽의 대상인과 군주 및 귀족 들을 대상으로 금융 거래를 하여 큰 부를 쌓아갔다." "스피니, 프레스코발디 같은 1세대 가문에 이어 바르디, 페루치 같은 2세대 가문들이 성장하고, 이들이 쇠락하면 다시 메디치, 스트로치 같은 3세대 가문들이 융성했다. 이 도시귀족 가문들이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예술적으로 피렌체를 빛낸 주역들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가 브로델은 피렌체 시민의 새로운 정체성을 두고 이 시대 사람들의 사고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의식, 곧 절약이나 시간의 가치를 강조하는 근대 부르주아 문화 요소가 생성되었다고 보았다. 모든 것을 신에게 의탁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힘과 능력virtu이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고가 발전한 것이다. 르네상스 예술은 이런 복합적인 분위기에서 꽃피었다."(322-4)